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비록 올해의 인문사회출판 지형도에 관한 기사와 함께 꽤 긴 출간예정 도서 리스트를 올려놓았지만 그 리스트조차도 사실 전체로 보자면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예기치 않은 책들이 얼마든지 더 출간될 것이며 그런 게 이 클렙토크라시('강도정치'란 뜻이라고 한다. http://h21.hani.co.kr/arti/COLUMN/15/24163.html 참조) 시대를 살아가는, 버티게 해주는 몇 안되는 낙이 될 것이다.   

러시아 철학자 미하일 리클린의 <해체와 파괴>(2002)도 그런 예기치 않은 책의 하나다(이 철학자들과의 대담집은 독어로도 번역돼 있다). 짐작엔 이번 봄에 출간될 듯싶은데, 개인적으로도 인연이 없지 않은 책이다. 이 책의 번역 출간을 처음 제의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떠맡은 일들이 많은 탓에 애초에 맡은 공역에서도 발을 빼고 후배에게 모두 일임해버리긴 했지만, 후배가 보내온 최종 원고를 보고 있자니 그래도 내가 빠진 덕분에 빨리 나오는구나 싶기도 하다.   

우리에겐 생소한 저자 리클린에 대해 소개하는 기사를 역자가 써놓은 게 있어서 미리 '예고편'으로 옮겨놓는다. 저자와 직접 교분도 쌓으면서 번역작업을 진행했기에 좋은 결과물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해체와 파괴>(그린비, 2009)로 출간됐다). 그리고 내친 김에 바라건대, 러시아 철학과 비평의 현재를 보여줄 수 있는 성과들이 앞으로 더 많이 소개되면 좋겠다.        

중대 대학원신문(08. 12. 10)  미하일 리클린,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 해체하기

미하일 리클린(1948~ )은 포스트/소비에트 시대의 러시아 사상을 이끌어가는 철학자 중 하나이다. 1977년 구조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공식’ 소비에트 철학의 지침들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며 꾸준히 서구 현대철학과 접속함으로써 소연방 몰락 이후 러시아 철학이 서구의 사유와 교통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해왔다.  

Михаил Рыклин Деконструкция и деструкция. Беседы с философами   

리클린의 <해체와 파괴>

80년대 말 유럽에서 거주할 때 자크 데리다를 비롯해 명망 있는 철학자들과 교우했던 경험도 리클린의 지적 이력을 형성하는 중요한 축이다. <모스크바의 데리다>(1993), <해체와 파괴>(2002)는 그 결산격이다. 자기 사유의 스승으로 메라브 콘스탄티노비치 마마르다슈빌리(1930~1990)와 데리다 두 사람을 꼽는데, 전자가 소비에트 철학의 집대성으로서 ‘사유의 종합’에 역점을 둔다면, 후자는 예의 해체론으로서 리클린의 사유에 가장 큰 이론적 바탕을 이룬다

하지만 단순히 해체론의 연장선에서 리클린의 사유를 비정(比定)하는 것은 오산이다. 우선 리클린은 해체의 이론적 탐구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해체의 큰 틀, 총론은 데리다 자신이 이미 짜놓았으며, 이제 필요한 것은 오히려 각론, 곧 해체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각론을 통해 총론은 꾸준히 재구성되며, 복수적 변환의 과정을 통과한다(그러므로 데리다의 작업도 하나의 ‘각론’일 뿐, 총론 따위는 기획된 적이 없다).  

‘해체의 실천’ 혹은 ‘실천적 해체론’이라 명명할 만한 리클린의 과제는 포스트/소비에트 시대의 문화적 지형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데 있다. 질문은 이렇다. “전체주의 사회의 욕망구조는 어떤 것인가?” “그 구조는 어떤 방식으로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는가?” 그것은 스탈린 시대에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사회적 심성구조에 대한 물음이자 사회 일반의 동력학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리클린에 따르면 러시아 사회는 단절/연속의 동시성으로서 여전히 포스트/소비에트적 구조 위에 놓여 있으며, 해체의 실천은 당연히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된다. 시평집 <환희의 공간: 전체주의와 차이>(2002), <진단의 시대>(2003) 등이 이런 사유의 결과물이다. 

Женщина и визуальные знаки  

안나 알추크 등이 쓴 <여성과 시각 기호>

해체론의 적용은 리클린의 삶을 극적인 ‘실천’의 무대로 이끌어갔다. 2003년 전위예술가이자 비평가인 아내 안나 알추크가 기획한 전시회 <종교 조심!>이 성물모독을 이유로 기소되어 오랜 법정 투쟁을 벌여야 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근 5년간 이어진 지리한 재판은 무혐의로 종결되었으나 리클린은 이론의 바깥, 해체적 실천의 장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 온몸으로 절감해야 했으며, 올봄에는 안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함으로써 극적인 파국을 맞게 되었다. 어느 대담에서 밝혔듯이 이 과정은 그로 하여금 한 사회의 의식 기저에 완고하게 자리잡은 무의식과의 투쟁이었으며, 해체의 실천은 다양한 전략을 통해 구체적으로 파고들 일이지 결코 일거에 전복적으로 성취될 수 없음을 확인케 해준 ‘수업’에 다름 아니었다.(최진석/ 러시아 국립인문대 문화연구 박사과정) 

09. 01. 16.  

Михаил Рыклин Свобода и запрет. Культура в эпоху террора

P.S. 검색해보니 리클린의 최신간은 작년에 나온 <자유와 금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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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러시아의 지적 전통과 현대 유럽철학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9-12 23:15 
    그린비출판사의 블로그에서 리클린의 <해체와 파괴>(그린비, 2009) 역자 인터뷰를 옮겨놓는다(http://greenbee.co.kr/blog/739). 책을 읽는 데 참고가 될 듯싶다. 더불어 블로그의 '인문학 해외통신' 코너에는 역자의 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와 사회적 죄의식의 기원'이 연재되고 있는데, 러시아 지성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흥미롭게 읽어봄 직하다.     『해체
 
 
드팀전 2009-01-16 17:20   좋아요 0 | URL
로쟈님 혹시 오늘 성대에 가지 않으셨나요?

로쟈 2009-01-16 17:30   좋아요 0 | URL
천리안이신가요?!..

드팀전 2009-01-16 17:41   좋아요 0 | URL
저랑 로쟈님이랑 눈을 마주쳤어요.찰나의 시선교차.
전 로쟈님의 얼굴을 아니까요...스쳐가면서 "아...저 로쟈님 아닌가?" 했지요.
어쨋거나 아주 우연히 만났군요.찰나의 마주침이었지요.

로쟈 2009-01-16 22:17   좋아요 0 | URL
그랬었나요?! 담엔 꼭 아는 체를 해주시길.^^

드팀전 2009-01-16 23:36   좋아요 0 | URL
^^ 광장 뒤에 있는 강의동 앞을 지나가셨어요. 양손에 무언가 복사물을 서너부 들고..거기서 강의하시는 듯. 서로 30센티옆으로 스쳐지나갔습니다.제가 처다봐서 그랫는지 저를 한 번 보시데요...그때는 저도 로쟈님인가 아닌가 확신이 없었거든요.
우연이란게...그냥 마구 벌어지는 일은 아닌가 봅니다. 그렇게 거기서 뵐 줄이야..ㅋㅋㅋ

로쟈 2009-01-16 23:45   좋아요 0 | URL
강의는 아니고요 도서관에서 자료 복사해서 들고 가던 때인가 봅니다. 제가 딴 생각이 많았던지 기억엔 없는데, 근방에 계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