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학원신문'(97호, 06. 05. 30)에 로버트 버턴의 <우울증의 해부>(태학사, 2004)를 '해부'하고 있는 글이 게재되었기에 (다소 길지만) 옮겨온다. 필자는 '학내기획팀'으로 돼 있다(편집장의 작품으로 알고 있지만). <우울증의 해부>는 언젠가 '문학적 태도로서의 우울증'에 관한 자료들을 찾다가 알게 된 책인데, 방대한 분량 때문에 선뜻 건드리지 못했던 책이다(책은 2001년판의 경우 1382쪽이다. 국역본은 당연히 부분역이다). 한데, 재작년 '부재중'에 출간되어 잠시 나를 놀라게 했던 책이다. 이후에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 '대학원생들의 우울'을 다루고 있는 기획기사는 '우울증'에 대한 욕구를 다시 부추긴다. 인용문에서의 강조와 군말은 나의 것이다.

"내 글은 마치 거대한 강이 흐르듯이 때로는 급격하고 빠르게 때로는 느리고 여유 있게, 어느 곳에서는 똑바로 어느 곳에서는 구불구불, 때로는 깊게 때로는 여울지어, 때로는 흙탕물로 때로는 수정같이 맑은 물로, 때로는 넓게 때로는 좁게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그때그때 다루게 될 주제에 따라서 그리고 내 기분에 따라서 때로는 심각하게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풍자적으로,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정교하게, 때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쓸 것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당신이 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아마도 지극히 평범한 한 나그네가 될 것이다.
나그네가 된 이상 당신은 화창한 날도 만날 것이고 궂은 날도 만날 것이다. 때로는 확 트인 광활한 들판을, 때로는 꽉 막힌 좁은 산길을 걷게 될 것이다. 어느 곳에서는 비옥한 옥토를, 어느 곳에서는 척박한 황무지도 만날 것이다. 이 가운데는 그대들이 좋아할 곳도 있겠고 싫어할 곳도 있겠지만 나는 그대들을 이끌고 울창한 숲을 통과하기도 할 것이며, 덤불 숲도, 언덕도, 계곡도, 평야도 지날 것이다. 험준한 산도, 위험이 도사린 골짜기도, 이슬에 젖은 풀밭과 경작지도 지나갈 것이다."(로버트 버턴, <우울증의 해부>, 37-38쪽)

1.
-로버트 버턴(1577-1640)의 책에 대해, 위 인용만큼 정확한 설명도 없을 것이다. 이 불세출의 인물은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으로 그보다 13년 늦게 태어나 24년이나 오래 살았다. 평생을 대학에서 보냈으며(교수가 아닌 학비와 기타 비용을 면제받은 ‘스칼라’라는 장학생으로), 그가 쓴 책은 <우울증(멜랑콜리)의 해부>라는 책 한 권이다. 그는 어디론가 여행을 한 적도 없으며, 결혼도 안 했으며, 어떤 세속적 성공을 얻지도 못했다. 한마디로 도서관에서 책만 읽다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버턴 같은 삶을 원하는 사람이 혹 있을지 모른다. 평생 책만 읽다 죽고 싶다고. 그러나 적어도 버턴이 포기한 것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할 것이다. 특히 세속적 성공에 대해서는.
-오늘날 대학에 남아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는다. 더구나 인문학이라면, 사회정책적인 배려도 최하수준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마저도 아직 수업을 들어야 하는 학생 개개인에까지는 해택이 미치지 않고 있다. 적어도 박사 수료(졸업) 정도는 되어야 공금(공동 프로젝트)을 나누어먹기라도 할 수 있다. 그마저도 얼마 되지 않지만. 정말이지 오늘날 공부하는 사람들은 최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정말 파업을 하든지 데모를 하든지 해야 하는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들(구체적으로는 대학원생들)이다. 왜냐면 그들은 심각하게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시간강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무얼 하러 대학원을 갔냐? 개인의 의지에 사회적 문제로 떠맡기는 이런 물음은 기만적이다. IMF 이후 대학원생이 배로 늘었다. 이 배경에는 당시 어려운 취업환경이 있기도 했지만, 그것을 눈가림하기 위해 배로 대학원 정원을 늘리도록 한 교육 정책도 있다. 역으로 말해 대학원생 수는 개인의 의지가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제도가 결정하는 문제인 것이다. 즉 당시 정부는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대학원생을 늘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많은 룸펜 대학원생들이 등장했다. 오늘날 이들은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을 읽고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쩌면 그때야말로 태평천하였다.” 어느 시대든지 룸펜들은 비굴하다. (왜냐면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상처를 주고받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채만식 시대의 룸펜들은 고상했으며, 엄살적인 성격이 강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은 노숙자도, 정신병자도 아니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있는 성인들(실업자들, 참고로 대학원생들은 스스로를 실업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이다(*물론 이건 푸념이다. 억울하고 분한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이들 룸펜들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에서도, 유럽에서도, 미국에서도 상당한 계층을 형성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푸코의 책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정신병자나 죄수를 배제함으로서 사회통합을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룸펜들을 생산함으로 사회를 유지시키고 있다. ‘룸펜-되지 않기’는 사회적 강령이 된다. 요행이 룸펜에서 벗어난 이들도 다시 그곳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사회를 혼신을 다해 붙잡는다.

-오늘날 한국 소설에 실망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나이 먹은 늙은이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룸펜들과 동세대인 소설가들조차 룸펜 이야기는 쓰지 않는다(*봉준호의 <플란다스의 개> 같은 영화는 예외이겠다). 그들은 역사나 지적추리라는 로망스에 기대거나, 섬세한 감각이라는 감상적 논리로 몸을 맡기거나, 엽기적이거나 기괴한(그러므로 자칫 문학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것으로 멋대로 해석되는) 퍼포먼스를 연기한다. 인간은 과거의 고통은 쉽게 인정하지만, 현재의 고통을 인정하는 데는 인색하다. 따라서 (개인적이 아닌 사회적) 고통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문학동네, 2004, 겨울)이라는 강연문에서 근대소설은 죽었다고 선언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의 문학은 더 이상 시대적 고통에 대한 감각을 잃었다. 이 감각을 잃고 나면 로망스만 남는다. 역사적 소재에 집착하고, 추리적 기교를 사용하고, 감각적인 문체로 감상적 효과를 만들어내고, 엽기적인 줄거리로 놀라게 하는 이야기들만 남게 된다. 그럼, ‘고통에 대한 감각’에 강도를 부여하는 게 임무인 비평가는 어떻게 되는가? ‘고통에 대한 감각’을 들어있는 작품이 부재한다면, 비평가가 소멸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좀체 비평가들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조용히 변신했기 때문이다. 고진이 말하는 ‘내면이 없는’ 비평가란 바로 그들이다.
-우리시대 소설가의 상상력이 도달할 수 있는 곳은 ‘혁명’이 아니라 ‘전쟁’이다. 오늘날 ‘혁명’은 사회에 의해 점진적으로 수행되고 있으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룸펜을 더욱 생산할 뿐이다.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에 상상력이 도달하게 되는 것은 전쟁뿐이다(*동의하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생각이다. '전쟁'의 차폐막으로서의 혁명? 과거 레닌은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지만). 파괴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세워질 수 없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룸펜이라는 이 기괴한 실업자들은 일시에 일자리를 갖게 될 것이다. 이 엄청난 변화의 가능성에 눈을 감는 좌파는 사실상 좌파가 아니다. 솔직히 오늘날 좌파와 우파를 나누는 유일한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사상이나 논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상력에 달려있다. 속칭 좌파들의 반전운동은 그들의 상상력의 빈곤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2.
-버턴은 우울증자의 대표적인 부류로 그 자신 역시 포함되는 공부하는 자들을 들었다. 이들이 우울증에 빠지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만 든다면, 첫째 혼자서 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둘째는 가난 때문이다(*버턴은 우리의 동시대인이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부연하자면, 오늘날과는 달리 19세기까지만 해도 대학은 출세의 통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대학이 출세를 위한 기관이 된 것은 만인을 위한 ‘공공교육’이라는 이념이 성립된 20세기 이후다. 따라서 버턴 시대에 대학에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가난을 각오한다는 걸 의미했다. 결혼 같은 것은 애초부터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학자의 노동보다 더 힘든 노동은 없다. 남이 못해낸 훌륭한 업적을 남기기 위하여 불철주야 머리를 짜내고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책과 씨름하다 보면 건강, 재산, 멀쩡한 정신, 그리고 귀중한 목숨 등,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되기도 한다. (...) 그동안 자그마치 20년간 대학에서 썩었지마는, 이제 그 바라던 직장을 얻기란 대학에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나 조금도 다름없이 멀고 아득하기만 하다. 지금부터 과연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한단 말인가?
가장 가능성이 높고 동시에 얻기 쉬운 자리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 자리이거나, 대학의 강사 자리일 텐데, 그 일을 하고 받을 수 있는 돈은 고작해야 매 사냥꾼의 수입만도 못한 연봉 10파운드, 거기에 하루 세 끼 식사와 약간의 시간외 수당, 그리고 부잣집 아이들의 부모를 기쁘게 하였을 경우 혹시라도 떨어질지도 모르는 몇 푼의 부수입뿐이다."(138-139쪽)




-우리는 여기서 버턴이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이었음은 물론 크리스토퍼 말로(1564-1593)와도 동시대인이었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다 아는 것처럼 말로는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파우스트적 원형’을 창조한 인물이다. 사실 그 이전까지의 마술사나 트릭스터적 이미지가 강한 ‘민중본 파우스트’는 말로의 붓을 거치면서 학자적 인물로 바뀐다.
-이에 대해 이언 와트는 흥미로운 설명을 하고 있다. 말로의 파우스트 탄생은 당대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특히 과도한 대학생 수의 증가(1560-1590년 사이 약 30년 동안 입학생 수가 3배로 늘었다고 한다)와 이들을 위한 일자리 부족을 들고 있다. 당연 이들은 사회적 불순분자들이 되었고, 홉스는 이런 상황을 “반역의 핵심은 대학이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말로의 파우스트는 사회에 대한 불만에서 탄생한 개인주의적 인물이다. 그의 계약과 환상, 그리고 영혼 파멸도 이와 떼어내서 생각할 수는 없다.
-일찍이 T.S 엘리어트는 괴테가 햄릿을 ‘청년화’했다고 비난했는데, 어떻게 보면 그것은 비난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면 설사 어떤 판본에 햄릿이 40대로 설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나이와 상관없이 그는 여전히 청년이기 때문이다. 청년(또는 청춘)이라는 개념은 나이에 의해 구분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사회에 대한 괴리감(불만감)의 유무에 의해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것이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만들 능력이 자기들에게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불만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들에게 이런 자신감을 부여한 것은 대학교육이다. 그러나 영혼을 담보로 악마와 계약하여 사회를 바꾸겠다는 것은 사실상 절망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많은 우울증 환자들과 말로의 파우스트, 그리고 버턴의 저작은 결코 따로따로 논의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버턴의 저작을 셰익스피어와 말로가 활약한 영국의 르네상스 시기에 대한 연구서로 읽을 수 있으며, 그것은 새로운 국가의 창조라는 유토피아론으로 정리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숫자로 치자면 영(zero)이나 다름없지요.”(84쪽)라는 인식이다.






-우리는 이와 똑같은 고백을 플로베르의 <감정교육>과 슈니츨러의 <여명의 도박>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공통점은 그것이 어떤 절망감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버턴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이것을 절망 자체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익살로 비틀어버린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데모크리토스가 살았던 시대보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보다 웃기는 일이 더 많다.”(51쪽)
-버턴의 작품은 나에게 라블레 소설을 연상시킨다(*최근에 라블레의 <팡타그뤼엘>이 연속해서 번역/출간되고 있다). 통찰력 있는 주장과 허무맹랑한 논지전개 사이에서 끝없이 조롱하고 치켜세우면서 끝없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그의 입담을 따라가다 보면 정말 독자는 나그네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를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이 책을 쓴다고 명확히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을 치료하긴 했던 것일까? 만약 치료했다면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사실 그는 말로처럼 극단적으로 절망하여 악마와의 계약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는 학자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우울증을 인간의 본질로 확장시켰다.
-“모든 인간은 우울증환자다.” 이것은 인간은 누구나 병자라는 것이다. 유럽 르네상스에 대해 생각할 때 이것을 놓치면 반쪽자리 이해에 그치고 만다. 엄밀히 르네상스란 인간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발견과 찬미가 아니라, 인간의 병적 기질에 대한 발견을 의미한다. 버턴에 오게 되면 ‘사랑’도 ‘신앙’도 병일 수밖에 없다. (유럽의 마냥사냥이 맹위를 떨친 게 바로 르네상스 시기였다는 점을 잊지 말자. 또 사실 마녀기질이란 우울증과 관계가 있다: 112-113쪽 참조)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버턴이 바로 이와 같은 병 속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는 병이 없다면 ‘면역체계’도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한다. 즉 만약에 인간에게 병이 없었다면 건강이라는 것 자체도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를 신앙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고통과 고난을 당한 자만이 신을 알게 되며, 만약 그가 고통을 겪지 않는다면 그는 악행을 반복하다가 영원한 파멸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를 좀더 사회적인 맥락에서 이야기하자면, 오로지 우울증을 겪은 사람만이 유토피아를 꿈꾸게 된다는 말이다.




-1964년 장 로베르 시몬은 “버턴의 유토피아가 유토피아문학사 연구가들에 의해 왜 무시되었던 것일까?” 하는 물음을 던졌다. 피에르 메스나르는 이 책임을 방대한 저서 속 일부분에 해당되는 부분을 무시한 독자에게서 찾고 있으며, J 막스 패트릭은 유토피아상을 상상력이 넘치는 소설적 취향 속에 집어넣은 저자 자신의 실책에서 찾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의 논의를 비추어 본다면, 누구의 말이 더 타당한지는 쉽게 짐작가능하다. 실제 버턴의 유토피아론을 읽다보면 놀라운 점은 그의 유토피아론이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유토피아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그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의 공상성을 비판하며, 실현가능한 국가를 그리고 있다.
-그는 인간의 본성에게 큰 기대를 갖지 않는다. “인간은 본시 생각이 모자라는 존재이기 때문에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결과는 같소.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오.”(47쪽) 그리고 법과 정치의 중요성과 그 기능을 정확히 통찰하고 있다. “다 알면서도 눈감아 주는 것이 정치다.”(82쪽) 또 필요악으로서의 전쟁도 긍정한다. “이 세상에 전쟁하면 무조건 나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사람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이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람이다. (...) 저 세상에서나 살 사람이다.”(57쪽) 다분히 과장되고 혼란스러운 버턴의 저작 속에서 적어도 유토피아론 만큼은 냉정하게 서술되어 있는 셈이다.
-그 중에서 나의 관심을 끄는 것 중 하나가 공직이 학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 다음은 군인인데, 왜냐면 군인의 임무가 한 시대에 국한된다면, 학자의 임무는 영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의 철인 통치론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같은 견해 자체는 버턴 자신의 시대에서 나온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버턴은 학자들의 삶에 대해 말하면서 그것을 ‘슬픈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학문 탐구는 속세의 이익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돈이 있는 자들이 나라를 다스린다고 한탄한다.
"대학에서 문학이나 수학, 또는 철학 같은 순수 학문을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손해이고, 다른 사람들의 존경도 받지 못하고 후원자도 얻기 힘들고 어리석은 일인가를 일찌감치 알아차린 약삭빠른 학생들 가운데는 예술이나 역사, 철학이나 언어학과 같은 순수학문들을 그저 식탁에서 식사하는 자리에 알맞은 유쾌한 장난감이나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미는 장식품 정도로 옆으로 밀어놓고, 그 대신 법률, 의학, 그리고 신학과 같은 현실적이고도 수지맞는 학문을 공부하여 먼저 충분히 돈을 벌고 나중에 자기가 원하는 공부를 하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돈이 있는 사람은 자기 돈을 계산할 줄 안다면 족하지 따로 수학을 공부할 필요는 없다. 자기가 소유한 토지의 크기를 아는 사람은 이미 지리 공부는 다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성공과 실패를 알고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보고 자신의 행동을 바로 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뛰어난 신학자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망원경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다른 위대한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과 성과에서 나오는 광휘를 자기에게 비출 줄 아는 사람이다. 좋은 일자리를 마련할 도구를 혼자서도 마련할 줄 하는 사람이 바로 훌륭한 기술자다."(143쪽)





-버턴이 말하는 ‘우울증(멜랑콜리)’는 오늘날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우울증’과는 차이가 있다. 그가 말하는 ‘우울증’은 매우 넓은 의미로(때로는 인간본성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문맥에 따라 여러 레벨로 사용된다. 따라서 그 세부적 문맥과 더불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학자의 우울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에서 버턴은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적을 하고 있다. 첫째 ‘혼자-있기’가 인간을 ‘괴물’로 만든다는 말과, 둘째 우울증이 ‘늙음(구체적으로는 중풍)’과 관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일찍이 루소는 물 속에 빠진 아이를 본능적으로 구하려는 마음(측은지심)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 ‘괴물’이라고 말했다. 흔히 프랑켄슈타인으로 대표되는 ‘괴물’의 계보(오늘날 우리소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를 말할 때 이것을 빼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모두 어불성설이다. 또 많이 지적되는 것이지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처녀작이 <노년>이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어떤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공부하는 이들, 그들은 사실상 애늙은이이자 괴물들로 어떤 절망적 상태를 의미한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오늘날의 소설들이 다루어야 괴물들은 말 그대로 기괴하고 섬뜩한 장난감 같은 괴물들이 아니라(내면 없는 비평가들은 이것들을 그럴싸하게 포장하지만), 바로 오늘날의 룸펜들이다.
-유토피아는 우울증(멜랑콜리)의 증상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유행어가 된 수많은 ‘멜랑콜리’ 중 유토피아가 부재하는 멜랑콜리는 모두 가짜이다. 멜랑콜리는 필연적으로 유토피아라는 면역체계를 만들어낸다. 만약 오늘날이 멜랑콜리의 시대라면 오늘날이야말로 유토피아가 요구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혁명이 아니라 전쟁이다(*모두가 룸펜이 아닌 이상 '름펨의 시대'라거나 '멜랑콜리의 시대'란 말에는 다소간에 과장이 포함돼 있다.하지만, 이 글이 대학원신문에 게재되었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멜랑콜리가 요구하는 상상력이란 바로 이런 것이며, 그것은 오로지 룸펜들에게서만 가능하다(*룸펜의 사회학적 인종은 '니그로'이다). 다시 말해, 이미 죽어버린 문학은 로망스 작가나 내면 없는 비평가가 아니라, 오직 전쟁을 꿈꾸는 룸펜들에 의해서만 되살아날 수 있다. 모든 것은 0(zero)에서 나온다. 만국의 룸펜들이여! 상상을 멈추지 말라.
06. 06. 16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