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자, 딜비쉬 - 딜비쉬 연대기 1, 이색작가총서 2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너머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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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라즈니의 전작주의자로서, 이 책을 안 살 수 없긴 하다. 젤라즈니와 르귄을 동시에 좋아하다니, 난 정신분열증에 걸린 것일까, 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세상에는 그 둘을 동시에 좋아하는 사람이 예상 외로 많다는 사실을 알라딘을 여행하면서 알았다.

그래 사람에게는 이중성이라는 게 있지. 나의 심리를 들여다 볼작시면, 르귄은 존경하고 젤라즈니와는 연애하겠다는 거겠지. 그래서 이 사람의 소설을 읽으면 가슴이 뛴다. 거기 나오는 주인공들이 다 마초임에도 불구하고 아, 진짜 멋있다, 이러면서 그 품에 나 자신을 맡기고 싶어지는.......(뭔 주착이랴, 아줌마가)

그게 왜 그런걸까, 항상 의문이었는데 어느날 라일라님이 올린 페이퍼에 마초의 해악도에 관한 자세한 분석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젤라즈니의 소설에 나오는 마초는 해악도가 아주 가벼운 편에 속한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다니, 뭐 나만 이상한 건 아닌듯.

< 마초 의무주의자>

"내가 널 지켜줄게. 조건 없이."

해악도 15.

순수 마초 부류 중에서 해악도가 가장 낮다. 마초의 덕목 중에서 권리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의무에만 "싸나이"의 근성을 걸고 정진하는 부류다. 일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죄"로 스트레스를 주긴 하지만, 그 이상의 혜택이 있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으나, 아쉽게도 숫자가 많지 않다.

젤라즈니의 주인공들은 다 이 부류이다. 사랑하는 여자는 무조건 보호, 무한히 큰 능력과 힘을 가지고, 무한의 생을 살면서('불사'를 빼고 젤라즈니 얘길 할 순 없다) 사랑하는 여자의 유한한 삶으로 인한 이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고독과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사는......

너무 멋지지 않은가. 물론 그의 소설이, 문체가, 그 주인공들이 폼생폼사에 올인(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유치한 폼생폼사는 못봐주게 역겹지만 그것도 어느 경지를 넘어서면 알면서도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책, 딜비쉬는 아직 좀 약하다. 계속 이어질 거라니 클라이맥스까지 보고 나야 뭐라 말하겠다만 단편이 계속 이어지는 듯한 구조도 몰입을 방해하는 측면이 있고, 아무래도 그의 주요 걸작들을 다 보고 난 후에 보게 된 딜비쉬는 임팩트가 덜한 듯. 어쨌든 그의 소설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는 불사, 복수, 이런 것들이 여기서도 여전히 얘기된다. 주로 복수가. 그리고 다른 소설과는 달리 SF적 요소는 없는 순수 판타지이다.

이어지는 연작에서 그의 복수가 성공할지, 그가 딱딱히 굳어버린 동상의 몸에서 깨어나면서 악마에게 지불한 것이 무엇인지 나오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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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5-06-02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젤라즈니와 르귄의 책은 안 읽어봤는데요. 그 둘을 동시에 좋아하기가 힘든 건가 보죠?

깍두기 2005-06-02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보면 젤라즈니는 좀 문제가 있거든요. 르귄은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글을 쓰는 작가이고요^^

urblue 2005-06-02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도 젤라즈니와 르귄 모두 좋아하는데요.

깍두기 2005-06-02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우린 다 이중인격자라고!^^

비로그인 2005-06-02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젤라즈니를 만나볼까, 그만 둘까를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리뷰를 보니 고민이 더 깊어집니다...;;; 아.. 어찌해야하나...;;;;;

깍두기 2005-06-02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나세요, 만나요! 난 무조건 추천!
(바디 스내처도 공짜로 준다구요. 그것도 잼나요^^)

마냐 2005-06-02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중인격자임다. 커밍 아웃~ ^^

깍두기 2005-06-02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마냐님, 문제가 있다니까 우리가.....^^

달달무슨달 2005-06-03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저만 그런가 했었는데 르귄과 젤라즈니를 모두 좋아하는 분들을 여기서 만나는군요~~정말 기쁩니다~~^^

깍두기 2005-06-03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averin님, 반갑습니다. 서재에 찾아가 봤는데 지금 방금 서재 만드신 듯 해요. 제가 첫방문객이었어요. 기념으로 방명록 남기고 왔습니다^^

KNOCKOUT 2005-06-15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둘다 좋아해요. 숨은 깍두기님 말대로 젤라즈니와 연애를.. 르권은 존경을 하는군요. --ㅋ 아.. 님의 명확한 분석 감사요..
 
어린이 세계지도책
DK 편집부 엮음, 브라이언 델프 그림, 강미라 옮김 / 대교출판 / 2003년 10월
절판


내가 어렸을 때 이런 책이 있었다면 진짜 심심치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생각이 나는 것이 4학년 때인가 사회과부도를 받아들고는 동생들과 방바닥에 엎드려 배를 깔고는 나라 이름 찾기, 어느 나라 국기인지 알아맞추기, 각각의 대륙 이름과 바다 이름 찾기 등등의 놀이를 하며 시간가는 줄 몰랐던 일이다. 나의 세계지리 공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실 공부시간에 배운 것보다 이렇게 익힌 것이 훨씬 기억에도 오래 남았다. 딱딱한 사회과부도를 보면서도 그렇게 재밌게 놀 수 있었는데 이런 책이 있었다면 얼마나 신났을 것인가. 그러나 만화와 컴퓨터 게임 등 재밌는 게 넘쳐나는 우리 딸들은 아직 이 책을 쳐다보지 않고 있다. 하긴 그때 우리집은 테레비도 없었으니.....

첫장은 이렇게 세계전도가 나온다. 당연한 순서라고 하겠다.

그런데 의외인 것이, 그 다음 장이 북극과 남극이다. 좀 의아했다. 남극과 북극, 우리 생각엔 가장 마지막에 나올 거라고 보통 예상하지 않는가? 무슨 이유가 있을까?

그 다음 장을 넘기니 뜬금없이 영국이 떡하니 나온다. 웬 영국? 표지를 다시 보니 지도를 그린 사람이 영국인이다. 이 책은 번역서였다.(그때까지 몰랐다) 그러니 철저히 유럽의 시각에서 그려졌을 터.

아니나 다를까 대한민국은 거의 마지막에 <동북아시아>란 챕터에 그야말로 눈꼽만큼 나온다.

그래놓고 미안했는지 책 부록으로 커다란 낱장짜리 지도가 한장 들어있다.
뭘 배울 때는 자기에게 친숙하고 가까운 것에서부터 점점 먼 곳으로 지식을 넓혀가는 게 순서가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보는 세계지도는 먼저 우리나라가 나오고, 아시아, 유럽 등등으로 시야를 넓혀가는것이 아이들의 관심을 더 자연스럽게 유도할 수 있을 텐데, 책의 편집자들이 그런 생각을 못했을리는 없고, 아마 번역서라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그래도 쪽수 조정도 불가능했을까?

일본은 당당히 한 챕터를 차지하고 있다. 씁쓸하지만 뭐.....국력과 비례....아니겠는가.
각 챕터의 모든 지도에 그 나라를 상징하는 여러가지(특산물, 문화재, 산업 등등등)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어 아주 말랑말랑하게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챕터마다 퀴즈도 있어 친구들과 같이 놀 수도 있다. 여기 있는 퀴즈 말고도 얼마든지 퀴즈를 낼 수 있다.

챕터마다 요점정리도 있다. 자잘한 상식을 알 수 있어 좋다.

부록으로 주는 세계여러나라의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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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5-05-26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지도는 국내에서 새로 그려 끼워넣었겠군요. 쉽지 않았을 텐데 수고했네요...

풀내음 2005-09-29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사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네여~

분홍돼지 2007-03-20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얼핏 보고 괜찮다 싶었는데 ...
유럽의 관점이라는 생각은 못했다.

미횬 2007-10-11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토리뷰 감사요~
 
나도 타오르고 싶다 - 그림 혹은 내 영혼의 풍경들
김영숙 지음 / 한길아트 / 2001년 8월
품절


로드무비님이 이벤트 선물로 주신 이 책을 읽었다. 단숨에 읽히는 책이다. 그림 공부를 많이 한 사람보다는 이제 막 그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에게 알맞을 책이다. 나같은 사람 말이다. 새로운 것을 꽤 알게 되었다. 친절하고 바로 옆에서 이야기해주는 듯한 지은이의 글솜씨 때문에도 책은 막힘없이 술술 읽힌다. 그러나, 나에게 저자의 글은 어딘가 2%가 부족한 듯, 책을 다 읽고 나니 좀 허전한 감도 있었다.

소현이가 좋아하는 고흐의 자화상. 이걸 보고는 고흐놀이라며 내 목도리를 칭칭 감고 사진을 찍었었다.

이건 고갱. 다 아시다시피 고갱은 중년의 나이에 잘 다니던 회사와 아내 자식들을 버리고 그림공부를 하러 떠났다. 아, 그의 아내는 얼마나 황당했을까나. 고흐와 고갱의 그림을 보면서 옛날에 <달과 6펜스>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게 아마 그 둘의 이야기였지? 근데 어떤 얘기였는지는 가물가물.....그래서 리뷰를 써야 한다. 이 책에서는 한단락 정도로 잠깐 둘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다.

모딜리아니. 그의 그림의 여자들은 슬픈 것 같기도 하고, 감정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에서 모딜리아니의 행각에 대해 읽으니 또 그의 그림이 달라보인다. 학대받는 여인의 초상같은.....어쩌면 그 글은 안 읽는게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볼 때마다 이제 다른 상상은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흑.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딧>이다. 이 그림은 <천천히 그림읽기>란 책에서도 보았다. 여기선 세가지 버젼의 유딧이 나온다. 그 비교가 재미있다. 아르테미시아는 여성화가가 드문 시대에 활동했던 여성화가인데 그가 그린 유딧은 두려움이나 망설임이라곤 전혀 없다.

이것은 카라바조가 그린 <유딧과 홀로페르네스>. 저게 어디 목을 따고 있는 장면이란 말인가. 파리 한마리도 못 죽이게 생겼다.

클림트는 죽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들고 있는 유딧을 그렸다. 유딧은 알기 쉽게 말하면 이스라엘의 논개이다. 적장을 유혹해 목을 치는 장면을 이렇게 에로틱하게 표현하다니, 클림트의 유닛의 표정을 보면 살인에서 쾌감을 느끼는 정신병자를 그려놓은 것 같다.



각 단락의 맨 끝에는 세계유명미술관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있다. 교통편과 전화번호까지 있는.....나는 그걸 일부러 읽지 않았다. 지금 당장 갈 수도 없는데 읽어봤자 가슴만 아프다. 언젠가 그곳에 갈 수 있는 날, 여행계획을 세울 때 읽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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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05-05-15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독한 아름다움>과 겹치는 작품이 꽤 있군요.
2% 부족, 공감입니다.^^

깍두기 2005-05-15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2% 부족..... 뭔가 임팩트 있고 가슴을 콕 찌르는 문장이 없었다는....

하루(春) 2005-05-15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딜리아니의 그림이 좋군요.

panda78 2005-05-15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공감.. 2% 부족했어요. 지독한 아름다움이랑 이 책은 다 서점에서 읽고 왔지요.
그치만 한젬마씨 책보다는 훨씬 낫던걸요. ^^;

깍두기 2005-05-15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저도 모딜리아니 그림 좋아했는데 사연을 읽고 나니 갑자기 좋아하기 싫어졌다는.....ㅠ.ㅠ
판다님, 전 한젬마씨 책을 안 읽어서....판다님이 가장 재밌게 읽은 미술관련 책은 무엇인가요? 궁금^^

panda78 2005-05-15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제일 재밌게 읽은 걸 꼽으라고 하시면.. 꽤 어려운데요?
[르네상스의 초상화 또는 인간의 빛과 그늘] 이게 아주 재밌었구.. 고종희 씨 책들은 다 재밌었어요. 곰브리치도 역시나 좋구요. 조근조근 설명듣는 기분이 ^^
[화가와 모델] - 이건 그야말로 화가의 사생활 엿보기라 꽤 재밌었습니다. ;;
그리구.... 음.. 생각이 잘 안나네요. ^^;;; 다카시나 슈지 책들도 꽤 괜찮았어요.



깍두기 2005-05-16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워요, 판다님. 이런.....읽을 책이 이렇게나 많다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7 세트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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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스포일러 있음)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서 발생한 산업문명은 수백년 동안 전 세계로 퍼져, 거대 산업사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대지의 비옥함을 앗아가고 공기를 더럽히며 생명체마저 마음대로 바꾸어 버리는 거대 산업문명은 1000년 후에 절정기에 이르렀다가 이윽고 급격한 쇠퇴를 맞게 되었다. <불의 7일간>이라 불리는 전쟁에 의해 도시들은 유독 물질을 뿌리며 붕괴했고, 복잡하고 고도화한 기술체계는 소실되었으며 지표의 대부분은 불모의 땅으로 변해 버렸다. 그 후 산업문명은 재건되지 않았고, 인류는 영원한 황혼의 시대를 살아가게 되었다.

이야기는 이런 배경을 깔아두고 시작한다. 그러니까 나우시카가 사는 세계는 지금보다 천년도 더 나중의, 인류의 산업문명이 스스로 자멸하고 난 뒤에, 지구가 산업문명의 무덤이 되고 난 뒤에, 그 무덤 위에 세워진 세계이다. 그 세계는 땅 속의 오염물질 때문에 독기를 내뿜는 숲, 부해가 있다.

 
                                 <부해에 사는 식물(왼쪽)과 이야기의 배경 지도(오른쪽)>

부해는 엄청난 속도로 세상을 덮으려 하며 사람들은 독기를 피해 마스크를 쓰고 가까스로 살아간다. 부해에는 또 엄청나게 커진 곤충들과 '오무'가 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피하고 그것들과 싸워가며 살아야 한다. 그 와중에 또 두 나라간의 전쟁이 벌어진다.

여기까지 읽다보면 이 이야기는 물질문명을 맹신하고 서로간에 전쟁을 일삼는 인간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물론 그렇기도 하다. 두 나라는 전쟁의 와중에 전대의 문명이 봉인해 놓았던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안그래도 황폐한 지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서로를 죽이고 또 죽인다. 그 속에서 나우시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특별한 아이다. 그애에게는 적과 나의 구분이 없다. 그애는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느낀다. 곤충도, 오무도, 적군도, 아군도 그에게는 생명이다. 숲사람 세름에게 나우시카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생명의 흐름 속에 몸을 두고 있어요. 나는 하나하나의 생명에 연연하고 말지만.....나는 이쪽 세계 사람들을 너무 사랑하고 있어요. 인간이 더럽힌 황혼의 세계에서 나는 살아가겠어요.

설령 어떤 계기로 태어났다 해도 생명은 다 같아요. 아마 히드라조차도....정신의 위대함은 고뇌의 깊이에 의해 결정되는 거예요. 점균의 변이체조차도 마음이 있어요. 생명은 아무리 작아도 그 밖에 우주를, 그 안에 우주를 갖고 있어요.

 

그러나 이렇게 하나하나의 생명을 사랑하는 나우시카가 내린 결론은 어찌보면 의외이다. 그는 전 문명이 세워놓은 원대한 계획을 거부한다. 지구를 정화하고, 인간을 고결하고 우아한 존재로 만들려는 계획을.....

아니! 그건 당연하다. 어찌 생긴 존재이건 생명은 그 자체로 자유의지를 가진다. 높은 자의 계획 따위에 맞춰 살 존재는 아니다.

소녀여, 너는 재생으로의 노력을 포기하고 인류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겠다는 것인가?

어리석은 질문이군. 우리는 부해와 함께 살아왔다. 멸망은 우리 삶의 일부로 자리하고 있어.

종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태어나는 아이는 점점 줄어들고....너희들에게 미래는 없다.인류는 내가 없으면 멸망한다. 너희들은 부활의 아침을 넘어설 수 없어.....너희는 위험한 어둠이다. 생명은 빛이야!

아니, 생명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이다! 모든 것은 어둠에서 태어나서 어둠으로 돌아간다! 너희들도 어둠으로 돌아가라!

이야기는 여기서 물질문명에 대한 경고의 수준을 넘어선다. 이제 이야기는 생명의 의미, 인간존재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생명은 그냥 빛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이라고, 생명은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존재할 수 없는 그 자체로 신이 깃든 존재라고 나우시카는 말한다. 그것이 대답이 아닌 '질문'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내가 나우시카에게 동의할 것인지 아직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뱉어놓은 온갖 오물을 뒤집어쓰고, 인간은 그렇게 나아가야만 하는가?

나우시카가 청정한 세계가 돌아왔을 때 쓰여질 새로운 인간의 알을 파괴하며 "제가 지은 죄에 몸서리가 쳐집니다. 우리처럼 흉폭하지 않은, 온화하고 현명한 인간이 되었을 알이에요"라고 하자 옆에 있던 왕이 한 말.

"그런 건 인간이라고 할 수 없지....응?"

슬프지만 긍정할 수 밖에 없는 저 대목을 보면서, 결국은 나도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인간은, 오물을 뒤집어쓰고, 나아갈 수 밖에 없다고.


폐허가 된 땅을 허무가 담긴 긍정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나우시카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기에, 인간은 긍정할 만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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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5-14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이미 오염된 환경에 적응해버렸다는 대목이 참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리뷰 멋지게 잘 쓰셨네요~

깍두기 2005-05-14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참 슬펐어요. 인간이란 존재가....마치 바퀴벌레가 자기가 더러운 존재란 걸 깨달았을 때 같았다고나 할까...
 
디스크월드 1 - 마법의 색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테리 프래쳇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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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뒷표지에 보면 큰 글씨로 이렇게 써 있다. "판타지 마니아라면 안 웃을 수 없다" 이 말은 즉, 판타지 마니아가 아니라면 안 웃을 수도 있다는 말이겠다. 그래서 난 좀 안도했다. 내가 파안대소할 수 없었던 것은(가끔 얼굴을 실룩이긴 했지만) 내가 판타지 매니아가 아니기 때문이야. 내 죄는 아니라고.

또 책날개엔 이렇게 써 있다. "정말로 재미있다. 위트가 넘치고 아주 해학적이다. 프래쳇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패러디한다" 이 말은 날 슬프게 만들었다. 뭘 패러디했는지 원본을 알아야 웃든가 말든가 하지, 나처럼 밑천이 딸리는 사람은 어느 대목에서 뭘 패러디했다는 자세한 설명이나 있으면 모를까 웃기 힘들다는 말 아닌가.

그러나 나같은 사람에게도 이 책은 상당히, 꽤 재미있다. 비록 "분명히 이거보다 더 재미있는 내용인데 내가 몰라서 못 웃는거야" 라는 안타까움이 책을 읽는 간간히 나를 괴롭혔지만 말이다.

일단 캐릭터가 기상천외하다. 마법이라곤 쓸 줄 모르는 마법사가 있다. 최강 마법 딱 하나를 알고 있긴 하나 그 주문은 자기가 원한다고 내뱉을 수 있는 주문이 전혀 아니며, 그 주문을 외웠다간 뭔 일이 벌어질 지 그 자신도 모른다. 마법사가 마법도 모르고, 겁은 또 겁나게 많고, 알고 있는 최상의 작전은 삼십육계 줄행랑이나 주인공인 고로 절대 죽지 않고 요리조리 잘도 피해 나간다.

또 너무나 순진무구한 관광객이 있다. 순진무구한 탓에 두려움이라곤 없다. 자기 주변에서 벌어지는 피투성이 혈투를 그는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듯 즐긴다. 까딱하다간 서로의 목을 겨누고 있는 용사들 사이를 파고 들어가 "싸인 좀 해주세요" 할 판이다. 이 사람의 단순명료한 상황판단을 우리는 좀 배워야 한다.

높은 곳이 무섭지 않아?

두송이꽃은 구름 그림자로 얼룩덜룩한 자그마한 풍경을 내려다 보았다. 사실 무섭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다.

아뇨. 왜 무서워해야 하죠? 10킬로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든 10미터에서 떨어지든 죽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린스윈드는 이 말을 공정하게 생각해보려 했지만, 무슨 논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두송이꽃은 관광객, 린스윈드는 그를 안내하는 마법사이다. 그러나 사실은 시종일관 두송이꽃이 린스윈드를 일촉즉발의 모험으로  안내한다. 마법사는 맘껏 두려워하고, 관광객은 그야말로 모든 상황을 '관광'한다.

온갖 용사와 마법사, 마법검 등등이 등장하는 이 모험담에서 최강자는 관광객이 가져온 '짐짝'이다. 최강 짐짝.......우스우면서도 공포스러운.......하여간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캐릭터이다.

그리고 이 책의 또 하나의 매력은 이야기가 벌어지는 새로운 세상, 디스크 월드에 대한 묘사이다. 이 세상은 커다란 원판(디스크)이고, 이 원판은 커다란 네 마리 코끼리가 받치고 있으며 그 코끼리들은 거대한 거북이의 등짝 위에 올라타고 있다. 이 세계의 우주관은 둘로 대립되고 있는데, 이 거대한 거북이는 한 걸음 한 걸음 우주공간을 쉼 없이 나아갈 뿐이라는 '정상우주론'과 세상을 짊어지고 있는 여러마리의 거북이들이 한 곳을 향해 모여들어 짝짓기를 위한 빅뱅이 일어난다는 '빅뱅설'이 그것이다. (우하하하, 정상우주론과 빅뱅설, 기가 찰 노릇이로고^^)

다소 산만한 슬랩스틱 코미디식의 이야기 전개가 정신없을 수도 있다.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외국인이 본다면 100% 공감할 수 없는 것처럼, 이것도 우리가 100% 즐길 수는 없다. 그래도 새로운 세상과 인물을 만나는 즐거움은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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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5-31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30권이나 나오고 계속 나오고 있다면서요, 저도 1,2권 사 놓긴 했는데, 1권 앞에 좀 읽다가 말았어요. 열심히 잡고 읽으면 재밌을 것 같기도 한데 말이죠. 이 작가 영국인들이 굉장히 아끼는 작가라 BBC에서 무슨 리스트 만들면,헤밍웨이, 셰익스피어 이런 작가들과 함께 3-4작품씩 넣는 저력을 보이더라구요.

깍두기 2005-05-31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저는 이 책과 또 그 <히치하이커>같은 책을 보면 말이죠, 아주 안타까운 감정을 느낀답니다. 분명 미치게 웃긴 얘기일 텐데, 우리가 그들 문화를 이해 못하고 그 시절, 그 장소에 있지 않아서 모르는 유머여서 조금밖에 웃을 수 없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그러나 뭐, 우리에게는 <프란체스카>가 있잖아요^^;;

하이드 2005-05-31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회 연장한대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