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원래 각 언론의 북리뷰가 뜨기 때문에 옮겨오는 기사도 많아지는데, 이번주에는 대학원신문들까지 가세해서 할일이 더 많아졌다. 방학을 맞아 진작에 종간들을 했을 터이지만 기사들이 좀 뒤늦게 담비에 올라와 있기에 몇 편을 추릴 예정이다. 멜랑콜리에 대한 기사가 먼저 눈길을 끈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8110).

연세대 대학원신문(제158호) 멜랑콜리, 창작의 검은 원천

멜랑콜리는 원래 “검은 담즙”(고대 그리스어 melancholia = melas검은 + chole담즙)이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 의학에 따르면, 인간의 몸속에는 네 가지 체액(Humour), 즉 혈액, 노란 담즙, 검은 담즙, 점액이 흐르고 있는데, 그 가운데 어느 체액이 과도하게 흐르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네 가지 기질과 성격이 형성된다. 멜랑콜리는 이렇게 분류된 네 가지 기질 가운데 하나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몸속에 “검은” 담즙이 과도하게 넘쳐흐르고 있는 사람이 바로 멜랑콜리커(Melancholiker)다. 멜랑콜리에 관한 의학적 담론은 곧 인문학적 담론의 공간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아우르는 그 담론은 히포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아비첸나, 피치노, 버튼, 칸트,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파노프스키, 프로이트, 크리스테바 등등 수많은 서구 지성인들의 입을 통해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 철학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문학/예술인들 심지어 일반인들에게까지도 이 주제는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최근 멜랑콜리를 주제로 프랑스와 독일 합작으로 기획된 미술전시(2005년에는 파리에서, 2006년 베를린에서 열림)가 엄청난 관객의 호응을 받았다는 것은 세인의 지대한 관심을 증명해주는 하나의 사례다. 서양인들의 이런 각별한 관심에 비해 국내에서 연구된 멜랑콜리 관련 논문, 저서, 전시활동 등등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에게 아직까지 낯선 이 용어는 예술계나 정신의학계 일각에서 간헐적으로 사용될 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서구에서 진행된 멜랑콜리 담론을 조금만이라도 살펴보면, 멜랑콜리는 서양 예술과 철학의 핵심 정조(情調)를 가리키는 말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제 간략히 멜랑콜리와 그것에 얽힌 담론 한 가지(예술창작의 원천인 멜랑콜리)를 살펴보기로 하자.



멜랑콜리의 기질적 특징
먼저 일종의 기질, 또는 정신질환으로 이해되는 멜랑콜리의 핵심적 특징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멜랑콜리에 빠진 사람에게 멜랑콜리를 일으킨 대상 또는 원인은 불분명/불특정하다. 멜랑콜리커는 이유 없이 슬프고 우울하다. 그를 우울하게 만든 원인이 있다면, 무의식 깊숙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둘째 멜랑콜리를 묘사하기 어렵다. 사실 모든 감정이 형용하기 어렵지만, 정체불명의 미묘한 멜랑콜리는 더 더욱 잘라 말하기 어렵다. 멜랑콜리의 언어는 간접적인 묘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멜랑콜리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은유의 언어다.

셋째 멜랑콜리는 막연하지만 검질긴 불안감이다. 특히 미래의 죽음에 대한 불안감이 멜랑콜리의 주된 정조다. 불가해한 죽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앞에서 멜랑콜리커는 불안에 몸서리친다. 그리고 그 불안이 현재의 삶 전체를 뒤덮는다. 불안은 임박한 미래에서 온다. 막상 고통이 닥치면, 고통스러워하느라 그것을 피하려하느라 분주하고 정신없다. 불안해할 여유가 없다. 오로지 가까이 다가왔지만 아직 당도하지 않은 파국, 어김없이 다가오는 어둠, 임박한 미래의 고통이 불안을 낳고 기른다. 멜랑콜리는 도래하는 어둠 직전에 형성되는 불안감이다. 다가오는 파국을 예감하며, 지금 현재가 아니라 성큼성큼 다가오는 미래를 사는 사람의 정조다. 이런 이유로 옛날 사람들은 멜랑콜리의 기질을 “황혼” 또는 “가을”과 연결지었다.

넷째 멜랑콜리는 극적 반전, 즉 극단적인 감정들의 급격한 전환을 특징으로 한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극도의 권태감으로 이행되는가 하면, 터질 듯한 충일감과 끝없는 공허감 사이를 오락가락 반복한다.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의 변덕, 극단으로 치닫는 감정의 큰 기복이 멜랑콜리를 특징짓는다. 멜랑콜리의 이런 성격은 그것의 수용사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멜랑콜리는 천재의 징표이면서 동시에 가망 없는 정신병이고, 천사의 축복이면서 동시에 악마의 저주이며, 최고의 지성이면서 동시에 무시무시한 야수성이다. 멜랑콜리는 야누스적인 두 얼굴의 급격한 변전이고, 대립하는 양 극점의 반전이다. 이런 변신과 전환의 특성 때문에, 멜랑콜리는 뭇 금속들의 화학적 변용을 거쳐 황금을 만들려고 했던 연금술이나 신의 메시지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해서 전해 주는 전령, 메르쿠르(Merkur-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와 연결될 수 있었다.

다섯째 멜랑콜리는 어떤 상실감, 총체적인 무력감, 종국에는 자기 상실감이다. 갈망하는 어떤 것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서 시작해서, 멜랑콜리는 결국 자기 상실감으로 이어진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자기상실감은 사실 강한 자의식을 전제한다. 세상사의 허망함에 등을 돌리고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해보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빈곤한 자아만을 발견하며 절망하는 자가 바로 전형적인 멜랑콜리커의 모습이다. 타자로 향하는 길을 스스로 봉쇄하고, 타자에 무관심하도록 만들만큼 비대한 자의식/자기애를 가지고 있는 자만이, 그리하여 운명적으로 주체할 수 없는 좌절감과 무력감 그리고 상실감에 진저리치는 자만이 멜랑콜리커가 될 수 있다.



사랑의 상실, 검게 응축되는 슬픔
정리하자면, 멜랑콜리는 일종의 슬픔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색의 슬픔이 아니라, 수많은 슬픔의 색깔들이 뒤엉키고 응축되어 만들어진 “검은” 슬픔이다. 그렇다면 멜랑콜리의 이런 어둠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꼽고 있는 가장 중요한 어둠의 원천은 사랑의 상실, 이별이다. 사랑의 대상을 상실하였을 때, 우리는 자신의 수족이 잘려나가는 고통과 슬픔을 느낀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애도작업이 실패할 경우) 한동안 슬픔을 느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상실의 고통과 그 고통에 대한 불안 때문에 사랑의 대상에 대한 애착(愛着)은 커져가고, 애착은 집착(執着)이 되고, 집착은 자기집착으로 연민은 자기연민으로 변하여, 결국 사랑에서 시작된 멜랑콜리는 끝없이 커져만 가는 자기연민과 자기증오로 끝을 맺는다. 초라한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은 자기혐오와 증오로 돌변하고, 이렇게 자신의 가슴을 할퀴고 상처를 낸 다음, 다시 피투성이가 된 자신을 동정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강도를 더해가며 반복된다. 사랑의 상실과 상처에 슬퍼하는 자기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끼면서, 슬픔은 슬픔을 배가시킨다. 사랑의 공복감에 제 살점을 스스로 뜯어 먹는 자기 연민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없는 멜랑콜리의 수렁에 빠진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멜랑콜리는 사랑 대상의 상실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견디기 힘든 슬픔과 상실감의 반복적인 타격으로 영혼 전체에 어둡게 번져버린 영혼의 검은 멍이다. 하지만 멜랑콜리의 검은 반점이 이처럼 부정적인 색깔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상처, 질병, 광기, 비이성, 헛된 감상 등으로만 멜랑콜리의 어둠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스따로방스키의 뛰어난 해석에 따르면, 이런 영혼의 검은 멍, 곧 고통의 농축물은 검은 담즙으로 전치될 수 있고 다시 그것은 “검은 잉크”로 전치될 수 있다. 뛰어난 작가는 멜랑콜리, 곧 인간의 고통스런 파토스를 창작의 재료, 또는 기폭제와 원동력으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서 작가는 흰 종이 위에 자신의 검은 담즙을 잉크삼아 선명한 글자를 적어 넣을 수 있다. 농도가 짙은 검은 잉크일수록 선명한 글을 쓸 수 있듯이, 작가가 창작활동을 하는데 있어 멜랑콜리는 필수조건이며, 멜랑콜리의 색깔이 검으면 검을수록 눈에 띄는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멜랑콜리에 관한 중요한 물음을 제기한 적이 있다. “철학과 정치, 시 또는 예술 방면의 비범한 사람들이 왜 모두 명백히 멜랑콜리커였을까?”(Problems BookⅩⅩⅩ, 953a)



영혼에 남겨진 멍자욱, 창작의 원천
사랑에서 멜랑콜리는 시작된다. 미지근한 사랑이 아니라, 광적인 사랑에서 멜랑콜리는 탄생한다. 그런데 모든 사랑은 시작부터 이미 거리를, 부재를, 차이를, 이별을, 결국 죽음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사랑이 크면 클수록, 고뇌(Leid)가 커지며, 그럴수록 열정(Leidenschaft) 또한 커져간다. 거리, 부재, 차이를 가로지르고 이별과 죽음을 넘어서기 위해 무한히 증폭되는 사랑은 결국 끝없는 고뇌가 되고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이 된다. 그런데 사랑대상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열정이 커질수록 자신의 모든 감각과 생각의 가능성들이 최대로 확장된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던 것들을 멜랑콜리커는 볼 수 있게 된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다시 인용해 보기로 한다. “멜랑콜리커들은 격렬성으로 인해 원거리 사수처럼 정확하게 활을 쏜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급변할 수 있는 그들의 태도로 인해 그들에게는 인접성이라는 현상이 나타난다. … 게다가 그들의 행동은 매우 커다란 격렬성으로 인해 또 다른 행동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다” (『수면 속의 예견』). 보통의 상식으로는 연결되지 않는 사태와 사태, 인접불가능하게만 여겨지던 단어와 단어를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 은유제작능력, 바로 그런 상상력의 비상(飛翔) 능력을 멜랑콜리커는 소유하고 있다. 보통의 상식과 안목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거리를 멜랑콜리커는 훌쩍 뛰어넘는다.

그리고 정확하게 사태를 적중시킨다. 프로이트도 멜랑콜리커가 “진리를 바라보는 더 예리한 눈”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슬픔과 멜랑콜리」). 때문에 사람들은 때때로 멜랑콜리커가 범상치 않은 재능을 가졌다고 판단한다. 이와 같이 멜랑콜리커가 근본적으로 “원거리 사수”가 될 수 있는 동력은, 즉 모든 멜랑콜리한 창조력의 근원은 사랑의 열정, 결국 사랑의 크기에 맞먹는 상실의 고뇌에서 나온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미 시작부터 비극을 예술의 모태로 삼았던 서구인들은 타인의 심금(心琴)을 울릴 수 있는 작품 창작의 원천을, 삶(사랑)의 고뇌가 영혼에 남겨놓은 검은 멍울에서 찾았던 것이다.(김동규│연세대학교 철학과 강사)

08. 01. 05.

P.S. 기사에서 언급된 스타로뱅스키(스따로방스키)의 멜랑콜리론은 그의 보들레르론에서 가져온 게 아닌가 싶다. 한편, 멜랑콜리를 슬픔의 일종으로, '검은 슬픔'(크리스테바의 표현으론 '검은 태양')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슬픔'(애도)과 '멜랑콜리'(우울증)를 대비시킨 프로이트의 핵심적인 주장을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멜랑콜리'에 대한 문학적인 해석으로 보면 되겠다. 멜랑콜리, 혹은 우울증(우울질)이란 주제에 대해서는 예전에 다룬 적이 있다. '만국의 룸펜들이여, 단결하라!'(http://blog.aladin.co.kr/mramor/897660), '애도와 우울증'(http://blog.aladin.co.kr/mramor/909608) 등을 참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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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8-01-06 09:12   좋아요 0 | URL
검은 담즙을 잉크 삼아 창작한다니 완전 멋진걸요!
근데 재능이나 열정도 없이 그냥 멜랑콜리하기만 한 건 어떡하나요. -_-

로쟈 2008-01-06 09:17   좋아요 0 | URL
그게 아직 덜 우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