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때문에 이 페이퍼를 들여다보실 분들이 많을 텐데, 얼마간 고의적이긴 하지만 내 탓은 아니다. 돌아가신 김현 선생 탓이다. 그의 비평집 제목이 <책읽기의 괴로움>(문학과지성사, 1993)이기 때문이다. 1992년에 나온 건 전집판이고 나는 80년대에 나온 민음사판을 갖고 있다(이 책과 관련한 얘기는 http://blog.aladin.co.kr/mramor/880102 참조).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에 이 책이 올라와 있는데, 다름 아니라 오늘이 지난 1990년 세상을 떠난 저자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바쁜 와중에 잠시 17년전 그날을 떠올려본다.

한국일보(07. 06. 27) [오늘의 책<6월 27일>] 책읽기의 괴로움

문학평론가 김현이 1990년 6월 27일 48세로 사망했다. 시인 황지우(55)를 1999년 인터뷰했을 때 했던 말이 생각난다. “김현 선생 돌아가시고 나서는 (문학이) 재미가 없어졌어요. 문학판이 구심점도 없고 이슈도 없는 요즘, 새삼 그 분이 그립습니다.”

황지우의 말처럼 김현은 한 시대 한국문학의 구심점이자 이슈의 창출자였다. 1960년 그가 김승옥 김치수 최하림 등과 만든 동인지 <산문시대>는 한글세대의 신화였고, 그것은 1970년 김병익 김주연 등과의 <문학과지성> 창간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그는 우리 문인들의 호명자였다.

자신보다 20년이 젊은 세대의 무협지적 상상력까지 한국문학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을 정확히 호명해준 것이야말로 김현의 가장 큰 공이었다. 시기적으로 묘하게도 그의 사망 이후 1990년대부터 한국문학은, 역시 황지우의 표현으로라면 “초라한 주변부 장르나 언더그라운드 꼴이” 돼버린 것도 사실이다. 그의 부재가 아쉬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책읽기의 괴로움>은 폭력의 연대였던 1984년 나온 김현의 평론집이다. 표제 평론은 최인훈의 소설 <회색인>을 통해 그런 세상에서의 ‘책읽기’라는 문제를 다룬 글이다. 다시 읽어본다.

책읽기가 고통스러운 것은 책읽기처럼 세계를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계가 책 속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 분명하게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다만 방황할 따름이다. 그 방황을 단순히 책상물림의 지적 놀음이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근본적인 질문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나도 최인훈의 회색인에 가깝다. 나는 내 자신이 불행이고 결핍이다.”

07. 06. 27.

P.S. 하지만 그의 <책읽기의 괴로움>을 구한 것도, 읽은 것도 모두 큰 즐거움이었다는 걸 고백해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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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현..
    from 한사의 서재 2007-06-27 12:05 
    “책읽기가 고통스러운 것은 책읽기처럼 세계를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계가 책 속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선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푸른괭이 2007-06-27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릴 땐 몰랐는데 지금 보니, 사진 속 김현 선생이 너무 젊군요....

마늘빵 2007-06-27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현 책은 딱 한개 봤는데 제목이 기억이 안나는군요. 수필집 비슷한 성격이었는데. 책읽기가 괴롭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 요새 그래요. 읽고픈건 많은데 의욕이 나지 않을 때.

비로그인 2007-06-27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현씨의 글 좋습니다.
제가 한 부 먼댓글로 엮어 얻어갑니다.
고맙습니다. 로쟈님


수유 2007-06-27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옮겨가요~~ 저도 즐거움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