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에 대학신문에서 옮겨오던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마지막 편은 자크 랑시에르이다(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045). 알튀세르 사단에 속한 철학자로 국내엔 처음 알려진 듯하지만 알튀세르와의 '결별' 이후에 그가 전개한 독자적인 철학이 국내에 소개된 적은 없는 듯하다(여러 권의 저작이 번역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개인적으론 짧은 책들을 쓴다는 것, 문학과 영화를 아우른다는 것 등등에 매력을 느껴서 대부분의 영역본을 긁어모은 철학자이기도 하다(주로 지젝의 언급을 통해서 만나보던 참이었다). '평등의 원리에 대한 옹호'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 아래 기사가 짤막한 길잡이가 되어줄 듯하다(필자는 알라디너들에게 '발마스'란 이름으로 더 익숙한 진태원씨이다).   

대학신문(07.11. 26)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⑩ 자크 랑시에르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는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더불어 21세기 벽두 프랑스 철학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알튀세르의 후예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불화』(1995),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1998),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2005) 같은 혁신적인 정치철학 저서들뿐 아니라, 지적 평등을 교육의 기초로 제시하는 『알지 못하는 선생』(1987)에서부터 아날학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역사의 이름들』(1992)을 비롯해 문학, 영화 및 미학에 관한 독창적인 작업으로 세계 학계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다. 이처럼 그가 광범위한 주제에 관해 많은 책들을 출간하고 있지만, 그의 저술 전체는 단일한 주제, 곧 근원적인 평등의 원리에 대한 다양한 변주로 이해될 수 있다.

‘평등의 원리에 대한 옹호’라는 문구는 진부한 느낌마저 주는 것이 사실이다. 평등을 반대하든 찬성하든 간에, 철학자 또는 사상가치고 평등에 관해 한두 마디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랑시에르가 옹호하는 평등은 기회의 평등이나 조건의 평등, 심지어 결과의 평등도 아니다. 그것은 원리로서, 공리(axiom)로서의 평등이다. 곧 평등은 달성해야 할 (또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나 과제가 아니라, 항상 이미 모든 인간의 행위 속에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 이해하는 정치 역시 이러한 평등 원리의 옹호와 다르지 않으며, 이는 또한 올바른 의미의 민주주의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 사람들은 실제로 평등할까? 가령 지적 능력의 차이는 어떨까? 우리가 알다시피 천재와 바보, 수재와 둔재, 세계적인 석학과 범인(凡人) 사이에는 부인할 수 없는 능력의 차이, 괴리가 존재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차이를 좁히려는 노력이 교육의 주요 목표 중 하나가 아닐까?

The Ignorant Schoolmaster: Five Lessons in Intellectual Emancipation 

놀랍게도 랑시에르는 이러한 차이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알지 못하는 선생』은 19세기 네덜란드로 이주한 장 조제프 자코토(Jean-Joseph Jacotot)라는 프랑스 교사의 경험을 들려준다. 네덜란드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 불어 선생은 불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네덜란드 학생들이 불어-네덜란드어 대역본 책 한 권을 교사의 가르침 없이 그들 스스로 읽으면서 불어로 말하고 글을 써나간다는 놀라운 사실을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의 교훈은 무엇일까? 랑시에르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교육이란 지식을 소유한 스승이 무지한 제자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과정이 아니라는 점이다. 교육은 학생들(또는 무언가를 알려고 하는 사람들 일반)이 이미 지니고 있는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발휘하고 연마해가는 과정이지, 지적으로 우월한 누군가가 지적으로 열등한 이들을 가르치고 이끌어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이는 곧 지식의 위계, 지적 능력의 격차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교육의 행위 자체는 항상 이미 지적 능력의 평등을 전제하고 있다. 누군가가 이미 알지 못한다면, 이미 알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교육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지적 평등의 원리는 정치에 관해, 민주주의에 관해 새로운 빛을 비춰준다. 랑시에르는 서양 정치사상의 역사 전체는 민주주의의 불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논증의 역사라고 간주한다. 왜 민주주의란 불가능한 정치일까? 또는 적어도 최악의 정치일까? 그것은 민주주의가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두지 않는, 다시 말해 어떤 특별한 통치의 능력도 인정하지 않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통치자가 될 수 있고 또 누구나 피통치자가 될 수 있는 정치,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 자체이며, 여기에는 모든 사람의 평등에 대한 공리가 깔려 있다. 통치에 특별한 자격을 가정하는 것은 사회적 분업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는 또한 능력의 차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추첨이야말로 민주주의에 걸맞은 제도이며 선거는 본질상 귀족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곧바로 다음과 같은 비판들이 제기된다. 과연 전문적인 지식과 자격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현대 사회와 같이 복잡한 사회를 제대로 통치할 수 있을까? 더욱이 현대 사회의 대중은 공적인 문제에는 무관심하고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평등한 소비 주체들일 뿐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등만을 구현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우파와 좌파의 구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랑시에르의 주장은 황당한 유토피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는 기존 제도권 정치 안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이들이 통치하거나 사회적인 몫의 분배 질서를 뒤흔드는 일이 계속 되풀이돼 왔다. 고대 그리스의 빈민들의 반란이나 파리 코뮌, 68 운동 등은 그에 대한 증거들이다. 따라서 이는 적어도 유토피아가 아니라 하나의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이러한 사건의 분출은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번득임이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랑시에르는 거부할지도 모르지만, 그가 좀 더 대결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왜 랑시에르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늘 예외적인 사건, 봉기로만 존재하는가? 지속적인 제도 속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은 불가능한가? 평등의 원리를 지속적인 과정 속에서 구현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니, 그 이전에 대중이 스스로 행위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진태원_서울대 철학과 강사)

07. 11. 26.

P.S. 랑시에르의 많은 저작 중에 가장 먼저 읽으려고 하는 책은(사실 미뤄둔 지가 꽤 된다) 슬라보예 지젝이 서문을 쓰기도 한 <미학의 정치학>이다. 얇은 책이므로 이번 겨울방학때는 시간을 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 전에 번역서가 나온다면 더 좋겠지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람혼 2007-11-26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랑시에르는 개인적으로도 지속적으로 읽고 있는 철학자인데, 여러모로 반가운 글이군요. 이 코너의 특성상 일단 전체적인 윤곽만을 보여준다는 단점이 있습니다만, 아마도 이 코너의 '장점'이 바로 이러한 '단점'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ㅡ혹은 뒤로ㅡ부가될 로쟈님의 코멘트가 기대됩니다.^^

로쟈 2007-11-26 18:41   좋아요 0 | URL
제 코멘트는 기대에 못 미칩니다. 랑시에르는 저에게 아직 미래의 철학자라서요.^^;

자꾸때리다 2007-11-26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박사님 한국 컴백하셨더군요 발박사님 강연도 들어봤습니다 물론 약속 땜시 다 못 듣고 나왔지만요

로쟈 2007-11-26 21:54   좋아요 0 | URL
네, 무사귀환하셨나 봅니다. '귀국보고회'는 아직 없지만요...

자꾸때리다 2007-11-27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당황스러운 내용이기는 하네요 특히 수재 둔재 차이를 부인한다는 건... 저희 학과만 봐도 저는 쩔쩔매는 유기화학을 어떤 사람은 술술술 외우던데

로쟈 2007-11-29 01:06   좋아요 0 | URL
그런 차이의 존재와 그에 대한 차등적 대우는 무관하다는 발상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