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는 전공 관련 글을 쓰느라고 바쁘게 지냈다. 어제로써 승전 60주년을 맞은 러시아도 못지 않게 바빴을 법하다(푸틴 왈, "그래도 스탈린이 히틀러보다는 낫다." 이건 슬라보예 지젝의 단골 구호이기도 하다). TV에서 본 외신에 따르면 기념행사는 (언제나 그렇듯이) 크레믈린 광장에서의 불꽃놀이 행사로 마무리되었다. 그걸 보면서 든 단상들이 없지 않아서 몇 자 적어내려가다가 그만 날려버렸다. 다시 쓸 형편은 아닌지라, 그냥 막바로 책 얘기나 하기로 하겠다. 대신에 다른 자리에 남겼던 코멘트 하나만을 옮겨놓고.

(현 푸틴 정부의 독재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강경하지 않은, 노골적이지 않은 독재도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 현 상황에서라면 그건 (아직도 덩치가 제법 큰) 러시아의 해체를 의미합니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몰락 이후에 러시아라는 다민족 국가를 묶어줄 수 있는 끈이 없거든요. 전승 60주년을 그토록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이고. 체첸 분리주의에 대해서 강경하게 대응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터입니다. 해서 현재로선 (민주주의가 아니라) 애국주의 모드밖에는 없습니다. 먹고 살 만큼 경제적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는 애국심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전에 모스크바 통신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농부(=러시아)의 자유와 장사꾼(=서구)의 자유는 의미의 외연이 같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많은 땅이 필요하지 않듯이 많은 자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적어로 대개의 러시아인들이 생각하기엔(물론 경제엘리트 자유주의자들은 또 생각이 다르지만. 대신에 경제엘리트들에겐 관료엘리트들과는 달리 애국심이 결여돼 있습니다). 요컨대, 현단계에서 러시아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입니다(그래서 나온 것이 러시아식 민주주의일 겁니다).."

지난주 이건희 삼성회장이 고대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으러 갔다가 반대하는 학생들에게 '봉변'을 당한 뉴스도 여기저기서 도마에 오르고 있는데,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이번주 <씨네21> 의 한 꼭지도 그랬다. 진중권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가 "수령님, 우리들의 수령님"이란 제하에 이 '사건'을 다루고 있었는데,  새삼스러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음미할 만한 비유: "이번 사건은 종교적 경지에 달한 북조선 수령 문화의 자본주의적 버전이다." 요컨대, '빨간 바이러스' 진중권의 진보주의는 북조선의 수령주의와 남조선의 재벌주의(혹은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똑같이 비판적인 것. "북조선에서는 수령님이 인민을 먹여살린다. 남조선에서는 삼성이 국민을 먹여살린다."

물론 여기엔 비아냥이 들어가 있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름대로의 메시지도 포함하고 있다. 남조선 '삼성맨'들은 북조선 '주체맨'들을 비판할 근거가 없다는 것. 왜? 똑같은 놈들이니까(수령이나 재벌이나 다 '돼지'라는 아이콘으로 표상된다). 이것이 진중권의 입장이라면, 그것은 나치즘/파시즘과 스탈린주의를 똑같은 '전체주의'로 묶어서 비판한 한나 아렌트식의 '자유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니, 그가 당파성에 보다 충실하다면, 비록 똑같이 종교적 경지에 달했다 하더라도, "(굶어죽는) 북조선의 수령주의가 (소수만 배터지는) 남조선의 재벌주의보다는 더 낫다"고 말해야 한다(스탈린주의가 파시즘보다는 낫다는 맥락에서). 적어도 그는 자칭 '레드 바이러스'이니까.

진중권의 결론: "삼성 철학의 상상력 밖에서는, 자주는 아니더라도 아주 가끔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도 있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그 가치는 인문정신을 담당하는 교수들이 앞장서서 지켰어야 한다. 그들이 방기한 그 일을, 학생드링 했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교수들은 그 장한 학생들을 '징계'하겠다고 벼르고 자빠진 모양이다." 일리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전제는 좀 의심스럽다. 교수들이 (소위 돈 주고 살 수 없는 가치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인문정신의 전도사요, 어쩌면 전사라는 전제 자체는 너무도 고루하면서 '보수적'이다. 설사 그러한 교수분들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아주 가끔' 존재하는 것 아닌가? 그게 (이미 혁신된) '현실' 아닌가? (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말로 돈이 지배한다는 걸 보여주는 교수들의 행동이야말로 어줍잖은 반대자들의 비아냥들보다 훨씬 '교육적'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적당한 반대라는 건(수사적인 발언의 '수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언제나 체제와 공생적이지 않은가?

또다른 논평: "특히 이번 해프닝을 계기로 부총장 이하 보직교수 전원이 총사퇴를 결의하고 시위 학생들에게 징계위협을 가하고 있는 고려대학교 학교당국의 반응은 정말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전직 대통령이 정문조차 넘지 못하는 수모를 당하고 돌아갔을 때에도 태연하던 이들이 모든 학문적 양심을 480억 원에 팔아치우고 재벌총수에게 굽실거리는 꼴이란 정말 실망스럽다 못해 측은하기까지 하다. "인간보다 돈을 중시하는 이에게 철학박사 학위를 팔아먹고도 당신들이 더 이상 인문학의 위기를 운운할 수 있겠냐"는 인터넷 상의 한 고려대학교 학생의 울분에 찬 토로는 신자유주의 시대 대학의 위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뼛속깊이 실감하게 한다. 이참에 사직서를 제출한 고려대학교 교수들은 보직만 내놓을 것이 아니라 아예 교수직까지 반납하고 학교를 떠났으면 한다." 혹 그들의 보직을 내놓으면서까지 '시위'하는 건 (교수직이라는) 자리를 보전하기 위함이 아닐까?

계속. " '옳고 그름'이 아니라 '돈과 이익'에 따라 몰려다니는 교수들의 모습을 보고 학생들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대학을 더 상품가치가 높은 노동력을 찍어내는 '취업알선소'쯤으로 여기는 교수들이나, 부끄러움을 모르고 학생들을 '폭력집단 철부지'로 매도할 줄이나 아는 '어른'들 속에서, 그래도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학문의 정신이 있음을 당당히 얘기하고 살아있는 비판적 지성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자 한 고려대학교 학생들에게 늦게나마 박수를 보낸다. 나아가 삼성과 같은 악질자본들의 탄압에 맞서 힘겹게 싸워왔던 노동자들의 투쟁에 오랜 기간 꿋꿋이 연대해왔던 학생운동을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노동자 사회운동이 적극적으로 나서 이들을 지지 엄호해야할 때다."(<사회화와 노동>, 263호)

옳은 얘기다. 혹은 옳기로 작정한 얘기다. 하지만, "인민의 재앙과 초절정 사기술책으로 성장한 삼성", 그리고 그 '삼성과 같은 악질자본들의 탄압'에 대한 비판의 칼날은 역시나 동형론적으로, "인민의 재앙과 초절정 사기술책으로 버티고 있는 북조선"에 대해서도 마땅히 겨누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게 아니라면, 아주 당당하게 "(인간적으로 다수가 굶어죽는) 북조선의 수령주의가 (비인간적으로 소수만 배터지는) 남조선의 재벌주의보다는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잘 사는 세상'으로서의 '참세상'에 대한 비전은 보다 솔직해져야 한다. '모두가 잘 산다는 비전'은 자본주의적 비전/미끼이다(더불어, 모순적이다. '모두가 잘 산다면' 아무도 잘 사는 게 아니다). '모두가 똑같이/적당히 못사는 세상', 그게 보다 솔직한 공산주의 비전이다. 혹은 삶에 대한 평가의 기준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배는 곯더라도 발레 보러 다니는 게 '참인생'이라는 식으로. 그런 게 고상한 비전이다. 인간이란 종의 본성이 그런 비전에 걸맞을 정도로 고상한가 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이지만. 

 

 

 

 

 

이런 식으로 투덜거리는 나의 온건한 결론은 역시나 이번주 <씨네21>에 실린 '투덜양'의 그것이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 대한 감상문을 작성하면서 김은형 기자는 이렇게 쓴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현실주의자의 이야기다. 누군가는 현실주의가 아니라 패배주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구리들은 지는 싸움을 한다. 애당초 그들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목숨 걸고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하겠다는 비장감이 없다. 심각하게 대책회의를 하다가도 '누가 나설래?' 그러면 모두 자는 척을 하고, 또 그러다가 회의 끝나고 햄버거를 하나씩 돌리니 입이 찢어진다." 그 햄버거가 적(인간)들이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해서 "뭘하든 (이들의) 시작은 창대하지만 그 끝은 미미하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뭐, 어때'라는 식이다.  현실은 이들을 밀쳐내지만 이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악질적인 돼지과도 아니고 그렇다고 빨간 바이러스과도 아닌 나로선 이런 너구리과에 분류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나는 현실주의자이고 패배주의자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변혁이나 혁명과 달리 다수 의견의 난장으로서의 '정치'란 그런 현실주의/패배주의의 장이다. 그리고 그 장은 소설의 장이기도 하다. 내가 사랑하는 건 그 소설들의 세계이고 너구리들의 세계이다. 그 세계가 각각 경제적/ 도덕적으로 잘난 체하는 '돼지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으면 좋겠다...(하겠다던 책 얘기는 다음에 해야겠다.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역시 미미하군... )

05. 05. 10.


댓글(6)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여우 2005-05-10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녁 시간에 너구리 친구 한 명 다녀 갑니다.^^

로쟈 2005-05-10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도 고치기 전에 다녀가셨군요.^^

깍두기 2005-05-10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구린데요.....그래도 진중권의 글은 멋졌어요^^;;;
(햄버거는 어디서 주나요?? =3=3=3)

로쟈 2005-05-10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그는 주로 '멋있는' 말을 하죠...

종이 2005-05-11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수의견의 난장으로서의 '정치'가 주는 혐오감이 소설과 같은 장에 두고 말할 수 없게 합니다. 소설이 포함하는 자괴감과 부끄러움을 현실정치는 모르니까.
대중인쇄물에서 그나마 진중권과 같은 발언을 확인하는 거는 좋았습니다.

로쟈 2005-05-11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탈린도 박정희도 그런 '정치'를 혐오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