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타계한 러시아의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의 수제자로 잘 알려진 첼리스트 장한나의 '책과 인생'을 옮겨온다(두 사람의 사제관계는 http://blog.aladin.co.kr/mramor/1106912 참조). 12살때 스승의 부인 갈리나의 권유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읽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그런 권유를 건넨 사람이나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사람이나 아무튼 놀랍다. 초등학교 5-6학년 때가 아닌가(아마도 그맘때라면 나는 <삼국지> 같은 걸 읽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여하튼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이다. 영어도 마스터하고 통찰력과 표현력도 길렀다지 않는가. <죄와 벌>도 읽기 힘들어하는 요즘 대학생들이 좀 각성할 일이다.

경향신문(07. 06. 16) 12살때 읽은 영문판 '백치'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읽으면 너의 마음이 열릴 것이다." 지난 4월 타계하신 나의 스승 로스트로포비치 선생님의 부인 갈리나가 해준 말이다. 그때 난 열두살이었다.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부터인가. 세계 동화 전집 등을 통해 독서를 너무나도 좋아하게 됐다. 등장 인물들의 다양한 성격,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그들의 흥미진진한 삶, 그리고 정의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동화 속 세상에 푹 빠졌다.

재미있는 책을 잡으면 밥 먹을 때는 물론, 첼로 연습 시간에도 읽기를 중단하기 힘들어 발가락으로 책장을 넘기기도 했다. 처음 읽는 책에서 긴장과 스릴을 느꼈다면, 다시 읽는 책에서는 이야기 속 의미들을 찾고 즐기는 맛을 알게 됐다. 뉴욕으로 건너갔을 때 열 살이었던 나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다. 공립학교의 ESL 프로그램은 체계적인 영어 공부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고, 12세부터 다닌 사립학교에는 그나마도 없었다.

11세 때 파리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만난 갈리나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영어판 <백치>를 구입해 읽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12세 소녀에게 <백치>를 권한 갈리나도, 그 말 한마디에 바로 <백치>를 읽은 나도 참 순수했던 것 같다. 인생을 바꾸는 힘이 책 안에 있다는 믿음을 공유한 게 아닐까 싶다.

만일 지금 내가 12세 어린이에게 책을 권해야 한다면 <백치> <안나 카레니나> <파우스트> 같은 명작을 권하기 전에 여러 번 생각할 것 같다. 너무 어렵지는 않을까, 작품의 위대함을 소화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나도 내가 느낄 수 있는 만큼만 느끼고 이해하듯이, 어린이도 나름대로 어떤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런 명작들은 독자의 그릇 크기에 관계없이 어떤 충격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그런 충격을 통해 나의 그릇이 성장하고, 그 책을 다시 읽거나 다른 책을 읽었을 때 더 큰 감동을 받는 것이다.

서툰 영어로 <백치>를 읽은 후 과연 내 마음이 열렸는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그 때부터 거대하고 복잡한 사연들이 많은 러시아 문학에 반해서 톨스토이, 체호프, 도스토예프스키, 푸슈킨의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순수문학, 그리고 소설이란 장르에 빠져 영국, 프랑스, 독일 문학으로 폭을 넓혔다. 내용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단어 공부도 열심히 했고, 문장의 형태부터 표현력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많은 영어의 비밀을 자연스럽게 흡수했다. 고등학교 무렵에는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으며 에세이를 제출할 만큼 영어 실력이 늘었다.

독서를 통해 영어를 쉽고 즐겁게 마스터했을 뿐 아니라 통찰력과 표현력을 기르는 데도 더 없이 좋은 훈련이 됐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어휘와 표현은 언어 자체의 폭에 비해 너무나도 좁다. 표현력이 좁은 만큼 우리의 생각도 단순해지는 건 아닐까. 책을 통해 언어의 풍요로움을 접한다면 우리의 시각이 더욱 넓어지고 성장하리라 믿는다. 또 이런 과정을 통해 인생을 풍요롭게 사는 지름길을 찾게 되리라 믿는다.(장한나)

07. 0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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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인간 2007-06-16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을 '만국의 언어'라고 정의한 속설에 따르자면, 음악의 신동인 장한나는 결국 어학의 신동이 되는 것이겠지요. ^^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거의 25년이 되어 가도 영어 소설 하나 읽기가 버거운 저로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위로가 됩니다. 쿨럭~ ^^

로쟈 2007-06-16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영어를 잘 하려면 먼저 첼로를 배워야겠습니다...

수유 2007-06-16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영특한 이미지가 어려서부터의 독서에서 왔군요. 저도 요즘 조카에게 다소 두꺼운 책들을 사주고 있는데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하더라도 격려를 해주렵니다. :)

작은앵초꽃 2007-06-16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또 어떻게 성장할까 늘 기대되는 첼리스트에요.
그나저나 저 너무나도 많은 영어의 비밀이라는 것, 저도 몇 개 알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