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문학사이'의 이번주 연재는 <최순덕 성령충만기>와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의 작가 이기호를 다루고 있다(성령이 충만하면 갈팡질팡하게 되는가 보다). 문단에서 몇 안되는 젊은 기대주로 꼽히는 이 '육체파 소설가'(근육맨이란 뜻이 아니라 '막노동꾼'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의 '삽질'에 한번쯤 주목해보시길(최근에 작가는 인터넷방송 DJ와 대학강의를 맡아 더욱 바빠지게, 더욱 갈팡질팡하게 되었다). 그냥 삽질로 보이는 작품들도 없지 않지만, 사실 그렇게 파다보면 또 뭐가 되기도 하는 게 이 '소설-노가다판'이기도 하니까 기대는 버려두지 마시고. 관련기사와 인터뷰도 한데 모았다...
경향신문(07. 03. 24) [작가와 문학사이](11)이기호-삽질 같은 글쓰기
'소설 쓰는 노동자’. 어느 좌담에서 이기호는 스스로를 이렇게 정의했다. 이때 ‘노동자’란 샐러리맨으로 대표되는 임금 생활자라기보다는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에 더 가깝다. 문자 그대로 ‘삽질하는 사람’이라고 할까. 아니나 다를까. 이기호의 단편소설 ‘수인(囚人)’은 삽질하는, 아니 곡괭이질하는 소설가가 등장한다. 소설에서 삽질, 아니 곡괭이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시대 소설가가 처한 곤경 혹은 광경을 잘 보여준다.
원래 ‘삽질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삽으로 땅을 파거나 흙을 파내는 일”을 말하지만, 군대용어로 전용되면서 요즘에는 대개 “엉뚱하거나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죽인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소설을 ‘전구나 라디오’ 같은 발명품과 같은 것으로, 아니 사실은 더 못한 것으로 보는 시대에 소설을 쓰는 일은 속된 말로 삽질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받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마땅히 소설가라면 ‘삽질’을 거부할 것이겠지만, ‘수인’의 소설가는 자신이 소설가임을 증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삽을, 아니 곡괭이를 든다. 문자 그대로의 삽질을 하게 된 것이다. 25m의 시멘트벽을 뚫는 불가능한 ‘괜한 짓’은 그렇게 시작된다.
삽질로서의 소설쓰기. 그것은 ‘삽질하네!’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을 만큼 무용하고 비실용적인 일인 동시에, “바늘로 우물을 파는 듯한”(오르한 파무크) 고행에 가까운 힘겨운 노동이기도 하다. 원고료와 인세만으로 간신히 생활을 꾸려가면서 홀로 죽을 힘을 다해 소설을 써도, 소설가는 한심한 인간 취급을 받기 일쑤다. 그러나 언젠가 홈리스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속에서도, 아무도 자신의 소설을 읽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도, 소설가는 삽질 같은 소설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삽질은 소설가만 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삽질을 해서, 땅을 파서 그 흙을 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 지하 벙커에 갇힌 채 6개월을 지내야 했던 ‘나’는 극도의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우연히 흙을 먹는다. 그러다가 ‘나’는 흙맛에 매료되고 급기야 ‘나’에게 흙은 밥이 된다. ‘그냥 삽으로 대충 몇 번 파헤쳐도’ ‘나’는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흙만 먹을 수 있다면 우리는 ‘밥’을 위해 그렇게 악전고투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러나 ‘누구나 손쉽게’ 흙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흙맛을 알기 위해서는 ‘흙은 먹을 수 없다’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우리의 감각을 천편일률적인 것으로 만든 조미료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땅 파 먹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이기호의 소설에는 이렇게 삽질하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의 삽질은 대개 보통의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한다. 그래서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스스로를 질책하지만, 그러면서도 자학과도 같은 삽질을 멈추지 못한다. 그 삽질은 대개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나타난다. 자해공갈을 하려다가 공갈(恐喝)은 못하고 자해(自害)만 한 경우(‘당신이 잠든 밤에’), 교통표지판을 잘라 고물상에 팔려고 하다가 되려 교통표지판을 수호하게 된 경우(‘아무 의미 없어요’), 국기 게양대에 걸린 국기를 떼어서 팔려다가 국기 게양대와 이상한 사랑에 빠진 경우(‘국기 게양대 로망스’). 역시 삽질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기호는 이들을 일러 ‘이시봉’이라고 한다. 이 시봉이들은 분명 우리 사회의 낙오자들이다. 그들은 사기조차 칠 수 없을 만큼 멍청하며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는 머피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남을 탓하는 대신 자기 머리를 쥐어박는 자학을 선택한다. 물론 그들의 자학은 병리적 마조히즘도 자기 우월감의 반어적 표현도 아니다. 그런 멋 부리는 자학을 하기에 그들은 너무 우직하다. 어쩌면 그들은 그런 우직함으로 삽질을, 삽질 같은 소설쓰기를 계속하는지도 모른다.(심진경|문학평론가)
한국일보(07. 03. 22) [길 위의 이야기] 정치적 올바름
요즘, 이곳저곳에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원래 '정치적 올바름'이란 차별적, 혐오적인 언어로 소수그룹을 모욕하는 것을 막자는 취지에서 생겨난 것이다. 한데 이 '정치적 올바름'이 근래 들어 자꾸 근본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길 없다.
단 한 가지 진리만 제시될 수 있다는 믿음, 그 외에 것들은 모두 아니라는 생각. 그것이 이 '정치적 올바름'을 왜곡시키고 있는 주범이다. 그 왜곡이 가장 크게 작동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대학이다.
많은 대학의 선생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지닌 교육자로 평가받고 싶어한다. 해서, 자꾸 '정치적 올바름'외에 것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소수의 권리를 부르짖느라, 다수의 권리는 망각하는 선생들을, 나는 많이 봐왔다. 그것은 왜 그런 것인가? 그것이 오직 포즈로써의(*포즈로서의) '정치적 올바름'이기 때문이다.
실상은 그렇지 못한데, 인정욕망에 사로잡혀, 연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정치적 올바름'은 오히려 독이 되고 만다. 근본적이지 못한 근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런 근본주의는 종종 폭력의 형태로 우리 사회에 되돌아오곤 한다. 거 참, 문제다. 연기들 하지 말고 살자.(소설가 이기호)
주간한국(07. 03. 20) [이신조의 '작가와 차 한 잔'] <2> 소설가 이기호
영국의 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고 한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해석을 하자면,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갈팡질팡이란 말 대신 우왕좌왕이나 우물쭈물, 오락가락이나 좌충우돌, 허둥지둥이나 전전긍긍이 들어간다 해도 크게 무리는 없어 보인다. 아무튼 버나드 쇼란 작가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라도 이 문장을 통해 그가 작품 속에서 특기로 발휘했던 씁쓰레한 자조(自嘲)의 뉘앙스를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렇다면 묘비명이 아닌, 그 문장을 제목으로 내세운 소설책은 어떨까. 사실 갈팡질팡이든 우물쭈물이든, 좌충우돌이나 전전긍긍이란 말은 (한 작가의 일생보다는) ‘젊음’을 설명하는데 더없이 적절한 단어들이다. 물론 젊음은 싱그럽고 활기차고 아름답다는 희망과 긍정의 수식어를 우선 헌사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미 젊음을 통과해왔거나 지금 젊음을 통과하고 있는 당신이라면,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지’ 탄식 같은 혼잣말을 중얼거릴 것이다. 젊음에게 ‘혼돈’은 전공필수, ‘방황’은 교양필수다.
젊음은 헤매고 더듬고 망설이고 놓치고 속고 허방을 짚는다. 시행착오는 피할 길 없으며, 창피를 당하거나 헛걸음을 치기 일쑤다. 말 그대로 갈팡질팡, 우왕좌왕, 오락가락의 나날들. 만만찮은 대가를 치르며 인생을 위한 세련의 기술을 습득해가는 시절. 그러나 인생이 짐짓 서글퍼지기 십상인 것은 많은 경우 그 세련이 그럴싸한 포장, 능란한 거짓말, 어떻게든 상처나 갈등을 면해보려는 회피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소설가 이기호가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 역시 예의 ‘세련’의 문제다. 그러나 그는 애초부터 그럴싸한 포장이나 능란한 거짓말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방식임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라고 왜 번드르르한 세련의 포즈를 흉내내보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결과는 무참했던 것 같다. 세련의 포즈를 취하려다 그야말로 무참하게 ‘깨지는’ 극적인 사례들을 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그의 책을 펼쳐들면 된다. 그럴싸한 포장과 능란한 거짓말에 좌절한 이기호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래서 ‘정면 돌파’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기꺼이 고난의 가시밭길을 선택한 영웅이나 구도자라는 것은 또 아니다. 멋들어지게 돌파에 성공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시봉’이란 인물로 대표되는 이기호 소설의 주인공들은(이름부터가 벌써 좀 그렇다) 웬만한 소시민상(像)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안한 표현이지만 ‘지지리 궁상’에 가까운 캐릭터들이다. 그들의 정면 돌파는 대의를 위한 거창하고 폼 나는 ‘선택’이 아니라, 궁지에 몰린 나약한 자의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이자 발버둥이다. 예상대로 그들은 세상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어느 때는 거의 린치를 당하는 수준이다.
소설 속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주인공의 좌충우돌에 킥킥 웃음을 터뜨리며 빠르게 책장을 넘기는 독자도 있겠지만, 멋지고 근사한 주인공을 자신의 분신으로 삼아 감정을 이입시켜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은 독자라면 고개를 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기호의 주인공들이 그런 수모를 겪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련’ 때문이다.
그들의 정면 돌파가 어쩔 수 없는 발버둥에 불과한 것이라도, 그들이 끝내 세련됨을 손에 넣을 수 없다 하더라도, 예의 이기호식(式) 정면 돌파는 당위성을 갖는다. 그것은 외면이나 도피가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삶에 대한 기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통은 솔직하고 정직하다. 애써 갑옷 같은 갑각류의 껍질을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는 것, 그러지 않았다는 것. 생살의 쓰라린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짐짓 건강하다는 뜻이다.
카페의 이름은 ‘제니스’. 좀 달콤한 것이 먹고 싶다던 그는 조언을 구한 뒤, ‘바닐라 카라멜 라떼’를 주문한다. 잠시 뒤 하트 모양의 하얀 우유거품이 떠 있는 예쁜 커피잔이 그 앞에 놓인다. 그가 웃으며 카페의 직원에게 묻는다. “와, 이런 건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어줍잖은 ‘작업 멘트’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는 커피 위에 이런저런 모양으로 우유거품을 만들어 얹은 것을 ‘라떼 아트’라고 부르는지 모르는 ‘아티스트’인 것이다. 우유거품으로 하트 모양을 내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을 그 직원을 ‘바리스타’라고 부른다는 사실 역시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뭐 어떤가. 와, 이런 건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순순히 물어보면 되는 것이다. 창피를 당할까 굳이 아는 척을 한다거나, 주눅이 들어 물어보지도 못한다거나, 그게 더 지지리 궁상이다.
두들겨 맞는 얘기에 일가견이 있는 소설가와 ‘맷집’ 얘기를 했다. 이기호는 현재 한국일보에 <길 위의 이야기>라는 짧은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세상살이에 대한 이런저런 단상들을 이기호 특유의 유머와 기지로 풀어내고 있는데, 무척이나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는 모양이다. 재미있다는 반응도 많지만, 몇몇 민감한 사안이나 어느 특정 단체의 문제를 언급했을 때는 바로 악플이 달리거나 항의 메일을 받거나 했다. 소설이라는 픽션에 익숙해져 있는 터라 처음 써보는 칼럼이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역시 여러모로 맷집이 생기고 있다는 느낌이다. 독자의 반응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전달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게 욕이건 칭찬이건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내가 잘 쓸 수 있는 건 역시 픽션이란 것도 확실히 깨달았다.”
모든 도식화(圖式化)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분류에 의하면 이기호는 ‘글월로 세상을 계몽하는 지식인’형(形) 소설가도, ‘글로 억압과 싸우는 투사’형 소설가도, ‘문자로 예술하는 고독한 댄디’형 소설가도 아니다. 신형철은 이기호를 ‘육체파 소설가’로 명명한다. ‘막노동꾼’에 가까운 소설가란 것이다. 그 말에 동의하듯, 그는 단편집 말미 ‘작가의 말’에 “소설이 잘 써지지 않을 때마다 내가 중얼거리는 말이 있습니다. / 겁 많은 두 눈아, 겁내지 마라, 부지런한 네 두 손이 다 알아서 해줄 테니”라고 썼다.
이기호의 단편소설 ‘수인(囚人)’은 핵사고가 일어난 가상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세상에 재앙이 벌어진지도 모른 채 산 속에 틀어박혀 소설을 쓰고 있던 신인작가 박수영은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린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없게 된 수영은 자신이 쓴 소설책을 찾아내기 위해 폐허더미가 된 서점을 향해 이십오 미터 길이의 땅굴을 파기 시작한다. 곡괭이를 들고 자신의 책을 향해 콘크리트 벽을 내리치는 소설가의 손에는 물집이 잡히고 피가 흐른다.
곧잘 독자를 낄낄거리며 웃게 만드는 소설가 이기호는 스스로를 참 무취미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그가 술에 약하다는 사실은 문단에 제법 알려져 있다. 여느 작가들처럼 마니아급의 예술적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도 음악도 여행도 그저 그렇단다. 컴퓨터 게임 삼매에 빠지는 일도 없고 흥미를 느끼는 특별한 잡기도 없다. 중독이라 할 만한 거라곤 담배와 축구중계 시청 정도. 경치 좋은 곳을 오래도록 산책하는 것, 멍하니 이런저런 공상에 잠기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는 것들이라 말한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그의 어여쁜 아내는 “무슨 소설가가 그래요?”하며 첼로를 선물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이야 첼로 앞에 앉아 있으면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어색한 게 사실이지만 덕분에 목표가 생겼다. 환갑이 되는 날, 첼로 연주회 겸 소설 낭독회를 열고 싶다. 과거의 작품이 아니라 그때 막 새로 쓴 소설을 가지고.”
이기호와 첼로! 그럴싸한 포장과 능란한 거짓말을 익히지 못해, 흠씬 두들겨 맞으며 미련하게 곡괭이질을 해야 했던 젊은 소설가는 어찌됐든 ‘세련’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기호는 발음이 어려운 외국 영화감독의 이름이나 아방가르드 미술 사조 앞에서는 그의 주인공 ‘시봉’처럼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이지만, 귄터 그라스와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책장이 나달나달해질 정도로 반복해 읽었으며 한나 아렌트와 다치바나 다카시의 글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소설가다. “내가 쓰고 싶은 얘기는 메타 픽션(소설가가 주인공인 소설)이 아니다.
진짜 하고 싶은 얘기는 아직 시작도 못했다”며 장편소설에 대한 은밀한 결의를 밝히는 그의 나직한 목소리는 더없이 진지했다. 갈팡질팡하다가 세련되어질 줄 알았다. 소설가 남편에게 첼로를 선물한 그의 어여쁜 아내는 올 5월에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 첫 장편소설에 매진하고 있는 소설가 이기호는 당연히 그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 정면 돌파. 그는 정직하게 글을 쓰고 정직하게 아이를 키울 것이다. 힘겹겠지만 더욱 세련되어질 그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참고로 작가와 필자의 친분관계상 대화는 이기호 소설의 그것처럼 지극히 리얼한 구어체로 진행되었으며, 곧 세상에 태어날 그의 아이는 필자의 예상대로 아들이란 점을 밝혀둔다.
07. 03.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