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에서 이번주 서평위원 칼럼(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으로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몇 곳에 올해의 책을 추천하면서 빼놓은 한윤형의 <뉴라이트 사용후기>에 대한 '후기'로 적은 글이다. 개인적으론 몇 달 전에 읽은 책인데, 담고 있는 콘텐츠를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재배치했더라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란 아쉬움을 갖게 했다. 하지만 유익했던 책이고 CBS의 시사자키 '로쟈의 서재' 코너에서 소개도 한 바 있다.  

교수신문(09. 12. 07) 어떤 ‘역사전쟁 관전기’  

12월에 접어들면 여러 언론과 출판계에서 벌이는 연례행사 중 하나는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일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선정 작업에 손을 보태면서 한해를 돌아보게 됐다. 한 개인이 읽을 수 있는 역량을 훌쩍 넘어서는 다종·다량의 책이 해마다 출간되고 있기에 ‘올해의 책’에 대한 선정은 제한된 독서 범위 내에서 어느 정도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조건하에서 몇 권의 책을 골라보다가 다시 손에 들고 만지작거린 책은 한윤형의 『뉴라이트 사용후기』(개마고원)이다.

책은 젊은 인터넷 논객이자 자칭 ‘키보드워리어’인 저자가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이 촉발한 ‘역사전쟁’을 정리하고 평가한 ‘상식인을 위한 역사전쟁 관전기’이다. 그가 염두에 둔 ‘상식인’은 일차적으론 같은 세대의 젊은이들이지 싶다. 아니 그런 느낌은 소위 ‘88만원 세대’가 이 책을 가장 깊이 공감하면서 열독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나의 생각이 빚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로선 저자의 주장에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도 그의 논지전개방식은 다소 낯설었다. 하지만, 그런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 가지 사실을 새롭게 알았고, 또 몇몇 쟁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더불어 한국 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새로 부추긴 공로도 있기에 이 책은 내게 ‘올해의 책’에 버금할 만하다.   

그렇다면, 한윤형은 어떤 주장을 펼치고 있는가. 한국사에 대해 ‘상식인’ 수준의 이해를 갖고 있는 내가 더 따져 보고픈 쟁점 몇 가지를 나열해본다. 먼저, 뉴라이트와 민족주의자들을 모두 비판하는 저자의 ‘스탠스’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은 한국 민족주의의 기원을 어떻게 볼 것인가란 문제다. 그는 민족과 민족주의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뉴라이트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근대 민족주의란 기본적으로 신분제의 철폐를 전제로 하는데, 노비의 비중이 30%를 웃돌았던 18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현재와 ‘민족’ 개념이 형성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로만 치부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3·1운동 이후에 한국 민족주의는 전면화됐고 ‘역사적 실체’가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분단국가를 수립한 김일성과 이승만은 사천 년 단일민족을 두 동강냈기 때문에 나쁜 것이 아니라 3·1운동 때 이룬 합의를 위반했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주장한다.

둘째는 백범 김구에 대한 평가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김구는 테러리스트였다는 주장은 새롭지 않지만, 해방 이후 정국에서 상당 기간 이승만과 김구의 입장이 동일시됐다는 지적은 눈길을 끈다. 김구의 격렬한 반탁 입장이 예기치 않게도 모든 반대 세력에게 민족주의라는 포장을 씌워주게 되고 결과적으론 친일파와 이승만에게 힘을 실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뉴라이트가 이승만을 구하기 위해 김구 노선을 비판하고, 민족주의자들이 영문도 모르면서 이승만을 비판하고 김구를 옹호하는 것은 모두 자가당착적이다.   

셋째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다. 흔히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은 남한은 자본주의 덕분에 경제가 성장했고, 북한은 공산주의여서 망했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미국통이었던 이승만은 1950년대 말부터 미국식 경제시스템을 흉내 내어 시장개방, 금융자유화 등을 실시하고 은행도 민영화했지만, 박정희는 그것을 다시 국유화하는 한편 1972년에는 사채를 동결시키는 조치까지 단행했다. 이러한 박정희식 모델은 자유시장경제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원조인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가까웠다. 즉, 완전한 자본주의도 완전한 사회주의도 아닌 혼합형 체제였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근대의 쌍생아라면, 사회주의 또한 한국 근대의 필수적인 구성소였다고 보는 것이 상식에 맞는 것 아닐까.

그리고 넷째는 대한민국사의 주류세력이 누구였나라는 문제. 저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대한민국사는 친일파든 독립운동가든 상관없이 적극적으로 기회주의를 펼친 이들의 역사였다”라고 주장한다. 어떤 일관된 기득권 세력이 있었다고 보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박정희 역시 기득권 세력을 경멸했기에 이승만을 거세게 비판했다는 점도 근거의 한 가지다.

이 책에서 내가 얻은 소득은 이러한 쟁점들에 대해 더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을 다지게 된 것이다. 벌써부터 내년에 읽어야 할 책들의 목록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09. 12. 08. 

 

P.S. 최근의 관심사 중 하나는 레닌과 박정희를 겹쳐서 읽는 것이다. 구체적으론 레닌의 <국가와 혁명>과 박정희의 <국가와 혁명과 나>를 겹쳐 읽기 위해서 몇 권의 책을 구입하고 또 대출했다. 준비가 되는 대로 뭔가 써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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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2-09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극적 기회주의'가 '박정희'와 '레닌'의 만남을 주선했군요. 뭔가 기대됩니다.

로쟈 2009-12-09 18:15   좋아요 0 | URL
네, 생각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자료들을 좀 보려고 합니다...

들국화 2009-12-09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라이트 역사논쟁뿐만 아니라 진보와 보수의 정치투쟁을 보는 새로운 (균형잡힌)시각을 제공해 개인적으로 아주 유익하게 읽었습니다. 저는 이 책이 제시하는 게 상당히 신선하고 생산적이라고 생각해서 좀더 큰 반향을 불러오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는데...그렇지는 않더군요. 저는 한윤형보다 앞 세대인데, 친구들에게 적극 권하고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읽힐 책이라고 생각해요.

로쟈 2009-12-09 20:46   좋아요 0 | URL
저도 아쉽게 생각하는데, 편집이나 구성을 달리했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09-12-10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올해의 책 리스트에 넣고 싶었던 책이었네요..뭔가 '논쟁'이 불길 바랬는데,,아쉽습니다. '한윤형'이라는 이름 자체의 주목과 소비라고 할까까요...뭔가 '기특하다'는 시선으로만 보려는 분위기가...한편으론 한윤형이 쓴 '글'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으로 나아가진 못한 건 아닌지..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로쟈 2009-12-10 19:50   좋아요 0 | URL
삼세번이라고 했으니까 세 번째 책이 나오면 분위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죠. '기특하다' 이전에 20대 독자들이 너무 안 읽는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