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들 읽기'를 위한 또다른 '펌푸질'이다. 도우미로 나선 이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씨이고 그가 추천하는 시집(이라기보다는 결구라고 해야겠지만)은 이영광의 <그늘과 사귀다>(랜덤하우스, 2007)이다(http://h21.hani.co.kr/section-021158000/2007/09/021158000200709130677037.html). 시인의 두번째 시집이라지만 나는 아래의 소개를 읽고서야 시인의 이름을 기억해두게 됐다(앞으로도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잊어버릴 수 있는 이름이 아니잖은가!). 주로 거론되고 있는 시는 '동쪽바다'인데, 동쪽바다는 나로선 아주 친근한 곳이어서(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내가 자란 곳은 된다) 김연수의 소설에서 '7번 국도' 이야기를 들을 때만큼의 반가움을 갖게 된다(비록 시는 암울함으로 마무리되고 있지만). 전체 시가 궁금하신 분들은 나처럼 간단히 퇴근길에 서점에 들러 한권 챙기시면 된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제목은 나의 것이 아니다.

한겨레21(07. 09. 13) "당신은 좆도 몰라요"

수많은 문학상이 있다. 대개는 받을 만한 사람이 받는다. 바로 그게 문제다. 늘 받을 만한 사람이 받다니, 이럴 수가, 이렇게 지루할 수가. 불만은 또 있다. 왜 심사의 대상은 늘 ‘한 편의 작품’일까. 예컨대 이런 식은 어떤가. 올해의 제목상, 올해의 도입부상, 올해의 여성 캐릭터상, 올해의 묘사상, 올해의 아포리즘상 등등. 물론 작품이라는 것이 분리 불가능한 유기체인 줄은 잘 알고 있지만, 1등만 뽑는 시상식의 상상력이 하도 따분해서 하는 소리다.

이영광의 두 번째 시집 <그늘에서 쉬다>(랜덤하우스코리아·2007)를 읽었다.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체적으로 아름답고 견고한 시집이다. 이 시집에는 이를테면 유배된 선비의 순결성 같은 것이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 아름답고 견고하지만, 좀체 틈을 주지 않는 그 염결성이 다소 답답하기도 했다. 그러다 읽은 한 편의 시에는 드물게도 쓸쓸한 투정 같은 것이 배어 있어서 외려 그게 마음을 끌었다.

“동쪽 바다로 가는 쇳덩이들,/ 짜증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붕붕거린다, 꽁무니에 불을 달고// 이 지옥을 건너야 極樂 해변이 있다”는 구절로 시작된다. 동해로 가는 차들의 행렬. 교통체증이 심했던지 ‘짜증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차들이 악다구니 중이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시인은 ‘지구는 공사 중’이라고 투덜거리며 찻집으로 길을 낸다. 찻집 벽에는 고구려 벽화가 그려져 있고 시인은 ‘당신’에게 편지를 쓰듯 읊조린다. “뉴 밀레니엄은 어쩌면 벽화의 시대로 남지 않을까요.” 이어지는 내용이다.



폭탄 세일과 재탕 우주 전쟁과 기본 삼만 원을/ 숙식 제공과 月下의 도우미들과/ 흡반 같은 골목을 거느린 벽의 이면,/ 벽화는 모든 벽을 은폐해요/ 모든 벽화는 春畵예요// 세상은 궁극적으로 형장이고/ 인간은 인간의 밥이고/ 에로가 어쩔 수 없이 애로이듯/ 이건 苦行이야, 마시고 싶어 마시는 게/ 아니야, 하고 내가 주정했을 때/ 당신은 암말 없었죠 블라인드 너머/ 오색의 길을 오색의 길을 오색의 길을/ 보고 있었죠 이 지구는 어쩌면/ 버려진 별이 아닐까, 신음하듯.”(‘동쪽 바다’에서)

시인은 “벽화는 모든 벽을 은폐해요”라고 적었다. 우리는 이렇게 읽었다. 이제 주위의 모든 벽들은 죄다 광고판이다. 그것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벽화쯤 될 것이다. 그 벽화들은 초자아를 잃어버린 우리 시대의 욕망들을 음란하게 드러낸다. “모든 벽화는 춘화(春畵)예요.” 게다가, 벽화가 벽을 감추듯, 우리 시대의 춘화들은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곳곳의 ‘벽’들을 용케 감춘다. 그걸 알기 때문에, 고행하듯 술을 마시고, 버려진 별을 보듯 지구를 본다.

“돈 내고 받아드는 영수증처럼 허망한 당신의/ 오랜 병력과 어둠과 온몸이 부서질 듯한 체념을/ 가슴으로 한번 받아볼까요 나는 잘못/ 살았어요 살았으니까 살아 있지만/ 당신과 못 만나고 터덜터덜 가는 길에/ 동쪽 바다 물소리 푸르게 들리고,/ 내가 밤하늘 올려다보며 당신 생각을 할까요/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두루미처럼 울까요/ 당신은 좆도 몰라요”

같은 시의 끝부분이다. 당신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는 길에 잃어버린 유토피아처럼 동쪽 바다 푸른 물소리가 들린다. 같은 시의 다른 대목에서 시인은 “요컨대 인간은 전쟁 중이죠“라고 적었다. 말하자면 그에게 2000년대는 ‘지구는 공사 중, 인간은 전쟁 중’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 구절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잘못 살았다, 잘못 살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라는 시인의 자조에도, 그의 저 쓸쓸한 귀가에도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진짜 매력은 이런 근엄한 메시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투정 부리듯 늘어놓는 말들의 쓸쓸한 율동에 있다. 자학인 듯 가학인 듯 이어지던 말들이 제 쓸쓸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무너진다. “당신은 좆도 몰라요.” 세상과의 불화가 그리움을 키우고, 너무 큰 그리움은 때로 화를 키운다. 욕설이 이렇게 물기를 머금을 수도 있구나. 이 시를 ‘올해의 결구(結句)상’ 후보로 추천한다.(신형철_문학평론가)

07. 09. 16.

P.S. '손민호기자의 문학터치'에서도 <그늘과 사귀다>가 언급되고 있어서 옮겨놓는다. 

중앙일보(07. 06. 12) 밑바닥에서 꿈을, 죽음에서 삶을

한 달쯤 전 나란히 나온 시집 두 권을 말한다. 부족한 지면 탓에, 아니 게으름 때문에 신간(新刊)이 되지 못하고 구간(舊刊)이 되어버린 시집이다. 시인 제위에 마냥 죄스럽다. 한편으론 뿌듯한 마음도 있다. 남들이 무심코 지나친 시집을 홀로 펼칠 때의 기분은, 횡재를 맞은 듯이 짜릿하다.

박영희(44)의 시집 '즐거운 세탁'(애지)과 이영광(41)의 시집 '그늘과 사귀다'(랜덤하우스). 두 시집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하나는 비루한 삶에서 희망을 길어올리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그늘에서 삶의 기운이 돋아난다.

두 시인 모두 문단에서 밀어주거나 끌어주는 이 없다는 것도, 그런데도 시와 함께 산다고 주저 없이 밝히는 것도 닮아있다. 박영희는 "시인의 누명을 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부끄럽다"고 적었고 이영광은 "다름 아닌 시와 더불어 고행(苦行)하게 된 것이 행복하다"고 적었다. '누명'과 '고행'에서 시를 업(業)으로 삼는 자의 '자발적 버거움'이 읽힌다.



# 삶을 노래하다

여기 한 편의 시. 읽는 요령이 있다. 시가 묘사하는 풍경을 눈앞에 그려보는 것이다.

'저울눈금을 확인한 고물상 주인이 ㎏당 50원 하는 폐지를 부리다 리어카 밑바닥에서 젖은 라면상자 두 개를 발견하고는 이런 일이 벌써 한두 차례 아니라며 남은 이보다 빠지고 없는 이가 더 많은 노인을 다그치자 재생이 가능한 폐지를 주워온 노인네는 요 며칠 궂은 날씨를 탓하여 본다.//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고물상에서는 눈물이 젖어도 폐지가 젖어서는 안 된다.'

'즐거운 세탁'의 맨 앞에 실린 시 '고물상을 지나다'의 전문이다. 고단하고 퍽퍽한 고물상 노인의 삶이, 읽는 이의 눈을 할퀸다. 이 시는 전에 본 적이 있다. 박영희가 쓴 르포집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삶이 보이는 창)에서다. 시인은 거기에서 우리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고물을 줍는 노인들의 삶을 묵묵히 전한 다음, 시인은 앞의 시를 적어두었다. 그리고선 "아프면 눈물이 나오지만 고통스러우니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 시의 제목은 지금과 달랐다. '삶'이었다. 하여 삶은, 고물상의 젖은 라면상자다.



# 죽음을 기억하다

'그늘과 사귀다' 초입에서 이영광은 '아버지 세상 뜨시고/몇 달 뒤에 형이 죽었다'('떵떵거리는'부분)고 부고(訃告)를 쓴다. 이어 한사코 죽음만을 기록한다. 아래는 그 세목(細目)이다.

①염습(殮襲):관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몸이 씻겨지는 동안,/다른 몸들이 기역 니은 리을로/엎드려 우는 동안('황금 벌레' 부분)

②출상(出喪): 수양버들 춤추는 길에/상여 하나 떠가네/제 발로는 더 이상 걷지 못하는 자의 집,/여러 몸이 메고 가네('수양버드나무 채찍'부분)

③하관(下棺):취한 몸을 리어카에 실어와 아랫목에 눕히듯/관을 내린다/…/맞지 않는 옷을 입고도 오늘은 신경질이 없어라/난생처음 오라를 지고도/몸부림이 없어라('나무 금강로켓'부분)

④기일(忌日):제상은 그의 돌상,/뼈에 붙은 젖을 물려주고/숟가락 쥐여주고/늙은 집은 이제 처음부터 다시 그를 키우리라('음복'부분)

⑤ …그 이후:나는 그들이 검은 기억 속으로 파고 들어와/끝내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고/떵떵거리며 살기 위해/아주 멀리 떠나버린 것이라 생각한다('떵떵거리는' 부분). 하여 죽음은, 산 자의, 아니 죽음에 채 이르지 못한 자의 영역이다.(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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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16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 놀라 클릭했다는 --;

로쟈 2007-09-16 19:32   좋아요 0 | URL
제 탓은 아닙니다.^^;

LAYLA 2007-09-16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좋아요. ^^ 로쟈님 덕택에 알았네요

로쟈 2007-09-17 00:27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

수유 2007-09-16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도 시지만, 신형철의 '말들의 쓸쓸한 율동'이란 표현에 무릎을 치네요. 제가 너무 옛시인속에 살았나 봅니다...좋은 시인들이 있었네요..겨울방학때쯤 한번씩은 읽어야겠습니다..신형철의 평론들도..

로쟈 2007-09-17 00:28   좋아요 0 | URL
신형철 평론집은 여름에 나온다고 했었는데 조금 늦어지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