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에 실린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옮겨놓는다. 최근에 '한길그레이트북스' 100번째 책으로 나온 아서 단토의 <일상적인 것의 변용>(한길사, 2008)을 실마리로 삼아서 단토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이란 게 무엇인지 적은 글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예전에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2004)를 여러 차례 다루면서 언급한 적이 있기도 하다(http://blog.aladin.co.kr/mramor/802981 등 참조).
한겨레21(08. 05. 27) 앤디 워홀의 비누상자
‘예술의 종말’이란 말을 들어보셨는지? 그거 뭐 유행 아닌가? (근대)문학, 철학, 역사 가릴 것 없이 떼로 종말을 고했다고 하는데, 예술이 끝났다는 게 굳이 새로운 소식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럼 보다 구체적인 질문을 재차 드린다. 예술은 언제 종말을 고했다고 보시는지? 그리고 그 종말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시는지? 너무 과한 질문인가? 얼핏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나름대로의 예술관과 예술철학으로 무장해야 할 듯싶다. 하지만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비평가 아서 단토에 따르면, 너무도 유명한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과 함께 박스 하나만 잘 기억해두면 된다. 비누 상자다.
‘예술’이라고 흔히 번역되는 ‘아트(Art)’가 여기서는 좁은 의미의 ‘미술’을 뜻하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미술의 종말’이라고 해야겠지만, 어쨌거나 단토가 ‘예술의 종말’을 충격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은 1964년의 한 전시회에서다. 그는 당시 뉴욕 이스트 74번가의, 마치 재고품 창고 같은 모양새의 스테이블 갤러리에서 슈퍼마켓에서나 진열돼 있을 법한 ‘브릴로 상자’가 층층이 쌓여 있는 걸 보고 미적 혐오감을 넘어서는 철학적 흥분을 느낀다(‘브릴로’는 청소용 세제의 브랜드다. 이 비누 상자 옆방에는 켈로그 상자들도 쌓여 있었단다).
물론 워홀이 마켓에서 이 상자들을 사다가 미술관으로 그냥 옮겨놓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상자들은 그가 브릴로 상자를 모방해서 직접 제작한 것이다. 즉 진짜 브릴로 박스는 골판지로 만들어졌지만 워홀의 브릴로 박스는 합판으로 만들어졌다. 문제는 이 재질의 차이가 육안으로는 식별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해서 겉보기에는 똑같은 두 종류의 박스가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는 단순한 상품상자로서의 브릴로 상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워홀의 팝아트 작품으로서의 브릴로 상자. 하지만 이 두 상자는 보는 것만으로는 식별되지 않는다. 흔히 무엇이 예술작품인가는 ‘보면 안다’고 흔히 말하지만 이 경우엔 ‘봐도 모른다’. 이것이 결정적이다. 미술이 시각(눈)의 문제에서 사고(머리)의 문제로 전환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미술은 더 이상 외관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철학적으로 따져보자. 똑같게 보이는 두 상자가 어떻게 해서 하나는 그냥 상자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작품이 되는가? 어떤 사물이 예술작품인가 아닌가는 대체 누가 어떤 기준으로 결정하는가? 이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여 단토가 내놓은 대답이 ‘예술의 종말론’이다. 그리고 이 주장은 1965년에 발표한 ‘예술계’란 논문과 1981년에 출간되고 최근 번역돼 나온 <일상적인 것의 변용>(한길사 펴냄)을 통해서 제시된다. 그가 말하는 예술의 종말이란,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말해주듯이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기에 이제는 예술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제기된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더 이상 가능하지도 또 유효하지도 않다면 거기서 예술의 역사가 종말에 이르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나쁜 소식일까? 그렇지만도 않다.
사실 국내에는 단토가 1995년에 이 문제를 다시금 총정리해서 내놓은 <예술의 종말 이후>(미술문화 펴냄, 2004)가 먼저 소개됐다. 이 책에서 단토는 헤겔주의자로서 예술의 종말이 갖는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예술의 종말은 예술가들의 해방이다. 그들은 이제 어떤 것이 가능한지 않은지를 확증하기 위해 실험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미리 말해줄 수 있다. 예술의 종말에 대한 나의 생각은 오히려 역사의 종말에 대한 헤겔의 생각과 비슷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역사는 자유에서 종말을 고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예술가들의 상황이다."
헤겔에 따르면 역사는 하나의 중대한 목적을 갖는다. 곧 자유의 확장이다.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시대에 도달하게 되면 역사는 종언을 고한다. 그것은 달리 역사의 완성이기도 하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여서 모든 일상적인 것들이 예술작품으로 변용될 수 있고 누구나 예술창작자가 될 수 있다면 예술은 종말에 이른다. 예술의 민주주의가 곧 예술의 완성이다.
08. 05. 21.
P.S. 애초에 단토의 책을 글감으로 삼은 건 '한길그레이트북스'의 100번째 책이라는 상징성을 고려해서였다. 최신간이라 다 읽어볼 여력은 없었고 한두 장 정도 읽어보고 간단하게 감상을 적으려고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서문에서부터 책은 막히기 시작했다. 기념 띠지까지 두르고 나온 책으로서는 좀 민망한 일인데, 가령 단토가 '일상적인 것의 변용'의 선구적인 예로 뒤샹의 예술세계를 언급하고 있는 대목을 보라.
"나는 먼저 뒤샹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일상적 존재의 생활세계(Lebenswelt)에 속하는 대상 - 빗자루, 병걸이, 자전거 바퀴, 소변기 등 - 을 예술작품으로 변화시키는 미묘한 기적을 처음으로 행한 사람은 미술사의 선구자인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그의 행위는 하찮은 대상들을 모종의 미적 거리 안에 배치했고, 그 결과 그것들이 미적 향수(享受)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간단하게 평가할 수도 있다. 즉 가장 가당치 않은 곳에서 모종의 아름다움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하려던 시도로 볼 수 있다."(57쪽)
뒤샹의 작업이 갖는 의의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인데, 얼핏 읽어도 셋째 문장과 넷째 문장은 서로 모순 아닌가? 그에 따르면, 뒤샹은 (1)일상의 하찮은 대상들이 미적 향수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가장 가당치 않은 곳에서 아름다움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는 것이 되니까. 어느 쪽이 맞는 말일까? 이 두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내가 보기에 일상의 하찮은 대상들이 "미적 향수에 부적합하다"는 건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을 잘못 옮긴 것이다. 'improbable'은 물론 '있음직하지 않은', '사실 같지 않은'이란 뜻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고 여기서의 강조점은 그럼에도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즉 미적 향수(감상)의 후보(대상)가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뒤샹에 의해서 말이다. 그것이 어떻게 "그것들이 미적 향수(享受)에 부적합하다는 보여주었다고 간단하게 평가할 수" 있는지는 역자만이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