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쥐 기사 데스페로 비룡소 걸작선 39
케이트 디카밀로 지음, 티모시 바질 에링 그림, 김경미 옮김 / 비룡소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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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읽으면서 어쩐지 심상치가 않다고 했더니 내가 너무도 감명깊게 보았던 <내친구 윈딕시>의 작가였다. 그럼 그렇지~

얘들아, 너희들이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르겠구나. 사실 이렇게 물어야만 하지. 아주 자그마하고 약골이면서 커다란 귀를 가진 생쥐가 '피'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공주와 사랑에 빠지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이야 하고 말이야.
대답은......."그렇다"야. 물론 우스운 일이지.
사랑은 원래 우스꽝스러운 거야.
그러나 사랑은 멋지기도 하지. 그리고 강하고. 데스페로가 공주를 사랑하는 일이 이런 모든 사실을 곧 증명해 줄 거야. 사랑이란 게 강하고, 멋지며, 우습기도 하다는 것을 말이야.

엄청 약골로 태어나, 생긴 것도 평범하지 않아 부모에게 '절망(데스페로)'란 이름을 받은 우리의 주인공 데스페로는 어처구니없게도 공주님과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니 동화는 이 둘이 '그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보통은 생쥐기사 데스페로가 엄청난 지혜와 용기로 눈 앞에 나타나는 적들을 챙챙 물리치고 공주님과 키스를 해서 잘생긴 왕자가 된다......정도?

그런데 이 동화에서 생쥐기사의 '눈앞에 나타나는 적들'은 마냥 미워할 수가 없다. 작가가 그들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너희들은 시궁쥐가 마음이 없다고 생각했니? 그렇지 않단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마음이 있지. 살아 있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마음을 다칠 수가 있어.

이 동화의 주요 악역인 시궁쥐, 그 역겹고 더러운 시궁쥐의 마음 깊은 곳까지 쓰다듬는 작가의 손길 때문에 이 이야기는 식상한 선악이분법 구도를 훌쩍 넘어 어린이들에게 인생의 진실을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해 주고, 그 진실이 쓰기도 하고 시기도 하지만 결국은 우리의 영혼을 달래주는 닭고기 수프라는 걸(이야기에서 수프는 아주 중요한 그 무엇이다) 조근조근 말해 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물론 아이들이 이 책을 읽고 이렇게 느낀 점을 콕 찝어내어 이야기하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말로는 못해도 느낄 거라 생각한다. 뭔가 뭉클한 감정을.

이룰 수 없는 일이야. 내가 원했던 건 약간의 빛 뿐이었는데. 그래서 공주를 여기 데려온 건데. 정말로, 아름다움을 조금 가지려고...... 나만의 빛을 가지려 한 건데.

라고 말하는 시궁쥐에 대한 뭐라 말할 수 없는 연민을.

얘들아, 내가 보기에 용서는 사랑과 아주 비슷하단다. 강하고 멋진 거야.
그리고 우습기도 하지.
어쨌든 우습지 않니?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북을 두드린 바로 그 아빠가 아들에게 용서를 구하다니. 생쥐가 그런 배신자를 용서한다고 생각하면 우습지 않아?
하지만 데스페로 틸링은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어.
"아빠, 아빠를 용서해요"
데스페로는 그 말을 하는 것이 가슴이 둘로 쪼개지지 않을 단 한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했단다. 얘들아, 데스페로는 자기 자신을 구하려고 그 말을 한 거야.

용서하는 자와 용서받는 자에 대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공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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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6-01-10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요, 솔직이 요즘, 이렇게 따뜻한 이야기가 더 버거워요. 이걸 전달하는 것이 어쩐지 씁쓸하거든요. 아이들도 알거든요.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쯤은. 으음~~ 그래도 꾸준히 들려줘야겠지요... 참, 어려워요.

깍두기 2006-01-10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돌바람님. 현실은 척박하지요. 사람들도 점점 사나워지고요.
그래도 이 책은 현실을 마냥 외면하고 있진 않아요.
저는 그냥 이 책을 읽으면서....연민의 바다에 푹 빠졌다가 나온 느낌이랄까....
아이들은 또 신나는 모험으로 읽을 수도 있어요.
좋은 동화의 장점이죠. 누가 읽어도 재밌고, 각자에게 맞는 메시지를 주는 것^^

바람돌이 2006-01-10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멋진건지 아니면 깍두기님의 리뷰가 멋진건지.... ^^
깍두기님의 리뷰를 보면 이 책을 꼭 읽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솟구치네요. 요즘 뭐든지 보관함으로 일단 나르고 본다는 말씀... ^^

깍두기 2006-01-10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멋진 거죠 물론^^;;;(돌 던지지 마란 말이야!!!!)
이 작가 책 두권 봤는데
이 책과 <내 친구 윈딕시> 둘다 참 괜찮습니다.
애들은 좋아할지...감수성이 풍부한 애들은 표현하기 힘든 무엇인가를 느낄 것이구요.
문장이 쉽기 때문에 독서수준 높지 않아도 금방 읽을 것 같습니다.
4학년 이상 권장^^

돌바람 2006-01-10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돌이 어때서 던지고 그러세용^^*
역시 깍두기님한테 물어보길 잘했네요. 저도 그러려구요. 헤헤

ceylontea 2006-01-10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 제가 읽고 싶어지는데요..(아침부터 지름신이 오시네.. --;)

반딧불,, 2006-01-10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론티님과 막상막하 지름신..등록이옵니다. 질질질~~(그분에게로 끌려가는 중..)

깍두기 2006-01-10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님, 앗, 죄송합니다^^
근데 저한테 뭘 물어보셨지?^^;;;;

실론티님, 반딧불님. 그분께 반항하시면 안됩니다^^
 
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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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제이 굴드, 당신 말이야, 나한테 꼭 찍혔어!

과학자가 이렇게 글을 재밌게 써도 되는거야! 물론, 대한민국에도 과학자이면서 글도 재밌게 쓰는 마모님이란 분이 계시긴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은 전세계에 그분 하나 뿐인 줄 알았다구.

그런데 이렇듯 과학적 지식과 새로운 주장을, 능청스러운 유머라는 양념을 넣고 반죽하여, 먹기좋고 보기좋은 빵을 만들어내는 솜씨라니! 게다가 그 엄청 오만한 자신감은 어찌 보면 뻔뻔스럽기까지 한데, 난 왜 그것까지 마음에 들어버린 거지!

하여간 난 지금부터 당신의 스토커가 되기로 했으니 각오하셔. 아니, 각오는 내가 해야 하나. 책값이 만만치 않을 텐데ㅡ..ㅡ;

 

저자에 대한 애정고백은 이 정도로 하고, 이 책에 대해 말하자면 이 책의 주제는 '진화란 어떤 특정한 방향을 향한 목적의식적인 사다리 오르기(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이다. 인간은 우연의 산물이다' 라는 것이다.

사실 난 이 책을 읽기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주장이 별로 놀랍진 않았고, 그렇게 간단한 주장으로 책한권을 써내려간 능력이 존경스러웠을 뿐인데, 굴드가 이렇게까지 흥분하면서 글을 쓴 걸 보면 반대쪽의 주장이 상당히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는 논박을 위해 아주 여러가지 알아보기 쉬운 도표와 그래프와 그림들을 이용하는데(그리고 야구기록도. 진화를 얘기하는 책에 야구 얘기가 삼분지 일이다), 대단한 건 그런 도표 및 그래프마저도 이 아저씨가 사용하면 유머러스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특히 술주정뱅이 모델을 보면 폭소가 터진다.

왼쪽에는 벽이 있고 오른쪽에는 도랑이 있는 길을 가면 술주정뱅이는 결국은 도랑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얘긴데(갈짓자로 비틀거리다가 말이다) 이것을 그는 생물이 왜 점점 더 복잡성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만 진화해 왔는지에 대한 너무나도 적절한 비유로 사용한다. 왜 생물이 점점 더 복잡해지는가? 그것은 무슨 목적의식이 있거나 그것이 생존에 더 유리해서가 아니라 그쪽 방향만 뚫려 있기 때문이다. 가장 단순한 모습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다양해지기 위해선 복잡해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양성이야말로 생명이 추구하는 바다. 

그것을 복잡성의 정점에 있는 인간이 오해하여 '진화는 인간이란 고등동물을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교만을 떠는 것이라는 것이다. 마치 진화의 정점에 인간이 있다는 듯.

굴드 아저씨는 코웃음을 치면서 '인류는 운 좋게 당첨된 것 뿐이지 생명의 방향성이나 진화 메커니즘의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다' 라고 단언한다. 그 말은 즉, 옛날로 되돌아가서 새롭게 진화의 수순을 밟는다면 인간은 절대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잘난척하지 말란 얘기다.

그러면서 그는 '그래도 인간이 가장 고등동물이며 지구를 지배하고 있지 않는가?'란 애처로운 마지막 하소연조차 '우리의 행성은 35억년 전 화석으로 보존된 최초의 생물(물론 박테리아)이 출현한 이래 언제나 <박테리아>의 시대였다' 고 못을 박는다. 박테리아는 35억년이란 긴 기간동안 살아왔으며, 지구의 구석구석 없는 곳이 없고, 심지어는 그 전체량을 따져도 인간은 물론 지구상 어떤 생물보다 더 많다. 그리고 인간이 핵을 '가지고 놀다가' 절멸한 후에도 여전히 지구를 지배할 것이다.  

사실 목적의식적으로 인간이 생겨났건 그냥 우연히 생겨났건 이 지구상에 인간이 생겨난 건 엄연한 사실이다. 뭐 그걸 가지고 니가 옳으냐 내가 옳으냐 할 건 없지 않나 싶지만 굴드는 그 주장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낸다.

풀하우스의 모델은 우리에게 변이와 다양성을 그 자체로서 존중하라고 가르쳐 준다.........우수성은 특정한 점이 아니라 넓게 퍼져 있는 차이들이다. .....우리는 변화로 가득 찬 각각의 자리에서 우수해지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하지만 이 사회는 끊임없이,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획일적인 평범함으로 이전의 빼어난 것들이 가졌던 풍요로움을 대체하려고 한다. 맥도날드가 지역 식당을 밀어내고, 대형 슈퍼마켓 체인점들이 구멍가게들을 내쫓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변이와 다양성 전체를 자연의 현실로 이해하고 방어하는 것은 이러한 풍조에 경종을 울리고 진화하는 시스템에는 필수적인 원료인 다양성과 변이를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전에 진화론자들이 '잘못' 이해했던 적자생존과 생존경쟁의 법칙을 사회에 도입하여 이런 무한경쟁사회가 된 것에 대해 굴드는 매우 유감인 듯 하다. 그는 자연과 생명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세계도 다시 보자고 말한다. 나는 그가 생각해 보자고 하는 방향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그가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기 위해 약간의 '오버'를 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도 갖고 있는데,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다른 저서들과, 그와 대립항에 있는 다른 과학자들(리처드 도킨스 같은)의 책도 읽어볼 예정이다. 

 

 

그리고 책을 덮으며 마지막에 한 생각 : 그래도 난 박테리아가 되고 싶진 않아........그러나 뭐.....박테리아라고 딱히 인간이 되고 싶은 건 아닐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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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6-01-09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그렇게 재미있어요?
덜덜

하이드 2006-01-09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나는 이런책을 줄줄이 사 놓고 못읽고 있으니, 그게 문제에요. 아, 또 욕심나네요. -_-;;;;;;

깍두기 2006-01-09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님, 재밌습니다. 제 스타일이어요^^
제가 교양과학서적을 좋아하는데, 가장 감명깊게 읽은 건 중3때 읽었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이고요, 이 책도 아주 재미있군요. 코스모스는 교향곡, 이 책은......뭔가 좀더 유쾌하고 가볍고 신랄한 무엇이어요^^

하이드님, 님의 욕심을 누가 막으리.....사 놓은 책으로 대여점 하면 안될까?^^

하루(春) 2006-01-09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아직 안 샀는데... 저도 사게 되면 아주 재미있게 읽을게요. 계속 기대는 하고 있어요. ^^

깍두기 2006-01-09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제 리뷰가 좀 부추김이 되었나요?^^

마늘빵 2006-01-09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안지릅니다.

마늘빵 2006-01-09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르면 안돼~

깍두기 2006-01-09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비명 같아요^^

바람돌이 2006-01-09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넣어두고 지를 때마다 손이 왔다 갔다.... 결정적 한방이군요. 지난번에 페미니즘의 도전도 결정타를 날리시더니....^^;;

깍두기 2006-01-10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훗, 성공^^
저자의 생각에 동의를 하건 반대를 하건
아마 그의 말빨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어요^^

산사춘 2006-01-12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말지름땜시 연초는 참고있는데 넘 하셔요. 흑

깍두기 2006-01-12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호, 질러요 질러~~~~

2006-06-27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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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에게는 '페미니즘'이란 말을 들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십몇년 전 내가 전교조에 가입해서 탈퇴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되어 교육운동이란 걸 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
사실 나에게 '운동'이란 별로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고, 머릿속에 든 것도 별로 없었다.
내가 전교조를 탈퇴하지 않은 것도 내 속에 굳은 신념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내가 하겠다는데, 그게 옳다는데 누가 감히 나한테 해라마라야!' 라는 내 성질이 발동했기 때문이라는 게 더 정확하다.
그래서 나는 같이 일하는 선배님들(내가 막내였다. 발령 받자마자 짤렸기 때문)이 무지 존경스러웠고
신념에 따라 행동하며 삶과 생각을 일치시켜가며 한걸음한걸음 나가는 그분들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날, 회의를 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우조교 사건'이 화제에 올랐다.
('우조교 사건'이란 표현이 잘못된 건지도 모르고 우린 그때 누구나 이렇게 불렀다. 가해자는 누군지 공개하지 않고 피해자의 이름을 공개하는 이 엄청난 언어폭력! 이 책에서는 이 사건을 '신정휴 교수 사건 혹은 서울대 성희롱 사건이라고 부른다)
한 남자선배가 이런 식으로 판결을 내렸다. '우조교가 처음부터 거절을 했어야지, 자기가 신분상의 불이익을 받고 나니 그때서야 폭로를 하다니, 그건 우조교에게도 그런 식으로 출세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거다. 여자도 잘못이다'
나는 그때 엄청 분노했는데, 너무나 억울하게도 그에 맞서 말할 논리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얘기는 점점 이상한 방향, 약간 음담패설 비슷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었다. 점점 더 불쾌해진 나는 '이제 그만 하죠' 하고 말을 잘랐는데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것을,
"여자들은 이런 얘기 하면 속으로 좋아하면서 겉으로 싫은 척 한다던데?"
결정적으로 그 선배가 기름을 끼얹는 발언을 한 것이다. 열받아서 꼭지가 돌아버린 나는 똑같이 파렴치하게 인신공격성 발언으로 맞섰다.
"사람에 따라 다르죠. (옆에 계신 다른 남자선배를 가리키며) 똑같은 말도 이분이 하면 기분 나쁘지 않은데요, 선배님이 하면 기분 나빠요!"

그날 분위기 엄청 싸아~해졌음은 물론이고 그 이후 그 선배와 나는 두번 다시 말을 섞지 않았다.
그분은 지금도 교육운동의 선봉에 서 계시다. 물론 나는 그분의 참교육에 관한 진정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어떤 한가지 정체성에 의해 정의 내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진보냐 보수냐, 정의의 편이냐 불의의 편이냐 이런 식으로 양분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나는 그때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던 것 같다.

젠더 정치의 시각에서 본다면, 좌파와 우파 모두 남성 중심적 정치 전선을 강하게 유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이런 종류의 진보 남성과 극우 논객 조갑제의 차이는 없다.

부르주아 지식인 남성이 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옹호하는 '좌파'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것은 그들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다.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력, 남성의 주체성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남성이 여성주의자가 되는 것은 자기 존재를 상대화해야 하는, 자신을 후원하는 '아버지'를 버려야 하는, 매일매일 보이지 않는 (가사)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힘든 일이다. 그야말로 존재의 전이인 것이다.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언제나 진보라고 불리우는(그리고 자청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살면서(가정이든 사회든) 갑갑함과 불공평함과 때로는 억울함까지 느꼈던 이유가 저 위에 인용문장에 나와 있다. 남자가 여성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존재의 전이'인 것이다. 왜 남자들이 정치적으로 그렇게 올바르고 공명정대하며 약자의 편에 서서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집에 돌아오면 아내에게는 가해자가 되며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려 하고 아내의 무료노동의 덕으로 살아가려고 하는지 완벽 이해가 되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 책이 내게 진정으로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위와 같은 타인(남자)의 잘못 뿐 아니라 내 속에 뿌리내린, 내가 남성중심사회에서 살아가면서(그리고 그전에 수만년 동안 진행된 남성중심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고스란히 받아들여서) 내 몸에 내재된 나의 편견들을 돌아보게 해 주었다는 데 있다.

위에서 언급한 '우조교 사건'이라는 잘못된 명명도 그렇거니와, '양성평등' 이란 말도 문제삼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양성평등'이란 말은 이 세상은 여자와 남자 두가지 성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으므로 양성구유자나 트렌스젠더 등의 성적 소수자를 제외시킨 이름짓기라는 것이다. 저자가 책에서 이런 식으로 든 예는 한두개가 아니다. 헤어지면서 하는 인사 "또 보자" 이런 말도 시각장애인을 배제한 표현이다.

이렇듯 여성주의란 내가 편견을 가지고 생각했던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위치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이 매우 놀라웠고, 새로웠고, 매력적이었다.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만든다. 여성주의는 정치적 올바름, 통일성이나 단일성의 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럴 때, 여성 뿐만 아니라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도 들리게 된다.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보편주의' 정치학으로서 여성주의 언어가 지닌 힘이다.

그러니까 여성주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은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 위에 존재하며 그 하나하나를 모두 '인간'으로 서게 하고 누구하나 배제시키지 않는 것이 여성주의인 것이다. 정말 매력적이지 않은가?

물론 여성주의의 시각으로 사고하는 것이 즐겁지만은 않다. 그것은 이 책에서 말한 대로 '상처'이고 '고통'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어왔던 것에 대한 불신, 무의식적으로 사용해왔던 언어에 대한 성찰, 내가 나도 모르게 타자를 무시하고 배제해 왔던 것에 대한 뼈아픈 반성, 억압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굴종해왔던 데 대한 모욕감을 한꺼번에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 그것이 상처인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 나오는 다음 문장을 수첩에 적어 두었다.

상처에서 새로운 생명, 새로운 언어가 자란다. '쿨 앤 드라이', 건조하고 차가운 장소에서는 유기체가 발생하지 않는다. 상처받은 마음이 사유의 기본 조건이다. 상처가 클수록 더 넓고 깊은 세상과 만난다......편안한 상태에서 앎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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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1-05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상처받은 마음이 사유의 기본 조건이라는데 동의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추천 ^^;

날개 2006-01-05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너무 재밌습니다...!!! 재밌다는 표현을 쓰면 안될것 같지만...^^;;;;

blowup 2006-01-05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리뷰 쓰고 있는데. 겹치기도 하고 전혀 아니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요. 깨달음은 다르기도 하고 비슷하기도 하고.

마태우스 2006-01-05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훌륭한 리뷰입니다. 신정휴 사건이 맞지요. 그가 나중에 "나는 성폭력 교수인가"라는 책도 냈는데요, 거기서 자기 연구업적을 장황하게 설명했더이다. 헌책방에서 그거 보면서 어이없어했지요.

마태우스 2006-01-05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이런... 댓글 달 땐 일등이었는데 4등으로 밀리다니...

깍두기 2006-01-05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제가 리뷰 쓰고 이렇게 단시간에 댓글이 줄줄 달리는 경험은 처음이어요!
일단 이 감격을 먼저 댓글로 올리고 한분한분 답글을.....^^

깍두기 2006-01-05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낡은 구두님, 제 경험에도 괴로워야 생각이란 걸 하게 되더라구요^^ 안 그러면 만판 퍼져서....^^

날개님, 재밌다는 말이 가장 듣기 좋습니다. 마니마니 해 주셈~^^

나무님, 저 책을 읽으면서 너무도 여러가지 생각을 해서 리뷰 쓰기 매우 곤란했습니다. 이 리뷰에 제 생각의 십분지 일이나 담겼을지.....님 생각도 궁금합니다^^

마태우스님, 아니 그 인간 뻔뻔하기가 그지 없네. 책도 냈단 말입니까!!

깍두기 2006-01-05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 안그래도 님에게 이 책을 읽은 다음엔 무슨 책을 읽는 게 좋을지 상담할 생각이었어요. 가르침을 주세요!

깍두기 2006-01-05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그 땡스투를 님에게 했던가....? 기억이 없네.....
그래도 가르침은 꼭 줘요! 더 공부하고 싶어졌으니까.

superfrog 2006-01-05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이렇게 훌륭한 깍두기 엄마 밑에서 해송이, 소현이가 나온 거로군요..^^

깍두기 2006-01-05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야, 금붕어님~~~ 리뷰 내용과 상관있는 댓글을 달라구우~~~^^

superfrog 2006-01-05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내용과 상관 있는 추천은 했어요..ㅎㅎㅎ

무해한모리군 2006-01-05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이책에 대한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답을 주기보단 이런저런 고민거리를 많이 안게 된듯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데 '여자'이기를 요구하는 압박에 힘겨운 때가 많습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chika 2006-01-05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아직 못 읽었어요. 안그래도 누구에게 땡투를? 하고 있었는데, 깍두기님으로 낙찰!!! (제 댓글에도 댓글달아줘요~ 오호홋 ^^)

깍두기 2006-01-05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붕어님, ㅎㅎㅎ 고마워유^^

해방동이님, 반갑습니다. 네, 저도 그 생각 했어요. 생각할 거리를 너무 많이 던져 주는 책이라고요. 이 세상 모든 일들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고나 할까요.

치카님, ㅎㅎ 내가 딱 맞춰 리뷰를 올렸구만요~^^

sandcat 2006-01-05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겠다, 라니 갑자기 깍두기님께 절하고 싶어집니다. 추천합니다.

깍두기 2006-01-05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은 저렇게 했지만 실은 두려워요 ㅎㅎㅎ
다짐이죠, 다짐. 자신이 있는지는.....글쎄요^^

로드무비 2006-01-05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산동 전교조 사무실에 여럿이 어울려 격려차 간 적이 있어요.
깍두기님이 거기 계셨을라나?
멋진 리뷰입니다.
전 아직 상처 받을까봐 절절 맵니다.^^;;

깍두기 2006-01-05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본부에서 근무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없었을 걸요?^^
전 이제 남에게 받을 상처는 받을만큼 받았다고 생각해요.(교만^^)
내가 얼마나 그 상처를 잘 소화시킬지, 비루하게 굴지 않을지, 라는 과제가 남아 있죠.
아, 그리고,
남에게 상처를 안주고 살아야 할 과제도^^

paviana 2006-01-05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동네에서 이 책 안 읽으면 안 될거 같은 분위기이네요.^^
비숍님.로드무비님.마태님.플라시보님깍두기님. 정말 주옥같은 리뷰들이 주루룩 올라오네요. 어느 분에게 땡스투를 해야 되나 무지 고민되겠습니다.^^

로드무비 2006-01-05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아나님, 땡스투는 저 눌러주세요.
요즘 형편이 좀 어렵거든요.^^;;;

깍두기 2006-01-05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님이 언급하신 분들의 막강 리뷰를 보고 책을 주문했지요.
땡스투는 뭐~~~~ 저에게~~~^^

깍두기 2006-01-05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로드무비님!
언제 저런 댓글을!!
님 형편이 아무리 어려운들, 한꺼번에 고래가 그랬어 24권 세트를 산 저보다 더 어렵겠냐구요!^^

로드무비 2006-01-05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의 말씀은 "우리집은 요리사도 가난해!"하는 말과
같다고 사료됨.=3=3=3
그렇게 탐나는데도 결국 못 산 사람 앞에서.

깍두기 2006-01-05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웅.....졌습니다!
여러분, 땡스투는 로드무비님에게!^^

비로그인 2006-01-05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와 댓글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습니다.
입좀 다물게 옆에서 조금만 눌러 주세요.
전 상처만 주고 살아왔는데...ioi

바람돌이 2006-01-06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 책은 안 읽으면 안되겠다는 압박이....끙~~ 이번달 절대 책 안사기로 했단 말예요. ^^;;

아영엄마 2006-01-06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너무 멋진 리뷰입니다!! 추천수가 좀 더 올라가야하지 않을까요? ^^

깍두기 2006-01-06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개비님, 입은 다물어지셨겠죠?^^
따개비님이 자책하며 벌을 서시니 제가 괜히 죄스러워요.
전 위의 댓글에 이기적인 소리만 해 댔는데....^^

바람돌이님, ㅎㅎ 이 책은 사셔야 할 걸요!

아영엄마님, 아이구, 무슨 말씀을!^^

시비돌이 2006-01-09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20추천.....

깍두기 2006-01-09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픈달님, ㅎㅎ 부럽죠?
=3=3=3

비로그인 2006-01-11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이 이야기하신 책, 동네 도서관서 살짝 훑다가 아는 욕 모르는 욕 다 긁어모아서 책에 퍼부어주고 나왔던;;; 훌륭한 리뷰 앞에 왠 번개맞아 정신나간 듯한 리플을;;

깍두기 2006-01-11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평범한 여대생님의 댓글을 다 받아보고 리뷰 쓴 보람이 있네요!
근데 왜 욕을 하셨는지 엄청 궁금하다는.....쥔장보기로라도 살짝 가르쳐 주세요?^^

톡톡캔디 2006-01-30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너무 오랜만에 들립니다. ㅠ.ㅠ 부끄럽네요. 좋은 글 읽고 갑니다.^^

깍두기 2006-02-01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톡톡캔디님, 진짜 오랜만.....이제 이곳에 복귀하신 건가요? 아주 떠나신 줄 알았어요!
 
나는 입으로 걷는다 웅진책마을 8
오카 슈조 지음, 다치바나 나오노스케 그림, 고향옥 옮김 / 웅진주니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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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짧고 글씨도 큼직큼직한 책으로 1학년부터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감동은 나이제한이 없다.

혼자서는 일어날 수도 없는 다치바나.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자 아무 거리낌없이 '오늘은 우에노 집에나 가볼까?'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다치바나를 집앞 인도에 침대 째로 내놓고 잘 다녀오라며 들어가 버리신다.
(이 대목에서 엄청 황당)
그러나 다치바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다.
입으로 걸으면 되니까.
지나가는 사람에게 가는 데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에노 집에 갈 때까지 다치바나는 여러 사람과 만난다.
그 중에는 이해심 많고 따뜻한 사람도 있지만 너무도 편협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치바나의 침대차를 밀어준 사람들 모두는 위로와 치유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다.
어쩌면 인간이란 한명도 빼놓지 않고 그것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위로와 치유 말이다.
다치바나는 그들에게 그걸 준다.
그가 살아가는 모습 만으로 그들은 위로를 얻는 것이다.

장애인이란 '우리가 도와야 하는 불쌍한 사람'이 절대 아니다.
그들은 매우 존엄하며, 존경스럽게 시련을 이겨내고 있는 우리의 이웃이고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에게 긍정의 힘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가족들이 그 소년을 보살펴 주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족들도 소년으로부터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소년은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살아갈 힘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죠.
신기하죠! 인간은 참 멋지죠!

바로 이렇게 말이다. 작가가 '신기하죠! 인간은 참 멋지죠!'라고 하는데 마음 속에서 어찌나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오던지!  

이 마음을 잊지 않고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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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6-01-01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책이네요. 존경스럽게 시련을 이겨내는 사람으로 장애우들을 볼 수 있는 시각. 새해에 사서 내년에 우리반 아이들한테 읽혀야겠네요. ^^

깍두기 2006-01-01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바람돌이님. 책은 아주 좋은데요. 중학생들에게 읽으라 하면 시시하다 할 지도 모릅니다. 아마 10분만에 읽을 수 있을 거예요. 같은 작가가 쓴 청소년용 책도 있는 것 같으니 참고하세요^^

바람돌이 2006-01-02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우리반 아이들의 반은 이 10분정도 분량의 책이 딱 맞을겁니다. 헤헤~~~

깍두기 2006-01-02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우리 딸도 그래요^^(중학생 큰딸)

조선인 2006-01-02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찌잉. 새해 아침에 듣기에 너무 멋진 말이에요. ㅠ.ㅠ

깍두기 2006-01-02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저도 다이어리 첫장에 저 말을 쓰니 너무 좋더라고요^^
 
마디타 - 2단계 문지아이들 60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일론 비클란드 그림, 김라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린드그렌 여사는 정말이지 경이로운 분이다. 이 분의 동화에 나오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매력적인데, 하나도 비슷한 애들이 없다. 내가 처음 만난 린드그렌 동화의 주인공은 말괄량이 삐삐인데, 이 엉뚱하고도 씩씩한 소녀는 전혀 예쁘게 생기지 않은데다가 힘은 천하장사고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지만 그래도 이 아이를 알게된 사람은 절대 얘를 미워할 수가 없다. 미워하기는 커녕 그 묘한 매력에 중독되어 버리고 만다. 다른 주인공들- 라스무스, 로냐, 미오, 에밀 등등- 도 마찬가지. 각자 성격과 생김새는 다르지만 개성있고, 매력 넘치며, 내 옆에 있다면 정말 사랑스러울 것 같은 아이들이다.

오늘 또 한명의 매력적인 소녀를 만났다. 이름은 마디타. 일곱살이며 다섯살 동생 리사벳과 이해심 많은 부모님과 행복한 유년을 보낸다. 이 소녀가 주변 사람들과 만들어내는 아기자기한 얘기는 얼마나 예쁜지! 투정과 거짓말조차도 귀여운 아이들! 사소한 놀이도 엄청난 모험으로 만들어버리는 아이들!

학교에 갓 입학한 마디타. 학교생활 열심히 잘 하는 것 같더니 슬슬 사고를 치기 시작한다. 신발도 잃어버리고, 옷에 잉크도 쏟고......그런데 그건 다 리하르트 때문이다. 그 녀석이 마디타의 신발을 하수구에 쳐넣고, 잉크도 쏟고, 그뿐인가 마디타의 책에 낙서도 하고 지우개를 먹어버리고, 도대체 그 리하르트란 녀석은 어떻게 된 녀석일까? 궁금했던 엄마는 마침 길에서 담임 선생님을 만났다. 이제 리하르트는 큰일났다. 과연......정말 리하르트는 큰일난 걸까?^^

마디타와 리사벳은 요셉놀이를 하기로 하였다. 요셉이 된 리사벳은 우물에 들어간다. 마디타는 요셉의 형이 되어 리사벳을 노예상인에게 팔아치워야 한다. '작고 예쁜 노예 팝니다' 라는 팻말을 세워놓고 마디타는 리사벳을 잊어버리고 실컷 놀았다. 문득 생각 나서 가본 우물가에는 '이 노예를 내가 5외레에 샀소이다. 노예장사꾼 무스타파 알 아크마르'라고 써있고 5외레가 놓여져 있다. 아아, 어떡하면 좋아! 난 동생을 노예장사꾼에게 팔아먹은 나쁜 애야! 집에는 어떻게 들어가지????

이런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얼마나 알콩달콩하고 귀여운지 책을 깨물어 먹고 싶을 정도이다. 그리고 린드그렌 여사님의 위대한 점은 이런 에피소드들의 세부를 이루는 아이들의 심리를 정말 놀라울 정도로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애들이 어떤 때 심술을 부리는지, 그러다가 어떻게 금방 풀어져서 사랑스런 천사가 되는지 이 할머니는 어쩜 그렇게 잘 알고 계신 걸까? 아이들이 무슨 일에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를 내는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 걸까?

분명히 린드그렌 할머니는 이 아이들을 천사처럼 사랑스럽게, 좋은 면만 그리지는 않는다. 마디타와 리사벳은 심술도 부리고, 싸우고, 말썽 피우고, 거짓말 하고, 사고를 친다. 그런데 그 아이들의 내면을 그려주는 린드그렌 할머니의 손길은 너무도 따스하고 인자해서, 그 손길을 따라가는 우리는 '아이들은 말썽 피우고 사고치는 존재지만 너무도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걸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주변의 사고뭉치들을 다시 한번 보게 된다. 저 애들도 사랑스러워, 라고 생각하며.

그런데 이 책에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책을 덮고 나면 주인공보다 더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옆집 오빠 '아베'이다.

마디타와 리사벳은 노래를 불렀다.......그런데 정말로 창문 밑에 서서 노래를 듣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비쩍 마른 사내아이였다......사내아이는 금사슬나무 덤불 뒤에 몸을 숨긴 채, 전에도 밤이면 종종 그랬듯이 두 아이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베....아베는 노래 듣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아베가 거기에 서 있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조금 있으면 아베는 수선화를 밟지 않게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그곳을 떠날 것이다. 지체 높은 집안에서 태어나신 아베, 노예 장사꾼 무스타파 알 아크마르는 착한 소년이었다.

귀여운 두 소녀와 놀아주고, 때로는 소녀들을 놀려먹은 소년 아베. 무능한 부모님을 먹여 살리며 '사람은 살아있는 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법'이라고 농담처럼 중얼거리며 두 아이들을 따스한 눈빛으로 지켜보아준 소년 아베 때문에 이 동화는 한층 더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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