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볼루션' 시리즈에 대한 서평기사가 이번주에 뜨는 듯하다. 마이리스트로만 만들어두었는데, 관련기사도 옮겨놓는다. 개인적으로는 연휴의 자투리 시간에 <마오쩌둥>에 붙인 지젝의 서문을 읽었는다. 마오의 혁명론뿐만 아니라 지젝의 혁명론을 이해하는 데에도 필수적인 글이었다(시간이 나면 정리해서 올려두고 싶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상상력'이 필요한 분들은 나머지 다섯 권이 마저 출간되기 전까지 1차분 다섯 권 가운데 최소한 한두 권 정도는 읽어보시길 바란다.  

경향신문(09. 01. 31) 혁명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상상력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혁명가들에게 ‘혁명(Revolution)’이란 무엇이었을까. 마오쩌둥은 “실천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며, 실천을 통해 진리를 검증하고 발전시키라”라고 했고, 공포정치의 대명사 로베스피에르는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하다”고 말했다. 예수는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했고, ‘영구혁명론’을 주장한 트로츠키는 “개인의 존엄성을 지키려면… 오로지 피와 강철뿐”이라고 했다.  


마오쩌둥, 로베스피에르, 호찌민, 예수, 트로츠키(사진 왼쪽부터)

<레볼루션 시리즈>는 예수부터 카스트로까지 시대적·사상적·정치적 맥락에서 다양하게 독해되는 혁명가들의 불꽃 같은 사유와 상상력을 담은 원전들을 선별해 엮은 책이다. 영국의 좌파 출판사 버소(Verso)가 2007년부터 출간하고 있는 시리즈를 번역 출간했다. 이번에 마오쩌둥·로베스피에르·호찌민·예수·트로츠키 등 5권이 나왔고 올해 안에 카스트로·토머스 제퍼슨·시몬 볼리바르·토머스 페인·마르크스 등 5권이 나올 예정이다.  

시리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원전의 함의와 그 현재적 의미를 재발견하게 해주는 40~50쪽에 이르는 서문. 슬라보예 지젝, 테리 이글턴, 알랭 바디우, 타리크 알리 등 이 시대의 진보적 지성들이 혁명가들의 육성이 어떻게 지금까지 새로운 혁명에 대한 영감을 주고 있는지를 풀어냈다.  



특히 세계 철학계의 스타 슬라보예 지젝은 마오쩌둥·로베스피에르·트로츠키의 서문을 썼다. 지젝은 ‘무질서의 왕, 마오쩌둥’에서 “혁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부정이라는 ‘가무한(假無限)’ 속으로 빠져들어야 했다”면서 “이것은 문화대혁명에서 정점에 도달했다”고 밝힌다. ‘로베스피에르, 혹은 공포라는 신성한 폭력’에선 로베스피에르의 사상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순수에의 의지’를 짚어내면서 그의 사상이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급진적 자유주의 아래 놓여 있는 동시에 그것의 한계 역시 배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트로츠키>에는 스탈린 테르미도르에 대한 반(反)관료적·자유주의적 비판자와 ‘영구혁명’을 주장하는 ‘방랑하는 유대인’ 등 이질적인 모습으로 각인된 트로츠키의 모습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테러리즘과 공산주의’가 실렸다.  

지젝은 서문에서 이 책이 1930년대 스탈린주의를 예견하게 하는 많은 메시지들이 녹아 있는 “징후적 텍스트”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스탈린에게 레닌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외설적 영혼’ ‘권력의 도구가 되어 인공적으로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영혼’으로 영원히 산다면 트로츠키에게 레닌은 “같은 이데아를 위해 투쟁하는 민중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살아 있다”고 말한다.  



혁명가의 반열에 예수가 올라 있는 것도 이채롭다. 영국의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서문에서 ‘예수는 혁명가였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예수는 레닌이나 트로츠키보다 더 우월하기도 하고 열등하기도 한 혁명가”라고 밝힌다. 자신이 맞섰던 권력구조의 전복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에선 레닌이나 트로츠키에게 뒤지지만 그들이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완벽한 존재양상에 의해 기존 권력구조가 일소되리라 기대했다는 점에선 우월하다는 설명이다.

시리즈 발간의 의미는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쓴 ‘발간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혁명에 대한 올바른 독법은 거대담론의 극적 도식을 해체하고 그 속에 묻혀 있는 인간의 진정성에 접속하는 일이다. 그것은 현실의 건너편을 사고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 가지 더. 그것은 오늘날 목도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김진우기자) 

09. 01. 30.   

P.S. 한겨레의 서평기사는 지젝의 로베스피에르론에 대해서 짚어주고 있다. 횃불을 든 5인의 혁명가 그래픽이 볼 만하다!..  

 » 마오쩌둥, 호치민,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예수, 레온 트로츠키(왼쪽부터). 슬라보예 지젝은 이 혁명가들의 실천을 비판적으로 반복할 필요가 있다며 혁명을 상상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자고 말한다.  

한겨레(09. 01. 31) 해방 위한 창조적 혁명을 꿈꿔라

영국의 대표적인 진보 출판사 ‘버소’에서 2007년 펴낸 ‘레볼루션스’ 시리즈 가운데 다섯 종이 한꺼번에 번역돼 나왔다. <마오쩌둥-모순론·실천론> <로베스피에르-덕치와 공포정치> <호치민-식민주의를 타도하라> <예수-가스펠> <트로츠키-테러리즘과 공산주의>는 이 시리즈가 제목 그대로 ‘혁명가들의 말과 글’을 텍스트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프레시안북은 이 책들에 이어 올해 안에 나머지 다섯 종, <피델 카스트로> <토머스 제퍼슨> <시몬 볼리바르> <토머스 페인> <마르크스>를 펴낼 예정이다.

이 시리즈는 원텍스트 앞에 저명한 지식인들의 긴 서문이 붙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오늘날 이 오래된 글들이 왜 다시 읽혀야 하는지 소개하는 글이다. 이 글들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세계 철학계의 스타 슬라보예 지젝이 쓴 서문들이다. 지젝은 지난 200년의 근대 혁명의 인격적 대리자라 할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레온 트로츠키, 마오쩌둥 세 사람을 재해석함으로써 이 시리즈의 근본 의도를 도드라지게 보여주고 있다.  

시리즈가 발간된 2007년도면,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결코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처럼 세계를 지배하고, 반자본주의적 혁명 열정은 주눅이 들어 ‘제3의 길’ 따위 패배적 타협책에 안주하던 때다. 그런 상황은 본질적으로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이런 전망 상실의 시대에 지젝은 혁명을 재사유하자고 이야기한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지젝이 혁명을 재사유하는 방식에 있다. 로베스피에르·트로츠키·마오쩌둥의 텍스트들이 보여주는 대로 지젝은 이들의 주장과 실천에서 ‘독재’와 ‘공포’를 사유의 중심으로 삼는다. 오랫동안 진보파들이 외면하고 회피했던 문제를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지젝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지 않고는 혁명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듯하다.

지젝의 문제의식은 앞서 그가 편집하고 긴 해제를 단 레닌의 텍스트(<지젝이 만난 레닌>)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 텍스트에서 지젝은 레닌을 통해 러시아혁명을 다시 사유하자며 이렇게 말한다. “레닌을 반복한다는 것은 레닌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레닌을 되풀이하는 것은 ‘레닌이 죽었다’는 것, 그의 특수한 해법이 실패했다는 것, 그러나 그 안에 구해낼 가치가 있는 유토피아적 불꽃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로베스피에르·트로츠키·마오쩌둥은 레닌의 기원이고 변주이며 전환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세 혁명가를 다시 사유한다는 것은 이들의 실패한 해법 안에 유토피아적 불꽃이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시인하고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드는 일이 된다.

지젝이 해석하는 로베스피에르는 근대 정치혁명의 출발이자 원형이다. 근대의 거의 모든 급진적 혁명은 로베스피에르가 이끌었던 자코뱅파의 혁명 원리를 이어받았다. 말하자면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주의 공포정치·독재정치의 기원적 모델을 제공한 사람이다. 자코뱅주의야말로 근대 혁명의 핵심 인자였던 셈이다. 여기서 지젝은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1793년 없는 1789년’, 다시 말해 자코뱅의 공포정치가 없는 프랑스 혁명을 옹호하는 데 대해, ‘카페인이 제거된 커피’를 옹호하는 것과 같은 주장이라고 일축한다. 로베스피에르는 온건파 당통을 두고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는데, 지젝이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대목도 같은 맥락이다.

로베스피에르는 공포를 혁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합니다. 공포는 신속하고 엄격하고 강직한 정의의 다른 말입니다.” 로베스피에르 연설의 특징은 ‘상반된 것들의 역설적 일체화’에 있다. “인류의 압제자를 응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비로운 일이요, 그들을 용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야만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혁명의 본질에 들어 있는 이 ‘공포’(테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다. 지젝은 공포가 정치적 해방에 필수요소로 깃들어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코뱅파가 한없이 과격해지고 극단화한 데는 어떤 무능력이 깔려 있었다고 진단한다. 다시 말해, 사적 소유의 철폐와 같은 경제적 차원의 평등을 실현할 수 없었던 이 부르주아 혁명가들이 그 문제를 미봉하고 정치적 차원에서 정의를 실현해보려 몸부림치다 나타난 결과가 대공포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로베스피에르를 겨냥해 ‘선한 테러리스트’, ‘덕을 집행하는 악마’라고 규정한다. 그런 식의 규정은 트로츠키와 마오쩌둥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이런 규정은 냉소적이기만 한 것일 뿐 자유와 해방에 대한 신념은 결여한 것이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지젝은 말한다.

지젝은 철학자 헤겔이 <역사철학 강의>에서 프랑스혁명을 두고 했던 발언이야말로 진실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프랑스혁명은) 영광스러운 정신적 여명이다. 사고하는 존재가 모두 이 시대의 환희를 나누었다. 고귀한 감정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정신적 열정이 전 세계를 흥분시켰다. 마치 신과 세상이 처음으로 화해한 듯했다.” 헤겔의 이런 평가는 러시아 10월혁명과 이후 중국혁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지젝은 말한다. 그는 근대의 주요한 급진 혁명들이 공포와 독재라는 본질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본질을 단순히 부정해야 할 대상이 아닌 헤겔적 의미에서 ‘지양’해야 할 대상으로 이해한다. 그 문제에 담긴 해방적·창조적 내용을 보존하되 거기에 스며든 독성은 씻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이 다소 추상적인 얼버무림으로 들리지만, 지젝의 강조점은 혁명을 상상하고 실천하기를 두려워해서는 해방은 오지 않는다는 지점에 놓여 있다. 두려움이야말로 상상력의 적이라고 지젝은 말한다.(고명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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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9-01-30 18:14   좋아요 0 | URL
저도 재작년에 <마오쩌둥>과 <트로츠키>에 붙인 지젝의 서문들을 읽고 이리저리 엮어 한 번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던 차, 로쟈님이 써주실 글을 학수고대하고 있어야겠습니다.^^

로쟈 2009-01-30 18:51   좋아요 0 | URL
요즘 같은 '생존 스케줄'로는 언제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미친 척하지 않는 한...^^;

비로그인 2009-01-30 19:37   좋아요 0 | URL
마오쩌둥에 대한 지젝의 서문 요약, 저도 읽어보고 싶군요. 그 살인적인 스케줄에 부담을 드려서 미안합니다만... ^^ "거대담론의 극적 도식을 해체하고 그 속에 묻혀 있는 인간의 진정성에 접속하는 일... 그것은 현실의 건너편을 사고하는 일이기도 하다." 신영복 교수님의 이 말씀 좋군요. '거대담론'에서는 희망을 느끼지 못하지만 '인간의 진정성'이라는 말과, '현실의 건너편'이라는 말에서 희망의 가는 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같아서는 전자에서도 그 빛이 잘 안보이는 듯하지만요...

로쟈 2009-01-31 14:48   좋아요 0 | URL
준비하는 자들의 모습이 다른 이들에겐 빛이 될 수도 있겠지요.^^

2009-01-30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31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