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몇 편이 생각나서 옮겨놓는다. 모두 95년 여름에 쓴 것들이다. 아직 이파리였고 청춘이었다. 카뮈가 재혼을 하고 <이방인>을 쓴 나이였다. 나는 "한때는 모두 이파리였다"고 적었다. 지나고 보니 정말로 그렇다. "한때는 모두 이파리였다..."   

이파리들이 푸르다

이파리들이 이 여름 한껏 푸르다 한때는 모두 이파리였다 이파리 축에 끼여 한 시절이 좋았다 햇빛이 좋았고 꽃내음이 좋았고 바람둥이들이 좋았다 어디에 기대어도 모자람이 없어라 오죽하면 낯짝이 붉어지도록 지리멸렬하도록 죽어 백골난망(白骨難忘) 이 세상 거름이 되도록  

우리는 열매들이야

이 뙤약볕만으로 우리는 익어 더는 볼 것도 없이 오동나무 그늘이 아닌 데야 익어도 그만 아주 콱 익어버려 온통 열애의 날들이야 이렇듯 짱짱한 은총이야 낯뜨거움이야 더는 볼 것도 없이 눈먼 사랑이야 그리움의 허공이야 이 뙤약볕만으로 우리는 익어 바짝 마른 그리움이야 더는 태울 것도 없는 마음이야 아주 그만이야 


 
푸른 사과

나를 부드럽게 대해줘 푸른 사과는 꼭지를 따라 빙글빙글 돈다 빛과 그늘이 그렇게 세상을 싸고돈다 푸른 사과의 영토에 해가 뜨고 해가 지고 푸른 사과는 다만 그늘에서 익어간다 나를 부드럽게 안아줘 푸른 사과는 뛰어가고 싶고 날아가고 싶고 춤을 추고 싶다 푸른 사과는 당나귀가 되고 싶고 나팔꽃이 되고 싶다 나를 제발 부드럽게 대해줘 



꽃들이 비에 젖는다

비는 언제나 꽃을 들고 있다 꽃들은 언제나 종알댄다 비는 언제나 막연히 기다린다 꽃들이 비에 젖는다 비는 마른 꽃을 본 적이 없다 꽃들은 언제나 종알댄다 비는 언제나 그친다 꽃들은 언제나 다그친다 비는 푼돈을 벌러 다시 빗속으로 나간다 비는 언제나 꽃을 들고 있다 꽃들이 비에 젖는다 

 

09. 07. 10.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펠릭스 2009-07-12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매를 기대하기에는, 제 새순이 막 돋았거든요. 지금은 영토를 넓히는 중입니다. 가끔 종알대는 새들이 날아 들어 산만합니다. 저는 꽃을 향해 마음을 더 열어야 합니다.

로쟈 2009-07-11 09:01   좋아요 0 | URL
아직 한창이시군요.^^

콩세알 2009-07-11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좋으네요. 특히 첫번째 시가..이파리 사이로 바람이 선들하게 부는 듯한 리듬이 느껴져요.

로쟈 2009-07-12 11:29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시니 좋습니다.^^

Sati 2009-08-04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번째 사진 출처가 어딘가요? 훔쳐가도 되는 건지요?

로쟈 2009-08-04 23:0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다 훔쳐온 것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