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온 책들의 웅성거림을 기준으로 하면, 비교적 '조용한' 주라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숨죽인 외침 소리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이번에 재출간된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바다출판사, 2010)이다. 나는 학원사판(1985)을 갖고 있는데(하지만 어디에 두었는지는 모른다), 새 판본도 바로 장바구니에 넣었다 일단은 보관함으로 옮겼다. 학원사판을 조금 더 찾아보자는 생각에서다. 그래도 일단 이 '오래된 새책'에 대한 리뷰는 챙겨놓는다.    

세계일보(10. 08. 28)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본성에서 모든 권력은 나온다

“카이사르, 칭기즈칸, 나폴레옹, 히틀러…. 인간의 역사는 수많은 군중을 죽음으로 내몬 자들을 숭상한다. 그들은 재능이 있는 동시에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다. 그들은 모두 시체 더미의 왕이다. 인간의 역사는 살아남는 자의 역사이고 폭력의 역사이며 시체 더미의 역사라는 데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권력자는 군중을 죽음으로 위협하여 전장으로 내몰고 군중은 죽음의 군중, 곧 시체 더미가 된다. 권력자는 그만이 살아남은 유일한 인간이 되어 시체의 들판에 서 있기를 좋아한다. 살아남는 최후의 인간이 되는 것, 이것이 모든 권력자가 원하는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엘리아스 카네티는 자신의 저서 ‘군중과 권력’에서 이렇게 갈파하고 있다. 이 책은 198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20세기 최고의 르네상스 지식인으로 꼽히는 저자가 35년간 군중과 권력자의 생리를 조사 분석해 1960년 발표한 역작이다.

군중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현상이다. 월드컵에서 보여준 군중의 열기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2년여 뒤 실시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점점 더 많은 군중의 행동들이 집단적으로 표출될 것이다. 아프간에 대한 미국의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북한 핵개발을 둘러싸고 한반도 긴장의 파고는 여전하다.

이러한 상황은 50여년 전 카네티가 고민했던 당시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파시즘과 냉전, 핵전쟁의 위협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프로파갠더들의 극성도 여전하다. 현대사회든 그 이후 첨단 사회든 간에 군중과 권력은 여전히 궤를 같이하고 있다. 지금 이 시각의 상황도 카네티가 분석했던 군중과 권력 현상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카네티는 1905년 스페인계 유대인으로 불가리아에서 태어났다. 유대계라는 이력의 카네티에게 ‘나치즘’의 발호는 군중과 권력에 운명적으로 천착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나치즘의 행동 양태를 파악하기 위해 나치즘 치하에서 끼니를 이어가며 연구했다. 그러던 중 군중의 광기에 들떠 있던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이 자행되자 영국으로 망명, 연구활동에 전념했다.

군중 심리는 카네티에게 문제를 풀어주는 핵심이었다. 1910년 핼리 혜성 출현에 따른 종말론적 패닉 현상, 1911년 타이타닉호 침몰 소식을 듣고 거리로 뛰쳐나와 비통해 하던 인파의 물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시민들이 보여준 적개심과 광기, 전후 독일의 인플레이션에 따른 극심한 궁핍과 혼란, 그리고 유대인 학살…. 자신이 살았던 20세기 전반기만큼 군중 현상이 역사상 폭발했던 시기도 없었다고 카네티는 쓰고 있다. 

카네티는 군중에 의한 권력 현상을 주로 생존 문제와 연관시켰다. 그는 “모든 권력은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나온다”고 지적했다. 살아남는 순간이야말로 권력의 순간이다. “죽음을 목격하며 느꼈던 공포는 죽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만족감으로 변한다”고 설명한다.

카네티는 권력 현상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로 종교도 근본적으로는 권력의 본질과 관련된다고 파악했다. 종교는 죽음과 내세를 담보로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인간의 약점을 이용해 벌이는 장사라고 카네티는 주장했다.

그는 군중 행동의 기원을 무리 행동에서 찾고 이렇게 정의한다. “무리는 부족이나 씨족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부족이나 씨족은 정태적인 것에 반해 무리는 동태적이다. 가장 순수한 무리 형태는 사냥 무리다. 무리들 가운데 전투 무리가 가장 보편적이다. 전투 무리는 자신의 재물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아는 사냥 무리와 유사하다. 군중의 심리도 이와 유사하다.”

카네티는 이어 군중 심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군중은 언제나 성장하기를 원하며, 군중의 내부는 평등이 지배한다. 군중이 형성되는 것은 평등을 얻기 위해서이다. 특히 군중은 밀집형태를 사랑하며 하나의 방향을 필요로 한다. 군중은 항상 동적이며 어떤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이 책을 읽은 서평자들의 일치된 결론은 카네티의 이 저서가 ‘파시즘에 대한 정확한 보고서’라는 것이다. 카네티는 책의 말미에서 히틀러의 광기와 역사상 유례없는 유대인 학살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의문을 던지고 있다. 어떻게 예술과 철학과 자연을 사랑하는 독일인들이 그처럼 포악한 권력자의 명령에 복종해 그런 끔찍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하는 물음은 카네티뿐 아니라 20세기 지식인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이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21세기를 연구하는 지식인들에게 적잖은 과제를 설정해주고 있다.(정승욱 기자)  

10. 08. 28.  

P.S. 이번주에 나온 최성각의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동녘, 2010)에도 <군중과 권력>에 대한 서평이 수록돼 있기에 옮겨놓는다. 저자는 '방대하고 치밀하면서도 극적인 책'이라고 평했다.  

청년 카네티가 처음 ‘군중’을 만난 것은 19살 때였다. 1924년 국수주의자들에 의한 독일 외상 라테나우 암살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벌인 대규모 시위였다. 그는 경악했다. 그것은 성난 물결이었고, 뜨거운 화염이었으며, 동시에 세찬 질풍이었다. 군중은 바위처럼 단단하면서도 비누거품처럼 쉽게 부서지기도 해서 더욱 카네티를 전율시키고, 경악시켰다. 그는 이때의 체험을 이렇게 말한다.

“이 군중은 예전에 내가 보았던 군중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내 피부로 이 군중을 느꼈고, 이 군중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랐다. 나는 그때까지 군중을 마치 나를 향해 습격해오는 것 같은 위협적인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때에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 어떤 저항하기 힘든 힘에 의해 군중 속으로 빨려들어가 나 자신이 군중의 일원이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데모가 끝나 군중이 해산하고 각자 집으로 뿔뿔이 흩어져갈 때, 나는 나 자신이 지금까지보다 가련한 존재가 되고 무언가 귀중한 것을 잃고 만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3년 후인 1927년, 카네티는 다시 군중 속의 하나가 된다. 성난 시민들이 빈의 법무성 건물을 불태워버릴 때, 그 시위에 참여했던 체험이었다. 카네티는 이 체험으로 말미암아 바스티유의 폭풍우에 대해 책을 통해 보지 않아도 이해해버린다.

이 두 번의 운명적인 체험 이후, 그는 35년여 간 ‘군중연구’에 자신의 삶을 투신한다. 가히 필생의 작업이라 할 만하다. 이 장엄한 책은 실로 방대하고, 치밀하면서도 극적이다. 어마어마한 자료와 넘치는 인용과 역사적 사실들, 그리고 카네티만의 독창적이고 깊은 통찰로 점철되어 있다. 문학, 종교, 인류학, 심리학, 생물학의 영역을 넘나들며 카네티는 ‘군중의 물리학’ ‘권력의 정신분석학’을 완성했다. 그래서 세상은 그가 쓴 시나 소설 때문에 그를 시인이나 작가라 말해야 할지, 그가 쓴 희곡 때문에 극작가라 말해야 할지, 이 경이로운 책 때문에 사회과학자라 말해야 할지, 그의 방대한 지적편력으로 말미암아 인류학자라 말해야 할지, 끝내는 사상가라 말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러나 그는 어떤 학파, 어떤 체제(장르), 어떤 이데올로기로도 자신이 헐값으로 분류되기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단지 ‘카네티’라는 한 정신을 그는 자처했던 것 같다. 1960년, 책이 발간되자 이 놀라운 노작은 곧 ‘20세기의 서양고전’으로 자리매김되면서 그의 생전에 불멸의 가치를 얻게 되었다. 그를 일러 20세기의 ‘르네상스적인 인간’이라 말하는 연유가 여기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결국 이 놀라운 정신이 이 작업과 함께 수행한 소설 『현혹』에 노벨문학상 수여라는 형식으로 최소한의 예를 갖춘다.  

필자가 접한 『군중과 권력』은 반성완 선생이 번역한 1982년 한길사 초판본이었다. 550쪽에 달하는 책을 읽고 난 뒤에 쓴 메모를 펼쳐보니, ‘1992년 3월 2일’에 이 책을 완독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몇 달에 걸쳐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어디 있었고 뭘 하면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있었을까? 직장에 매이지 않고 살던 그즈음 내게 의료보험증은 있었을까? 어떻게 이토록 벅찬 치열한 정신을 만날 염을 냈고, 이 책에 무수히 밑줄을 그으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인간정신에 대한 경탄과 새로운 발견의 기쁨과  내 정신의 초라함과 편벽,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데 대한 절망을 직시했을 것이다.

학원사판도 있고, 한길사판도 있고, 모두 절판된 뒤 펴낸 바다출판사판도 있다. 하지만 바다출판사판도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아마 이 책은 오래된 도서관이나 ‘양식 있는 헌책방’에 가야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나라 새 책방에는 정말 나무에게 너무나 큰 죄를 범하고 있는 쓰레기들이 범람한다. 그건 그렇다손치고, 찾아 읽으려는 뜻만 있으면 그러나 반드시 이 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봄의 우리 촛불집회를 ‘군중’이라 해야 할 것인가, ‘공중’이라 해야 할 것인가, 누군가 이 책을 인용하면서 쓴 칼럼도 있었다. 이런 책을 한번 접하고 나면, 책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는 것과 혹 어쩌다 책을 펴냈더라도 책을 펴내기 전보다 더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독자는 그러나 특별히 무장할 필요가 없다. 열린 마음으로 겸손하게 위대한 저작을 읽어나가면 될 것이다. 반드시 그 정신이 격랑을 만난 뗏목처럼 요동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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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8-28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반성완 교수가 번역한 한길사 본을 갖고 있습니다. 1982년 초판 발행, 제가 소장하고 있는 건 1987년 10판본이네요. 그 때만해도 이런 책이 10판을 찍어냈었군요. 카네티는 제 의식속에 현장 기억으로 남은 첫 노벨상 수상작가입니다. 노벨상 수상이 알려지자 그의 대표 소설 <현혹>이 <머리없는 세상>이란 제목으로 황급히 번역되었고, 이 책을 아직 소장하고 있습니다. <머리없는 세상>을 읽다가 어린 마음에 참 이런 재미없는 소설에 노벨상이 수여되었을까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학생에 불과했으니까요 ㅎㅎ <군중과 권력>은 <머리없는 세상>의 해설을 읽다가 알게 됐고 그 제목에 끌려 대학생 시절에 구입했었습니다. 읽었던 기억은 나는데 완독을 하진 못했던 것 같아요. 다시 한번 책을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오래간만에요.^^ 그런데 학원사판은 어떤 책인지 궁금하네요. 전 반성완의 한길사 본과 바다출판사 본밖에 몰랐었습니다.^^

로쟈 2010-08-28 20:11   좋아요 0 | URL
학원사판이 강두식 선생 번역입니다. 바다출판사판의 '원판'이죠...

드팀전 2010-08-29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3년전엔가요 <바다출판사>꺼를 서점에서 산적이 있습니다. 부산에 있는 대형서점에는 그때도 모두 품절상태였는데...대학가 앞의 작은 서점에서...^^
음반도 똑같습니다. 품절된 것들이나 단종된 것들이 동네 작은 서점이나 레코드가게에 가면 그대로 있지요. 안팔리니까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이런 길모퉁이 작은 서점에서 절판된 책을 찾을때가 더 기분이 좋다니까요.
그 바로 전에 어떤분이 헌책방에서 사서 보내준게<주우신서>라고 되어있던데...강두식역이구요. 83년 7판이네요

로쟈 2010-08-29 11:23   좋아요 0 | URL
한길사판이 1977년, 대일서관과 주우판, 학원사판이 1982년에 나온 것 같습니다. 1년만에 7판을 찍었다면 놀라운데요...

드팀전 2010-08-29 13:31   좋아요 0 | URL
책에는 7판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요즘 표기로 하면 7쇄 아닐까 싶네요. 많이 안찍었나보죠.그래도 적지 않은 양인 것 같습니다.

로쟈 2010-08-29 18:49   좋아요 0 | URL
네, 7쇄 정도면 꽤 주목받았던 걸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