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한편을 올려놓는다. 여느 시들과 마찬가지로 오래 전에 쓴 것이다. 이미 올려놓은 줄 알았더니 그럴 계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생각난 김에 미루나무 길을 걸어도 좋겠다 싶은 날이다... 

 

미루나무 등걸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미루나무 등걸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물을 데운다
미루나무 언덕에 망가진 자전거를 끌고 가는 늙은 우편배달부의 모습이 보인다 물이 끓는다 너무 늦는 것은 아닐까 너무 자주

얼음장에 갇혀 하얗게 질린 나뭇잎들이
봄물에 떠밀려 오곤 했다 언제였던가

미루나무 등걸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물을 데운다
미루나무 언덕에 넘어질 듯 내려앉은 노을이 읽히지 않는 傳記처럼 걸려 있다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생애가 있으리라 너는 말했다
우리 사는 날들이 전부가 아니야 정말 아니었으면

미루나무 등걸에 기대어 하루를 보낸다
오늘도 부치지 않은 편지가 마지막 한 잎처럼 구겨진다

미루나무 등걸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물을 데운다
습관은 가벼운 탄식처럼 아늑하다 이젠
미루나무 등걸 어디에도 손수건을 내걸 만한 자리는 없다 물이 끓는다
사랑했으리라 그대는 삶을 사랑했으리라 낮은 呪文처럼 물이 끓는다

미루나무 등걸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나는 잠이 든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헤적이는 마음처럼 한 자락 구름이 걸려 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쭈그러진 입김처럼 어둠을 껴안고 있다    

 

10.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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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7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8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7 1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8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10-17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에는 원고와 강의의 쓰나미라고 하셨는데, 자작시도 올려주시고,,, 시에 나온 푸르른 나무(미루나무에요?)와 바탕화면의 낙엽사이에서,,, 시를 음미 합니다.

로쟈 2010-10-18 00:03   좋아요 0 | URL
아무것도 안 올리기가 뻘쭘해서요.^^;

2010-10-18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8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모사케르 2010-10-18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릴케를 떠올리게 하는 아련한 미루나무 시군요..
미루나무에서 그네를 탔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미루나무에 관한 산문을 지어볼까 싶게 만드는 강력하고 아름다운 시 입니다.

로쟈 2010-10-18 09:04   좋아요 0 | URL
미루나무에 관한 산문도 읽고 싶네요.^^

비로그인 2010-10-18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모사케르님께서 릴케가 떠오른다고 하셨는데, 제가 마침 릴케의 말을 읽고 있었습니다. 옮기고 싶네요. 릴케의 말을 빌어 '시를 쓰는 분들' 또한 칭송하고 싶어요. // "일찍 시를 쓰면 별로 이루지 못한다.(이 말에 완전긍정은 아니지만) 시인은 벌이 꿀을 모으듯 한 평생 의미를 모으고 모으다가 끝에 가서 어쩌면 열 행쯤 되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란 사람들이 생각하듯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감정이라면 젊을 때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시는 체험이다. 한 행의 시를 위해 시인은 많은 도시, 사람, 물건들을 보아야 한다.....[하지만] 체험의 추억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추억이 많으면 그것들을 잊을 수 있어야 한다. 추억이 되살아 올 것을 기다리는 큰 인내가 있어야 한다.] 추억이 내 안에서 피가 되고, 시선과 몸짓이 되고, 나 자신과 구별되지 않을 만큼 이름 없는 것이 되어야, 그때어야 비로소, 아주 가끔 시 첫 행의 첫 단어가 그 가운데서 떠오를 수 있다." // ..... 알토란 같은 한 주 되세요!

로쟈 2010-10-18 17:13   좋아요 0 | URL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인가요? '가을날' 때문인지는 몰라도 왠지 릴케는 가을과 잘 어울리는 듯해요...

미지 2010-10-19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했으리라 그대는 삶을 사랑했으리라 낮은 주문처럼 물이 끓는다"

지워질 수 없는 어떤 감각의 낙인 같은 것이 느껴지는 강렬한 구절이군요

로쟈 2010-10-19 10:31   좋아요 0 | URL
가끔 저도 써놓고 맘에 든다 싶은 시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