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열한 법치주의와 사법 불의

이번주에 눈에 띄는 신간은 저널리스트들이 쓴 역사서이다. '알 카에다에서 9·11까지'를 다룬 로렌스 라이트의 <문명전쟁>(다른, 2009)과 '세계를 뒤흔든 20세기 미국의 마녀재판'이란 부제를 단 브루스 왓슨의 <사코와 반제티>(삼천리, 2009). 미국사/문명사의 한 단면을 자세하게 파헤치고 있는 책들인데, 개인적으론 내용보다도 이런 책들을 쓸 수 있는 필자와 시장 조건이 좀 부럽다. 이번주 한겨레21의 커버스토리가 '소설 쓰는 시대'이기도 했지만(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5722.html), 내가 좀더 부럽다고 생각하는 쪽은 '넌픽션 쓰는 사회'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드라마 보는 사회'도 나름대로의 '문화'일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넌픽션 쓰는 사회'가 좀더 전망이 있다고 본다.  

 

<문명전쟁>과 <사코와 반제티>는 언론리뷰에서 크게 다루어졌기에 군말을 보탤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사코와 반제티>의 경우 한국사회의 현실도 떠올리게 해준다는 점에서, 또 그런 점에 주목한 기사도 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9. 09. 12) 왜 미국은 이들을 '전기의자'에 앉혔나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찾아온 미국 땅에서 두 남자는 강도살인죄를 뒤집어쓰고 전기의자에 앉아 사형을 당한다. 세계는 이를 '마녀사냥'이라고 비난했고 미국은 훗날 두 사람의 명예회복을 통해 잘못을 인정했다. 두 희생자 니콜라 사코, 바르톨로메오 반제티는 신대륙 미국을 찾아 온 이탈리아 이민자였다. 각각 제화공, 생선장수로 일했던 둘을 사람들은 온화하고 따뜻한 인물로 기억한다. 사코는 가족을 성실하고 소중하게 대했으며 반제티는 문학과 친구를 좋아했다. 그들에게는 무정부주의자라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무정부주의에 공감했고 무정부주의 조직에서 활동했다. 

사코와 반제티가 미국에 온 지 12년이 지난 1920년 4월 15일 사건이 발생했다. 매사추세츠주의 소도시 브레인트리에서 현금가방 강탈 사건이 일어나 경리 등 직원 2명이 살해됐다. 경찰은 총과 총탄을 갖고 있던 사코와 반제티를 용의자로 체포했다. 두 사람은 줄곧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신념을 보여주었다. 반제티는 감옥에서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지금 관용을 위해, 정의를 위해,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날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사코는 아들에게 "행복한 유희 속에서 젊음을 보내기보다 박해당하고 희생하는 이들을 도와라"고 쓴 편지를 보냈다.

뚜렷한 물증이 없었지만 사형이 언도된 것은 두 사람이 무정부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공산주의 물결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이미 18세기말부터 인권, 노동운동이 고양됐고 진보주의 진영의 사회개혁 요구가 거셌다. 무정부주의자 역시 사회개혁 요구 운동에 적극 가세했고 사코와 반제티도 그 대열에 동참했다. 하지만 진보진영의 요구가 거셀수록 반대편의 대응 또한 거칠었다. 1차 세계대전 참전 이후 미국에서는 애국주의가 확산됐고 대대적인 좌익 검거 선풍이 불었다. 두 세력은 어떤 식으로든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보수세력은 사코와 반제티를 용서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두 사람이 무정부주의자이고 1차 세계대전 참전을 기피했다는 것만으로도 유죄를 확신하고 있었다. 재판장은 "무정부주의자 놈들"이라고 내뱉고 "미국인이라는 애국심을 갖고 나라의 부름에 응한 진정한 군인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공공연히 강조했다. 심리는 증인들의 모호한 진술과 피고에 대한 유도 심문으로 일관됐으며 반대로 무죄 입증 증거와 알리바이는 채택되지 않았다.

유죄가 확정되고 처형이 임박해지자 미국은 물론 전세계 노동자와 지식인들이 사형 반대 운동에 나섰다. 런던, 시드니, 베를린, 로마, 도쿄, 부에노스아이레스 등에서 시위가 있었고 동맹파업이 일어났다. 버트런드 러셀, 마리 퀴리, 앨버트 아인슈타인, 업턴 싱클레어, 버나드 쇼, 로맹 롤랑, 이사도라 던컨 등 명망가들이 두 사람의 구명에 나섰지만 허사였다. 1927년 사형이 집행될 당시 사코는 서른다섯, 반제티는 서른아홉 살이었다.

이들이 실제 범인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일부에서는 여전히 유죄를 의심한다. 하지만 객관적 증거 없이 사상과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뤄진 처형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미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다. 한 이름처럼 늘 같이 붙어 다니는 사코와 반제티는 그 뒤 그림, 소설, 시, 노래, 드라마, 연극, 오페라, 영화, 다큐멘터리 등으로 되살아났다. 그리고 사형이 집행되고 50년이 지난 1977년, 마이클 듀카키스 미국 매사추세츠주 지사는 공식적으로 두 사람의 명예회복을 선언했다.

듀카키스는 사코와 반제티 사형 기념식에 참석해 "지금 이 사람들이 유죄냐, 무죄냐를 판결하려는 것이 아니다"라며 사면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매사추세츠 주민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높은 수준의 정의가 사코과 반제티에게는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책은 그로부터 30년 후인 2007년 미국에서 출판됐다.(박광희기자)   

한국일보(09. 09. 12) '사코와 반제티'사건에 투영된 한국사회

미국이 어려움 없이 세계 최강국이 된 것은 아니다. 미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나라 역시 여느 나라 못지않게 심각한 대립과 고통을 겪으며 오늘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 등을 읽으면 유럽의 백인이 원주민을 밀치고 들어온 그 순간부터 이 나라는 갈등과 혼돈에 휘말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초에는 노동운동의 기운이 일기 시작한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했고 사용자와 정부는 강경 대응으로 맞섰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립은 거세져 파업과 폭동이 잇따랐고 경찰 진압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가 유입된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 영향을 받은 작가 잭 런던은 <강철군화>에서 사회주의자의 형제애를 그렸고 업턴 싱클레어는 <정글>에 사회주의를 꿈꾸는 주인공을 등장시켰다.

소비에트 혁명이 일어나자 미국 보수층의 좌익 알레르기 반응은 극에 달했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겹치면서 애국주의 바람이 거세게 일었고 무정부주의자 등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이 전개됐다. 이탈리아 이민자 사코와 반제티가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갖는다. 사코와 반제티가 사형에 이른 과정에서 알 수 있듯 그때 미국의 사법부는 법과 정의와 양심을 따르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사코와 반제티 사건을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 역시 한때 일방적인 이념의 광풍에 휩싸여 살았다. 그 시기에는 정부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사상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감옥으로 끌려가고 목숨을 잃었다. 그때 우리의 사법부도, 사코와 반제티 사건을 다룬 1920년대 미국 사법부처럼, 인권보다는 체제를 지키려고 했다.

사코와 반제티 사건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수십만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은 한국 노동자보다 훨씬 나쁜 조건에서 일하고 생활하며 인권을 온전히 보장받지도 못하고 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사코와 반제티 역시 이탈리아계라는 이유로 미국에서 무시를 받았다. 혹시 우리가 이 땅이 좋아 찾아온 이주 노동자를 무시하고 비하하는 의식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돌아보아야겠다.(박광희기자) 

09. 09. 12. 

P.S. <사코와 반제티>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상기하게 된 건 엊저녁 버스에서 들은 라디오뉴스이다. 박정희 군사정부하에서 '사법살인'을 당한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의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는 보도였다. 관련기사를 찾아 옮겨놓는다. 찾아보니 경향신문의 원희복 차장이 쓴 <조용수 평전>(1994)와 <조용수와 민족일보>(2004)가 출간된 바 있다(관련기사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22956). 나름대로 풍부한 내용을 담은, 한국판 '인저스티스'의 사례를 다룬 책들이 더 많이 나오고 더 많이 읽힐 때 '사법개혁'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다...  

세계일보(09. 09. 12)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유족 등 10명에 국가는 99억원 배상하라”

1960년대 초 북한에 동조한 혐의로 사형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사진) 유족 등에게 국가가 99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20부(장재윤 부장판사)는 11일 ‘민족일보 사건’으로 체포돼 사형된 조 사장의 유족과 생존 피해자인 양실근씨 등 10명이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를 배상하라”며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조 사장의 유족 8명에게 총 23억원, 양씨 등 2명에게 6억원과 이자를 각각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조 사장의 유족과 양씨 등에 대한 위자료는 총 29억원이지만 사건 발생 이후 40여년 동안의 이자까지 감안하면 정부가 지급해야 할 실제 배상액은 99억여원에 달한다. 재판부는 “반국가단체인 북한 또는 그 구성원을 찬양·고무·동조한 자의 가족이라는 멍에를 쓰고 평생을 사회적 냉대 속에 각종 불이익을 당하였음이 인정되므로 정부는 원고들이 입은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민족일보 사건은 1961년 군부세력이 혁신계 진보성향의 신문인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장을 ‘간첩혐의자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민족일보를 창간하고 북한의 활동을 고무 동조했다’는 혐의로 체포한 뒤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소급 적용해 처형하고 민족일보를 폐간조치했다(*폐간조치한 사건이다).

조 사장은 5·16 쿠데타가 발생한 지 이틀 만인 1961년 5월18일 체포돼 같은 해 6월22일 제정된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6조의 소급 적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그해 12월21일 사형이 집행됐다. 양씨는 같은 혐의로 기소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2년6개월간 복역한 뒤 풀려났으나 1993년까지 정보기관의 감시 하에서 생활했다. 조 사장의 유족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사건 발생 47년 만인 2008년 1월 무죄선고를 받아냈다.(김정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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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2 15: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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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2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09-09-12 17:50   좋아요 0 | URL
자유당정권(말기)'진보당 사건'에 연루로 '조봉암'선생을, 5.16이후 박정권이 '북한찬양고무죄'로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을 사형시켰군요. 조용수 사장은 조봉암 선생 구명운동까지 했는데, 특히 조용수 사장의 제2심판때 이회창 님이 민관인 심판관이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현재 백낙천 교수는 '포용정책2.0'를, 박세일 교수는 '선진화 포용통일론'(흡수통일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조용수 사장은 어떤 민족통일론을 주장했을까 궁금합니다.

결국 소비에트혁명이후 미국의 보수층도 무정주의자에 대한 잘못된 체감으로
'사코와 반제티', 우리 또한 북한과 관련하여 남한내 보수층이 자신들의 정권유지 차원에서 사상범으로 몰아 죽임을 감행했군요.

올해 서거하신 두 분 전직 대통령도 한 분은 사법적 자의에 의해, 또 한 분은 정보기관의 강제 납치 상황에서 구사일생으로 회생하였던 것을 보면 사람의 인간성에 대한 발전은 별로 없는것 같습니다.

기획된 사법살인과 일반 사형이 스페인독감(1918-20)으로 4,000만명이 죽었다는 사실보다 더 절실히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요?

로쟈 2009-09-13 19:40   좋아요 0 | URL
'백낙청' 교수입니다. 오타가 났네요. 사법살인은 인위적 과실에 의한 것이니 자연재해와는 아무래도 다른 것이죠. 요즘은 인재도 자연재화화되어 가고 있지만요. 지난주 임진강 사건처럼요...

2009-09-14 1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4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