류블랴나학파 혹은 '지젝과 그의 친구들'

지젝과 그의 친구들을 흔히 'Slovenian Lacanians'라고 부른다. '슬로베니아 라캉주의자들' 혹은 '슬로베니아 라캉학파'라고 옮길 수 있겠다(이들에 관해서는 언젠가 '지젝과 그의 친구들'이란 페이퍼를 쓴 적이 있다). 얼마전에 나온 사라 케이의 <슬라보예 지젝>(경성대출판부, 2006)의 서론에서 이들에 대한 한 문단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는' 오역들이 눈에 띄어서 교정해둔다.  

"지젝은 뛰어난 사상가이다. 그러나 그는 고립되어 작업을 하지 않는다."(14쪽) 

원문은 "Zizek is a leading thinker, but he does not work in isolation."이다. 번역에 흠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 붙은 각주에서(이 책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각주인데) 거명되고 있는 지젝의 슬로베니아 라캉학파 동료들이 이렇게 표기돼 있다: "영어권에서 가장 잘 알려진 슬로베니아 라캉학파는 밀러던 도러, 레나타 살레츨, 알렌카 주판치치 등이다. 그 외에는 마이란 보조비치, 라호 리아, 즈드라브코 코베가 있다."(255쪽) 찾아보기에 보면, 'Mladen Dolar'는 '믈라덴 돌러'로 표기돼 있다. 내가 읽은 대목들에서 모두 제각각으로 표기돼 있는 것인데, 부주의하달 수밖에. 그리고 국역본이 나와 있는 'Miran Bozovic'의 표기는 그냥 '미란 보조비치'라고 해야겠다. 그런 정도는 사실 독해에 장애가 된다고는 볼 수 없다. 계속 읽어보자.  

"그는 1949년 옛유고연방인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나서 류블랴나에 있는 철학연구소의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의 일원이다."  

일반적으로 '슬로베니아 라캉학파'라고 부르고 국내에서는 그 총서까지 나오고 있지만, 사실 '학파'란 말은 좀 거창하다. 모임의 실체라는 건 '지젝과 그의 몇몇 동료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지젝이 류블랴나에서 세운 건 '이론정신분석학회'이며, 지젝이 회장, 돌라르가 부회장인 2인 학회였다. 물론 이후에 걸출한 후배들/제자들이 합류하게 된다.

"이 단체의 특징은 대륙철학(데카르트, 칸트, 헤겔, 마르크스)의 배경을 공유한다는 것과 라캉식의 정신분석에 매혹되었다는 것, 타자의 용어로 각자를 설명하려는 치열한 충동이 있다는 것이다."  

지젝과 그 일당의 이론적 기획이 독일 관념론과 라캉 정신분석학을 접속에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일이다(지젝은 하이데거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프랑스로 건너가 알랭 밀레의 지도하에 정신분석학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런데, 번역문에서 '타자'는 무엇이고 '각자'는 무엇인가?

이런 류의 번역서에 '정통한' 독자라면, 그게 각각 '대륙철학'과 ''라캉 정신분석'를 가리킨다는 걸 짐작할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역자는 그런 생각으로 옮기지 않은 듯하다. 그랬다면, 적어도 "언제나 각각을 다른쪽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경향(a relentless urge to explain in terms of the other)" 정도로 옮기지 않았을까? 혹은 풀어서, "그들은 대륙철학을 정신분석학의 용어로, 그리고 정신분석학은 대륙철학의 용어로 설명하려는 경향을 공유했다"라고 해주던가.  

"진정한 교육자적인 열정이 그들로 하여금 책을 쓰게 한다. 이데올로기와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 역시 그들을 하나로 묶는다." 

'진정한 교육자적 열정'? 그만큼 그들이 쉽고 재미있게 쓴다는 얘기이다. 적어도 라캉과 헤겔을 한두 페이지라도 읽어본 독자라면 지젝이 난해하다는 얘기는 할 수 없다. <안티-오이디푸스> 이후 최고의 지적인 경험을 제공해준다고 하지만, "지젝은 들뢰즈와 가타리보다 훨씬 더 재미있기도 하다."(13쪽)

 

"지젝이 편집한 몇 권의 책들이 그를 따르는 슬로베니아인들에게는 연구의 본보기가 된다. 그들은 우수한 언어학자들이고, 지젝처럼 유럽 여러 나라의 말을 자유롭게 쓰며, 독일어와 프랑스어 원서로 헤겔과 라캉을 읽을 수 있다."  

여기엔 좀 심한 오역들이 포함돼 있다. 먼저, 첫번째 문장의 원문은 "Several of the volumes edited by Zizek contain examples of work by his fellow Slovenians."이다. 다시 옮기면 "지젝이 편집한 몇 권의 책에는 그의 슬로베니아 라캉학파 동료들의 작업 사례들이 포함돼 있다." 

이들의 이름을 떨치게 해준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지젝은 자신이 편집을 맡은 'Wo ES WAR'(Verso출판사)나 'SIC'(Duke대 출판부) 시리즈에 '동료'들을 대거 참여시킨다. 물론 이 '슬로베니아인'들만으로 시리즈의 목록이 채워진 건 아니지만.

다시 돌아가면, '유럽 여러 나라의 말을 자유롭게 쓰'는 'linguists' 가 '언어학자들'인가? '언어능통자들' 정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즉, 이들의 강점은 불어와 독어에 능통하면서 영어로도 저술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변방'의 지식인들이 세계무대에 진입하기 위해서 갖춰야 할 기본조건이 무엇인가를 시사해주는 듯싶다.  

Žižek, Slavoj: Kako biti nihčeDolar, Mladen: ProzopopejaZupančič, Alenka: Poetika. Druga Knjiga

"그들의 문화는 세계주의적이며 그들 대부분의 작업은 지젝처럼 여러 언어로 이뤄진다. 지젝처럼 그들도 처음에는 주로 그들이 창간한 Problemi지와 시리즈 책인 Analecta에 슬로베니아어로 출판했다."  

그러니까 먼저 슬로베니아어로 발표한 다음에 그것이 다른 언어들로 옮겨지는 식인데, <항상 라캉에 대해>의 경우도 슬로베니아어본이 먼저 출간된 다음에 영어본으로 새롭게 편집됐다...

06. 09.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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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랑의 대상으로서 시선과 목소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15 17:11 
    '지젝 읽기'를 연재하다 보니 여느 때보다도 더 자주 '지젝'에 관해 검색해보게 되는데, 지젝이 편집한 <사랑의 대상으로서 시선과 목소리>(인간사랑, 2010)가 출간됐다. 그의 두 번째 아내였던 레나타 살레츨과 같이 편집 책임을 맡은 SIC시리즈의 첫 권으로 나왔던 책이다. 원저는 1996년에 나왔으니까 상당히 '오래된' 책이다.    라캉주의 연구서라고 분류할 수 있을 텐데, 전체 8편의 논문
 
 
기인 2006-09-10 0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댓글 답니다 :) 맨 아래 책들 바로 위에
'다시 돌가아면'이라는 오타 지적하고 자려고요 ㅎㅎ

로쟈 2006-09-10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는 일부러라도 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