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피터 크레이머의 <우울증에 반대한다>(플래닛, 2006)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책이었다. '우울증 컬렉션'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울증과 관련한 몇몇 책들에 흥미를 갖고 있던 차에 항우울증 치료제인 프로작에 관한 베스트셀러를 쓴 저자의 명성에 눈길이 갔던 것이다. 한데, 주문해서 손에 들기까지도 아무런 리뷰나 서평을 읽어볼 수가 없었다. 언론의 지나친 주목을 받는 책들이 있는가 하면, 이렇듯 이유없이 홀대받는 책들도 있는 것(신생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 '로비'가 부족했던 것일까?). 

해서 언제든지 '프리뷰'의 자리에서 다룰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비오는 날 공치는 '노가다' 인부처럼 일주일을 그냥 흘려보냈다. 이번주는 사정이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출판사 리뷰라도 올려놓는다. 그리고, 학위논문의 일부를 떼다가 붙여놓는다. 우울증에 대한 나의 '문학적' 관심이 어디에 걸쳐 있는지 보여주는 글이기도 하다(비오는 날 우리 아저씨들이 따로 무얼 하겠는가? 연장이나 다듬고 있는 수밖에).    

 -정신의학자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프로작에게 듣는다(Listening to Prozac)>의 지은이인 피터 D. 크레이머가 '질병'으로서의 우울증의 담론을 자세히 살핀다. 수잔 손택의 책 제목을 연상시키는 <우울증에 반대한다(Against Depression)>라는 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지은이가 반대하고 있는 대상은 우울증을 우리 몸의 질병으로만 보지 않는 세간의 인식, 더 나아가 '우울증을 낭만화하는 사회'이다.

Peter D. Kramer

-20여년전 항우울제인 '프로작'이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우울증이 과연 (약으로 치료해야 할) 질병인가?" 하는 논쟁이 들끓었다고 한다. 책은 지금에도 역시 우리 사회에는 우울증을 단순한 '마음의 감기' 정도로 치부하거나, 창조성과 감수성, 천재성의 원천인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만연해 있음을 지적한다. 지은이는 우울증이 심각한 생리학적 질병이라는 사실을 최신 뇌 연구 결과를 비롯한 의학/생물학적 근거와 여러 통계를 바탕으로 입증한다.

-또한 지은이 자신의 개인적인 진료 경험, 그리고 문학과 예술에서 끌어온 사례 제시로 우울증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실제 우울증 환자들을 더욱 고통받게 만들고 있으며, 더 나아가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을 왜곡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울증을 직시함으로써 자아와 예술, 사랑과 훌륭한 삶 등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이러한 인간 이해에 있어서 '정신의학'과 '정신분석'은 적대적 동반자이다. 요즘의 심리철학과 인지과학이 그렇듯이).

이제 이어지는 건 '프로이트에게 듣는다'쯤 되겠다(다소간 '학술적'이므로 딱딱한 글에 경기를 일으키는 분들은 여기까지만 읽으시면 되겠다). 크레이머 교수라면 별로 달갑잖게 생각할 듯하지만, 프로이트 또한 "자아와 예술, 사랑과 파탄난 삶 등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여준다고 나는 믿는다. 

 

 

 

 

예술에 대한 프로이트적 가정에 따르면, 예술창조의 전제조건은 삶의 파탄이다. 즉 뭔가 억울하게 당했다는 느낌 없이,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감정 없이 예술을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술은 삶에서 잃어버린 시간과 행복에 대한 하나의 보상으로서 주어지며, 자신만의 상상의 세계에서 그러한 보상을 찾는 예술가는 현실과 화해하지 못하는 망상적 돈키호테이다. 그래서 예술사가인 하우저의 말을 빌자면, 모든 예술은 정확하게 말해서 일종의 ‘돈키호테주의’이다(아래 사진은 아르놀트 하우저).

 

그러한 돈키호테주의가 예술사에서 전면화 되는 것은 낭만주의 시대 이후이다. 프로이트가 진술한 의미에서 예술가의 개인적인 요구와 사회의 집단적인 요망 간의 불일치는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두드러지기 때문이며, 사실 만족의 대용물이나 보상/위안으로서의 예술 개념 따위는 모두 낭만주의 내지 후기 낭만주의 예술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하우저, <예술사의 철학>) 요컨대 낭만주의 이후의 예술은 삶의 상실을 전제로 하며, 그것에 대한 대가로 지불된다.

 

 

 

 

 

 

 

 

 

상실에 대한 두 가지 반응 태도를 다룬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증>(1917)은 이런 맥락에서 다시 읽을 수 있다. 애도와 우울증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중요한 차이점은 우울증의 경우에 자기 존중감, 즉 자기애가 급격하게 추락한다는 것이다.

 

애도의 경우에는 일단, 현실성 검사를 통해서 드러난 사실, 즉 사랑하는 대상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상에 부과되었던 모든 리비도를 철회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점차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상실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지만, 우울증은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무의식적/나르시시즘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대상 상실이 자아 상실로 전환된다. 그리고 대상과 자아 사이의 갈등은 동일시에 의해 변형된 자아와 자아-이상으로서의 초자아 사이의 갈등으로 변모되고, 이것은 대상화된 자아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낳으면서 급격한 자기애의 상실, 곧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

 

이러한 애도와 우울증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ⅰ) 애도는 의식적인 대상과 관련되지만 우울증은 무의식적인 대상과 관련된다. (ⅱ) 애도는 대상과 관련되지만 우울증은 나르시시즘, 즉 자아 형성과 관련된다. (ⅲ) 애도와 달리 우울증에서는 애증의 양가감정이 자아 내부로 투사되면서 사랑의 대상을 자아로 바꾸고, 자신의 자아는 초자아의 역할을 하면서 사디즘을 발현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두 반응 태도가 정념의 특정한 상태를 지시한다기보다는 일련의 과정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이에 대한 생각을 더 진전시키지 않았지만, 정념의 진행과정으로서의 애도와 우울증은 분명 내러티브를 함축한다. 그레마스(A. J. Greimas)에 따르면, 일반적인 서사체(혹은 서술체)의 경우 서술 프로그램은, 가장 간단하게는, 이접(disjunction)과 연접(conjunction)의 서사로 표시될 수 있다. 이접의 서사는 주체(S)와 대상(O)이 분리되는 서사, 즉 주체가 대상을 상실하거나(상태) 박탈당하는(행위) 서사이고, 연접의 서사는 주체와 대상이 결합되는 서사, 즉 주체가 대상을 회복하거나(상태) 획득하는(행위) 서사이다. 이것을 함수(Function) 형식으로 표시하면,


F1(S)=(S∩O)→(S∪O): 상실/박탈

F2(S)=(S∪O)→(S∩O): 회복/획득


이 된다(∩와 ∪는 각각 연접과 이접을 표시한다). 프로프(V. Propp)와 그레마스의 서사학에서 주로 분석 대상이 되었던 모험 서사의 경우는 주체가 박탈된 대상을 다시 획득하는 일련의 과정이 기능단위들의 통사적 배치를 통해서 제시된다. 즉 그것의 일반적인 유형은 F1 F2가 결합된 형식을 취한다.


F(S)=(S∩O)→(S∪O)→(S∩O)


이러한 통사론적 배치의 모델과 유형에 대한 탐구는 주로 주체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서사학 혹은 서술기호학은 엄격히 말하면, 행동기호학 혹은 행위기호학이었다. 이 행동기호학에서의 주체는 행위의 한 기능으로서, 즉 행위자로서만 기술된다.

 

하지만, 낭만주의 이후의 서사에서 주체의 행위자로서의 역할은 모험서사에서의 그것만큼 중심적이지 않다. 낭만주의의 주체는 자아와 세계를 맞대응시킬 만큼 확장된 자아를 자신의 것으로 하고 있기에 오히려 중심적인 것은 이 주체의 주관적 정념이다. 따라서 대상의 상실에 대한 반응 역시 모험서사에서처럼 즉각적이거나 반사적이지 않으며, 복잡한 내면적 과정을 통해서 표출된다. 그러한 과정을 유형화한 것이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증이라면, 이 두 범주는 낭만적 서사를 기술하는 유력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앞에서의 함수 형식을 응용해서, 애도와 우울증의 서사 모델을 제시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FT(S)=(S∩O1)→(S∪O1)→(S∩O2): 애도

FM(S)=(S∩O)→(S∪O)→(S↔$): 우울증


여기서 FT에서의 T는 Trauer(애도)의 이니셜이고, FM에서의 M은 Melancholia(우울증)의 이니셜이다. 애도의 함수에서 첫 번째 화살표가 지시하는 것은 ‘상실’이고, 두 번째 화살표가 지시하는 것은 대상리비도의 전이(O1에서 O2로)인데, 이 전이의 과정을 ‘애도’라고 부른다. 이때, 중요한 것은 O1≠O2이어야 한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O1이 O2에 의해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O1>O2이기 때문에 그 대체는 완벽한 대체는 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O1-O2의 차이가 애도의 크기와 정도를 결정한다.

 

우울증의 경우에는 조금 복잡한데, 먼저 첫 번째 화살표가 가리키는 것은 애도 함수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상과의 이접, 즉 ‘상실’이다. 그리고 두 번째 화살표가 가리키는 것이 ‘우울증’이다. 이 우울증의 진행과정에서 주체는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대상화된 자아(S=O로서의 $)와 원래의 자아가 차지하던 자리에 들어선 자아-이상으로서의 초자아(Superego) 사이에 자아 분열이 이루어지며(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울증 함수의 1, 2항과 3항에서의 동일한 기표 S는 ‘자아’의 자리만을 표시할 뿐이며, 실제적인 내용, 즉 기의는 다르다는 점이다. 1, 2항에서 S의 기의가 ‘자아’라면 3항에서는 ‘초자아’이다), 이 양자 간에는 애증관계, 대립관계가 형성된다. ↔가 표시하고자 하는 것이 그러한 애증/대립관계이다. 이렇듯 애도와 우울증은 그것이 함축하는 내러티브 진행과정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면, 그러한 애도와 우울증의 서사는 언제 처음 나타나는가? 그것은 애도와 우울증이 상실에 대한 반응태도라고 할 때, 인간에게서 최초의 근원적/원초적인 상실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인간에게서 애도와 우울증을 수반하는 근원적/원초적 상실은 오이디푸스 단계에서 엄마로부터의 분리이다(물론 분만 시 모체로부터의 분리를 가장 원초적인 분리체험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식적인 분리과정이 아니라 생물학적 분리(과정)이며, 인간만의 고유한 체험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반면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비록 인간이 장기간의 의존기간을 거치면서 느리게 성숙해간다는 생물학적 사실의 결과이긴 하지만, 인간만의 고유한 것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에 따르면, 대략 만 세살 반에서 여섯 살까지의 아이가 자신과 다른 성을 지닌 부모와 신체적, 정서적, 지적으로 독점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지만, 자신과 동성인 부모가 가진 우선권을 인정하게 되면서 발생한다. 이때 아이는 자신보다 우월한 동성의 부모에게 보복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며 자신의 근친상간 욕구와 살인충동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유산이라고 묘사한 초자아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이 죄책감이다(물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러한 설명에 모든 정신분석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정신분석학의 기본개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이 개념에 대한 자신의 최종적인 생각을 공식화하지 않았다. 때문에 프로이트의 리비도론 대신에 대상관계론을 주장하는 멜라니 클라인은 프로이트와는 조금 다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오이디푸스 상황을 이론화하기도 한다).

 

이러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진행과정 또한 일련의 서사적 과정을 함축하며, 그것은 애도와 우울증의 서사로 표시될 수 있다. 이때 애도의 서사는 오이디푸스적 상황을 성공적으로 해소해 나가는 과정의 서사이며, 우울증의 서사는 그렇지 못한 과정의 서사이다. 즉 애도의 서사함수 FT(S)=(S∩O1)→(S∪O1)→(S∩O2)는 FT(자아)=(자아∩엄마)→(자아∪엄마)→(자아∩초자아)로 재기술 될 수 있고, 우울증의 서사함수 FM(S)=(S∩O)→(S∪O)→(S↔$)는 FM(자아)=(자아∩엄마)→(자아∪엄마)→(초자아↔자아)로 재기술 될 수 있다.

 

이러한 서사방식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보편적 방식이지만,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애도의 서사와 우울증의 서사에 보다 잘 부합하는 것은 자아의 주관성이 극대화되고, 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성장하게 되는 낭만주의 서사이다. 이때 낭만주의 서사라는 말은 이중적인데, 그것은 낭만적 주인공의 서사이면서 동시에 낭만주의 시인 자신의 전기적 서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시인에게 있어서 창작은 자신의 또 다른 전기, 혹은 진정한 ‘자서전’이다.

 

고전주의 시인의 과제가 선험적으로 주어진 문학적 관습과 규범을 얼마나 잘 준수하느냐에 놓여 있었다면, 낭만주의 시인의 과제는 자기 자신의 문학적 생애를 창작을 통해서 기술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의 삶은 창작에 바쳐진 질료이면서 동시에 그의 창작이 궁극적으로 그려내야 할 형상이기도 하다. 이때 그가 지향하는 삶은 물론 더 이상 모방적인 삶이 아니라 자기만의 삶, 창조적인 삶이다. 그리고 시인 자신이 그러한 삶의 주체로서 새롭게 규정된다. 만약에 그러한 주체가 없다면, 새로운 삶, 새로운 사회적 관계, 새로운 세계에 대한 창조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새로운 자기창조, 혹은 자기 정립을 통해서 세계창조의 입법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는 혁명적이다. 물론 이 혁명은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아니 정치적 혁명 이전에, 혁명적인 텍스트로서의 낭만주의 텍스트의 현상성이 낳는 혁명이다(K. H. 보러에 의하면, 그와 같은 현상성에 대한 의미론적 표현형식이 내용을 갖게 되는 시기는 1820년대이며, 대표적인 예가 하이네와 들라크루아의 작품이다). 즉 낭만주의 시인은 그의 텍스트적 자아와 분리되지 않는다.

 

이 혁명적인 텍스트 혹은 텍스트적 혁명의 주체로서의 낭만주의 시인은 흔히 ‘낭만적 천재’라고 불리는바, 낭만주의 시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러한 천재로서의, 창조의 주체로서의 자기규정, 곧 자기선언이다. 낭만주의 시인에게서 유독 ‘시인’이란 자기 정체성이 자주 주제화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그러한 관심이 어떤 분리와 상실의 체험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낭만주의 문학은 주관적 자아의 절대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자아를 한정하는 주변의 모든 사회적 관습과 규범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한 의문제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자아와 객관적 세계 간의 분리가 당연히 선행되어야 한다. 그 분리는 낭만적 시인의 자기정립을 위해선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지만, 한편으론 자기정립에의 무한책임을 떠안도록 내맡겨지는 소외의 체험이기도 하다. 상실은 그것의 다른 이름이다(아래는 뒤러의 판화 '멜랑콜리아'[1514]).

 

 

시인은 바로 그러한 상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아이면서, 그것을 창작을 통해서 보상받고자 하는 자아, 승화시키고자 하는 자아이다. 거꾸로 말하면, 상실의 체험은 시인의 일상적 자아에 균열을 일으키면서 시인으로서의 자기정립에 대한 결단을 촉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한 자기결단을 통해서, 주관적 의식의 과잉으로 말미암아 자기 존재의 거처/장소를 찾아서 배회하는/표류하는 낭만주의 시인은 자기정립에의 여정의 이정표들을 세우게 된다. 그 이정표들은 시인의 앓고 있는 상실의 징후이면서 동시에 그가 그 상실을 치유하는 방식이고 그 흔적이다. 시인이 시인으로서 자신을 정립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상실의 반복적인 치유과정을 통해서이다.

 

때문에 역설적으로, 상실의 체험은 시인으로서의 자기정립에 있어서 근원적인 조건이며, 시인의 자기창조에 있어서의 가능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상실이 시인으로서의 자기정립 조건이라고 해서, 그 자기정립의 방식이 일률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인의 개성과 그가 처한 조건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마치 상실에 대한 각기 다른 반응 태도로서 애도와 우울증이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상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자기정립의 두 유형을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유형화는 사실 생소한 것은 아니다. 이미 F. 쉴러는 <소박문학과 감상문학>(1795)이라는 고전적인 논문에서 모든 시인을 소박시인과 감상시인으로 대별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소박시인은 자연스럽고 소박하며 자기 분열과 자기비판을 필요로 하지 않고, 소박한 감성에 따라 현실에 모방에만 자신을 국한하는 시인이다. 반면에, 감상시인은 회의적이고 자기 분열적이며, 정신과 감정의 갈등에 고민하는 시인이다. 전자는 자연 자체이며, 후자는 자연을 찾는 자이다)...

 

06. 07.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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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21 23:50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은 부제이고, 제목은 '푸시킨 VS. 레르몬토프'이다. 러시아 두 낭만주의 시인의 사랑시(실연시)를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비교한 글이다. 개인적으론 '푸슈킨'이란 표기를 선호하지만 지면에는 외국어 표기안에 따라 '푸시킨'으로 표기됐다.     고교 독서평설(09년 3월호) 푸시킨 VS.
 
 
pax 2006-09-12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사실 저도 우울증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는데(저 자신이 우울한 인간이기도 하고 그래서), 뭔가 우울증에 대한 필이 딱 꽂히는 기분이군요~ 그렇지만 역시 우울한게 사라지지는 않습니다.ㅠㅠ

로쟈 2006-09-12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아니라 프로작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