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들 때문에 다소 미뤄진 책 소개를 해치우기로 한다(사실은 어제 몇 자 적어내려갔지만, 난데없는/일시적인 정전으로 날려먹었다). 관심의 폭이 무작정 넓은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책이 '많이' 나온다고 느껴질 정도로 요즘은 정말로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매일 같이 서점에 가서 체크를 해봐도 그 책이 그 책이었던 '먼옛날'(80년대)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더불어 느껴지는 건 역시나 '겁없는' 책값들이다. 도서관 인프라가 아직 풍족하지 못한 현실에서 고가의 신간서적들은 자신의 '경제적 계급'을 반추하도록 강요한다. 혹 이런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는가? "네가 그래도 책을 사보겠다는 것이냐?" 혹은 "네가 어디서 맞먹자는 것이냐?"
제일 먼저 꼽을 책은 단연 마틴 에슬린의 <부조리극>(한길사)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에슬린은 오늘날에는 상식적인 문학용어가 된 '부조리극'이란 말을 발명해낸 양반이다. 원서의 초판은 1962년에 나왔고, 책은 1950년대 프랑스 연극무대를 주름잡았던 베케트, 이오네스코, 장 주네 등의 새로운 연극을 '부조리극'이란 말로 유형화하는 데 성공했다(거기에 아다모프와 해롤드 핀터를 포함하게 되면 부조리극의 5인방이 된다). 이후에 이 용어는 그 외연이 더욱 확장되어 고대 그리스의 희극(아리스토파네스)에까지 적용되기도 하는데, 사실 부조리극은 연극적 형식 못지 않게 그 세계관이 문제시되는 드라마이므로 그러한 소급적 적용이 아주 억지스러운 건 아니다. 세계관이 연극적 기교보다 더 나이를 먹었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 만큼. 어쨌든 부조리극 연구의 '고전'을 이제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되어 반갑다(나는 이전에 러시아 부조리극에 관한 리포트를 쓰기 위해서 이 책의 이론 파트를 읽어본 적이 있다).
베케트와 브레히드, 핀터 등의 극작가들에 대한 권위있는 해설자로 유명한 에슬린은 (내가 알기론) 한국에도 두어 차례 다녀간바 있고, 극단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에 대한 평을 남기기도 했다. 국내에는 <극마당: 기호로 본 극>(현대미학사, 1993), <드라마의 해부(학)>(청하, 한양대출판부) 등이 번역/소개돼 있다(<극마당>은 원로 연극학자가 '새내기' 연극기호학을 소개하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지적하는 책이다). 부조리극에 대해서는 그밖에 신현숙, <20세기 프랑스 연극>(문학과지성사, 1997)의 한 장을 참조할 수 있고, 서울대출판부에서 나온 문학용어 시리즈의 <부조리문학>도 요긴하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임준서, <반연극의 계보와 미학: 부조리극을 중심으로>(살림, 2004)가 있는데, 베케트, 이오네스코, 장 주네의 3총사 외에 한국 극작가로서 오태석, 이현화, 장정일을 다루고 있어서 이채롭다.
부조리는 세계관이면서 또한 이 세계에 대한 '감수성'인데, 이 감수성을 가장 시적인 문체로 일깨워주는 책은 단연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책세상)이다. 거기서 카뮈는 어느날 갑자기 무대장치가 무너지는 경악스런 상황을 부조리한 상황의 예로 제시한다. 거기서 암시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부조리는 연극(무대)적 상황과 연극적 의식 속에서 가장 잘 표출된다. 해서, 부조리극은 부조리문학의 대표 종(種)이자, 그 자신이 유(類)이기도 하다. 참고로, 국내에 번역/소개돼 있는 5인방의 대표작들을 꼽아본다(해롤드 핀터의 경우는 8권짜리 전집이 나와 있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민음사),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민음사), 장 주네의 <하녀들>(예니), 아다모프의 <타란느 교수>(연극과인간), 그리고 <해롤드 핀터 전집>(평민사).
아쉬운 건 러시아 부조리극이 아직 소개돼 있지 않은 것. 프랑스에서보다 앞선 1930년대 다닐 하름스와 알렌산드르 베젠스키 같은 작가들이 뛰어난 '부조리극' 작품을 남긴바 있으며 1960년대 아말릭 같은 작가의 작품도 매우 재미있다. '언어장벽'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부조리극의 경우 극적 효과의 많은 부분을 언어 유희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왕이면 우리말로도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두번째 책은 이사야 벌린의 <낭만주의의 뿌리>(이제이북스). 책은 1965년에 저자가 워싱턴에서 행한 연속강의를 묶은 것인데, 이번에 믿을 만한 역자(강유원이 공역자로 참여했다)들에 의해 번역되었다. 역자 후기를 참고하여 이 책의 교훈을 요약하면 이렇다. "낭만주의는 결국 개인의 불굴의 의지, 개인의 신념과 이상을 강조하면서 원래의 의도와는 반대로 타인의 의지를 인정하고 타협할 필요성을 불러일으켰다. 인류는 타인의 이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의 이상도 인정받을 수 없음을 역사를 통해 배우게 된 것이다. 낭만주의가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유산은 바로 이 관용과 이해의 정신이다." '낭만주의의 진정한 유산'으로서의 이 교훈은 낭만주의를 반면교사로 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일 테다.
영국의 저명한 자유주의 철학자 이사야 벌린(1909-1997)은 본래 라트비아 태생으로 여섯 살에 러시아로 이주했다가 혁명 후 1921년에 영국으로 건너갔다(망명?). 당연히 러시아와 인연이 없을 수 없는데, <계몽시대의 철학>(서광사, 1992), <비코와 헤르더>(민음사, 1997) 등의 철학서 외에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지만 <러시아의 사상가들(Russian thinkers)>이란 저서도 갖고 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작가들과 인텔리겐차들을 다룬 책인데, 특히 투르게네프론과 '여우와 두더지'란 제목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비교론이 유명하다. 러시아에서는 작년인가 재작년에 두 권짜리로 벌린 선집이 번역돼 나왔는데, <자유의 철학>와 <자유의 역사>가 각 권의 제목이었다(확인해 보니 2001년에 나왔다. 내가 갖고 있는 <자유의 역사>는 러시아에 관한 글모음인데, <러시아의 사상가들> 전체가 포함돼 있다).
여러 학술적 업적으로 벌린은 1957년 기사 작위를 받았으므로 정확하게는 '벌린 경'이다. '칼 포퍼 경'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벌린과 포퍼는 영국식 교양과 자유주의 철학의 쌍두마차이다. 그런 벌린이 마르크스의 평전, <칼 마르크스>(미다스북스, 2001)까지 쓴 건 다 '교양'의 산물이겠다(한편으로 19세기의 대표적인 사상, 낭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서로 교호적이다. 가령 바이런식 낭만주의는 19세기 전반기에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혁명에 대한 영감'을 제공하였다. 국내에 바이런과 바이런이즘에 관한 좋은 책들이 아직 소개되지 않는 것은 유감이다). 다시 역자들의 말을 옮기면, "칸트나 헤르더, 피히테나 실러 같은 철학자와 사상가들뿐 아니라 문학과 음악과 미술의 각 분야를 아우르며 예리한 분석과 풍부한 실례를 쏟아내는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교양을 만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이 적당히 교양 없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라면 필독할 만하다.
한편, 강유원도 어디선가 지적한 것인데, 교양은 언제나 우파의 것이다(배부르다고 과시하는 게 교양이다). 평등주의자로서 좌파는 삶의 퀄리티(품위와 교양)를 따질 겨를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아직도 세계 인구의 1/5이 절대 빈곤층이다). 우파의 '교양'을 대신하는 것은 좌파의 경우 '품성'이다(현실 사회주의에서도 '공산주의자의 품성론'은 어디서나 핵심적인 이슈였다. 배고파도 참는 게 품성이다). 즉 우파가 교양을 따진다면 좌파는 품성을 따진다. 나이브하게 얘기하면, 우파는 좌파가 무식하다고 욕하고("저런 배운 것도 없는 천한 것들!"), 좌파는 우파가 돼먹지 않았다고 비난한다("저런 돼먹잖은/파렴치한 인간 말종들!"). 이 둘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 교량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유식한 파렴치함'과 '순박한 단순무식함' 사이에 찢기게 될 것이다.
중국의 문화혁명이 잘 보여준 것이지만, 많이 안다는 것은 '유죄'이다. 대개의 경우 (남보다 많이 아는) 지식인들은 사회주의/공산주의에 적합하지 않다. 가령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러시아 망명시인 브로드스키의 경우. 젊은 시절 남들 노동할 때 일은 하지 않고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그는 재판정에 섰다. 너는 무엇을 했는가? 시를 썼습니다. 누가 너에게 시를 쓰라고 했는가? 너는 사회주의의 밥벌레이다! 요컨대, 브로드스키는 교양 있는 시인이었지만 동시에 파렴치한 밥벌레였다. 물론 사회주의 혁명에 지식인 이론분자들의 노력과 투쟁도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그들은 혁명의 성공과 동시에 숙청/제거되어 마땅하다(계급 없는 세상은 지식인 없는 세상이기도 하다). 요컨대, 그들은 '사라지는 매개자'이면서 '터미네이터'의 역할을 역사적 사명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 자본주의는 똑똑한 놈 한 명이 먹여살린다고 하지만(이건희의 천재론), 사회주의의 구호는 좀 다르다. "가라, 똑똑한 놈들은 가라! 이제 바야흐로 평등한 어중이떠중이(=인민)들의 세상이 오리니."
세번째 책은 부르디외의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 <나는 철학자다>(이매진). 원제가 그렇게 변형된 건 물론 '장삿속'일 테지만, 이 경우는 최악이라 할 만하다. 역자 후기를 봐도 표제가 그렇듯 변경된 이유에 대해서 아무런 해명이 붙어 있지 않다. 책은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하이데거 읽기인바, 그는 기존의 독해를 모두 거부하면서 자신만의 (적합한)이중적 독해를 제안하고 실행한다. 즉 그는 하이데거에 대한 "(지지자들의) 철학적 독해 대 (비판자들의) 정치적 독해라는 대립구도를 포기하고, 이중적 독해, 곧 정치적이면서 철학적인 독해를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서 하이데거 철학의 고유성이 나치즘과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를 밝혀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의 의의? 역자에 따르면, "하이데거에 대한 부르디외의 비판적 분석은 당대 철학에 의해 억압받아온 사회학의 복수이자, 인문학에 있어서 늘 사회학과 경쟁관계에 있는 철학에 대한 사회학의 우위를 간접적으로 선언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치즘과 하이데거의 관계는 20세기 (서양)철학사 최고의 스캔들이다(한국 현대문학사에서라면 춘원 이광수나 미당 서정주의 친일 스캔들에 견줄 만하다). 20세기 최고의 철학자(적어도 그 중 한 명)가 과연 나치주의자였을까, 라는 문제. 이 스캔들이 다시금 주목받게 된 건 1987년 <하이데거와 나치즘>이란 책이 프랑스에서 출간되면서부터인데, 이후로 하이데거를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많은 논쟁적인 책들이 출간되었다. 시기적으론 1988년에 출간된 부르디외의 책 또한 그러한 논쟁에 한몫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에 대한 우리말 저작으로는 이미 박찬국 교수의 묵직한 연구서 <하이데거와 나치즘>(문예출판사, 2001)이 나와 있다. 그게 부담스럽다면, 제프 콜린스가 쓴 <하이데거와 나치>(이제이북스, 2004)를 훑어볼 수도 있겠다.
한편, 하이데거의 신간으로는 휠덜린의 송가 <이스터>에 대한 강의록이 번역돼 나왔다. <휠덜린의 송가(이스터)>(동문선)이 그것인데, 아쉽게도 내가 사온 러시아본 강의록에는 빠져 있다(러시아어본은 독러 대역본이다). 신간은 하이데거의 파워와 함정이 무엇인지 혹 말해줄지 모르겠다. 참고로, 앞에서 꼽은 부르디외의 책도 러시아어로 번역돼 있다.
네번째 책은 지난번에 출간을 기대한다고 언급한 게 무색할 정도로 '빨리' 나온 스피박의 주저,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갈무리)이다. 철학, 문학, 역사, 문화, 네 장으로 돼 있는데, 600쪽이 넘으니까 아주 묵직한 책이다. <다른 세상에서>(여이연)과 함께 스피박 총정리를 하면 되겠다. 한편, 스피박의 탈식민주의론에 대한 비판도 드물지는 않은데, 국내 논자의 경우를 예로 들면 가령 김재용은 <협력과 저항: 일제말 사회와 문학>(소명출판, 2004)에서 스피박의 논리는 '피장파장의 논리'라고 비판한다. 고명섭이 <지식의 발견>(그린비, 2005)에서 간추린 바에 따르면, 스피박의 논리는 표면적으로는 식민주의를 비판하지만, 그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을 식민주의에 포섭된 논리로 이해함으로써 결국에는 저항의 가능성을 지워버린다(해서 "일제에 맞서 싸웠던 사람들 역시 국민국가와 내셔널리즘의 틀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진정한 저항이 있을 수 없고, 친일이나 반일이나 다를 것 없다는 논리인 것"). 스피박을 읽을 때 그런 비판도 염두에 둔다면, 좀더 긴장감있는 읽기가 될 듯하다.
며칠 전 세계여성대회가 서울에서 개막되었는데(참석예정이었던 스피박은 막판에 사정으로 불참했다고) 거기에 발맞추듯 나온 책이 방대한 분량의 2권짜리 <여성주의 철학>(서광사)이다. 얼마전에 나온 <여성철학자>(푸른숲)와 앞서거니 뒤서거니이다. 문제의식은 비슷하지만, 접근방향은 좀 다른데 그 차이는 '여성' 대 '여성주의'란 말로 요약될 수 있을지. 어쨌거나 이 세(네) 권의 책 모두 출산드라 이상의 아주 풍만한 부피를 자랑한다. 여성들의 세상이 그렇게 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말이 나온 김에 여성학 이론서를 한 권 더 덧붙이자면, 스피박과 같이 인도 출신의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의 <경계없는 페미니즘>(여이연). 부제는 '이론의 탈식민화와 연대를 위한 실천'이며, 430쪽이어서 거명한 책들 중 가장 '날씬하다'.
끝으로 다섯 번째 책은 우리에게 <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창비, 2003), <사산되는 일본어, 일본인>(문화과학사, 2003), 그리고 임지현 교수와의 대담 <오만과 편견>(휴머니스트, 2003)으로 잘 알려진 사카이 나오키 교수의 <번역과 주체>(이산)이다. 그 자신이 어느 자리에선가 곧 소개될 거라고 했던(혹은 소개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바로 그 책이다. 책소개를 옮겨오면, "저자는 일본인이나 일본어라는 균질성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내부에서 일본사상이라는 역사적 연속성이 만들어져왔다는 것은 일종의 환상으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언어적 통일체와 그것에 기반한 국민공동체 해체를 옹호한다. 일본어나 일본인이라는 환상을 드러냄으로써 언어적.사회적 잡종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책은 그 자체로 언어적 잡종성을 체현한다. 책에 수록된 여섯 편의 글은 모두 영어에서 일본어로 혹은 일본어에서 영어로 호환적으로 쓰였거나 번역되었다. 또한 한국어를 모어로 사용하지 않는 외국인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되어 애초에 균질적인 언어에 의해 지탱되는 공동성을 신뢰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그러한 문제의식 자체가 사카이 나오키의 독특성을 구성한다(적어도 그렇게 평가되어 그는 미국대학에서 연구를 받았고, 현재는 미국 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어쨌든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주제 자체는 흥미로우며 나로서도 관심이 간다.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론 역시 신간인 <언어제국주의란 무엇인가>(돌베개)와 함께 강상중의 <내셔널리즘>(이산, 2004)과 더글러스 로빈슨의 <번역과 제국>(동문선, 2002) 등이다('내셔널리즘'에 관한 책들이 부쩍 많이 출간되고 있다). 키워드는 번역, 주체, 내셔널리즘, 제국(주의), 탈식민주의이다. 하지만, 이걸 읽는 데 필요한 '연구비'를 조달할 수 없는 지금의 나로선 그저 바라만 볼 따름이다...
05. 06. 23.
P.S. 들뢰즈의 <시네마2>에 관한 이야기 등의 '부록'은 나중에 보충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