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온라인에서의 블로거 활동에 관해 한 주간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요즘 '1인 3역'을 계속해나가는 게 불가능하지 않나란 자기반성도 하던 차였는데(이러다간 조만간 침몰하지 않을까 싶다), 내친 김에 '로쟈'가 언론에 처음 노출된 게 언제였던가 찾아봤다. 온라인에서의 활동은 1999년부터였지만, 언론에 처음 이름이 오른 건 2003년 가을 지젝의 방한을 다룬 오마이뉴스 기사를 통해서였다('지젝'도 2001년 6월 한국경제의 한 칼럼에서 처음 이름이 비친다. 네이버 검색으로는 그렇다). 마침 지젝의 번역서 몇 권에 대한 서평을 올려놓던 시절이다. 그렇게 처음 기사화된 이름을 보고 좀 재미있으면서도 낯설게 느꼈던 듯싶다. 하지만 일회적이었고, 2007년 1월초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인터넷 서평꾼'을 다룬 한겨레 기사에서 언급된 이후에야 비로소 '로쟈'란 이름은 주목을 받는다. 한겨레21에 '로쟈의 인문학 서재' 칼럼을 연재하는 건 그해 8월부터다. '로쟈'란 이름을 언제까지 끌고 나갈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우려되기도 한다. 오래전 오마이뉴스 기사를 '아카이브' 자료로 챙겨놓는다.  

 

오마이뉴스(03. 10. 09) 어려운 지젝, 사람들 왜 모이나

지젝이 왔다. 그런데 과연 온 것인가. 자연적 실체로서 그는 비행기를 타고 입국하여 몇몇 강연을 진행 중에 있다. 오긴 온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아니 오래 전에 도착하였으나 그 학문적 실체가 제대로 구성되거나 조명되지 않았다. 상상적 실재로 우리 주변에 머물러 있을 뿐, 지젝은 늘 오고 있는 중이다.

몇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사상계의 거목에 대한 탐사가 손쉬운 접근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가 단순히 '철학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최신의 서구 철학계(이 용어에 대하여 지젝은 거부하겠지만)가 모든 종류의 정보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어마어마한 질량을 압착한 한 권의 사유물을 토해내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지적 바탕이 없고서는 그의 저작, 심지어는 목차조차 도대체 어떤 사유의 그물로 짠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플라톤에서 코소보 사태까지, 구조주의에서 공포소설까지, 그저 두루두루 아울러서 지식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거의 한 문장 속에 동시에 출현시켜 그 자체로 세계의 복합성을 문자로 드러내버리는 지젝의 사유는 전공자는 물론이거니와 '국영수 중심'으로 성장해온 우리의 인문 환경에서는 도무지 해독 불가능한 암호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지젝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적도 있는 박학다식한 동구권 학자'에 머무르고있다.

방한한 지젝, 하지만 그의 학문은 여전히 오고 있는 중
두번째 이유로는 성실하지만 부주의한 번역물과 불성실하고 빈약한 오역물이 지젝에 대한 관심을 차단시킨다. 문학과 영화에 대한 약간의 관심만으로도 충분히 그 착오를 가려낼 수 있을 <환상의 돌림병>(인간사랑)이나 <향락의 전이>(인간사랑)의 오역은, 저작권법에 따라 다른 이가 좀더 섬세하게 번역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했다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지젝의 저작에 대한 리뷰를 쓴 '로쟈'씨가 작년 12월 말에 쓴 내용에 따르면 <향락의 전이>(인간사랑)의 경우 "일반 독자가 이 교양서를 읽어낼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한다. 또한 "지젝의 작업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이 역서는 짜증만을 불러일으키며, 처음으로 그에게 다가가는 독자들에겐 고역만을 선사한다"고 쓰고 있다.

이 책은 원래 초역판이 2001년 7월에 출간되었다가 번역 과정의 미비점을 보완하여 2002년 9월에 '개역판'으로 내면서 책값을 무려 9000원이나 인상하여 하드커버로 출간하였는데, 의미있는 교정과 보완은 전무하다는 것이 로쟈씨의 의견이다.

세번째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복합적인 이 세계의 불가해한 속성 때문이다. 그의 저작이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 것은 지적 유희가 아니라 전체를 조망하기 위한 다양한 접근의 실례이다. 현대사회의 본질은 (그것이 미국이든, 이라크든, 슬로베니아든, 한국이든) 기본적으로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적인 억압적 융합과 긴장과 대립에 따라 매우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현상 속에 감춰져 있으므로 그 실체에 대한 접근은 어쩔 수 없이 다양한 이론적 바탕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의 말대로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의 억압은 사라지거나 축소되지 않고 일상 속에 깊이 스며든다. 그리고 '귀환'한다. 다양한 시선이 필요한 이유가 된다. 



지젝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세 권의 책
지젝과 더불어 사색하는 것은 흥미롭지만 괴롭다. 누구보다 소통을 열망하는 학자지만 우리의 허약한 지적 기반은 의미있는 최소한의 소통, 곧 '독서'조차 불편하게 만든다. 지젝은 말한다. 현대는 '카페인 없는 커피, 알코올 없는 맥주, 아편을 대신한 마리화나, 사이버 섹스 등 실체가 없는 가상현실에 대해 열망'한다고.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현대는 혁명, 테러리즘, 파시즘, 스탈린주의 등 '실재에 대한 강렬한 열망에 따른 근본주의적 충동'에 사로잡힌다고 지젝은 말한다. 따라서 그 사이 제3의 길, 곧 자유·다양성·인권·관용 등의 민주적 가치를 모색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언만 따로 추스르고, 그 정치적 발언록의 즙만 짜낼수록 지젝은 우리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므로 세 권만 따로 추려 읽도록 하자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 김소연 옮김). 홀로코스트, 후천성 면역결핍증, 체르노빌,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를 성찰하는 지젝의 진지하면서도 날렵한 시선이 충만한 저작이다. 라깡식 판독법으로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을 경쾌하게 드러내준다.

<항상 라깡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김소연 옮김). 지젝이 영화학자들과 더불어 라깡의 정신분석학 방법론으로 히치콕의 영화를 분석한 책이다. 리얼리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 골고루 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히치콕 영화의 분석을 통해 현대 사회의 주체 형성을 다루고 있다.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한나래. 주은우 역). 할리우드로 집약되는 현대 대중문화의 풍부한 사례를 통해 라깡을 재구성한다. 라깡을 사이에 두고 푸코, 하버마스, 롤스 등이 얽힌다.(정윤수/박형숙 기자) 

10. 04. 15. 

P.S. 본기사에 딸린 박스기사에는 이런 지적도 들어 있다. "한편 지젝 학문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 라깡 등에 대한 출판 인프라가 빈약한 우리네 인문학 풍토에서, 그들을 '뛰어넘는' 지젝에 대한 과도한 열광은 또 다른 '지적 패션'이라는 지적도 들린다." 그간에 '빈약한 출판 인프라'가 괄목할 만큼 좋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지젝의 책은 이후에도 매년 3-4권씩 출간됐고, 올해도 예외는 아닐 듯하다. 지젝의 이미지를 아바타로 내걸고 '로쟈'는 그 '지적 패션'을 '지적 일상'으로 바꾸려고 나름 애써왔지만(1만명의 독자층을 만드는 것이 잠정적인 목표치가 될 수 있다), 낙관적으로 말해서 전망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10년, 혹은 20년이 걸리면 가능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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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04-16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를 첫머리에 쓰면 안보이나요? <하우 투 리드 라캉>을 엊그제 배달받고 들여다봤는데 제게는 읽는 것이 괴롭지만 흥미롭습니다. 라캉의 다음을 읽는데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10-04-16 01:11   좋아요 0 | URL
어느 책인지는 모르겠지만(네 < >로 묶으면 안보이게 되더군요) 흥미로움이 괴로움보다 점점 커지기를 바라겠습니다.^^

푸른바다 2010-04-16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3년 서울대에서 지젝이 강연할 때 가보셨는지요?^^

로쟈 2010-04-16 22:22   좋아요 0 | URL
물론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