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전설적인 첼리스트이면서 국내에는 장한나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어제 바람구두님의 페이퍼를 읽고 처음 알게 됐는데, 관련 부고기사들을 옮겨놓는다. 클래식에 특별한 취향이 없는 탓에 그의 죽음에 별다른 감상을 갖고 있지는 않다(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 정도를 갖고 있나 보다). 다만, 과거 절친했던 한 친구가 열광적으로 좋아했던 첼리스트 정도로 기억이 날 따름(그녀는 로스트로포비치의 내한 공연을 빼놓지 않았다). 기사를 읽다가 알게 된 건 지휘자로서의 데뷔작이 <예브게니 오네긴>이라는 것. 1968년이었고 볼쇼이에서였다...
한국일보(07. 04. 28) '천상의 선율' 러 첼로 거장 로스트로포비치 '천상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러시아 출신 첼리스트 겸 지휘자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가 27일 모스크바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0세. 로스트로포비치는 간장 질환으로 입원 치료 중이었다. 1927년 구소련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음악가 부모 밑에서 태어난 그는 13세 때 첫 첼로 공개 연주를 했다. 16세 때 모스크바음악원에 입학,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배운 피아노와 첼로 외에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에게 작곡을 배웠으며, 지휘도 공부했다.
23세 때 소비에트 시절 최고의 영예인 스탈린상을 받으며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고, 서방에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197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반체제 인사 솔제니친을 옹호하는 글을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보냈다가 요주의 인물로 찍혀 국내 활동과 해외 연주여행을 제한 받자 74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파리에 머물던 78년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나 90년 고르바초프 당시 대통령에 의해 복권돼 모스크바로 금의환향했다.
냉전시절 구소련의 예술적 자유를 위해 싸우는 투사로도 잘 알려진 그는 91년 민주화에 저항하는 구소련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다시 모스크바로 날아가 이에 맞서는 시위대에 합류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그 앞에서 즉흥 연주를 했고, 99년 다시 그 자리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 기념공연을 했다.
첼리스트로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테크닉과 깊이를 보였을 뿐 아니라 첼로의 레퍼토리를 넓히는 데 누구보다 힘써 수많은 곡의 작곡을 위촉하고 직접 초연했다.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브리튼, 루토슬라브스키, 펜데레츠키, 뒤티외 등 20세기 최고의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첼로 곡을 썼다. 한국 첼리스트 장한나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그는 수많은 어린 첼리스트들의 정신적 후원자로도 유명하다.
지휘자로 데뷔한 것은 1968년, 볼쇼이극장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지휘하면서부터다. 망명 후 첼로 연주와 지휘를 병행한 그는 77년 워싱턴의 내셔널심포니 음악 감독이 되어 17년간 이끌면서 지휘했고, 세계의 여러 오케스트라를 객원지휘했다. 프랑스의 레종도뇌르 훈장 등 많은 상과 훈장을 받았다. 최근에는 아내인 소프라노 갈리나 비쉬네프스카야와 함께 아제르바이잔 어린이를 위한 건강 재단을 만들어 운영해왔다.(오미환 기자)
동아일보(07. 04. 28) "거장, 천상의 현을 울리다…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별세"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 첼리스트 겸 지휘자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27일 별세했다. 향년 80세. 고인은 지난해 말 간 질환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으나 이날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숨졌다. 그는 지난달 27일 80세 생일을 맞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초청으로 크렘린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이달 들어 건강이 악화됐다.
1927년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태어났으며 모스크바 국립 콘서바토리를 졸업한 뒤 1945년 소련 국제음악콩쿠르에서 황금상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를 사사했으며 리히테르(피아노)의 반주로 독주회를 열기도 했다. 에밀 길렐스(피아노)와 레오니트 코간(바이올린)과 트리오로도 활동했다.
1974년에는 반체제 인사인 솔제니친과 사하로프를 공개 지지했다가 추방당했다. 공민권을 박탈당한 뒤 서방에서 자신의 역사를 다시 만들었다. 첼로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인적 연주를 선보인 그를 위해 작곡가들은 앞 다투어 곡을 헌정했다. 생전에 세계 초연한 작품은 240곡이 넘는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벽돌 더미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주했다. 1990년 소련 체제 붕괴 후 복권된 로스트로포비치 부부는 1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첫 무대에서 지휘한 차이콥스키 교향곡 ‘비창’은 세기의 명연으로 손꼽힌다.
러시아인들은 그를 ‘슬라바’(영광)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므스티슬라프’를 짧게 줄인 이 애칭은 최고 연주자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도 4, 5차례 공연을 가졌다. 그는 인터뷰에서 “한국의 김치와 갈비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에서 나를 부르면 언제든지 가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전승훈 기자)
■ 애제자 장한나의 추모
세계적인 첼리스트 장한나(24·사진) 씨는 1994년 로스트로포비치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그의 애제자가 됐다. 장 씨는 27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한 시대가 막을 내린 느낌”이라며 스승에 대한 애도의 뜻을 밝혔다. 이를 정리했다.
선생님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첼리스트였다. 처음 만난 것은 11세 때였다. 선생님 앞에서 연주하고 싶어 선생님이 파리에서 여는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 나갔다. 선생님은 “처음에 첼로가 혼자 걸어 나오고 있는 것 같아 놀랐는데 뒤에 조그만 여자애가 있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연주를 마친 뒤 선생님은 나를 번쩍 안아 주셨다.
이후 15세 때까지 워싱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선생님을 찾아가 레슨을 받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마지막 레슨을 받던 날 선생님은 “네게 음악의 열쇠를 주었다. 이제 그 문을 열고 나가 너만의 음악을 만들어라”고 말씀하셨다.
1996년 첫 음반을 녹음할 때 선생님께서 지휘를 해 주셨다. 선생님은 “첼리스트 음반의 녹음을 지휘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며 “나이 들면 그 뜻을 알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첼리스트로서의 대물림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음반은 선생님께서 지휘한 유일한 첼리스트의 음반이 됐다.(전승훈 기자)
07. 04.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