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한편을 올려놓는다. 여느 시들과 마찬가지로 오래 전에 쓴 것이다. 이미 올려놓은 줄 알았더니 그럴 계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생각난 김에 미루나무 길을 걸어도 좋겠다 싶은 날이다...
미루나무 등걸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미루나무 등걸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물을 데운다
미루나무 언덕에 망가진 자전거를 끌고 가는 늙은 우편배달부의 모습이 보인다 물이 끓는다 너무 늦는 것은 아닐까 너무 자주
얼음장에 갇혀 하얗게 질린 나뭇잎들이
봄물에 떠밀려 오곤 했다 언제였던가
미루나무 등걸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물을 데운다
미루나무 언덕에 넘어질 듯 내려앉은 노을이 읽히지 않는 傳記처럼 걸려 있다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생애가 있으리라 너는 말했다
우리 사는 날들이 전부가 아니야 정말 아니었으면
미루나무 등걸에 기대어 하루를 보낸다
오늘도 부치지 않은 편지가 마지막 한 잎처럼 구겨진다
미루나무 등걸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물을 데운다
습관은 가벼운 탄식처럼 아늑하다 이젠
미루나무 등걸 어디에도 손수건을 내걸 만한 자리는 없다 물이 끓는다
사랑했으리라 그대는 삶을 사랑했으리라 낮은 呪文처럼 물이 끓는다
미루나무 등걸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나는 잠이 든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헤적이는 마음처럼 한 자락 구름이 걸려 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쭈그러진 입김처럼 어둠을 껴안고 있다
10. 10.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