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연의 평문 "모더니즘의 망령을 찾아서"는 1994년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실렸던 것인데, 김성기 (편) <모더니티란 무엇인가>(민음사, 1994)에 한번 수록되었다가 이후에 그의 평론집 <비루한 것의 카니발>(문학동네, 2001)에 재수록되었다. 나는 이 3종의 글을 다 갖고 있는 듯한데, 이번에 읽은 건 평론집에 수록된 것이다. 다른 동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책박스를 열어보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고, 지난번에 마샬 버만의 얘기도 나온 김에 그의 <단단한 것은 모두 녹아 날아간다 - 근대성의 경험>(국역본은 <현대성의 경험>)에 대한 해제 성격의 이 평문을 읽어본 것이다(이전에도 읽었을 법하지만,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다).

 

 

 

 

황종연은 먼저 <반시대적 고찰>에 실려 있는 니체의 글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를 검토한다. 거기서 제기되고 있는 역사 망각(니체가 부추기는 것은 우리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역사(주의)에 대한 능동적인/긍정적인 망각이다)이란 테마 혹은 망각의 이념이 모더니즘과 친족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즉, 역사에 대한 망각과 부정이 각종 모더니즘(운동)의 공통분모라는 것. 

"모더니즘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지목되곤 하는 '전통과의 결별'이라는 것이 단순히 기존의 문학적, 예술적 관습의 파괴와 혁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것을 경험하는 근대 특유의 방식이라는 차원에서, 다시 말하여 유동적인 현재에 대한 의식에 압도된 생산적인 망각의 전략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비루한 것의 카니발>, 355쪽)

더불어 황종연이 지적하는 것은 모더니즘을 공격하면서 들고 나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구호/수사가 모더니즘의 그것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 "포스트모더니즘의 정당화에 봉사하는 비판적 담론들이 근본적으로 모더니즘적 수사에 기생하고 있다는 것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356쪽) 그런데, 버먼의 <근대성의 경험>은 "포스트모더니즘 자체를 다루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제기된 가장 강력한 비판 중의 하나"이다. 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횡행하던 시절에 버먼의 모더니즘 옹호를 끌고온 배경은 아마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나의 견문으로, 황종연은 우리문학에서 모더니즘의 옹호자를 자임하고 있으며(그러니까 그의 포지션은 리얼리즘도 포스트모더니즘도 아니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러한 입장의 전거를 모더니즘에 대한 버먼의 논의에서 가져온다(이 평문이 비평가 황종연에게 갖는 의미가 거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또한 버먼과 마찬가지로 "모더니즘의 '망령들'과의 대화는 근대성의 현실에서 물러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 보다 정직하게 대면하고 보다 대담하게 싸우기 위한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강조해둘 것은 버먼의 책이 '근대성'이 아니라 '근대성의 경험'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그러니까 똑같이 근대성 프로젝트의 유효성을 강조하지만 '근대성' 범주에서 사고하는 하버마스와는 좀 다른 얘기를 '근대성의 경험'을 화두로 하여 버먼을 늘어놓게 되며, 이것이 그의 강점이다. 상대적으로 하버마스는 '미학'이나 '경험'에 무관심하다). 사실 이 제목(부제)만 가지고도 버먼의 입장을 어느 정도 예단할 수 있다.

"버먼이 모더니즘의 갱생을 위해 망각이 아니라 기억을 실천하고 동시에 촉구하는 배경에는 근대성이라는 것이 그저 유동적인 현재의 경험이 아니라 역사적인 실체성을 갖는 경험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무자비한 망각을 필요로 하는 삶, 그것의 본질적인 역사성을 그는 강조한다. 그가 기억하는 모더니즘은 현재 우리의 삶이 여전히 역사적 근대성의 난제와 곤경 속에 있음을 직시하도록, 문화적 단절의 환상에서 깨어나도록 자극한다."(358쪽) 그리고 "<근대성의 경험>에서 버먼이 제기한 가장 중요한 주제는 모더니즘과 근대화 사이에 존재하는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관계이다."(359쪽)

여기서 '근대화'란 '일군의 사회적 과정'을 뜻하며, 모더니즘은 그것이 야기한 다양한 비전과 이념이다. "모더니즘이 근대화와 맺고 있는 관계는 대단히 복합적"이다. "모더니즘은 근대화에 의존하면서도 근대화에 개입하고, 근대화에 적응하면서도 근대화에 반발한다."(359쪽) 즉, 모더니즘과 근대화는 변증법적인 관계에 놓이며, 여기서 암시되는 바이지만, 모더니즘에 대한 버먼의 정의는 일반적인 정의보다 광범위하며 포괄적이다(그걸 단점으로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도하에서 버먼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생겨난 인간 경험 양식의 차원에서 근대성의 본질에 접근한다."(360쪽)

"버먼이 말하는 근대성의 경험은 근대화가 유럽 봉건사회를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세계 전체로 확대되면서 인류에게 초래한 보편적인 경험이다. 근본적으로는 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에 의해 추동되는 근대성은 비록 시간과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경험이 되었다고 그는 보고 있다. 모든 지역적, 종족적, 이념적 경계를 넘어서 사람들의 개인적, 사회적 생활에 침투한 이러한 근대성은 사람들의 생황을 안정적이고 확실하게 하는 모든 질서 또는 토대의 원천적인 결여를 기본 특징으로 한다."(361쪽) 때문에 근대적인 삶이란 "창조와 파괴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 있는 유동적인 삶"이며, 그것은 "근대적 인간에게 희망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절망의 온상이고, 행복의 약속이면서 동시에 재앙의 저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근대성은 본질적으로 역설의 경험이다."(361쪽)

이러한 전제하에 버먼의 논의는 괴테의 <파우스트>와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거쳐, 근대성의 원초적 장면을 드러내주는 도시 공간으로 이어진다. 거기서 특별히 자세하게 분석되는 것은 보들레르의 파리와 도스토예프스키의 페테르부르크이다(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전사(前史)로서 푸슈킨과 고골이 다루어진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관심은 (파리보다는) 페테르부르크에 두어지며, 사실 '저발전/저개발의 모더니티'를 다룬  <근대성의 경험> 제3장은 러시아문학 전공자들에게도 많은 유익한 생각거리를 제공해준다.

 

 

 

 

버먼의 해석에 따르면, "러시아의 왜곡된 근대성이 문학에서 표현되는 가장 두드러진 방식은 페테르부르크/뻬쩨르부르그가 '비현실적 도시'로 그려진다는 데에서 찾아진다."(368쪽, 나는 이전에 이 '페테르부르크 테마'에 관한 리뷰를 쓴 적이 있다.) 단적인 예가 고골(리)의 <페테르부르크 이야기>이다(5편의 작품이 묶인 <뻬쩨르부르그 이야기>(민음사) 참조). 그리고 이 페테르부르크 모더니즘의 고뇌와 열정의 표현으로서 (비단 버먼에게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이며, 버먼이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이다.

 

 

 

 

"이를테면, (버먼은)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가난한 서기가 페테르부르크의 네프스키 특구의 군중 속에서 자신이 장교와 사회으로 등등한 존재임을 스스로 확인하는 장면에서는 도시의 로맨스를 자기 것으로 삼는 정신의 출현, "정신적 근대화 속에서의 거대한 전진적 도약"을 보고 있다."(369쪽)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버먼의 논의를 정리하고 있는 대목에서 황종연은 (국역본에서만큼은 아니지만) 약간 정돈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인용에서 '네프스키 특구'는 '네프스키 거리'나 '네프스키 대로'로 옮겨져야 하는데, Prospect를 '특구'로 옮긴 것은(국역본은 '지구'라고 옮겼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가 고골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는 걸 뜻한다. "도시의 로맨스를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이란 표현도 보다 정확한 맥락을 확인하기 위해서 버먼의 원서(펭귄북)를 뒤적여 봤지만, 찾지 못했다.

황종연의 평문은 버먼의 논의에 대한 가장 유려한 해제로 꼽을 만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해 정리하고 있는 대목만큼은 나로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다. 가령, "버먼이 이해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함은 그가 바로 후진성의 통렬한 고뇌로부터 '공학'으로 표상되는 인간의 건설적, 창조적 활동을 긍정하는 비범한 각성에 도달했다는 데에 있다"(370쪽)는 대목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산물로서의 (근대 건축)공학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입장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의 대심문관의 논리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처럼 양가적인 면모가 있지만,  궁극적으론 비판적이다. 그게 적어도 일반적인 이해이다. 

 

 

 

 

반면에 버먼은 근대화(공학)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비판이 근대화 일반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근대화의 일면에 대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그는  근대화를 '모험으로서의 근대화'와 '일상으로서의 근대화'로 양분하고 도스토예프스키의 비판은 후자를 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러시아 문학도에게 흥미로운 건 이 대목이며, 지하생활자와 장교와의 '결투'를 버만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는바, 이건 '새로운' 이해이다). 그런데, '일상(routine)으로서의 근대화'라는 건 황종연의 요약에서 빠져 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의 논의/정리가 삐그덕거리는 건 그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령, "버먼은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에게는 도시생활에 잠재된 욕망과 고통, 투쟁과 환희의 모든 가망한 현실을 포용하는 비전, 정체와 안주를 모르는 영웅적인 근대화의 비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같은 건  작품을 읽지 않고 평문만 읽을 경우 지하생활자에 대한 정반대의 이해를 조장하기 쉽다. '영웅적인 근대화의 비전'이란 말은(역시 원문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반어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면 지하생활자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어지는 대목: "'모험으로서의 근대화'라는 그 비전은 도시의 갈등과 혼란을 종식시킬 계획과 발전을 추구하는, 그리하여 결국은 근대화마저 삶의 활기를 죽이는 판에 박힌 관례로 전락시키는 모든 근대화의 이념들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을 내포한다고 한다."(370쪽) 전체문장의 내용은 '모험으로서의 근대화'라는 비전은 모든 근대화의 이념들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을 내포한다, 이다. 거기서 '모든 근대화의 이념들'은 (1)도시의 갈등과 혼란을 종식시킬 계획과 발전을 추구한다. (2)근대화마저 (삶의 활기를 죽이는) 판에 박힌 관례로 전락시킨다. 나로선 (1)과 (2)가 어떻게 동시에 '모든 근대화의 이념들'을 수식할 수 있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다(나는 의미론적으로 이 문장이 비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둔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 탓하기에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황종연의 이해가 미덥지 않다.

파리와 페테르부르크에 이어서 버먼이 분석하고 있는 것은 1960년대 뉴욕의 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대립되는 버먼의 입장은 60년대의 활발한 논의를 통하여 성립된 모더니즘의 개념과 이론들에 대한 그의 비판을 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모더니즘에 연관된 60년대의 사상과 논쟁이 근대성에 대한 풍부한 비전들을 산출했음을 인정하면서도 모더니즘과 근대생활의 관계를 인식하는 방식에 있어서 우직하고 소박한 성격을 드러냈다고" (비판적으로) 본다(374쪽).

60년대 모더니즘의 (후퇴적/긍정적/부정적) 세 가지 경향에 대한 버먼의 비판은 모더니즘에 대한 그 자신의 비전이 지난 포괄적이며 복합적인 성격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며, "자본주의가 모더니즘 문화에 가하는 변질과 부식을 강조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그는 자본주의의 번창이 오히려 모더니즘이 필요로 하는 근대성의 자원과 활력을 꾸준히 생산하리라 믿고 있다... 이것은 모더니즘을 인식하는 그의 입장을 맑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양쪽 모두와 구별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376쪽). 더불어, 이러한 입지에서 황종연은 맑스주의(창비식 리얼리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양자와는 거리를 유지한다.

버먼에 대한 비판은, 황종연도 지적하고 있지만, 페리 앤더슨의 "근대성과 혁명"(<창작과 비평>, 1993년 여름호)을 참조할 수 있다(이 또한 복사해두었었는데, 읽은 기억이 없다. 아, 망각이여!). 그러한 비판을 수용하면서 황종연은 앤더슨의 비판(주로 버만이 모더니즘'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버먼의 논의를 오히려 보충해줄 수 있다고 본다. "버먼이 올바르게 인식했다면 그가 말하는 근대성은 현재 사람들이 처해 있는 유일한 실존적 조건"이며 "그것에 대해 우리는 찬양할 수도 규탄할 수도 있지만 그것 밖으로 나가지는 못"하고, "그것을 떠나서는 삶도 없고, 따라서 혁명도 없다"는 결론하에서.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모더니즘은 리얼리즘"이라는 버먼의 주장에 황종연도 동감을 표시한다. 이 경우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 찬 삶을 철저히 사는 리얼리스트는 바꿔 말하면 아이러니스트"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근대성의 경험에 충실하는 것, 그것에 내재한 변증법적 가능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381쪽). 근대성의 경험이 내포하는 '생산적인 역설'에 충실할 때 우리는 아이러니스트가 된다(오랜만에 로티의 구호를 본다!). 그렇다면, 리얼리즘이냐, 모더니즘이냐의 이분법을 넘어서 우리에게 남겨진 시대정신은 '아이러니즘'이다. 슐레겔의 말을 빌면, "영원한 생동성에 대한, 한없이 풍부한 대혼돈에 대한 명료한 의식"! 더불어, "자기 창조와 자기 파괴의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지점들"! 우리는 그런 지점들을 통과하고 있는가?..

05. 0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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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4-14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덕분에 늘 잘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로쟈 2005-04-14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송합니다...

나목 2006-12-30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rospect 는 지구, 거리로만 번역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특히 네프스키는 페테르부르크 안에 특별하게 조성된 지구라는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보면, 특구(특별히 조성된 지구)라는 말은 어색하지 않습니다. 또 "비루한 것의 카니발" 곳곳에 근대문학의 언표로 도스토예프스키가 언급되고 있는데, 읽지 않았다고 단순히 취급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문제로 드신 부분은 "제2장 마르크스, 모더니즘, 현대화"의 핵심이 되는 부분으로, 근대의 지향은 본질상 자신의 지향을 거부하는 것까지를 함의함으로서 '망각'의 소용돌이에 기꺼이 빠져드는 역동성이 있다는 뜻으로 저는 이해했는데, 이는 황종연의 해석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비문이라기보다는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근대의 역동적인 모순이었던 것일 수 있습니다. 여러모로 명쾌한 글에 궁금한 점이 있어서 댓글을 붙여 봅니다.

로쟈 2006-12-29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전적으론 '네프스키 특구'라고 번역될 수도 있겠지만, 그냥 고골의 작품 제목이기도 한 '네프스키 거리'란 말이 모든 걸 다 카바합니다. 그 자체로 페테르부르크와 러시아 근대성의 상징이 되구요. 필자가 참조하지 않았을 거라고 한 건 국역본 고골과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특구'란 말을 안 쓰기 때문에. 아마도 필자는 영역본을 참조했겠지요. 그리고 '비문'이라고 한 건 다시 읽어보니 제가 오버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언제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봐야겠네요.^^ 어쨌든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나목 2007-01-01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가지 더 궁금한 점이 있다면, 근대 문학에서 "영웅적인 근대화의 비전"이란, "세계의 현실적인 변화를 '주도하는'"의 뜻보다는, "세계와 나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의 뜻이 한층 더 큰 것으로 압니다. 훨씬 내향적인 것이지요. 예를 들어, 제임스 조이스의 "스티븐 히어로"에서 히어로는 단순히 반어적인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닙니다. 같은 작가의 "율리시즈"에서 블룸의 행위도 실은 비루하기 그지 없으나, 평단에서는 "영웅적인 근대의 비전"을 가진 인물로 무리 없이 꼽습니다. 황종연의 글은 전반적으로 일상적인 의미의 용어보다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축적된 용어를 쓰는 경향이 농후한데, 저는 문학에는 문학적인 잣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장단점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언젠가^^ 다시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족한 글에 답문 감사합니다.

로쟈 2006-12-30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타석으로 좋은 지적을 해주셨네요.^^ 사실 버먼의 책을 저도 완독한 상태에서 쓴 글은 아니었기 때문에 '숙제'로 남겨놓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덕분에 이번 겨울에 시간을 내봐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