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서점에 들렀을 때 프랑스의 '신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책이 깔려 있기에 의외다 싶었다. 더 의외인 건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프로네시스, 2008)란 타이틀. 같이 나온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프로네시스, 2008)은 여러 차례 출간됐던 책이므로 '오래된 새책'이고 작년에 썼다는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와는 30년의 터울이 있으니 합해놓으면 '프랑스의 한 좌파 지식인'의 30년 궤적이 되겠다. 레비의 입장에 동의하진 않지만(최근에 읽은 수잔 벅모스나 지젝 같은 좌파에 나는 더 끌린다) 그의 포지션은 한국사회에 나름대로 시사하는 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단적으로, 그가 '반미주의에 반대하는 좌파'이기 때문이다. 가령 '친미 좌파'는 한국에서라면 좌우 모두가 불편해하는 포지션이다. 그런 '불편함'이 지난 프랑스 대선에서 사르코지의 친구이면서도 루아얄(사회당)에 투표했다는 레비의 의의가 아닐까 싶다(한국에서는 그게 가능할까?).

경향신문(08. 08. 02) “반자유주의·반미주의는 좌파가 뿌리쳐야할 ‘유혹’들이다”

저자 얘기부터 해야겠다. 그것이 이 현란하고도 신랄한 책을 읽어내는 출발점이기에. 베르나르 앙리 레비.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 서른살이던 1977년 처녀작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을 통해 인간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신철학’을 주창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좌파와 우파, 서구 제국주의와 제3세계 군부독재, 부시와 후세인 등을 싸잡아 공격해온 성역 없는 비판자. 스스로를 반-반미주의자(anti-antiamericanist)라고 부르는 인물. ‘친미 지식인’ 또는 미디어 노출을 즐기는 ‘지식-언론인’이라는 비난도 있지만 보스니아, 수단 등 세계의 분쟁지역에 직접 뛰어들어 적극적 관심을 호소하는 현실참여 지식인이기도 하다. 지난해 초 출간된, 매혹과 환멸이 뒤섞인 현기증 나는 나라 미국을 탐색한 ‘아메리칸 버티고’를 기억하는 독자들도 있겠다.

그런데 그가 때늦은 ‘이념 고백’을 했다. “나는 거의 유전적으로 좌파이다. 좌파는 내 가족과 같다. 그러므로 자기 가족을 와이셔츠 갈아입듯 바꾸는 법이 아니다”라고. 책의 집필은 2007년 1월23일 시작됐다. 프랑스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던 니콜라 사르코지와 통화를 한 직후다. 저자는 20년 넘게 우정을 쌓아온 사르코지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역시” 좌파 후보(세골렌 루아얄)에게 투표했다. 30년 동안 그와 투쟁을 같이 해온 앙드레 글뤽스만이 우파로 전향하는 등 지식인들의 ‘우파로의 이동’이 이뤄지던 때다.



책은 레비가 왜 좌파를 끝까지 고수했는지에 대한 변론서인 셈이다. 더 나아가 선거에서 패배한 좌파의 몰락을 냉정하게 직시하면서 좌파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좌파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성찰했다. 원제를 직역하면 ‘나자빠진 거대한 시체’. 사르트르가 1960년 알제리 전쟁이 끝난 후 암울했던 시기 좌파를 표현한 말이다.

저자는 우선 자신을 비롯한 프랑스 좌파의 정체성을 관통하는 네 가지 정신적 유산을 거론한다. 드레퓌스 사건, 비시 정부, 알제리 전쟁, 68혁명. “좌파에 속한다”는 것은 이 각각의 사건에서 드러난 인권수호, 반파시즘, 반식민주의, 반권위주의·반전체주의라는 ‘반사작용’을 이용하는 방법을 되찾고 그것들을 ‘함께’ 작동시킬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인권문제를 등한시하는 반식민주의나 반파시즘 정신이 결여된 68혁명 정신 등 균형을 잃은 반사작용이다.

책은 이어 오늘날 좌파가 뿌리쳐야 할 ‘유혹’들을 조목조목 제시한다. 저자가 보기에 20세기 좌파의 몰락은 전체주의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에 기인한다. 그 결과 붉은색의 전체주의인 공산주의와 갈색의 전체주의인 나치즘의 결합이 목도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첫 번째 전체주의적 유혹의 붕괴 이후 그것을 대신하는 두 번째 유혹이 횡행하고 있다. 이 두 번째 유혹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그 유혹이 좌파가 아닌 우파적 영감에서 얻어졌다는 것. 저자가 “우파적 좌파” “현기증을 일으키는 좌파”라고 비판하는 지점이다.

저자는 좌파가 뿌리쳐야 할 유혹들로 반자유주의, 반미주의, 반유대주의, 파쇼이슬람주의, 보편성의 위기 등을 꼽는다. 우선 반자유주의. 혹 그것은 자유주의를 지구상 모든 악의 원천으로 돌림으로써 지역 국가들을 독차지하고 국민들을 약탈하는 엘리트들에게 무죄 선고를 내리는 것 아닌가. 그리고 ‘반자유주의적 수사’에 담긴 파시스트적이거나 나치적 수사학을 간과하지는 않는가. 저자는 이 부분에서 최근 조르주 아감벤이나 슬라보예 지젝 등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반자유주의가 결국 나치즘으로 향했던 독일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가 재발견되고 있는 것에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다음은 반미주의. 할 말이 없을 때마다 “그것은 미국의 잘못”이라면서 미국을 인류의 모든 죄악과 과실의 동의어로 만드는 것은 좌파들을 같은 함정에 빠지게 하는 것 아닐까. 저자는 “반미주의는 바보들의 진보주의”라고까지 말한다. 게다가 반미주의에는 반유대주의가 숨어있다. 저자는 반미·반제국주의가 ‘제국 대 반제국의 대립’ 구도 이외 모든 문제들의 발언권을 박탈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세계 각지의 억압받고 핍박받는 자들의 고통을 외면한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좌파가 반미·반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파쇼이슬람세력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비난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흩어지고 나뉘어진 인류라는 가정 위에 세워진 ‘차별주의’라는 낡은 독트린이 대거 회귀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민주주의·인권·사람에 대한 존중 등 보편주의를 통해 차별주의의 유혹을 추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카뮈, 사르트르 등을 거론하면서 ‘감상적 좌파’에 맞서는 ‘우울한 좌파’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회의적이었지만 투쟁하고 염세적이었지만 검소하고 실천적이었으며 권력을 무거운 부담으로 여겼던 이들 말이다.

프랑스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출발하고 있어 따라잡기 쉽지 않은 책이다. 게다가 옮긴이의 말처럼 “거의 폭력에 가까운 다양하고도 많은 정보”가 수많은 인용과 비유, 화려하면서도 호흡이 긴 문체에 녹아들어 있다. 옮긴이가 세세하게 달아놓은 수많은 주석과 함께 읽어내는 끈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저자가 프랑스 좌파의 과제들로 제시한 화두들은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문제들에 다름 아니다. 특히 프랑스와 우리나라, 둘다 실용주의와 경제 우선 정책을 내세운 우파 후보가 나란히 승리한 공통점을 지녔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도 적지 않다. 저자가 사르코지에게 표를 던지지 않은 몇 가지 이유. “경제적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그의 태도” “사르코지가 표방한 실용주의, 아니 기회주의” “어떤 사유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기 때문”. 30년 전 출간된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도 새롭게 번역돼 나왔다.(김진우기자)

08. 08.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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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8-02 01:28   좋아요 0 | URL
베르나르-앙리 레비의 '귀환'에는 저 또한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측면이 있지만, 그의 '위치' 자체가ㅡ오히려 현재에 더ㅡ'문제적'이라는 점은 저 역시 공감하게 됩니다.

로쟈 2008-08-02 18:02   좋아요 0 | URL
친미 보수주의자들이 이 정도 포지션으로만 이동해도 '대화'가 좀 되지 않을까 라는 게 제 '망상'입니다...

람혼 2008-08-03 03:44   좋아요 0 | URL
120% 동감합니다.

드팀전 2008-08-02 15:44   좋아요 0 | URL
반미주의는 바보들의 진보주의다..라는 말이 재미있군요.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아무곳에나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를 붙이는 것도 우습기는 하지요. 그렇게 말해버리면 이해하기는 쉽지만 그걸로 놓치는 것들이 또 얼마나 많을지..

로쟈 2008-08-02 18:01   좋아요 0 | URL
'반미=좌파'라는 프레임을 깨는 것이 좌파의 확장이 될는지, 투항이 될는지는 어조 잘 모르겠습니다. 한데, 사실 촘스키나 하워드 진을 '반미 좌파'라고 분류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구요(미국 정부를 비판하지만 그들은 미국을 사랑하잖아요)...

노이에자이트 2008-08-02 16:24   좋아요 0 | URL
이 양반이 1990년대 초에 쓴 <자유의 모험>을 봤는데 어째 좀 삐딱하고 냉소적인 거 같아요.재주는 많은데 경박한 것 같기도 하고...<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은 주로 진보파들을 때렸기 때문인지 당시 황혼기의 사르트르가 격하게 욕했다고 하더군요.

로쟈 2008-08-02 17:59   좋아요 0 | URL
외모도 출중한 테레비-지식인이죠. 다만 '친미 좌파'라는 포지션이 우리에겐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2 20:51   좋아요 0 | URL
이제 세월의 심술이 그의 외모에 나타나더군요.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 우리나라에 막 주간 조선에 번역되던 때의 사진은 배우 같더군요.그때가 1978년인데...물론 저는 그 당시의 주간 조선을 10여년 전 헌책방에서 1년치를 구했어요.혹 제 나이에 대해 오해하실까봐 알려드려요.

로쟈 2008-08-02 23:46   좋아요 0 | URL
그래도 미니멈 40대 중반이십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21   좋아요 0 | URL
40대라뇨! 제 몸매와 목소리가 20대인데...얼굴은 10대! 보약을 잘 못 먹은 10대처럼 생겼지만요.어우...사진을 공개하든지 해야지 안되겠어요.

로쟈 2008-08-03 20:29   좋아요 0 | URL
'미니멈'인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40   좋아요 0 | URL
헤헤헤...그냥 화끈하게 직설적으로 20대라고 해주시면 안되나요?미니멈하면서 애매하게 하는 것보단요.

로쟈 2008-08-03 22:47   좋아요 0 | URL
화끈하게는 50대 후반이신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03 23:21   좋아요 0 | URL
으....

2008-08-03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4 22:53   좋아요 0 | URL
헤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