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 브레인 - 우리 안의 극단주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레오르 즈미그로드 지음, 김아림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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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거예요


  넷플릭스 <레이디 두아>에서 주인공은 일하던 백화점에 전시돼있는 명품 앞에서 이 말을 읊조린다. 누군가에게 어울리는 백이 아니라, 이 백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니! 이 말은 명품을 가벼이 걸칠 수 있을 정도로 재력 있는 상류층으로 올라서겠다는 계층 상승 욕구 이상의 무언가를 품고 있다. 여기서 명품은 부와 사회적 지위를 가리키는 기호에 그치지 않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만들어내고 대상화한다. 이처럼 사람에게 미치는 힘, 그리고 욕망을 조직하는 권력까지 물건이 지니게 될 때 사물에 신과 같은 속성이 깃들였다 하여 물신성이라 부른다. <레이디 두아>는 신적 권능과 같은 물신성에 휘둘리고 비틀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정말 신에게서 비롯한 게 아니라면 물신성의 실체는 무엇일까? <레이디 두아>는 끊임없는 거짓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거짓이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물신성은 거짓에 의존한다. 거짓은 참의 외양을 둘러쓰고 나타나며 자신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내고, 이 믿음이 유지되는 한 힘을 잃지 않는다.


  아마도 최초의 물신성 비판은 우상숭배에 대한 거부였을 것이다. 신의 형상을 빚어 만든 물건에 절을 하며 모시는 숭배 행위는 그 물건이 정말 특별하다는 믿음에 의존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숭배하기 때문에 특별해지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우상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면 우상은 그저 물건에 불과하며, 숭배를 받을 가치와 자격이 당초부터 없었다는 걸 깨닫는다. <레이디 두아> 속의 명품은 우상과 다를 바 없다.

 

<독일 이데올로기>


  마르크스는 거짓된 신이 깃드는 대상을 우상과 명품 같은 대상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그는 우상숭배와 같은 현상이 종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체제에 대해서도 일어난다고 보았고, 한 시대의 지배적인 사회체제를 옹호하는 거짓된 관념들을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그리고 알다시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함께 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발전시켰다. 거짓의 힘을 약화시키고 몰아내기 위해서는 진실을 밝히는 방식의 비판만으로는 비판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보았다. 물질의 변화를 이끌지 못하는 관념은 공허하다. 그래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식을 변화시키라는 이러한 요구는 결국 현존하는 세계에 대한 해석 방식을 변화시키라는, 즉 다른 해석 방식을 통하여 세계를 승인하라는 요구로 귀착된다.”


  이러한 관점은 역사유물론에서 파생된 것인데, 역사유물론은 사람들은 먼저 먹고, 일하고, 소유하고, 교환하고, 지배받고, 지배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경제, 사회적 토대 위에 국가와 법, 이데올로기 등의 상부구조가 형성된다. 사회를 바라보는 토대-상부구조 관계를 의미하는 가장 유명한 언명이 바로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생활세계의 변혁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다. <레이디 두아>와 같은 작품들이 명품의 세계를 무수히 조롱하더라도 명품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소득과 자산의 격차, 불평등한 위계, 과시적·모방 소비행태 같은 사회 현실들의 옆에는 항상 명품도 나란히 존재할 것이다.

 

<이데올로기 브레인>


  물신성이 사회 현실의 산물이라면,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현실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인지적 장치이기도 하다.

  뇌에 대한 연구의 발달로 전통적인 다양한 주제들로 신경과학이 연구영역을 넓히고 있는 게 최근 지식 동향 중 하나이다. <이데올로기 브레인>은 신경과학자가 쓴 이데올로기에 대한 최근의 대중서다. 책의 내용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두 가지 근본 원리로 특징지을 수 있다. 바로 예측과 소통이다. 생존의 필요성에 의해 뇌는 끊임없이 예측하고 소통해야 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예측과 의사소통 문제에 대해 뇌가 내놓은 군침도는 해답이다.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질문, 우리가 따를 대본, 우리가 속할 집단이 무엇인지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을 제공한다. 생각과 행동을 안내하는 이데올로기는 세상을 이해하고, 다시 나 자신도 이해받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을 충족해주는 빠른 지름길이다.”


  즉 이데올로기는 거짓과 허위의식만이 아니다. 이제 이데올로기는 뇌가 과부하에 걸리지 않고 세상을 효율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인식 수단이다. 허위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과 극복의 관점을 발전시켰던 전통 이론과 달리 신경과학은 인지적 경직성에 주목한다. 인지적 경직성은 새로운 정보나 상황 변화가 생겨도 기존의 해석과 판단, 신념을 잘 수정하지 못하고, 기존의 틀에 고정해 판단하려는 경향이다.


  몇 가지 인지테스트들을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경직적인 사람일수록 극단적 이데올로기에 고착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극단성이란 좌파이든, 우파이든 정치적 스펙트럼의 양 끝에 위치해있는 걸 의미한다. 극단적 이데올로기들이 사회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면, 사회구성원들의 인지적 유연성을 직접 키워주려는 노력(유연성을 향상하는 인지훈련은 실제로 가능하다)도 대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뇌가 경직되는 데에는 불안정한 노동, 경쟁, 지위 불안, 소속 욕구, 미래에 대한 공포 같은 사회적 조건들도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경직된 믿음에 매달리게 만드는 생활세계의 조건을 함께 겨냥해야 한다.

 

물신성에서 벗어나기


  사실 물신성에 대한 최상의 논의는 일찍이 <자본론>에서 전개된 바 있다. 마르크스는 개별 경제주체들의 의지와 행위를 초월하여 작동하는 경제법칙(시장논리)들이 규제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을 사물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의미의 물신성으로 개념화했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건 사물의 인간 지배를 끊고, 인간이 연합한 공동체로서 스스로를 규율하는 자유의 세계로의 이행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사물의 지배를 사물 자체의 성질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인식하곤 한다. 상품이 가치를 갖고, 화폐가 가치 저장과 축적의 기능을 하며, 자본이 이윤과 이자를 낳는 건 상품과 화폐, 자본의 본성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회사와 시황, 경기가 안 좋으면 임금이 깎이거나 해고되고, 일터가 사라지는 건 자연법칙처럼 여긴다. 이러한 구조조정에 적응하지 못하는 게 문제지, 구조조정은 일어날 수밖에 없고, 때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경제법칙과 그 운동을 만들어내는 상품과 화폐, 자본은 인간이 노동하는 과정에서 맺는 사회관계의 산물이며, 이 질서는 인간의 실천에 의해 변화하거나 사멸할 수 있다고 <자본론>은 설명한다. <레이디 두아>에서 노동자는 가짜를 만들어내고, 자본가는 가짜를 명품으로 판다. 그리고 진짜와 구별할 수 없는데, 가짜라고 볼 수 있나요?”라는 노동자의 물음은 폭력의 분출로 이어진다. 명품이 사람을 만드는 세계에서 명품을 만드는 노동은 불경한 실체이다.


  화폐가 권력을 갖고, 자본이 스스로 이윤을 낳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서 자유는 사물의 힘을 숭배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사물의 배후에 있는 인간의 노동, 지배, 계급관계를 다시 보는 데서 시작된다.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자유란 우리가 숭배하던 사물의 힘이 사실은 인간들이 맺은 관계의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관계를 다시 조직할 수 있다고 믿는 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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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23. 작성


  202631(이란 기준, 한국 시간 32)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시작된 이란 전쟁이 우리 삶을 뒤흔들고 있다. 전쟁의 원인을 따라가다 보면, 정치자도자의 선택을 넘어 미국의 중동 개입 역사가 낳은 역설과 제국주의적 경쟁의 문제가 드러난다.

 

이들을 어찌하오?


  전쟁이 트럼프 대통령의 독단에서 비롯됐다는 건 복수의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진 바이다. 트럼프가 대표하는 MAGA 프로젝트가 얼핏 해외문제 불개입으로 읽힐 수 있는 미국 우선주의(국내문제 우선)를 내세워왔다는 점에서 마두로 납치와 쿠바 위협, 이란 공격의 최근 연이은 결정들은 자기모순으로 보인다. 상호관세에 대한 대법원의 위헌 판결, 그리고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계속 낮아지는 지지율 추이 같은 정치적 위기 상황을 일련의 군사적 모험으로 타개하려 한 동기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트럼프 일가가 이란 전쟁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다는 의혹도 일고 있다.


  트럼프의 변덕스러운 의사 결정 과정에서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의 설득이 유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타냐후부터가 뇌물 수수와 배임 혐의로 인한 사법적, 정치적 궁지를 모면하기 위해 전쟁을 이용해왔다는 비판을 받는 정치인이다. 2023년 하마스 전쟁부터 헤즈볼라와의 충돌과 이란 공습에 이르기까지, 폭력을 멈추기보다는 저항의 축을 완전히 부러트린다는 위험한 도박으로 이스라엘을 거칠게 몰아 왔다. 도박에 걸린 판돈에 자신의 사면까지 포함돼있다는 듯이 말이다.


  트럼프가 전 세계에 충격적인 결정을 내리고 고집하는 동안 미국 의회가 어떤 제동도 걸지 못했다는 사실 또한 충격적이었다.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위태한 민낯이 드러났는데, 얼마 전 계엄 선포를 겪은 한국에서는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장면이다. 국가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복원과 확장이라는 의제가 다시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성공이 실패를 부르다


  미국의 중동 개입 역사의 한 축이 이스라엘 건국으로부터 시작한 네 차례의 중동 전쟁과 팔레스타인 문제라면, 다른 한 축은 이란-이라크이다. CIA 공작에 힘입은 친위쿠데타 이후 권위주의 통치를 이어왔던 팔레비 왕조가 1979년 호메이니 혁명으로 몰락하면서, 이란은 반서방 이슬람 공화국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를 틈탄 이라크 후세인 정권의 기회주의적 공격으로 1980년부터 8년 동안 이란-이라크 전쟁이 지속됐다.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미국은 겉으로는 이라크를 지원하면서 비밀히 이란도 지원했는데, 균형 유지를 통해 신뢰할 수 없는 양면을 함께 약화시키려 했던 것 같다. 미국의 의도대로였는지 오랜 전쟁으로 약해진 두 국가가 자신의 취약성에 대응하기 위해 행한 결정들이 이들의 운명을 결정했다.


  사담 후세인은 8년 동안 잃어버린 판돈을 한 번에 되찾으려는 듯 다시 쿠웨이트를 침공했다가 아버지 부시에게 패배하고, 12년 후인 2003년에는 아들 부시에게 이라크를 빼앗기고 처형당했다. 후세인이 사라진 이라크에서는 중앙정부가 힘을 잃으며 IS가 준동하고, 시아파 민병대는 독자적인 친이란 세력을 이룬다.


  반면 이라크와의 전쟁 및 혁명 수호 과정과 이어진 미국의 경제 제재에 맞서 이란은 사회를 더 옥죄는, 군사화되고 경직된 국가로 변모해왔는데, 경쟁하던 이라크가 부시 부자에 의해 붕괴된 공간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에 적대하는 이슬람주의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이란으로부터 시작해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 지금은 몰락한 시리아 아사드 정권, 레바논 헤즈볼라, 가자지구 하마스, 예멘 후티 반군으로 이어지는 저항의 축이 형성됐다.


  저항의 축이 견고해지고 이스라엘이 하마스 및 헤즈볼라와 상시 분쟁을 겪으면서, 이와 같은 이란발 안보 위기를 이란을 직접 타격함으로써 최종 종식시킨다는 게 이스라엘의 전략이 되었다. 한편 미국은 불량 국가가 튀어 오르면 이스라엘을 앞세우거나 직접 나서서 두드린다는 해묵은 습관을 이번에 다시 꺼내든 셈인데, 지난 역사에서 보듯이 미국의 개입은 단기적으로 성공할지라도 결국은 새로운 적들과 저항에 부딪쳐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기적 성공조차 거두지 못할 것 같다.

 

제국주의 전쟁


  미국은 왜 중동에 개입해왔을까? 이 질문에 대한 전통적인 답변은 보통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스라엘 로비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네타냐후와 트럼프의 오래된 친교가 암시하듯 이스라엘과 미국내 유대인 사회의 미국 정가에 대한 영향력은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비설을 음모론 정도로 치부할 수 없는 게 국제정치학 내에서도 다양한 해석과 논쟁이 이루어져 온 주제이며, 국제정치이론 중 공격적 현실주의의 대가인 미어샤이머 교수가 공저한 <이스라엘 로비>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연구 중 하나다.

  

  다른 설명은 미국의 석유 통제 야망이다. 석유는 현대 경제의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자 플라스틱과 비료의 원료이다. 저렴한 석유는 경제성장에 필수이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친서방 중동 왕정국가들이 달러로만 석유를 팔고, 벌어든 달러로 미국 금융시장에 투자하는 페트로달러 시스템이 미국 패권에 크게 기여해왔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이라크 점령과 이란 제제는 페트로달러 시스템의 유지와 확장이라는 목적에 논리적으로 부합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경제가 탈제조화·금융화되고, 셰일혁명에 힘입어 에너지 생산이 증가하면서 중동 석유의 중요성이 감소한 까닭에 이란 전쟁은 석유 통제의 목적 때문이 아니라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이런 평가를 반박하면서 더 포괄적인 관점이 있는데, 제재를 우회하여 중국으로 값싸게 팔려나가는 베네수엘라와 이란의 석유를 미국이 통제할 수 있을 경우 중국의 에너지 수입망을 손에 쥐고 압박할 수 있다는 기회에 주목한다.


  트럼프의 최근 일련의 군사 행동을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맥락으로 읽다 보면 불안한 미래로 이어진다.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은 관세와 공급망 분리에 이어 군사력 사용으로까지 수단을 넓혀가고 있다. 상대가 우위를 점하는 지역으로 침투하고 세력권을 넓히려는 패권 경쟁이 혈투로 번질 가능성은 상존한다. 그곳은 대만이 될 수도, 한반도가 될 수도 있다.


  레닌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식민지와 금융자본의 세력권을 분할·재분할하기 위한 전쟁으로 규정했었다. 제국주의는 자본 가운데서 지배적인 지위에 있는 금융자본(금융을 매개로 산업자본이 결합하여 독과점적 지위에 도달한 자본 형태를 말한다)의 이해관계를 보장하는 팽창적·군사적 국가체제이다. 그래서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자본을 멈추고 조국을 뒤엎으라고 했다. 이러한 접근법이 현재에도 유효할지는 단언할 수 없다. 다만 단일 패권이 저물고 경쟁하는 강대국들이 충돌하는 지금의 세계는, 과거의 제국주의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불안을 남긴다. 이 불안과 혼란을 조금이나마 붙잡아 보려 할 때, 몇 권의 책이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박노자의 <전쟁 이후의 세계>, 존 리즈의 <새로운 제국주의와 저항>, 니콜라이 부하린의 <세계경제와 제국주의>, 그리고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제국주의와 국제 정치경제> 같은 책들이다. 이 책들이 당장의 답을 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조금 더 또렷하게 바라보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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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결핍 - 욕망의 뇌가 만들어 낸 여전히 부족하다는 착각
마이클 이스터 지음, 김재경 옮김 / 부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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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에 씀


결핍의 고리

  코스피 지수가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이 글은 주식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코스피 지수로 글을 시작한 건 가짜 결핍(마이클 이스터 지음)이라는 책이 말해주는 결핍의 고리를 설명하는 데 주식이 좋은 예시가 될 거 같아서이다.

  결핍의 고리라는 건 아무리 횟수를 더해도 부족하다는 듯, 우리로 하여금 특정 행동을 계속 반복하도록 유인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이다. 반복된 행동이 장기적인 효용을 낳는다면 문제될 것이 없기에, 결핍의 고리는 단기적인 쾌락은 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건강과 행복, 성숙 등의 바람직한 가치들을 훼손하는, 끝없는 욕망의 구조 또는 중독을 의미한다. 결핍의 고리는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을 주식을 사례로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기회의 발견 : 증권사 앱을 깔고 계좌를 개설한 후 돈을 이체해 놓으면 거래시간 동안 주식을 사고 팔 수 있다.

예측 불가능한 보상 : 주식을 보유하면 손실을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10%의 수익을 올릴 수도, 100%, 1,000%의 대박을 터트릴 수도 있다. 그리고 원하는 수익률까지 상승하는 데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지만 사자마자 상한가를 찍을 수도 있다.

즉각적 반복 가능성 : 주식을 사고 팔 기회()만 있다면, 거래시간 동안 사고파는 데에는 횟수나 기다림과 같은 다른 제한이 없다. 음식은 배가 부르면 더 못 먹고, 로또는 토요일이 지나야 하지만, 주식 거래는 즉각적으로 반복 가능하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요소가 결합하면 끝이 곧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지는 닫힌 원이 그려지는데, 이 원의 고리 위에 서 있는 대개의 사람들은 스스로는 멈출 수 없이 계속 달리게 된다. 이 고리의 핵심은 만족이 아니라 종료 신호의 부재에 있다. 보상이 확정적이면 멈출 수도 있지만, 보상이 불확실하고 즉각적으로 다시 시도할 수 있을 때 행동은 끝을 잃는다. 기회와 보상, 반복 가능성 중 어느 하나라도 사라지거나 반복이 현저하게 지연되어야만 고리가 끊어지고 비로소 끝을 맞이한다.

  결핍의 고리 위를 달리는 이들에게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주는 건 도파민이다. 예측 불가능한 보상이 기대되면 도파민이 분비된다. 그런데 도파민은 단순한 쾌락 물질이 아니라 기대추구를 강화하는 신호에 가깝다. 보상이 예상보다 크거나, 혹은 곧 나타날 것처럼 느껴질 때 도파민은 행동을 멈추기보다 다시 시도하도록 유도한다.

 

결핍의 설계자

  사람들이 특정 행동을 반복할수록 돈을 벌어드는 산업에서는 결핍의 고리 3요소를 잘 활용한다면 더 큰 수익으로 보상받을 것이다. 실제 증권사들은 기술발전을 활용하여 이러한 방향으로 증권거래를 발전시켜왔다.

과거와 달리 증권거래소를 찾아 가지 않아도, 전화를 걸지 않아도, PC 앞이 아니더라도, 모바일 터치 몇 번만으로 증권을 거래할 수 있다. 또한 과거에는 소수 트레이더만 접근 가능했던 선물, 옵션 등의 파생상품거래도 누구나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구축해, 현물거래로는 달성할 수 없는 막대한 수익 달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돈이 부족한 이들을 위한 신용 공여 기법도 갖가지이다. 기회는 더 쉽게, 변동성(보상 혹은 손실)은 더 크게, 반복은 더 즉각적으로 가능하도록 서비스를 설계해왔다.

  이러한 증권거래 혁신은 특히 단기 변동성을 좇는 거래 방식에서 도박과 유사한 중독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중독을 나약한 의지 때문으로만 여기는 건 결핍의 고리를 설계한 이들의 치밀함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사실 책에는 주식중독의 사례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도박, 마약, 득점(게임과 같은 계량화된 목표에 대한 집착), SNS, 음식, 소유, 정보에 대한 중독과 욕망을 분석하며, 이들에게서 결핍의 고리라는 공통의 구조를 찾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의 과정을 저자가 직접 경험한 일화들을 섞어가며 쉬운 문체로 그려준다.

 

느린 진화, 빠른 환경변화

  책에서 가장 신선한 내용은 두 가지였다. 먼저는 결핍의 고리가 인류 진화 과정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수렵과 채집만으로 생존을 영위하는 우리의 머나먼 조상들을 상상해보자. 먹을거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끈기 있게 이동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환경에서, 울창한 숲 속으로 들어가거나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서 곧 손에 넣을지 모르는 식량에 대한 기대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잘 살아남아 자신의 유전자를 남겼을 것이다. 또한 기대했던 식량이 없더라도 주저앉지 않고 다른 숲과 언덕을 다시 찾아 떠나는 사람이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로 전할 확률이 훨씬 높았을 것이다.

  이처럼 결핍의 환경에서 보상이 불확실하더라도 기회를 발견하면 행동하고, 실패해도 다시 행동하는 개체들이 기나긴 시간 살아남고 번성했을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경향이 세대를 거치며 인류의 일반적인 심리구조로 자리 잡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과거 인류의 삶을 완전히 재현할 수 없는 이상 하나의 가설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보상 체계가 희소한 환경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은 다양한 진화심리학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설명이다.

  그런데 인류가 기나긴 시간 동안 생존하고 번성해오는데 유리하게 작용해온 결핍의 고리라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반대로 풍요로운 현대 사회에서는 중독과 자기 파괴의 원인으로 변모한다. 결핍의 환경에서 필요한 것을 얻기까지 끈기 있게 행동하도록 촉진시켜주었던 심리구조가 풍요의 환경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먹어 치우고 축적하여도 멈추지 않는 욕망의 전차가 되었다.

  인간의 뇌와 심리구조가 수십만 년에 이르는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의 진화의 산물이라면, 현대 사회가 이룩한 풍요로움은 2, 3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상대적으로 굉장히 짧은 시간 동안만의 현상이다. 따라서 결핍에서 풍요로 달라진 환경 변화에 뇌가 적응하고 변할 자연적인 시간이란 거의 없었던 셈이다. 이러한 부조화가 현대 인류가 물질적 풍요 가운데서 겪는 정신적 결핍의 이유인 것이다.

 

무한한 욕망에 대해 달리 생각하기

  책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욕망의 무한성에 대해 달리 생각할 기회를 주는 것 같다. 우리 문화는 흔히 욕망은 무한하다고 손쉽게 가정한다. 경제학은 욕망은 무한한데 자원은 유한하다는 비극을 최대한 경감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한다고 스스로 정의한다. 즉 욕망의 무한성은 분석의 대상이 아닌 자명한 전제 또는 법칙처럼 다루어진다. 따라서 저마다의 욕망을 끝없이 좇는 인간의 이기심과 이로 인한 서로 간의 경쟁, 제한 없는 축적, 벌어지는 격차 같은 것들은 다소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없앨 수는 없는 자연법칙과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욕망의 무한성은 그 자체로 고유한 속성이라기보다, 인류가 생존과 진화의 과정에서 구축한 심리구조(뇌신경)와 특정한 외부 환경(결핍의 고리 3요소) 사이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낸 행동패턴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여기서 예측 불가능한 보상이 기대되면 도파민을 뿜어내는 뇌는 신의 계시나 인간의 숙명 같은 존재가 아니다. 오랜 진화 과정에서 자연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진화심리학적 이해는 욕망을 객관화하고, 삶을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디자인하는데 도움이 된다. 중독과 고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핍의 고리를 이루는 기회의 발견, 예측 불가능한 보상, 즉각적 반복 가능성을 역으로 활용할 수 있다. 무언가를 하는데 복잡한 절차를 거치도록 한다거나, 다시 실행하는데 상당한 지연 시간을 둔다든지 해서 말이다. 혹은 긍정적인 행동을 강화하도록 결핍의 고리를 활용할 수도 있다. 바람직한 행동을 하면 예측할 수 없는 보상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풍요의 고리를 설계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개인의 자기 통제만으로 완전한 해결에 이를 수 없다. 우리는 어떤 환경이 욕망을 끝없이 증폭시키는지를 묻고, 그 반대로 종료 신호를 회복시키는 환경을 설계해야 한다. 문제는 인간의 욕망이 무한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멈출 수 없도록 조직된 환경에 있다는 합리적 의심에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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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
이주희 지음 / 글항아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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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

 

신간을 검색하다가 이 제목에 끌렸다. 누구에게든지 차별은 분노를 일으키는 행위이지만, 언제 어디에서든지 존재하는 게 차별이기도 하다. 차별을 낳는 사회적인 힘을 구조라고 부른다면, “차별하는 구조라는 말은 추상적이고 개념적이며, 피와 살이 없는 기계, 감당할 수 없는 무게처럼 느껴진다. 반대로 차별받는 감정은 다른 말이 없어도 아픔을 자아낼 것 같다. 차별받는 슬픔을 생각하면.

차별이라는 단어에서 생각나는 사진이 있다. 어디론가 도로 위를 걸어가는 흑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백인만을 위한 좌석에서 일어나기를 거부한 로자 파크스의 행동이 촉발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의 한 장면이었다. 버스를 타지 않고 먼 거리를 걸어가는 불편과 고됨을 스스로 감수하는 것으로 인종분리정책에 맞섰던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마음들이 수십 년의 시간을 가로 질러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 마음들 속에는 오랫동안 말없이 견디어온 차별, 그것이 낳은 수많은 감정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을 것이다.

차별받는 감정에 대해 어떻게 접근할지, 구조와 감정을 어떻게 연결할지 궁금하여 책을 읽었다. 책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로부터 시작한다. “지성으로 현실을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미래를 낙관하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현실을 비관하게 하는 것은 구조가 가진 힘이요,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건 주체의 능력일까?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저자(이화여대 사회학과 이주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감정적 해방은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 있어 지적인 해방 못지않게 중요하다. 따라서 차별하는 구조 아래 차별받는 사람들의 감정이 더 이상 부차적인 현상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차별받는 사람들의 감정에 작동하는 프레임 규칙과 감정 규칙의 파악이 차별 극복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프레임 규칙은 어떤 상황을 정의하거나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규칙을 말한다. 그리고 감정 규칙은 상황과 감정 간의 일치 혹은 불일치를 평가하는 기준을 뜻한다. 해고당한 사람이 그것을 고용주의 횡포로 여기는지 아니면 자신의 무능력과 실패로 규정하는지가 프레임 규칙에 의한다면, 감정 규칙에 따라서는 회사에 화를 내거나 비난하는 것이 적절한지 여부가 결정된다.

책은 차별받는 사람들의 감정에 작동하는 규칙에 대해 세 가지 키워드로 분석한다. 체념과 적응, 혐오. 차례대로 읽어가는 중에 내가 겪었던 차별의 구조와 그 아래에서 나의 감정은 어떠했는지 돌아보았다.

 

마트의 비정규직 노동자

 

내가 기억하는 대형마트는 서열화된 노동의 장소이다. 서열은 고용형태에 의해 결정된다. 밑바닥에는 외주, 하청화된 노동과 파견 노동이 존재했다. 청소와 경비, 시설관리를 담당하는 노동자들은 마트 소속의 직원이 아니며, 그들끼리도 서로 다른 회사들에 속해 있다. 시식대의 판매촉진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처지가 가장 열악한 건 마트와 용역회사 간의 계약이 해지되면 마트로 출근할 근거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마트가 이들의 노동에 매기는 예산과 용역회사가 중간에서 떼먹는 정도에 의해서 이들의 급여가 결정되고, 마트의 비용 절감과 용역회사의 중간착취 열정은 법정 최저임금으로만 식힐 수 있다.

간접고용과 직접고용 사이뿐만 아니라, 마트에서 직접 고용하는 노동자들 사이에도 서열이 존재했다. 상품을 진열하는 등의 기간제 노동자들이 있고, 기간의 정함이 없는 고용 내에서도 서로 높낮이가 다르다. 나 같은 하층의 용역 노동자에게는 캐셔와 매장 부분별 담당자들이 중간층, 사무실에 책상을 갖고 있는 몇 명의 사무직과 점장이 상층으로 보였다. 인상적이었던 건 과거 대형마트 노동조합 투쟁의 당사자들이 기간제나 입점 점주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던 거였다. 과거에 노조원들이 했던 일들은 비정규직의 일이 되었다.

이러한 고용카스트를 정당화하는 논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직무에 따라 최적의 고용형태가 결정되고, 저마다 능력에 맞는 일을 하고 있다면, 고용형태에 따른 서열은 능력에 따른 분배순위로서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사실 어느 노동도 필요하기 때문에 그 곳에 존재한다. 청소 노동자가 없다면 마트는 악취 나고 불결한 장소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노동의 가치는 이런 필요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노동의 가치를 결정하는 건 수요와 공급이다. 청소나 경비, 시설관리, 판촉과 같이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가 하더라도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일은 공급 측면에서 희소성이 없기 때문에 그 가치도 낮다는 게 경제학의 설명이다. 그리고 경제학대로 세상이 돌아가야 효율적이고 경제성장도 가능하다고 한다. 이른바 비핵심업무를 외주화한 대형마트는 이런 논리에 충실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혼자 일을 할 때는 별로 의식하지 않지만 마트의 진짜 정규직이 지켜볼 때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감정들이 있었다. 고용형태에 따른 노동의 분할이 수평 구조의 칸막이가 아니고, 수직 구조의 천장과 같고 임금과 의사결정 권한이나 기회의 차등 분배가 당연시되기 때문에 생겨나는 감정일 것이다. 못난 열등감이라는 자책에도 걸러지지 않는 건 여기서 나의 위치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자각과 이에 뒤따르는 위축감이었다. 나의 위치는 내가 들어갈 수 없는 공간, 이용할 수 없는 시설, 말을 걸 수 없는 상대 등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아무리 오래, 열심히 일하더라도 저 위로 낄 기회는 생길 수 없다. 나의 노동은 쓸모가 없고, 나 역시 쓸모가 없다는 무력감과 명백히 대비되는 건 마트 정규직의 사원증과 분명한 목소리의 지시였다.

차별의 벽들을 무너뜨리기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에서 차별받지 않는 마음을 위해 내세우는 제안은 차별금지법과 적극적 조치”, “기본소득과 기본서비스이다. 차별하는 구조는 개인의 체념과 적응, 혐오를 낳고, 이런 감정들이 차별을 더욱 공고화시킨다.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는 건 로자 파크스와 같은 위대한 용기와 차별받는 마음들의 연대와 운동이겠지만, 이러한 순간은 계획하고 준비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평범한 사람들이 차별을 받을 때 언제라도 기대거나 싸울 수 있도록 도움 주는 사회 제도의 마련이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사회 여건의 성숙이 연대와 운동 없이 선물과 같이 주어지지 않을 것 같다. 차별 아래에서 무력감과 패배감이 너의 책임이라거나 자기계발로 떠미는 게 아니라, 그 부당함에 분노하고 싸울 수 있는 감정을 지지하는 사회분위기의 변화도 필요하겠다.

책의 끝맺음이 상당히 좋아 이 문장들로 마무리 짓고 싶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가장 빨리 뛸 수 있는 선수가 항상 메달을 얻는 것은 아니다. 성소수자이거나 비정규직이거나 장애인인 우리도 차별적 구조에 막혀 능력을 보여줄 수 없었을 뿐, 우리가 선택한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메달을 딴 사람들은 좀더 겸허해져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작동 중인 여러 차별적인 기제로 인해 메달을 쟁취한 것 자체가 가장 빨리 뛴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메달 가까이 가지 못하기 때문에 무너져내릴 필요도 없다. 우리가 무너뜨려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차별하는 구조, 즉 우리가 차별받았을 때 느껴야 하는, 그래서 그 구조를 제거하는 데 필요한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진실한 감정을 막아서고 있는 거대하고 단단한 벽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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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상실 - 좋은 일자리라는 거짓말 전환 시리즈 2
어밀리아 호건 지음, 박다솜 옮김 / 이콘 / 2023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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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런 말이 무심코 나왔다. 이렇게 열심히 일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같은 양의 노력을 일찍 공부에 쏟아 돈 더 잘 버는 직업을 가질 것 그랬다고. 버티며 애써 일하는 게 당연하다면 더 많은 보상이 주어지는 길로 찾아 갔어야 한다는 후회였다. 좀 더 노력했더라도 잘 버는 직장에서 일했을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건 출근 때마다 온 몸에서 돋아나는 거부감을 참아내고 있다는 거다.

노동해방이라는 말은 착취와 억압받는 노동에서 해방되어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참 주인이 되자는 뜻이다. 그런데 이보다 은퇴 : 노동으로부터 벗어남이 스스로를 구하는 가장 현실적인 미래로 느껴진다. 복리의 마법을 믿으며 꾸준하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재산도 모을 수 있다고, 여러 재테크에 기웃거린다. 그러나 금리가 오르고 경기침체에 빠지니 이런 믿음과 희망이, 회사 밖에 대한 미래도 사라진다.

일하는 게 왜 이리 싫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하고 싶어 했던 일이 아니다. 취업하는 자체가 중요해서 뭐 하는 회사인지도 모르고 들어왔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그래도 몇 년은 아무 생각 없었는데 10년이 넘으니 한 번 뿐인 인생을 허비한다는 자책이 커진다. 둘째, 하고 싶어 하지 않은 일을 너무 오래 한다. 9시부터 6시까지 일하는 거에 더해서 일찍 출근하며 추가 근무하고, 일하며 생긴 피곤과 스트레스를 보듬는 시간들까지 합산하면 압도적인 지분이다. 내 시간의 실질적인 주인은 회사이다.

셋째, 직장에는 화를 돋우는 일들이 쉬지 않고 벌어진다. 직장에는 계급이 있고, 권한을 가진 상급자가 책임을 떠넘기거나 잘못된 결정을 해도 웃는 낯빛을 유지해야 한다. 상급자가 되기 위해 경쟁과 평가가 이뤄지고, 납득할 수 없는 인사에 그동안 일로 증명해왔다고 여겨온 스스로의 가치는 추락한다. 일찍부터 편한 자리 찾아 가는 요령을 욕해놓고, 이제라도 노선을 바꿔야 하나 갈등한다.

부적응자라서 힘든 걸까, 직장은 원래 적응하기 어렵고 힘든 곳일까? 스스로 부적응자가 아니라고 믿는다면, 직장이 꼭 이런 곳이어야 하는지 의문을 갖고 있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노동의 상실 좋은 일자리라는 거짓말

 

20234월에 번역 발행된 영국인 어밀리아 호건이 쓴 책이다. 원제는 LOST IN WORK : Escaping Capitalism이다. 이 책을 쓰도록 이끌었다는 저자의 소망이 인상 깊다.

나는 이 책이 이론의 가능성을, 이론이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 일의 가능성을 실현하기를 소망한다. 당연하고, 고정되어 있으며, 극복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꺼내어 그것이 실은 우연적이고, 변할 수 있으며, 극복 가능하다고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다시 말해 나는 이 책이 행동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전제 조건인 희망을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더 나은 일을 위한 희망, 지금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른 일에 대한 희망,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희망을.”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이란 임금노동을 가리킨다. 일을 폭넓게 해석하면 어떤 목적을 위해 육체적 수고와 정신적 피로를 감수하는 모든 활동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 행해지는 일로 서술대상을 한정짓는다. 같은 종류의 가사노동일지라도 고용되어 타인을 위해 일하게 되면 그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책은 임금노동이 처해 있는 현실을 비판한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저임금 불안정 노동이 늘어나고, 노동의 양극화로 격차와 차별이 늘어나며, 국가는 실업자에게 국가 재정을 좀 먹는다는 낙인을 찍으며, 최저 임금보다 못하더라도 일단 일자리를 구하라고 한다. 이처럼 일자리의 질이 악화되고 있기 때문에 다시 좋은 일자리를 되살려야 할까? 저자는 훨씬 멀리 나아간다.

이 책은 자본주의 체제의 일이 사람의 자유를 앗아가는 방식을, 일이 약간의 만족과 심지어 약간의 즐거움도 제공하긴 하지만 그건 다른 유형의 즐거움을, 다르게 살고 생산하는 방식을 없앰으로써 가능했다는 사실을 숙고한다.”

임금노동에 대한 전복적인 비판이 필요한 건 임금노동이 두 가지 부자유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일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부자유, 그리고 임금을 받는 대신 주는 사람의 통제에 따라야 하는 부자유. 이 두 부자유가 임금노동을 가능하게 하고 규정한다. 그런데 밥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게 세상의 이치 아닌가? 여기서 말하는 부자유는 자연이 인간에게 지운 굴레 같은 게 아니고, 사회가 자본을 소유한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로 갈라져 있으며, 다수는 자기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고서는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회현실을 의미한다.

한편 노동력을 구매하는 입장에서는 매출과 이윤을 낳는 쓸모 있는 노동을 원하기 때문에 노동자가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일하는 걸 용인하지 않는다. 여기서 생겨난 게 일터에서의 수직적 위계질서와 통제이다. 위계질서 내에서 어떤 사람은 관리자가 되어 사장 대신 직원들을 통제하지만, 결국 이윤극대화(비용절감)와 시장경쟁이 직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결정한다.

 

힘을 합쳐 자본주의 넘어서기

 

두 부자유로 인해 노동자는 일터 밖에서도 안에서도 일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빼앗긴 채 타인을 위한, 그래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을 강요받는다. 이러한 노동의 소외로부터 월급쟁이들이 겪는 고통과 번민이 시작된다. 그래서 저자는 일터에서 노동자가 자기 결정의 권한을 확보하고 넓혀가야 한다고 말한다. 촛불이 어둠을 몰아내듯이 노동자의 권한이 커질수록 우리를 옮아 매는 부자유는 힘을 잃어갈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가 힘을 갖는 유일한 수단은 노동조합으로 조직과 단결이다. 다만 노동조합의 목적이 노동자의 경제적 지위를 높이는 데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금융치료가 부족해서 노동이 힘든 게 아니라 노동자가 자기 노동을 결정하지 못하는 부자유가 실존의 문제를 낳기 때문이다. 책의 원제가 LOST IN WORK : Escaping Capitalism이라는 걸 기억하자. 자본주의에서 노동자가 잃어버린 건 자기 결정의 자유이며,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앙상한 요약에 담지 못한 이 책의 개성과 매력, 저자의 깊이 있는 관찰과 풍요로운 언변을 직접 읽어보기를 권한다. 작은 책이라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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