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 강의 시간표에서 그나마 위안을 얻는 것은 월요일 강의가 없다는 것이다. 대개 일요일의 뒤끝이 좋지 않기 때문에 월요일 아침부터 바삐 출근해야 한다면 그야말로 최악이었을 것이다(그런 학기도 있었다).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할지는 모르겠지만(어제까지 마무리짓지 못한 일들 때문에 오늘은 시름이 한가득이다) 하루를 시작하는 오전과 일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에는 여유가 좀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그 월요일 오전시간에 바쁜 일을 제쳐놓고 한겨레21의 칼럼을 먼저 옮겨놓는다. 제목 그대로 '잃어버린 쾌활함'을 찾아보기 위해서인데, 애당초 내게 '쾌활함'이 있었는지도 의문이긴 하지만, 축 처진 기분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리기 위한 방책이다(나는 '명랑쾌활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내가 안 갖고 있는 그들의 '명쾌함'을 부러워하기 때문이다). 사실 진작에 스크랩해놓으려고 했던 것이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장의기간과 겹쳐서 '쾌활함'을 입에 올리기 어려웠다. 칼럼은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마음의 생태학>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을 거쳐 스피노자의 <윤리학>까지를 횡단하며 '쾌활함의 윤리'를 길어낸다. 근래에 읽은 가장 유익한 칼럼이다.  

 

한겨레21(09. 08. 14) 발리, 고원, 쾌활함 1 

마당에서 엄마가 아이를 부른다. 엄마는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다. 아이는 엄마 품에 달려와 안긴다. 아이는 엄마의 가슴을 만지면서 자신의 성기를 잡아당긴다. 그런데 아이가 작은 쾌감을 느끼면서 엄마의 목에 팔을 두르려고 할 때, 엄마는 받아주지 않고 다른 곳을 바라본다. 아이가 엄마의 다른 쪽 가슴을 마저 쥐려고 하면, 엄마는 아이의 뒷머리를 리드미컬하게 쓰다듬는다. 만족하지 못한 아이가 짜증을 내면 엄마는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본다. 만일 아이가 엄마를 때리면, 엄마는 화내는 모습 없이 공격을 가볍게 걷어낸다. 이런 상호 작용이 몇 번 반복되면, 아이는 마침내 다른 것에 관심을 보이면서 스스로 놀게 된다. 

절정의 추구를 회피하다  
이는 1940년경 인도네시아의 섬 발리에서 그레고리 베이트슨이라는 인류학자가 관찰한 것이다. 베이트슨은 발리에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발리의 생활양식이 서양 문명과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구성돼 있다는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성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음악에서도, 절정(climax)에 점층적으로 이르게 하는 것이 기본적인 문화 형태다. 반면 위의 예에서, 아이는 절정에 이르기를 원하지만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제지당한다. 그래도 아이는 마침내 다른 놀이에서 더 큰 즐거움을 찾게 된다. (그러므로 엄마의 행동이 ‘신중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 강조돼야 하겠다.) 베이트슨의 보고에 따르면, 발리에서는 이 일화처럼 생활 곳곳에서 절정의 추구를 회피하고 예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베이트슨은 이 대조를 꼭대기가 있는 산과 높고도 평평한 고원(高原)의 비유를 들어 분명히 했다. “아이가 발리의 삶에 보다 충만하게 적응함에 따라, 연속적인 강렬함의 고원이 꼭짓점(절정)을 대체한다.” 그러니까 발리의 문화양식은 마음과 신체가 고원 상태를 형성하도록 습관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즐거움이 짧게 왔다 허무하게 사라지는 ‘쾌감’이 아니라 길고 강렬하게 유지되는 ‘쾌활함’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은 외부의 쾌락적 자극을 장시간 유지시킨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습관을 통해 마음과 신체의 경향 자체를 변화시키고 그에 맞게 환경을 새롭게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신들의 주저 <천 개의 고원>의 제목을 여기에서 가져왔다. 이 저서는 뾰족한 절정에 집착하게 하는 것들, 어느 하나의 존재에 고착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고발한다. 국가권력, 종교, 화폐, 정신분석학의 기표, 자아의 내면으로 회귀하는 것까지도. 기쁨의 고원 상태는 ‘많은’ 변용과 정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사람들, 동물들, 사물들, 제도들과 맺는 ‘외적’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감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베이트슨은 자신의 책 제목을 <마음의 생태학을 향하여>라고 붙였다. 이 제목은 흥미롭다. 생태학은 원래 생물과 환경의 상호관계를 다루는 학문인데, 인간의 마음에 그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의 생태학’을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다. 경제적 생태학의 모토가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면, 마음의 생태학의 원리는 ‘지속 가능한 기쁨’이다. 

마음의 생태학의 원리 ‘지속 가능한 기쁨’
어떻게 높고 강렬한 고원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관해 일반적인 원리를 말할 수는 없다.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방법들을 통해 조금씩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막연하다고? 참고할 만한 텍스트는 많다. 우선 문학작품은 변용과 정서의 실험실이다. 문학은 새로운 삶의 요소들을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예술가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이면의 기록 또한 중요하다. 반 고흐의 편지,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 세잔의 대담은 구체적인 실험을 담고 있다. 더 나아가 오늘날 블로그는 동시대의 경험을 손쉽게 공유할 수 있게 한다. 블로거들은 당신의 실험 보고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한겨레21(09. 08. 21) 발리, 고원, 쾌활함 2  

지난호에 언급한 발리의 일화는 스피노자의 <윤리학>의 한 대목과 겹쳐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비슷하게 쓰이는 두 단어, ‘도덕’과 ‘윤리학’을 구분해야 한다. 들뢰즈의 간단명료한 정식을 빌리자면, “도덕은 우리가 해야 할 것과 관련되고, 윤리학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관련된다”. 도덕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선험적으로 지정해주는 반면, 윤리학과 관련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선험적으로 알지 못한다. 모세가 받은 십계명은 도덕을 형성하지만, 사회적 규율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문학과 예술은 윤리학을 구성한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종교적 명령이 없는 실천 철학이다. 윤리학은 선과 악의 구분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치 평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역량의 증감, 존재의 확장을 예민하게 느끼길 요구한다. 우리는 자신의 역량이 증대될 때 기쁨을 느끼고, 축소될 때 슬픔을 느낀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행동의 기준을 선과 악에서 기쁨과 슬픔으로 이전시키기를 제안한다.

스피노자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정도 교의는 어느 정도 알고 있을 듯싶다. 그런데 좀더 나아가보자. 아무래도 기쁨과 슬픔이라는 기준은 분명하기는 하지만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기쁨의 추구는 쉽게 쾌락주의로 빠지는 것이 아닐까? 간단한 예로 마약 중독에 대해 생각해보자. 마약이 주는 쾌감을 연장하기 위해 점점 더 중독될 때, 그것이 하여간에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좋은 것일까? 앞서 말했지만, 그것이 종교나 법으로 금지됐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얻기 위해 스피노자의 이차적 구분을 살펴보자.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을 다시 하위 단위로 구분한다. 기쁨은 쾌활함(cheerfulness)과 쾌감(pleasure)으로, 슬픔은 아픔(pain)과 우울함(melancholy)으로 나누어진다. 이 구분의 기준은 신체가 변용되는 범위다. 즉, 쾌감과 아픔은 신체의 일부분만 변용될 때이고, 쾌활함과 우울함은 신체의 전체가 변용될 때이다. 마약은 신체의 일부분에만 제한적으로 기쁨을 주기 때문에 그것은 쾌감일 뿐 충만한 기쁨이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피노자가 쾌감과 아픔에 이중적인 가치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쾌감은 기쁨에 속하기는 하지만 나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국소적인 쾌감을 주는 사물에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픔은 슬픔에 속하기는 하지만 좋을 수도 있다. 앞서 말한 집착에서 풀려나도록 도와줄 수 있을 때 그렇다. 그러니까 순간이 아니라 지속적인 시간 안에서 봤을 때, 아픔은 쾌활함을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윤리학의 목표는 기쁨의 형성이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해, 전체적이고 지속적인 기쁨, 즉 쾌활함의 형성이다. 

잃어버린 쾌활함을 찾아서
발리의 일화에서 아이의 불만족은 교육적 효과가 있는 아픔에 상응한다. 아이는 부모의 신중한 상호작용 안에서 쾌활함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베이트슨의 관찰이 정확하다면, 이러한 문화 형식이 몇몇 사람의 특별한 지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 안에서 전승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발리의 음악 또한 점층적인 기승전결 구조를 배제하고, 같은 모티브가 변주되고 반복된다. 발리의 음악을 듣다 보면, 언젠가 한국의 라디오에서 들었던 멜로디가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아, <잃어버린 소리를 찾아서>였던가. 시작도 끝도 없이 완만하게 진행되는 노랫가락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

한국의 사회와 문화가 최근 10여 년간 절정의 쾌감을 추구하며 급속하게 변형돼왔다는 점을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강렬하고도 평평하게 지속되는 쾌활함을 유지하는 법은 ‘잃어버린 소리’와 함께 사라져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다시 새롭게 구축할 수 있을까.(이찬웅 프랑스 리옹고등사범학교 철학박사과정) 

09. 08. 31. 

P.S. 이 칼럼의 기여는 '쾌감'과 '쾌활함'의 의미를 명확하게 분절해놓은 것이다. 혹은 '쾌활함'이란 말의 용례를 새롭게 정의하고 제시한 것이다. 앞으로 '쾌활함'이란 말을 사용할 때마다 나는 전거로서 이 용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얻은 유익함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펠릭스 2009-09-01 08:54   좋아요 0 | URL
그리스 수도원의 본심이 마음의 고원을 찾으려는 노력이었다면
님의 고원(블로거)도 쾌활함의 연대입니다. 지난 10년이 역사의
'쾌감'이었다고 하다면 일본의 오늘은 '쾌감',아니면 '쾌활함'
일까요?

로쟈 2009-09-01 20:53   좋아요 0 | URL
'쾌활함의 연대'를 구축할 수 있다면 이상적이겠죠.^^

종이 2009-09-02 10:02   좋아요 0 | URL
제대로 안 읽고 지나쳤던 좋은 글을 보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로쟈 2009-09-03 22:36   좋아요 0 | URL
네, 챙겨두고픈 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