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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비출판사의 블로그에서 리클린의 <해체와 파괴>(그린비, 2009) 역자 인터뷰를 옮겨놓는다(http://greenbee.co.kr/blog/739). 책을 읽는 데 참고가 될 듯싶다. 더불어 블로그의 '인문학 해외통신' 코너에는 역자의 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와 사회적 죄의식의 기원'이 연재되고 있는데, 러시아 지성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흥미롭게 읽어봄 직하다.  

 

『해체와 파괴』역자 인터뷰 ― 러시아의 지적 전통과 현대 유럽 철학의 결합 

자기소개를 간략하게 해 달라. 지금까지 어떤 공부를 해왔는가?
원래 한국에서 전공한 것은 ‘러시아 문학비평사’, ‘러시아 근대 지성사’였다. 그런데 박사과정 중에 연구공간 수유+너머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다음에 방향이 조금 변하였다. 대학 안의 분과제도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 유학을 할 때는 문화연구로 방향을 틀었다.

미하일 리클린은 우리에게 낯선 인물이다. 어떤 인물인가?
이 책은 우연한 계기로 접하게 되었다. 운이 좋았는지 모스크바에 있을 때, 리클린을 두 차례 만나서 인터뷰까지 했었다. 그는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유럽에서 자신의 책을 내고 있고, 조금씩 자신의 이름을 알려나가고 있다. 처음에는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등, 인류학적인 연구를 했었다. 하지만 박사학위는 ‘구조주의 연구’ 였다. 1980년대 중 후반, 당시로서는 운이 좋게도 베를린, 파리에서 현대철학의 흐름을 접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데리다와 세미나를 오래했다. 이 세미나를 통해 ‘해체주의’라고 하는 자신의 공부에 밑천이 될 수 있는 중요한 흐름을 만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소비에트의 몰락, 새로운 러시아가 시작하는 시점에서) 유럽의 현대철학을 주도하던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야 그 내용을 잡지에 올리고, 책으로도 묶어낼 수 있었다.

『해체와 파괴』는 제목부터 뭔가 강력한 인상을 준다. 어떤 의미의 제목인가?
해체와 파괴는 데리다와 하이데거에서 논점을 끌어다 쓰는 대구적인 표현이다. '해체'는 당연히 데리다와 해체주의에서 온 것이다. 파괴라는 말은 하이데거가 근대 형이상학의 종점을 보면서 이야기 한 말인데, 이걸 끌어다 쓴 것이다. 물론 니체에게도 쓴다. 전통적인 사유의 '틀'을 조각내버리는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말로) 포스트 모던한 사유이다. 리클린 본인의 이야기로는 들뢰즈의 사유를 '파괴'라는 말로 설명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한국과는 들뢰즈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 보니, 나도 리클린을 만났을 때, 꼭 그 단어 밖에 없는가 물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받아들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들뢰즈 사유에서 이야기 하는 '탈주선'의 사유를 리클린 자신은 파괴적인 선들로 이해한다고 이야기 했다. 국민으로서, 한민족으로서,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와 같은 '~로서'의 규정들을 비켜나가는 힘들, 이것들이 기존에 규정된 것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선들을 만들 때 그 선은 분명 파괴의 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해체'가 기존 전통철학의 고정된 틀을 깨는 동력이 된다면, '파괴'는 그런 규정들을 넘어서는 힘으로 볼 수 있겠다.

『해체와 파괴』에 대담자로 등장하는 철학자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별된 것인가?
리클린이 90년대를 전후해서 유럽에 체류할 때, 본인이 생각하기에 유럽의 현대 지성,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가장 현대적인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뽑은 것이다. 다만, 지금과는 (시간적인) 격차를 가지고 있어서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시의성이 있는가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조금 다른 문제가 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말의 유럽 사유를 정리하는 의미에서라면 이들이 갖는 대표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리라 본다.

향후 개인적인 작업 계획이 있다면?
내가 러시아 전공자이기 때문에 러시아의 뭘 끌어와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서 지적 담론이 구성되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천되는 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러시아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한다. 그것은 지금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 경제적 상황이 어떻다는 것과는 무관할 것 같다. 러시아가 거지나라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지적 자원은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이고, 러시아 정치제도가 후진적이라고 해도 역시 그로부터 반발적으로라도 우리의 지적자원으로 유용하게 쓰일 것들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앞으로 러시아 사유의 면면한 흐름들을 한국에 소개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서구와도 비슷하면서도, 서구와는 다른 것들, 현재 러시아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들을 조감해 보는 것은 러시아의 과거를 보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09.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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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3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3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3 0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3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09-09-13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통철학에 대한 현대적 사유의 관계 규정', '지적자원으로 유용', '사유의 도정' 이라는 말에 대해서 음미해봅니다. '도정'과 '보리개떡'에 대해서도.

로쟈 2009-09-13 19:37   좋아요 0 | URL
마지막은 유머신 거지요?^^

펠릭스 2009-09-14 08:39   좋아요 0 | URL
산행중 선배에게 '왜,,산을 다니십니까?' 물었더니,
"생각을 깨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도정'은 곡립의 등겨층을 벗기는 조작입니다.
저는 '사유의 도정'과 '생각을 깬다"는 말을 같은 의미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모친께서 만들어 주신 "보리개떡"을 추억했습니다.
호밀가루 대신 사용한 '맥강'은 보리를 보리쌀로 몇 번
도정하면 나오는 보리가루입니다.
모친는 물먹인 '맥강'을 부풀리기 위해 '소다'를 넣고, 단맛을 내기
위해 '사카린'를 넣었습니다.
가마솥에 물을 붓고,시누대를 건 다음 모시천을 깔고, 그 천위에 어른 손바닥만한 맥강빵(보리개떡)을 찌셨지요.
저에겐 최초의 빵이었습니다. '사유의 도정'은 제 유년의
추억속에 남아 있는 '보리개떡'처럼 반가운 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