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신문에 게재한 글을 옮겨놓는다. '21세기의 사유들'이란 기획연재의 첫번째 꼭지로 나간 것인데, 주말에 '초읽기'에 몰리면서 쓴 글들 중의 하나이다. 기획의 취지는 이런 것이다. "사상과 현실이 유리되고 있는 시대에 그 관계를 다시 활발히 밀착시키고자 하는 사상가들이 있다. 그들이 이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시대의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어떤 사유를 제시하고 있는지 알아본다." 하지만 취지와 무관하게 나로선 '펑크'를 내지 않는다는 데 더 주안점을 둔 것이어서 결과적으론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할 수 있겠다(어쨌든 민폐는 면했으니까). 물론 '고생한' 편집자는 생각이 다를 수 있겠다(초고에서의 '-이다'형 어미들이 '-다'로 수정되면서 글은 좀더 스피디해졌다). 미안한 마음을 적어둔다.

대학신문(07. 09. 03)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라캉주의 분석가이자 포스트모던 철학자이고 문화비평가다. 혹은 자신의 표현을 빌면, ‘정통 라캉주의적 스탈린주의자’다. 그는 히치콕, 레닌, 오페라, 9ㆍ11 테러, 인권, 근본주의, 사이버공간, 포스트모더니즘, 다문화주의, 전체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등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많은 책들을 썼다. 그가 목표하는 바는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과, 대중적 환상 혹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신분석적 폭로다. 그 자신의 겸손한 정의에 따르면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그가 다룬 거의 모든 주제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가장 먼저 재고의 대상이 된 건 이데올로기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해인 1989년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으로 영어권 지식계에 ‘정식’ 데뷔한 것은 우연의 일치이지만 상징적이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했던 그 시기에 그는 이데올로기의 바깥은 없다고 주장하며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했다. 그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이름은 ‘냉소주의’다.

냉소주의는 더이상 “그들은 자기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는 마르크스식의 허위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한다”는 역설로 규정된다. 계몽된 허위의식의 역설이다. 가령, 우리는 지폐가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 ‘알지만’ 돈에 대한 물신주의적 태도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급진적’ 지식인들은 이민자의 온전한 권리와 국경 개방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지식인으로서의 특권적 지위가 계속 보장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무지’의 폭로는 더이상 아무런 파괴력도 갖지 못한다.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행위와 일상에 구조화돼 있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많이 믿는다.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지난 세기에 두 가지 유토피아의 종말을 경험했다. 하나는 70여년을 버티던 ‘정치적 유토피아’로서의 현실 사회주의의 종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후 10여년을 구가했던 ‘전지구적 자본주의’, 곧 자유민주주의 유토피아의 종말이다. 전자의 종언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 베를린 장벽 붕괴였다면, 후자의 종언을 보여준 ‘실재적’ 사건은 바로 2001년의 9ㆍ11이다. 이러한 종말 이후에, 새로운 갈등의 장벽들이 실재적 역사로 회귀했다. 따라서 유토피아의 종말 이후에 우리가 ‘역사의 종말’에 접어들었다고 하는 바로 그 관념이야말로 유토피아적 환상이다.

사실 이념이라는 대타자(the Other)의 몰락 이후에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고 관용적이며 쾌락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부자유를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기에 자유롭다고 ‘느낄’ 따름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오늘날의 쾌락주의는 절제의 쾌락주의다. 카페인 없는 커피나 섹스 없는 섹스, 혁명(유혈) 없는 혁명에 대한 기대와 권장에서 볼 수 있듯이 법의 부재는 아예 금지를 일반화한다.

가령 지젝이 자주 예로 드는 권위적인 아버지와 관용적인 아버지의 경우를 대비해보자. 권위적인 아버지는 “너는 그것을 해라!”라고 명령한다. 반면에 관용적인 아버지는 “그것을 해라, 하지만 네가 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배려는, 하지만 “너는 자발적으로 그것을 해라!”라는 보다 더 강한 요구를 숨기고 있다. 이것이 관용의 역설이며 자유주의의 역설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지만 아무것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오늘날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는 게 손쉬워진 만큼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것이 우리시대의 패러독스이며, 우리는 유토피아를 다시 발명해내야 한다. 유토피아는 가장 긴급한 요구의 문제다”라고 지젝은 말한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무엇인가?



지젝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란 관념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다.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에서는, 즉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지젝이 자주 드는 것은 1917년의 레닌이다. 레닌주의의 핵심은 자유주의적 ‘선택의 자유’ 대신에 선택 자체를 선택하는 데 있다. 즉 정치적 활동(activity)이 아닌 행위(act)란 현 상황이 제시하는 강요된 선택 대신에 그러한 ‘정치적 계산’을 돌파하는 어떤 광기다. “난 인간이 아닙니다. 난 괴물입니다.”라고도 지젝은 말했다.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정의다.

07. 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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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타 2007-09-03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럴수가. 로쟈님의 정체를 이제야 알아버렸습니다.^^;; 왠지 신문 보고 로쟈님일것이란 생각이.(글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7-09-03 21:52   좋아요 0 | URL
좀 늦으셨군요.^^

치타 2007-09-03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말입니다; 이제 한 학기 남았는데 수업 듣고 졸업하기 힘들겠네요ㅜㅡ

로쟈 2007-09-04 08:37   좋아요 0 | URL
저야 공식적으론 러시아문학만 강의하죠.^^;

marr 2007-09-04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벌꿀인줄 알고 먹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설탕섞은 물엿이었다고 말하는 건 지나친 비유겠죠? 지젝의 글은 너무 달콤해서 분간이 어려워요.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좀 고민해봐야겠네요. 문득 알튀세가 생각나는군요.

로쟈 2007-09-04 08:36   좋아요 0 | URL
물엿 맞습니다.^^ 다만 저는 벌꿀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eEe 2007-09-04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지젝이 스스로를 스탈린주의자라고 표현한 것은 어떤 맥락에서인가요?

로쟈 2007-09-04 23:42   좋아요 0 | URL
저는 그러한 '반응'까지 고려한, 그러니까 농담이기도 하고 진담이기도 한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젝은 출입문 현관에 스탈린 초상화를 걸어두고 있기도 합니다.^^

eEe 2007-09-05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치있는 분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