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독자들은 이미 알만한 소식이겠지만, 얼마전 황순원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의 기린아'임을, 게다가 '상복 많은 작가'임을 다시금 입증한 김연수의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문학동네, 2007)이 출간됐다. 관련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얼마전엔 하진의 소설 <기다림>(시공사, 2007)까지 번역해내면서 '투 잡'에 나선 이 작가의 행로가 어디로 귀결될지 주목된다(데뷔작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세계사, 1994)을 내던 '새내기 작가'도 어느새 '중견급'이 되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월은 그냥 무심히 흘러가는구나)...  

한국일보(07. 10. 01) "과거의 재구성, 억측 아닌 구원일 수도"

“이전엔 주로 주제를 명확히 드러내는데 집중했다면 이번 작품은 이야기에 중점을 뒀습니다. 이야기가 자유롭게 흘러 나오도록 방치를 했다고 할까요. 그게 장편의 속성에도 맞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소설가 김연수(38)씨가 장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문학동네 발행)을 펴냈다. 문학 계간지 <문학동네>에 6회에 걸쳐 연재했던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을 제목을 바꿔 출간한 것으로, 경장편 <사랑이라니, 선영아>(2003) 이후 4년 만에 낸 네 번째 장편이다. 최근 장편 집필에 집중하고 있는 김씨는 2004년 연재 탈고한 <밤은 노래한다>도 내년 초 출간할 예정이다.

대학 총학생회 간부인 ‘나’는 1991년 상부 조직 지시로 대학생 방북단의 밀입북을 도우려 베를린에 파견된다. 그곳에서 우연히 80년대 한국에서의 삶에 관한 충격적 고백이 교차 편집된 비디오를 보고 그 다큐 속 화자이자 감독으로 알려진 영화운동가 강시우와 접촉한다.

그러나 강시우는 명문대 출신의 천재 영화감독으로 신분을 세탁해 독일에 잠입한 안기부의 프락치이며, 다큐는 그를 세뇌하기 위해 안기부 직원이 촬영한 것임이 밝혀진다. 엄청난 분량의 문헌 조사를 통해 이야기의 세부까지 정교하게 구성하는 것으로 유명한 김씨의 장인적 면모는 이번 작품에서도 진가를 발휘한다.

하지만 여전히 작가는 매끄럽게 되살린 ‘공식적 역사’가 아닌, 개인 및 개인의 ‘주관적 역사’에 방점을 찍는다. ‘나’는 운동권 동지이자 연인인 정민과, 안기부의 세뇌로 두 번의 다른 삶을 살아온 강시우와 끊임없이 과거사를 되짚으며 우리가 누구이고 왜 지금 여기서 만나게 됐는지를 납득하고자 애쓴다.

‘나’의 조부와 강시우의 부친은 둘 다 입체로 볼 수 있는 옛날식 누드사진을 지녔었고, 자살한 정민의 삼촌이 마약 소지로 체포될 당시 강시우의 집안은 2대에 걸쳐 히로뽕을 밀무역하고 있었다. 등장인물들이 자신들의 조우를 비범한 인연으로 여기면서 발견하는 이런 ‘사실’들은 좋게 말해 ‘합리적 추론’이고 나쁘게 말하면 ‘억측’이다. 무엇 하나 확실하고 견고한 것이 없다.

그들도 알고 있다. “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사니까. 처음에는 실제로, 그 다음에는 회고담으로.”(384쪽). 하지만 덧붙인다. “어쩌면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들도 누군가가 지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이야기들은 더없이 중요했다.”(391쪽) 김씨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고 하는 이들은 과거를 재구성하게 마련”이라며 “그런 재구성은 억측이 될 수도 있지만 삶이란 우연의 연속 속에서 우리를 구원해주는 장치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삶은 짐작과 다르기 십상인 ‘뿌넝숴(不能設ㆍ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의 세계라 말하면서도 작가는 그 도저한 허무에 굴하지 않고 자신과 타인에 대한 탐색과 이해를 멈추지 않고 있다.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는 그의 정신은 ‘프로 소설가’를 자처하는 그의 직업 윤리만큼이나 독자에게 깊은 신뢰를 준다.

이번 작품을 비롯, 최근 들어 연애담이 부쩍 늘었다는 질문에 김씨는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책임 윤리가 사라진 90년대 이후,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하는 유일한 통로가 연애”라며 “연애를 통해서라도 자신만이 아닌 타인을 위해 살아보는 것은 도덕적이고 인간다운 태도”라고 말했다.(이훈성 기자)

07. 10. 01.

P.S. 겸사겸사 황순원문학상 수상자 인터뷰기사도 옮겨놓는다.

중앙일보(07. 09. 19) 김연수 “소설은 전문기술로 쓰는 공산품”

김연수는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작가다. 묵직한 작품세계를 선보인다고 해서 교양소설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잘라 말하면, 어딘지 한참 부족한 느낌이 인다. 당장 김연수가 섭섭하다고 할 게 분명하다.

올해 황순원문학상 수상작 ‘달로 간 코미디언’은, 말하자면 김연수를 빼닮았다. 소설은 김득구에 관한 얘기지만 결코 82년을 재현하는데 머무르지 않는다. 훨씬 더 많은 걸 작가는 소설 속에 꾹꾹 쟁여놓았다. 작가와 인터뷰를 빙자해 많은 시간 얘기를 나눴다. 그 대화의 주요 대목을 그대로 옮긴다. 워낙 얘깃거리가 많다 보면 이럴 수밖에 없는 거다.

-김연수는 어렵다.
“작가로서 내 소설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독자가 그렇게 느낀다면 어쩔 수 없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소통을 염두에 둔 문학 아닌가.
“물론 그렇다. 나는 내 소설이 왜 어렵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어렵다면 증거를 대라.”

-물론 댈 수 있다. 소설이 복잡하다. 여러 서사가 꼬여 있고 엉켜 있다. 소설 한 편에 너무 많은 걸 담으려고 한 듯한 인상이다. ‘달로 간 코미디언’도 마찬가지다. 김득구 얘기를 하려면 김득구 얘기만 할 것이지 왜 자꾸 다른 얘기를 하느냐. 연애 얘기로 시작하는 건 뜬금없어 보인다.

김득구는 실존인물이다. 그 사건을 직접 말하는 건 소설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소설에서 김득구란 이름을 끝내 쓰지 않았다. 김득구 사건에서 소설이 비롯됐지만 막상 이름은 쓸 수 없었기에 여러 장치가 필요했다. 여자가 있어야 했고, 그 여자의 실종된 아버지가 있어야 했고, 그 아버지의 실종을 추적하는 단서가 있어야 했다.”(※소설가 ‘나’가 한 여자로부터 실연을 당하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그 여자의 아버지는 80년대 유명했던 코미디언이다. 그 코미디언이 김득구 일행이 돼 미국에 원정응원을 갔다가 실종된다. 소설은 21세기인 오늘과 80년대를 수시로 오간다)

-그러다 보니 너무 복잡해진 거 아니냐. 그럼 작가가 한 문장으로 ‘달로 간 코미디언’의 주제를 말해보시라.
“소통의 문제다. 그게 안 보이다니…, 실망이다.”

-왜 하필 80년대로 건너갔나. 김연수는 90년대 작가 아니었나.
“시대가 구분된다고 해서 삶 역시 구분된다고 믿지 않기를 바란다. 80년대가 있어 90년대가 있었고 오늘이 있는 거다.”(※김연수는 1970년생, 89학번이다. 다시 말해 386세대의 끝물이다. 이념의 시대가 무너질 즈음 그의 청춘은 시작됐다. 그래서 김연수에겐 세상이 온통 뒤죽박죽이던 90년대 초반이 배경인 작품이 여럿 된다. 문단에서 김연수는 90년대란 세대 의식 속에서 해석돼 왔다)



-왜 이 소설을 썼나.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간 적이 있다. 거기 카지노 안에는 TV 모니터 수십 개가 설치돼 있었다. 도박에 지친 자들을 위한 편의시설이었다. 20여 년 전 한국에서 건너온 권투 선수의 죽음이 저 모니터 중 하나에서 중계됐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건 일종의 ‘개죽음’이었다. 카지노 손님에게 잠깐의 여흥을 주려고 마련했던 이벤트에 한국인 청년은 목숨을 걸었다. 소설은 그 비극에서 시작됐다.”

-소설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그러면 돈을 벌 수 없다.
“돈은 번역을 하거나 다른 글을 써 벌 수 있다. 나에게 소설은 신성한 것이다. 나는 소설가다.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을 쓴다면 그건 소설가가 아니다. 소설가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을 쓰기 위해 나는 무진 애를 쓴다. 나에게 소설은 일종의 공산품이다.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작품이란 뜻이다.”

-얘기를 듣고 나니 더 모르겠다.
“나는 소설을 쓰는 소설가다. 프로 소설가다.”

김연수는 말 그대로 전업작가다. 오로지 글을 써 밥을 번다. 그러면 시장에서 잘 팔릴 궁리를 할 법도 한데, 그는 그런 쪽엔 영 젬병이다. 김연수는 다만 소설의 격을 갖춘 소설을 쓰고 싶을 따름이다. 독자의 호응은 그 다음이다. 문득 한 늙은 도공의 고집이 떠오른다. 제 목숨 바쳐 도자기를 빚는 도공 말이다. 이런 얘길 슬쩍 비쳤더니 버럭 성을 낸다. “내 소설, 재밌다니까!”(글=손민호 기자)


 
◆소설가 김연수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94년 작가세계로 등단
▶소설집 『스무 살』(2000년)『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2002년)『나는 유령작가입니다』(2005년) 장편『굳빠이, 이상』(2001년) 등 다수
▶동서문학상(2001년) 동인문학상(2003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5년) 대산문학상(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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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는 작가인데 배고프기 싫어요
    from 내 안에 아직 2007-11-17 15:00 
    _지난달에 휴가 나갔을 때 집에서 <창작과 비평>계간지를 읽었습니다.전에 형이 정기구독하던 거였는데요,마악 수능치고 놀기 바쁜 저한테는도무지 읽기 힘든 이야기들을 하고 있어서문학도도 아니면서 뭐 이런 책을 보는가 싶었더랬습니다.요즘엔 좀 이야기가 달라져서 저도 된장삘을 즐기게 되었기 때문에'어디 한번'이란 마음으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정기구독하던 옛날건 아니고 2007년 여름호였으니까 최근거였죠.'한국의 장편소설을 말하다'였나, 특집 주...
 
 
퍼그 2007-10-01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이 인터뷰 읽을 때도 느낀 거였지만, 인터뷰 하시는 분이 어째 꼬투리만 잡고 있는 것 같네요. 그저 "어렵고 돈이 안 된다"는 얘기밖에 없고요. "많은 시간 얘기를 나눴"다는데, 정말 이게 "주요 대목"인지, 다른 얘기들은 어떤 것들이었는지 궁금한데 말입니다.

로쟈 2007-10-02 00:25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김연수는 재미없다는 평도 듣지만 매니아들도 있는데 말이지요...

허리우스 2007-10-01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에서도 오타가 나네요. 오타인지 모르는 것인지. 뿌넝수어(不能說)이 아닐까요. 항시 고맙게 로쟈님의 글 읽고 있습니다. 한겨레 연재와 담비의 연재도 재밌게 읽고 있고요. 건승하시길.....

로쟈 2007-10-02 00:26   좋아요 0 | URL
'연제' 오타는 고치셨군요.^^ '숴'나 '수어'는 비슷한 것 같은데요.^^

parksang 2007-10-02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갔다가 딱히 맘에드는 게 없을 때, 문지시선 아니면 이승우소설을 사오던 기억이 있어요. 안타는 친다는 믿음을 주던 작가.. 요새 제가 김연수에게 품은 생각입니다. 동시대 기린아들과는 달리, '실패할지 모르지만, 좌절할지도 모르지만(실패할거 같지만, 좌절할거 같지만) 끝까지 한번 가본다' 라는 심사가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그 과정이 겉핥기도 아니고 상투적이지도 않죠. 진짜로 가본거니까. 다른 기린아들은, 출발은 안하고 자학의 제스추어 혹은 재기발랄한 관전평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두번은 재미있지만요, 자꾸 반복되면 어리광 내지는 게으름 같아보여요.

로쟈 2007-10-03 13:17   좋아요 0 | URL
저도 공감합니다.^^

끼사스 2007-10-03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기법을 따지면 잘 모르겠지만 '뿌넝숴'는 김연수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속 단편 제목이기도 합니다.

wnsgml 2007-11-17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씨 책보고 혹시 여기도 김연수씨 글 있을까 싶어서 왔는데 역시 안보시는 책 없는 것 같애요

로쟈 2007-11-18 15:21   좋아요 0 | URL
보는 건 읽는 것과는 다릅니다. 많은 책을 보지만 그보다 훨씬 적은 책을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