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한 인문학

이번주 매경이코노미(1624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제안을 받고 인문서평을 격주로 게재하기로 했다. 첫 번째로 고른 책은 마사 누스바움의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궁리, 2011)이다. 추석 연휴 첫날에 독서실에 가서 읽은 책이다. 참고로 같이 읽은 건 곽준혁의 <경계와 편견을 넘어서>(한길사, 2010)에 수록된 인터뷰이다. 이 책에선 '마사 너스바움'이라고 표기돼 있다. 서평을 쓰고 나서 <인간성 함양(Cultivating Humanity)>(1997)도 주문했는데 오늘 책을 받았다...  

  

매경이코노미(11. 09. 28) 교육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

“우리는 거대한 위기, 심중한 전 지구적 중요성을 지닌 위기의 한가운데에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꺼내들었다면 십중팔구 2008년 이후의 전 지구적 경제위기를 다룬 책으로 넘겨짚기 쉽다. 자본주의 체제가 낳을 수밖에 없는 주기적인 위기인지, 아니면 파국적인 위기인지 여하튼 우리를 포함한 세계경제가 아직 빠져 나오고 있지 못한 위기 말이다.   

경제위기에 대한 진단이라면 사실 새로울 건 없다. 모두가 의식하고 있는 위기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미국의 인문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궁리, 2011)에서 경고하는 ‘거대한 위기’는 “마치 암처럼 대개는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되고 있는 어떤 위기”를 가리킨다.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교육에서의 전 세계적 위기’다.   

 

책의 원제는 구호처럼 간명하다.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Not for Profit)’. 물론 주어는 ‘교육’이다. 누스바움의 선택지에 따르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건 ‘이익을 위한 교육’과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 두 가지다. 중립적인 선택지는 아니다. 그가 보기에 바람직한 교육은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이고, 이익을 위한 교육은 나쁜 교육이다. 누스바움이 우려하는 것은 각국이 국가 이익에 목을 매면서 교육현장에 밀어닥친 급격한 변화다. 경제성장만을 국가 발전의 유일한 척도로 간주하면서 빚어진 결과인데 이 때문에 인문교양과 예술 교육이 차츰 축소, 배제됨으로써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이 위축되고 있다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다. 만일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전 세계 국가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전통을 비판할 수 있으며, 타인의 고통과 성취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는 온전한 시민이 아니라, 유용한 기계일 뿐인 세대를 생산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교육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로 귀결된다.  

바람직한 교육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누스바움은 세 가지 능력을 양성할 수 있게 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첫째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 둘째 지역적 차원의 열정을 뛰어넘어 ‘세계 시민’으로서 세계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셋째 다른 사람의 곤경에 공감하는 태도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이 능력들은 바로 인문교양과 예술을 통해서 길러진다. 가령 예술은 우리의 내면적 자기 함양과 타자에 대한 대응 능력을 증진시켜준다. 누스바움은 시카고의 어린이합창단을 한 사례로 드는데, 리허설과 공연에 참여하면서 아이들은 인종,사회경제적 배경이 전혀 달라도 함께할 수 있는 체험을 갖게 된다. 그리고 자기의 목소리를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와 맞춰나가는 과정에서 능력과 기율, 책임의 감각을 키우게 된다. 더불어 다른 시대와 장소의 노래를 배움으로써 자연스레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법도 익히게 된다. 합창이라는 경험을 통해서 민주주의적 결속감과 존중심이 길러지는 것이다. 물론 합창뿐만이 아니다. 음악, 무용, 회화, 연극, 모든 것이 이러한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익을 위한 교육, 경제 성장을 위한 교육의 주창자들은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아이들을 내몬다. 그들은 학교에 ‘사려 깊은 시민들’ 대신에 ‘유용한 이윤 창출자들’을 배출하라고 요구한다. 그런 교육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결과는 무엇인가. 인도 교육의 선구자이기도 했던 시인 타고르의 표현을 빌면 ‘영혼의 자살’이다. 타고르의 경고가 무색하게도 오늘날 이익을 위한 교육을 택한 인도의 학부모는 기술, 경영 대학에 입학한 자녀들은 자랑스러워하지만 문학이나 철학을 공부하는 자녀들은 부끄러워한단다. 누스바움이 보기에 이건 생각보다 끔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아무런 비판적 사고도 가르치지 않고 인종주의적 편견을 부추기면서 주입식 교육만을 밀어붙였던 인도의 구자라트 주에서 2002년에 폭동이 발생하여 힌두 우익 폭력배들이 2,000여 명의 무슬림 시민을 살해한 사건을 우연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학교들이 인도식 방향으로 이동해가고 있는 현실에 “뼛속 깊이 두려운 마음으로 놀라야 한다”는 것이 누스바움의 경고다. 과연 우리와는 무관한 경고인지 생각해볼 문제다.  

11. 09. 20.   

P.S.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는 누스바움의 단독 저작으론 처음 번역된 것이다. 그런 만큼 기대를 갖고 읽었는데 솔직히 절반 정도까지는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서평을 쓸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스러웠는데, 마지막 6장과 7장이 다행스럽게도 기대에 부응했다. 번역에 별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역자가 '문맥의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였다는 [ ]가 너무 빈번하게 나와서 오히려 독서에 방해가 됐다. ( )까지 자주 등장하다 보니 뭔가 거추장스러운 느낌을 자주 받았다 . 그리고 두 번인가 '괴탄하다'란 말이 나오는데, '개탄하다'를 잘못 쓴 게 아닌가 싶다. 또 마지막 감사의 글(원서에는 서두에 나온다)에서 누스바움이 아마르티아 센 모자에게 감사를 표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the late Amita Sen and Amartya Sen"을 "최근의 아미타 센과 아마르티아 센"이라고 한 건 오류이다. "고(故) 아미타 센과 아마르티아 센"이다. 아마르티아 센은 보통 '아마티아 센'이라고 표기되는 하버드대학의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로 인도 출신이고 누스바움과는 공동 연구도 진행한 적이 있다.     

우리와 처지가 비슷하게 영국에서도 인문학자들이 정부기관에 연구비 지원을 신청해서 지원을 받는 체계인 모양이다. 누스바움이 보기에 "이는 실로 시간 잡아먹는 귀신"이면서 "연구 주제를 왜곡하는 귀신"이다(미국은 대학 재정이 상대적으로 독립돼 있다). 그런 상황에서 빚어지는 에피소드 하나.  

최근 철학과와 정치학과를 합병하여 신설된 어느 학과에서 일하는 냉소적인 젊은 철학자는 내게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최근 그가 제출한 자금 지원 제안서의 제목은 6개 단어로 되어 있는데, 이는 글자 수 제한 탓이었다. 그래서 그는 제안서의 제목란에 "경험에 근거한(empirical)"이라는 단어를 6번 연달아 기입했다고 한다. 마치 제안서를 검토한 관료들에게 그가 여기서 다루는 것은 단지 '철학'만이 아니라는 점을 재삼 확인하기라도 하는 양 말이다. 그런데 그의 신청서는 결국 성공적으로 통과되었다."(214-5쪽) 

요는 'empirical'이란 단어를 많이 집어넣었더니 연구비 신청이 채택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에피소드의 내용이 잘못 번역됐다. "최근 그가 제출한 자금 지원 제안서의 제목은 6개 단어로 되어 있는데, 이는 글자 수 제한 탓이었다. 그래서 그는 제안서의 제목란에 "경험에 근거한(empirical)"이라는 단어를 6번 연달아 기입했다고 한다."는 "his last grant proposal was six words under the word limit - so he added the word 'empirical' six times"를 옮긴 것이다. '제목은'이나 '제목란에', '연달아'는 원문에 없는 걸 역자가 (이해를 돕기 위해?) 집어넣은 것으로 실상은 오독의 산물이다. 보통 '몇단어 이내'라고 지정돼 있는 연구비 신청서에서 6단어가 모자라기에, 곧 더 넣을 수 있기에 'empirical'이란 단어를 6번 집어넣었다는 것이다(그게 선정 '비결'이 아닐까란 것이고). 제목에만 같은 단어를 6번 연달아 기입한다는 건 가능하지 않은 얘기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9-21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2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2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족 2011-09-22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번역제목이 너무 마음에 안 듭니다. 개인적으로 '공부'는 혼자 하는 탐색활동이란 느낌이라면, '교육'은 누군가로 부터 배우고 길러지는 것이라서 저런 식으로는 쓸 수 없는 거거든요.

로쟈 2011-09-22 13:21   좋아요 0 | URL
네, 제목은 저도 맘에 안 듭니다.^^;

수증기 2011-09-22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주 들러서 즐겁게 읽는 사람입니다.^^

'괴탄하다'가 '이상하고 허탄하다'의 괴탄(怪誕)이라면
그런 뜻으로 쓰는 것은 종종 보이는 것 같습니다.
물론 맥락이 이상해서 의심하셨겠지만 여기서 자양분을 많이 얻는 독자로서
혹시나 도움될까 해서 남깁니다

로쟈 2011-09-23 08:50   좋아요 0 | URL
그런 말도 있군요. 하지만 어떤 단어를 그렇게 옮겼을지는 좀 의문이에요. 문맥상으론 그냥 '개탄하다'여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