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에 읽은 조간신문이 다소 '심심'했는데, 그나마 흥미를 끈 건 원로비평가 유종호 선생의 무라카미 하루키 비판 기사였다(유종호 선생에 대한 페이퍼는 이전에 한번 쓴 바 있다). 한국일보에서 읽었지만, 동아일보도 관련기사를 다루고 있어서 같이 옮겨놓도록 한다. 새로운 문제제기라기보다는 다소 뒤늦은 감이 없지 않은 '뒷북'처럼 읽히지만(물론 그의 발언은 하루키에 탐닉하는 세대에 대한 문학 교육자로서의 우려를 반영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평론가 유종호 씨 '무라카미 ‘노르웨이의 숲’은 음담패설집'”이란 호들갑스런 제목을 달았다
나는 '음담패설'이란 말을 쓰지 않겠지만(나는 나이브한 감상적 허무주의를 그냥 '포르노'라고 부른다), 그의 문학이 '데카당스'의 문학이라는 건 새로운 사실도, 지적도 아니다. 나는 좀 눅여서 '감상적 허무주의와 무라카미 현상'이라고 제목을 바꿔단다. 이 제목이라면 한가할 때 비평문을 써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때 초점은 '무라카미 문학'이 아니라 '무라카미 현상'이며, 나의 관심은 사회학적 관심이다.

동아일보(06. 05. 25) 원로평론가 유종호(71·사진) 씨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장편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혹독하게 비난했다. 유 씨는 문예지 ‘현대문학’ 6월호에 기고한 ‘문학의 전락-무라카미 현상을 놓고’에서 “<노르웨이의 숲>은 고급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허드레 대중문학”이라고 주장했다.



-<노르웨이의 숲>은 1989년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돼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무라카미 바람’을 일으킨 책. 유 씨는 대학 초년생 중 가장 감명 깊게 혹은 흥미 있게 읽은 문학책으로 <노르웨이의 숲>을 드는 학생이 압도적으로 많다면서, 자신이 본 바로는 “성적으로 격리된 수용소 재소자들이 일상적으로 나눔직한 성의 얘기로 가득 차 있다”고 밝혔다. 유 씨는 이 작품 속에 “성적인 문제로 좌절이나 일탈을 경험하는 사람이 많고 성적 호기심을 부추기는 성적인 얘기가 전경화되어 있고, 고교 3년 여학생의 자살을 위시해서 수수께끼 같은 자살이 빈번하다”고 지적했다.
-유 씨는 또 “소설의 화자가 대학생활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면서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는 등 등장인물들이 다소간 학교교육의 피해자 내지는 희생자란 함의를 풍기고 있다”며 “요컨대 감상적인 허무주의를 깔고 읽기 쉽게 씌어진, 성적 일탈자와 괴짜들의 교제 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이한 음담패설집”이라고 주장했다. 유 씨는 “불안한 청년기에 가벼운 우울증을 앓고 있는 심약한 청년들에게 이 책은 마약과 같이 단기간의 안이한 위로를 제공해 줄 것”이라면서 “약삭빠른 글장수의 책이지 결코 예술가의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유 씨는 한편으로는 “작가가 이미 사회의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상실했거나 예술적 포부를 가질 수 없는 시대의 언어 상품”이라며 작품을 낳은 시대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무라카미가 거둔 상업적 성공을 비하하거나 폄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면서 “다만 그의 문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학의 이상에서 너무나 동떨어진 하급문학일 뿐”이라고 말했다.(*물론 먼저 질문해야 할 것은 요즘의 학생들이 '고급문학'을 읽어낼 수 있는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인지, 이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
-유 씨는 24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상당수의 대학생이 문학적 위엄을 보여 주는 고전을 제쳐놓고 <노르웨이의 숲>을 가장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해서, 곤혹스럽고 우려가 되어 글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나는 유종호 교수의 평가에는 동의하지만, 우려에는 동감하지 않는다. '문학적 위엄'을 먼저 내팽개친 건 독자보다 문학계/출판계가 먼저라고 보기 때문이다. 팔아먹을 만큼 팔아먹은 책에 대해서 '음담패설'이라고 깎아내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기도 하고. 비록 음담패설이라고는 해도, 가라타니 고진의 지적대로, 하루키의 음담패설은 '세계적인 문화상품'이다. 문학이 아닌 상품의 자리에 서면, 하루키 문학은 타기의 대상이 아니라 벤치마킹의 대상이다(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그를 부러워하는 것인지!)




한국일보(06. 05. 25)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씨가 우리 문학의 저급화와 교양 퇴조 풍조에 대한 고언(苦言)을 25일 예술원 세미나에서 발표한다.
-‘문학의 전락 - 무라카미 현상을 놓고’라는 제목의 발제문에서 그는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이 “감상적 허무주의를 깔고 읽기 쉽게 씌어진, 성적 일탈자와 괴짜들의 음담패설집”이며 “고급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허드레 대중문학”이라고 폄하했다. 그는 “청춘은 성(性)적인 계절이지만 동시에 성숙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며 “이 책은 성숙을 위한 모색이 없다는 점에서 (작중 화자가 거론한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대척점에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대학 교육과 교육을 통해 축적한 인문적 교양이 신분의 표지였던 과거와 달리, 대학교육이 보편화하고 생활스타일이 다원화하면서 ‘교양’ 역시 ‘구제도의 하나’가 돼버렸다고 개탄했다. 그는 문학의 길이 ‘기쁨으로 출발하나 / 종당에는 낙망과 광기가 온다’고 했던, 낭만주의 시인 워드워스의 시 ‘결의와 독립’의 시행을 인용하며, ‘(이미) 낙망과 권태를 체험하고 있는 연구자나 교사의 비문학적 관심과 정열’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문학의 매혹에 눈뜨게 하는 기회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그 근거로 범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문학계의 ‘이론’ 탐닉 현상을 들고 있다. “작품 읽기보다 이론 읽기에 탐닉하는 사람들”이 “정전 개념의 해체를 통해 나태한 젊은이들에게 고전기피 현상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또 교수들의 연구업적 경쟁체제도 “교수들로 하여금 ‘이론’ 도입을 통한 논문 엮어내기를 강요하여 작품을 한갓 논문의 자료로 전락시킨다”고 비판했다.
(*)문학계의 이론 탐닉을 독자들의 하루키 탐닉에 견주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요컨대, 작품 읽기/읽어내기를 기피하면서 논문 엮어내기에나 탐닉하는 문학 연구자들 또한 데카당스들이다...
06. 0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