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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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풀로 엮은 집'이라는 곳에서 가을 강좌를 한다고 안내문이 왔는데 거기 사상체질에 관한 강좌가 있었다. 강의 제목을 주욱 훑다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각각의 체질별로 성향 같은 것이 써 있었다. 그에 따르면

소음인-지혜로우며 씨앗 같은 사람 이란다. 와, 아주 좋은 말 아닌가? 그렇다면 다음은?
태음인-대세를 따르며 땅 같은 사람. 이것도 괜찮네. 하지만 나는 소음인도 태음인도 아닌 소양인이다. 나는 뭘까? 궁금해 할 사이도 없이 바로 아래에 적혀 있었다.

소양인-폼생폼사 새 같은 사람.

헐. 좋게 나가다가 소양인에 와서 이 무슨.......뭐야, 이 사람 소양인에게 무슨 억하심정 있는 거 아냐? 라고 투덜투덜 댔지만 한편으로 100% 공감하며 가슴 한쪽이 뜨끔하였다. 허, 정곡을 찌르네. 어떻게 알았지. 내가 폼생폼사인 줄을?

레이먼드 챈들러의 폼생폼사에 내가 꼼짝을 못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필립 말로라는, 이 스타일 죽여주는데다가 냉소적이며 우울하고 고독하고 체념적이나 그러나 결국은 인간의 존엄성을 믿고 있음을 슬며시 증명해보이고야 마는 이 느와르적인 인물에게 나는 꼼짝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뭐 내가 그런 줄 여적 몰랐던 것은 아니다. 이미 '앰버 연대기'에 열광하며 내가 스타일에 꺼뻑 죽는 애라는 것은 증명된 바 있으니(젤라즈니는 판타지계의 레이먼드 챈들러라 불린다) 아무래도 나는 착한 척 하지 않으며(심지어는 못된 척 하며) 냉소적이고 잘 비아냥대나 결국은 매우 착하여 평소 자신의 언행과는 어울리지 않는 희생적인 행동을 하고 마는 이 주인공들에게 나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비정하고 비열한 도시에서 그 비열함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 이기든 지든 얻어맞든 때리든간에 항상 같은 페이스를 유지하며(아마 그는 절대 고함을 지르지 않을 것이다) 법전의 정의가 아닌 자기자신의 정의를 실현하는 남자. 그의 정의도 마음에 들며 그의 과장하지 않음도 마음에 들며 그의 변명하지 않음도 마음에 든다.

필립 말로가 나오는 시리즈 6권 중 이제 겨우 첫 권을 읽었다. 그러고서 벌써 열광의 조짐을 보이니 지름신이 강림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책의 장정도 매우 그럴듯해서(오래되어서 빛 바랜 영자신문 분위기의 하드커버임) 여섯권을 쭈루룩 책꽂이에 꽂아놓고 싶어 침을 흘리고 있다. 천천히 사자, 천천히.......

이 책을 읽을 때 눈여겨 본 포인트.

1.  멋지고 폼 나는 주인공

2. 그와 다른 인물들간의 대화의 묘미(암시적이기도 하고 비유적이기도 하고 하여간 읽어보란 말 밖에는)

3. 죽여주는 문장('죽은 사람은 상처받은 마음보다 무겁다' 뭐 이런 식)

그런데 이 소설에는 왜 제대로 된 여자가 한 명도 안 나오는가?(도박에 미친 여자, 마약 중독자 등등이 등장한다.)

 

그리고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스타일 많잖아? 책도 영화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레이먼드 챈들러 이후의 많은 작가들이 그를 따라했기 때문이다. 이 세상 탐정의 반은 그가 만들었다는 말도 있다. 그는 창시자인 것이다. 아무리 새로 생긴 맛집이 맛있어도 원조집에는 한번 가봐야 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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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5-12-30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이 적당하고, 비유 딱 떨어지고, 시시콜콜하지 않게 유혹하는, 폼 나는 리뷰입니다.^^

깍두기 2005-12-30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고마워요~~~^^
(특히, '폼'난다는 말~~~~~^^)
 
즐거운 불편 - 소비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한 인간의 자발적 실천기록
후쿠오카 켄세이 지음, 김경인 옮김 / 달팽이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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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부분은 일본의 신문기자인 저자가 가족과 함께 '물자나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도 더 행복할 수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무한소비사회를 넘어서는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을 기록한 것이며, 뒷부분은 저자가 비슷한 고민을 하고 대안을 찾아 실천하고 있는 일본의 각계 각층의 지식인과 실천가들을 찾아가 대담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생각은 책 제목 그대로 '즐거운 불편'이다. 나는 이 말이 너무도 공감이 되었다. 아무리 현재의 소비만능사회가 위험하다, 후손들의 미래가 걱정된다, 지구가 고갈되고 있다고 증거를 조목조목 들어 이야기해 주어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기자신이 소비를 억제해야 한다거나, 금욕을 실천해야 한다거나,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거나 하면 사람들은 즉시 외면해 버린다. 게으른 나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저자는 아주 작은 불편부터 실천에 옮기고, 그것이 금방 즐거움으로 변하는 것을 바라보고, 다시 조금 더 큰 불편을 실천하는 식으로 한단계 한단계 가족들과 함께 나아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어서 우리가 '불편함'에 겁먹지 않도록 해 준다. 

처음에는 자전거 출퇴근과 자판기 음료수 먹지 않기부터 실천한다. 천천히 무리없이 항목들을 늘려나가 나중에는 자그마한 논에 오리농법으로 농사를 지어 식구들 먹을 쌀을 자급자족하기에 이른다. 물론 그 와중에 힘든 일이야 많았지만 그의 기록을 읽다보면 그 고생과 불편은, 금방 그런 불편을 충분히 감수하고도 남는 기쁨으로 바뀐다. 그야말로 '즐거운 불편'인 것이다.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자전거 통근은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아침저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고지혈증에 체중과다였던 지은이에게 건강을 되돌려 주었고, 20층 계단 오르기는 성취감을 고양시켜 주었으며 힘들 것만 같았던 농사는 지역주민들과의 인간관계를 이어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들은 단순히 이 세상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의 완전성을 위한 것이다. 내가 먹는 것은 어디에서 오며, 내가 싸 놓은 것은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아무런 자각없이 살고 있는 현대생활은 절대 정상이 아니며 개인을 파편화된 조각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삶이라는 것을 이 책을 읽다보면 느끼게 된다.

특히 인상깊었던 것은 기르던 오리를 잡는 장면이었다. 1년동안 잡초와 벌레를 잡아먹어주며 농사를 도와주었던 고마운 오리를 벼이삭이 여물 무렵 이들 가족은 직접 죽여 요리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 아이들을 참관시킨다.(물론 자발적 참여이다) 언뜻 생각하면 이 무슨 잔인한 짓이냐 싶지만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살기 위해 무언가를 죽이고 있다. 아이들이 될 수 있는 한 그것을 빨리 깨닫고 희생된 생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요즘 엄마들은 걸핏하면 "가엾어라!"하거든. 홋카이도에서 컴백 섀먼 운동을 취재했을 때, 어머니들이 열심히 운동을 벌이고 있더군요. 그런데 돌아온 연어의 머리를 곤봉으로 쳐서 죽이는 것을 보고, 그 어머니들이 잔인하다고 난리가 아녜요! 그러면서 자기들은 프라이드 치킨을 잘도 먹는단 말이야! 이런 사람들하고는 안 되겠다 싶더라고.

그러면서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남들에게 떠미는 것 아니겠어요? 고기를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생물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잖아요. 그건 어쩌면 차별을 낳게 하는 원점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익만 가로채는 거요. 지금 현대인의 생활상을 보면, 그런 생생한 삶의 근원과 관련된 작업을 모두 가정 밖으로 몰아내서, 눈에 보이지 않게 하고 있잖아요? 출산도 사람이 죽는 것도 병원에서 하고, 고기도 생물을 죽임으로써 비로소 얻어진다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포장돼서 진열냉장고에 깨끗하게 장식되죠. 그것을 들고 계산대에 가서 돈만 내면 내 것이 되니......  

뒤의 대담 부분에서는 주로 '최대소비가 최대행복'이라는 현대사회의 슬로건의 맹점과, 그런 식의 소비를 조장하는 슬로건이 넘칠 수 밖에 없는 시장경제 시스템에 대한 고찰과 개인이 이에 맞서 어떻게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겠는지의 대안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서 제시하는 대안은 너무 개인적이기도 하고, 근본적이지 못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사람이 거시적이고 전체적인 것만 생각하면서 정작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외면한다면(바로 내가 그렇다) 그는 정말 불성실한 사람이 아닐까?

성실성의 개념은 흔히 '말한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말로 표현되고는 한다. 자신은 솔선하지 않으면서 지구를 위한 희생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혹은 나만 뒤로 빠지고 타인을 위험 속으로 몰아넣어서도 안된다.

이 말을 여기에 인용하였으니, 나도 뭔가 나의 생활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겠다.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그러고 나서야 지구가 어쩌고 미래가 어쩌고 환경이 어쩌고 지껄일 자격이 주어질 것이다.

1. 걸어서 출퇴근하기(왕복 1시간 20분 걸린다)
2. 봄이 되면 베란다에 채소 기르기
3. 빈 손일 경우 계단으로 다니기

일단 이 세가지를 결심한다. 그리고 이것은 꼭 환경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내가 즐겁기 위해서이다. 이 불편을 감수함으로써 내가 조금 더 행복해질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하지만 일단 편안해지면 얼마나 금방 지루해지는지!

인간에게는 자기자신을 변화시키고 싶다, 타인과 교류하고 싶다, 타인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확실히 있다. 그것은 문명의 무통화를 추진하는 '육체의 욕망'과 정반대의 욕망으로, 그것이 충족될 때 인간은 삶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 지금의 생활이 무미건조한 것은 육체의 욕망에 의해 생명의 욕망이 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육체의 욕망이 아닌 생명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유혹하여, 기차의 레일을 바꾸듯 욕망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나도 나라는 기차의 레일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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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5-12-28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기사에 "한국인처럼 생활하면 지구 2.08개 필요"라는 게 있네요. 뜨끔합니다. 환경스페셜 같은 프로그램을 즐겨보면서도 실천하는 건 너무 적어서 이 지구에 미안한 마음이 많습니다. ^^

깍두기 2005-12-28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에도 그런 말이 있어요. 지구상의 사람들이 다 선진국처럼 살면 지구는 끝장이지만 그렇다고 개발도상국 사람들에게 너네는 이렇게 살지 말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고. 문제는 선진국 사람들이 변해야 하는 거라고요.
지구상에서 소비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아마도 미국일 테지만,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을 걸요.

검둥개 2005-12-29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어느새 또 이렇게 좋은 리뷰를 쓰셨나이까! 잘 읽구 보관함에 넣구 추천하구 갑니다. 저도 오리 잡는 이야기가 제일 인상적이네요...

urblue 2005-12-29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려 열흘 동안(!) <문명의 붕괴>를 읽었습니다. 역사상 환경을 파괴했던 문명은 기필코 붕괴하고 말았다는 얘기지요.
보관함에 담습니다. 추천.

깍두기 2005-12-29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아유 참, 부끄럽사와요^^ 저 오리 얘기는 책으로 읽으면 정~말 인상적입니다. 감동적이기까지 하더라구요.

블루님, 그 책 저도 읽고 싶어요. 보관함에서 맨날 장바구니로 들락날락.

숨은아이 2005-12-29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연어 이야기 부분이 참 인상 깊습니다. 맞아요, 그렇군요.

깍두기 2005-12-30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대목 읽을 때 속이 시원했어요^^
 
프라이데이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로버트 하인라인 지음, 안정희 옮김 / 시공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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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이 책의 지은이인 로버트 하인라인이라는 아저씨의 머릿속이 너무도 궁금하다.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되셨으니 만나서 물어볼 수도 없고, 그의 책을 읽어서 짐작할 수 밖에 없는데, 이 분 진짜 중구난방이다. 난 그의 소설 중에서 <스타십 트루퍼스>를 가장 먼저 읽었다. 읽고서 얼마나 코웃음을 쳤던지 지금 작가에게 미안한 심정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책을 덮으며 내가 내린 평가. "이거 꼭 초등학교 보이스카웃 수준 아냐!"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이 아저씨는 그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어 '군대 안간 사람에게는 시민권이 없는' '나라를 지킨 자에게만 권리가 주어지는' 사회를 묘사하면서 나약한 인간들에게 팍팍 겁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발언을 읽으며 나는 그때 한참 한겨레 사옥에 모여 폭력사태를 연출하던 해병대 아저씨들을 떠올리고는(그때 왜 그랬지? 베트남전을 언급하다 그랬나?) 파시즘과 군국주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며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도 그를 하찮은 삼류작가 취급을 할 수 없었던 것은(삼류작가라니! 그는 SF계의 3대 거장 중의 한 명이다) 정말 실감나는 미래사회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와 생동감 넘치고 재기발랄한 대사,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스토리 등등 한마디로 '재미'는 완벽하게 보장한다는데 있었다. 소설이 재미있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러다가 어디서 절판본인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을 구해 읽고는 나는 이 작가가 그 작가냐며 다시 한번 표지에서 지은이의 이름을 확인하였는데, 내 생각에는 도저히 군국주의적인 삶의 태도와는 양립할 없을 것 같은 성에 대한 엄청 개방적 태도를 <달은....>에서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마치 나치 당원이 히피와 사귄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 황당함이랄까.

어쨌든 국내에 출간된 하인라인의 소설은 거의 다 읽은 것 같지만 그의 그 무궁무진하고 산지사방을 넘나드는 정신세계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바, 이번에 이 책 <프라이데이>를 읽으면서 뭔가 조금 가닥이 잡히는 듯한 느낌이다. 지금부터 내가 이해한 바를 풀어놓아 보겠다. 이것은 물론 매우 주관적인 해석이다.

1. 완벽한 '몸'에 대한 지향

하인라인은 내 생각에 '완벽 바디'에 대한 동경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스타십 트루퍼스>에서는 '강화복'으로, <프라이데이>에서는 '인조인간'으로 표현된다. 안 그래도 육체적 능력이 뛰어난 우주의 전사들이 강화복을 입으면 그 능력이 몇십몇백배 강화된다. 힘, 순발력, 스피드 등등. 유전적으로 '강화'된 인조인간 프라이데이는 보통 사람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 1초 만에, 사람들이 자기가 당했다는 것을 미처 눈치채기도 전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미적으로도 완벽하다. 프라이데이는 맞춤 설계된 인조인간이니 말할 것도 없고, <스타십...>의 주인공들도 빼어난 젊은이들이다.

아마 하인라인은 '완벽한 몸'을 무의식적으로라도 동경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은 나도 그렇다. 그래서 나도 이런 소재가 땡기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다 더해서 나는 천살까지 살고 싶은 개인적인 소망이 있으므로 '불사'라는 소재가 나오면 환장하는 경향이 있다.(젤라즈니를 괜히 좋아하는 게 아니다....)

2. 엘리트주의

'군대 갔다온 사람에게만 시민권'은 참으로 모골이 송연한 주장인데 그럼 신체허약자나 부녀자(억울하면 니들도 군대가라...그러겠지?)들은 투표권도 없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 일정 기준에 도달하는 자만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을 원하는 듯한 소설 속의 표현들을 보면 그는 확실히 엘리트주의자이다.

"물론, 맑시즘 가치의 정의는 한마디로 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많은 노동을 쏟아붓건 간에 진흙 반죽을 애플 파이로 바꿀 수는 없다. 진흙 파이는 진흙 파이로 남고, 그 가치는 무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서투른 노동은 가치를 쉽게 감소시켜 버린다. 재능이 없는 요리사는 멀쩡한 밀가루 반죽과 신선한 파란 사과를 먹을 수도 없는 쓰레기로 바꿀 수 있다. 그 가치는 제로로 변하는 것이다. 반대로 훌륭한 요리사는, 보통 요리사가 보통 과자를 만들 때만큼의 노력만으로도, 같은 재료를 써서 보통 애플 파이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가진 과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스타십 트루퍼스 중)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이런 말을 하다니, 정말 너무해 ㅎㅎ.

<프라이데이>에서도 세상은 몇몇 거대기업국가의 손에 좌지우지되며 엄청난 테러와 폭력사태가 일어나도 일반 시민은 도대체 누가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이 세상은 윗대가리 몇명의 손 안에서 놀아나고 있는 중이며 일반인은 알려고 하면 다친다. 이런 현상을 작가가 바람직하게 여기건 그렇지 않건 간에 작가는 대중을 '우민'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을 강력하게 받게 된다.

3. 그는 낭만적 자유주의자가 아닐까?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과 <프라이데이>에서는 미래사회의 엄청 개방적이고 다양한 결혼모델 및 남녀관계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 동성애 및 양성애에 대한 흔쾌한 인정, 일처다부제나 일부다처제를 넘어선 다부다처제, 물론 사랑은 하나 뿐이다, 이런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동시에 여러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이 정신사나운 미래세계는 지금의 일부일처제가 인간본성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라는 사람에게조차 '너무 난잡한 거 아냐?'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파쇼와 히피의 결합이라니, 나로서는 상상도 못해본 일이었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내 주위에서 이 반대의 경우로 정치적으로는 진보이면서 문화적으로는 더할나위없는 보수인 사람들을 흔히 접해왔던 터라(진절머리난다) 정치적 보수에다 문화적 진보인 경우도 불가능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가 꼭 정치적으로 보수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에서 그는 식민지 해방전쟁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혁명군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자도 있는가? 그는 그냥 자기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살고 싶어하며 우우 몰려다니는 대중(그의 생각에)을 우습게 아는 개인주의자, 낭만적인 자유주의자인지도 모른다.

이리저리 생각하다 보니 내 안에서 보수와 진보, 좌와 우의 개념이 뒤섞여 무진장 헷갈려 버린다. 하인라인 자체가 '민주주의의 반대는 공산주의'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프라이데이>는 재기발랄한 소설이며 암울한 디스토피아적인 시대배경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들은 유쾌하고 낙천적이며 신랄하다. 그러나 온 몸이 무기인 프라이데이도 결국 가장 간절한 소망이 '어디엔가 소속되는 것'이라는 결론을 볼 때 인간의 근본 문제는 변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몇백 광년을 여행하여 새 세계를 찾아가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 '가족을 갖는 일'과 '농장에서 닭을 키우는 일'이라.......

유전적으로 조작된 '인조인간'이라는 측면에서 작품을 볼 때는 이런 의문을 갖게도 된다.
1. 유전자 조작을 통해 현인류보다 매우 '업그레이드된' 인조인간을 탄생시키는 것이 과연 이 책에서처럼 이렇게 별로 위험하지 않은 일일까?
2. 작품에서는 인류가 이 '인조인간'들을 경원시하며 사람취급을 안 해 주고 있는데 그런 공포심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책에서야 그들이 주인공이니까 독자인 우리가 동정심을 갖지만 사실상 현 인류를 열등종으로 밀어낼 수 있는 존재에 대해 인류는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인조인간을 소재로 한 SF는 무수히 많다. 그 중 이 소설은 그래도 문제를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간 편이다.(필립 딕의 단편에 나온 그 전쟁기계에 대해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지금까지 SF에서 제기했던 문제제기에 대해, 이제 사회가 슬슬 답을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인간 게놈지도도 해독되었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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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5-12-22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 스타십 트루퍼스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하인라인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거든요. 이렇게 쓰시면 궁금해서 죽겠잖아요. 구할 수 있는 건 아마 스타십 트루퍼스랑 이 책 뿐일 것 같은데..이잉...

날개 2005-12-22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그럼 스타쉽트루퍼스를 읽고 이 책도 읽어야겠군요...ㅠ.ㅠ (요즘 깍두기님은 내 지름신...!)

blowup 2005-12-22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치당원과 히피가 사귀면 정말 볼 만하겠어요!
그리고, 진흙 파이는 머드 파이의 번역일 듯한데, 은유로서 진흙이라는 의미를 사용한 게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실제로 진하고 단 초콜릿으로 만든 머드 파이라는 메뉴가 있던데... 그 머드 파이와 애플 파이를 동시에 먹어본 일이 있다니까요.

게으름이 2005-12-22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의 반이나 살아버리셔서 억울하시겠소 ㅎㅎㅎ

깍두기 2005-12-22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게으름이님, 무슨 말씀! 저는 적어도 120살까지는 살 생각이라오. 그러니 삼분의 일 살았다고 해 주오.

나무님, ㅎㅎ 그림이 그려지시나요^^
머드 파이라는 게 실제로 있다구요? 재밌네요. 근데 저기서 말한 진흙파이가 그 머드 파이라면 그 가치가 '무'가 되지는 않을 텐데요.

날개님, 네네, 둘 다 읽으세요. 아~주 재밌어요^^

블루님, 일단 프라이데이만 읽어도 스타십의 선입견이 확 깨요. 사실 결정적인 건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이지만. 이것도 아마 어디서 조만간 복간되지 싶은데요.
그리고 하인라인이 가끔가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얘길 해서 그렇지 재미로 말할라치면 아시모프나 클라크보다 낫다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아시모프는 SF계의 KFC 할아버지, 클라크는 너무 점잖은 학자 나으리....^^
 
외출
김형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영화로도 나오고 책으로도 나오고, 볼 사람은 충분히 봤을 거 같으니 이제 내가 싫은 소리 좀 해도 되겠지?

난 변명이 싫다. 불륜은 별로 안 싫다. 그런데 이 소설은 주인공 불륜남녀를 작가가 애써서 변명해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는 '나는 불륜이라는 생각을 아예 지우고 썼어요. 또 하나의 사랑이라는 시선에서'라고 영화를 만든 허진호 감독과의 대담에서 이야기했는데 심술궂은 나는 '불륜이라는 생각을 애써 피하면서, 또 하나의 사랑으로 보이려고 감싸주면서' 글을 썼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이 먹으면서 점점 냉소적이 되어가다니 원.

그들이 불륜이고, 그래서 좀 안 이뻐보이면 안되는 건가? 사실 그들이 심각한 듯 날리는 의미심장한 대화들은 치장을 다 드러내고 보면 작업성 멘트에 지나지 않는다. 그거 작업성 멘트라고 작가가 좀 말해주면 안되나? 그럼 난 오히려 귀엽게 봐줄 수 있는데.

내가 뭐 불륜에 대해 지나치게 결벽한 태도를 가지고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니다. 애정사는 다 각자의 사정...케이스 바이 케이스.....자기 인생에 정직하기만 하다면야 그 누가 뭐라 하리....책임질 것 다 지고 말이지....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들은 영 그렇지가 못한 것 같으니.....

일단 나는, 인수와 서영이 좀더 뻔뻔해 주기를 바란다. 그래, 나 지금 나몰래 바람핀 나의 배우자에게 배신감 팍팍 느끼고 있거든? 그래서 홧김에 서방질할 참이야. 떫은 놈 있으면 나와 봐. 그래 주면 좋겠는데 영 주춤주춤 내가 지금 느끼는 게 사랑일까 오기일까 이런 거 확인하고 상대방을 밀었다 당겼다 하는 것이 쌍으로 내숭 떠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다. (그래, 바로 이것이었어. 내숭....내가 젤 싫어하는 내숭 말이다)

나는 그들의 이 일련의 고민의 과정들이 어쩐지 자기합리화의 과정처럼 느껴져서 그것이 매우 불편했던 것 같다. 나라면 그리하지 않는다. 자, 난 지금부터 바람을 피우겠다. 이건 배신감 때문이기도 하고, 외로워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저 남자가 꽤 괜찮아 보인다. 이게 사랑일까 아닐까 같은 언어유희로 나를 괴롭히진 않겠다. 불륜이면 사랑이 아니란 법도 없고, 또 그렇다고 이게 사랑이란 법도 없으니. 욕할려면 욕해라. 나도 내가 옳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이래주면 난 박수를 쳐 줄텐데.

수진이 깨어난 후 끝까지 그녀를 보살피다가 결국은 그녀의 '요청'으로 이혼을 하게 되는 인수도, 남편 경호의 장례식에서 그가 위독할 때 하필이면 남자와 있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새로운 사랑을 포기하는 서영도 뭐 그리 훌륭해 보이진 않는데, 그들이 그래서 마지막에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저 모든 양심적인 행동들이 그들의 사랑을 아름답게 완성해 주기 위한 작가의 포석인 것 처럼만 느껴지니....(아, 정말, 심술 좀 그만 부려라)

그리고 이제 난 삶의 궁기가 흐르지 않는 사랑 이야기는 신뢰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책임져야 할 애도 없고, 이혼하면 부닥칠 경제적 어려움도 없고, 교통사고 가해자인데도 불구하고 보상금으로 시달리는 일도 없고, 나이들면 자연스레 나오는 똥배도 없는, 그야말로 영화에 나오는 사랑이야기(영화가 원작이니 작가를 원망할 수는 없겠지), 완벽하고 아름다운 불륜을 위해 무대장치 다 해놓고 벌이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

실제 우리가 만나는 불륜은 이것보다 추하고 너절하고 노골적이고 한마디로 말해 그림이 안나오겠지만, 사실은 이 둘의 사랑보다 훨씬 아름다울 수 있다.(쓰고 나니 옛날에 배종옥과 이재룡이 나온 드라마 '바보같은 사랑'이 생각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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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05-12-13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0% 동감입니다.
전 영화밖에 못 봤지만 같은 생각으로 투덜거렸댔어요. ^^

깍두기 2005-12-13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영화를 못 봤어요. 리뷰는 이리 썼지만 비디오를 빌려보고 싶은 마음이 있네요. 비교분석해 보면 재밌을 거 같아서....^^

2005-12-13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깍두기 2005-12-13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 B군을 트럭으로 줘도 싫다는 님께 존경의 마음을 표합니다. 전 비록 B군이 제 스타일은 아니지만 트럭으로 주면 도저히 거부할 수 없을 거 같은데.....^^

난티나무 2005-12-13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책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B군의 연기가 어찌나 가볍던지요.
(저도 트럭으로 준다면... 음음... 거부 못 해요...^^;;)

깍두기 2005-12-13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티나무님, 우린 사실 트럭이 탐나는 게 아닐까요.....^^;;;

sooninara 2005-12-13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럭..ㅋㅋ 몇톤 트럭이냐도 중요한가요?
현실감이 떨어지긴 하죠.
불륜을 위한 무대 장치라..난 이미 아이들때문에라도 틀렸네.

깍두기 2005-12-13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우린 똥배 때문에도 안돼.....하지만 이 모든 역경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불륜....내가 시방 먼 소릴 하고 있는 거여????

sooninara 2005-12-14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님..졌소이다. ㅋㅋ
(영화봤는데..손예진이 비너스라인이 있거든요. 약간 볼록뱃살..부럽긴하더이다.)

깍두기 2005-12-14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그래요? 손예진도 배가 나왔다구? 그럼 우리도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건가?

sooninara 2005-12-14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이이야긴 아줌마끼리만..손예진이 살짝 아래뱃살이 있는데..그게 축처진 아줌마 뱃살과는 다르죠. 그 왜 비너스라인라고 처녀들의 완만한 곡선이라고 해야하나요? 그래서 얼마나 부럽던지 ㅠ.ㅠ
 
7인 7색 - 일곱 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곱 개의 세상
지승호 지음 / 북라인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지승호님(알라딘에 서재를 갖고 계셔서 이 글을 볼 것이 분명하므로 할 수 없이 '님'을 붙인다ㅡ..ㅡ;)의 책을 이것까지 합하면 세권을 읽었다. <크라잉넛, 그들이 울부짖다>와 <마주치다 눈뜨다> 그리고 이 책 <7인7색>.

지승호님은 한국사회 최초로 전문 인터뷰어라는 분야를 개척한 분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 인터뷰란 '방송이나 신문, 잡지 등 언론 계통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유명인을 독자에게 소개하기 위해 그들을 만나 몇가지 질문을 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분은 아무데도 속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우리에게 들려주는 아주 특이한 분야를 개척하고 있는 중이다.

내 생각에 이 일은 누군가는 해야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지는데, 우리 사회가 언론이 발달하면서 뭔가를 다 기록하고 보관하고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언론이란 것이 파편화된 쪼가리 정보 밖에 기록하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승호님 식의 인터뷰가 계속된다면 그것은
1. 우리 사회의 어떤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이 시대를 어떤 식으로 살아왔으며 개별 사안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2. 그 인터뷰가 기록될 당시 사회적 이슈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가 
이 두가지가  중첩되어 쌓여갈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기록물이 될 것 같다.

어쨌든 덕분에 나는 앉은 자리에서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7분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리고 두가지 면에서 매주 만족했는데 첫째는 이 인터뷰가 적절한 질문을 통해 그분들의 평소 사상이나 철학(너무 거창하면 그냥 생각)을 드러내 주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그 사이사이 그분들의 저서를 통해서는 알 수 없는 인간적인 측면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럼 이제 한분 한분 만나본 소감.

<진정한 아나키스트 박노자>

난 내가 아나키스트인지 몰랐는데 이 인터뷰를 보고 알게 되었다. 그의 말에 하염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나는 그 유명한 '당신들의 대한민국'도 읽지 않았는데 이제부터 그의 저서를 읽어볼 참이다.

그러니까 애국심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 자기 이웃을 사랑하고 한국민중을 사랑하는 진정한 의미의 애국심은 당연히 좋은 것이지만, 우리를 억압하고 똥 먹이는 군대를 만든 국가를 내가 왜 강제적으로 사랑해야만 합니까? 그리고 한국 국적이 없다고 해서 자기 이웃이나 자기와 문화나 언어가 같은 한국사람을 사랑하지 않게 됩니까?==> 내가 도덕시간에 '나라 사랑' 단원이 나오면 항상 하는 얘기. 얘들아, 애국이 별게 아냐. 내 주변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고 나보다 힘든 사람을 생각하는 게 애국이다. '국가'란 아무 형체도 없는 것이다. 그냥 옆사람을 사랑해라. 이제 박노자 선생님을 만났으니 나는 이 얘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길고 긴 인터뷰에서 가장 잊을 수 없었던 한 마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체인점은 김밥천국이에요.ㅡㅡ>ㅎㅎ 이분 진짜 한국인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개인주의자 이우일>

이우일은 내가 '옥수수빵 파랑'에서 본 이우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라고나 할까. 그런데 정치사회적 이슈를 제기하는 부분에서는 약간 의외인 것이 그가 그런 작업을 심심치 않게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옛날에 딴지일보에 연재된 존나깨군 분위기로 얘기한다면 '존나 재수없어서 씹은 것 뿐' 이라는 투다.

뭉치는 거 있죠? 뭔가 이루기 위해서 모이는 게 참 재수 없더라구요.......그분들은 사회적인 의식이 있으니까 하는 걸 텐데, 저는 웬만한 사건이 아닌 이상 개인적으로 그런 활동을 벌일 것 같지는 않아요.

약자의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 건데.....그러나 나 자신도 떼로 모이는 걸 좀 싫어하는 개인적인 성향이 있기 때문에 저렇게 말하는 그가 이상하진 않다. 저런 사람도 있어야지. 재밌었다.(그리고 그가 그렸다는, 그리고 이제 희귀본이 되어버린 그 '빨간책'이 무지 보고 싶다)

<낭만주의를 포기한 낭만주의자 유시민>

여기 실린 일곱개의 인터뷰 중 가장 재밌었다. 유시민은 직접 대놓고 적으로 만나면 매우 거북한 상대일 것 같다. 대화가 거침이 없고 상대방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해야할 말은 꼭 할 사람이란 느낌을 받았다. 관전하는 입장에서는 흥미진진이다. 그러나 그런 인간적으로 느끼는 호오의 감정을 떠나서 이 사람의 정치적 행보에 관해서는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은데, 이번 인터뷰에서 결정적으로 이 부분 때문에 나는 이제 유시민에 대한 내 마음을 접을 것 같다.

지승호- 재외동포법을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데요. 그를 두고 네티즌은 우리당 386의원들을 맹비난하고 있습니다.
유시민- 저는 그냥 욕먹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욕먹기 싫어서 찬성표를 찍어 줬거든요. 통과된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개정안을 내면 되요....지금으로서는 그 법을 지지하는 분들을 설득할 수가 없어요......

홍준표가 그때 발의한 재외동포법, 거기에 찬성표를 찍어줬다는 것만으로 유시민을 매도할 생각은 없으나 그러면서 이유로 댄 구구절절한 변명(나에게는 그렇게 들렸다)은 항소이유서를 쓴 유시민과는 너무도 달라 보였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접한 뉴스, 황우석 보도를 한 피디수첩에 대한 발언 때문에도.

<광대의 철학자 진중권>

나는 진중권이 좋다. 나는 그가 '장바닥에서의 싸움질을 마다않는' 논쟁가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인터넷 토론공간이니 이런 곳에 들락거려 본 적이 별로 없어서 체감을 못했는데 이 인터뷰를 보니 그의 말투나 생각하는 방식은 상당히 내 스타일이다. 그러면서 또 책은 얼마나 재밌게 쓰는지 <미학 오디세이>와 <놀이와 예술의 상상력>은 또 내가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는 많은 사안에 대해서 발언한다. 그리고 그 발언은 대체로 정확하고 신랄하다. 그로 인해 생겨나는 적들에 대해서도 그는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잘못된 행동만을 씹어 주고, 그것으로 잊어버린다. 뒤끝이 없다.

이런 점이 내 맘에 든다. 그의 책을 더 읽어야겠다.

<유연한 사회주의자 노회찬>

숱한 어록을 남긴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라 흥미진진한 인터뷰를 기대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그 대신 공부를 많이 시켜주었다고나 할까. '나는 좌파다. 사회주의자다' 라고 얘기하면서 웃음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노동자 세상을 꿈꾸는 인도주의자 하종강>

이렇게 열심히 노동자를 위해 살면서도 노동자에게 부채감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구나. 이 책에 나오는 일곱명의 사람 가운데 가장 인간적으로 감명을 주신 분이다. 부채감 ㅡ 그런 건 우리같은 사람이 느껴야지 20년을 한결같이 노동자의 삶과 함께 해온 분이 부채감이 웬말인가! 그러나 그의 이 지나칠만큼 결벽한 양심 덕에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진정성으로 우리 가슴에 큰 파문을 일으킨다. 입만 살은 지식인들의 찌르는 듯한 말이 아닌 징처럼 에밀레종처럼 둔중한 아픔을 느끼게 하는 한마디 한마디.

"그럼 노동자들이 일은 예전보다 훨씬 적게 하면서 돈은 다 받겠다는 건데, 그건 도둑놈 심보 아닌가요?"
"인류의 역사는 노동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조금씩 적게 일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더 잘살게 되는 방향으로 발전해 오고 있습니다."

정말 인류역사를 꿰뚫는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외워서 써먹을 테다.

<타인을 부끄럽게 하는 좌파 김규항>

그의 책을 한권도 읽지 않아서(잡지에 연재한 짧은 글 몇번 읽은 정도) 김규항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인터뷰를 보고나니 읽고 싶어졌다. 특히 앞으로 나온다는 <예수전>. 긴 인터뷰 내용 중 이 대목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지승호- 프랭클린 플래너를 안 쓰는 이유가 '성공하기 싫어서'라고 하셨는데요. 성공에 목표를 두고 살지는 않는다 해도, 자기 일 열심히 해서 그것으로 성공하면 좋지 않습니까?
김규항- 좋지 않다고 보는 거지. 좋은 성공은 없다고 보는 거야.....(후략)

이 말 이후에 긴 설명이 이어졌지만 나는 그냥 이 말만으로도 김규항이 조금 좋아졌다.  

 

이 일곱분과의 데이트를 주선해 주신 지승호님께 감사. 그리고 한가지 부탁드린다면 책 많이 내신 분 말고, 몸으로 활동하시는 분들(어느 분야에서건. 연예인, 노동운동가, 운동선수 등등)의 인터뷰를 해주시면 좋겠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은 그야말로 기록해놓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지 않는가. 책 쓴 분들이야 자기 책이 남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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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5-12-13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쓰셨군요~ ^^

깍두기 2005-12-13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힘들어요. 이렇게 길게 쓰긴 첨이에요.(신이 나서 썼지만^^)

시비돌이 2005-12-13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으면 부담스러워하실 것 같아 리뷰 안 읽을께요. ^^ 근데 별점 5개는 절 의식해서 주신거 아닌가요? ㅎㅎㅎ

깍두기 2005-12-13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럭! 이렇게 열심히 썼는데 읽어주지도 않다니! 게다가 추천도 없이 넘어가기에요!
(그리고 저는 아주 냉정하게 별점을 줘요. 왜 이래요!)

시비돌이 2005-12-13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책 리뷰를 제가 추천하는 건 민망한 일이죠. 그래도 막무가내로 요구하시니까 추천했습니다. 지(혜린)빠라서 별을 많이 주신 것 같은데요. ^^

숨은아이 2005-12-13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뷰 책, 평소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굉장히 중요한 기록이 될 수 있겠군요, 정말. 마지막 문단에 추천 보냅니다.

superfrog 2005-12-13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리뷰를 보니 관심이 마구 생깁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꼭 읽어볼게요..^^

깍두기 2005-12-13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는달님, 혜린이 생각은...좀 했는지도 모르죠 ㅎㅎ

숨은아이님, 저도 지승호님의 책을 보기 전까진 이런 종류의 책이 재밌을 줄 몰랐어요. 상당히 재미있어요. 살아있는 대화를 듣는 것은....^^

금붕어님이 제 리뷰에 아는 척 해 주면 난 왜 이리 기분이 좋은지 흘흘흘

superfrog 2005-12-13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이런..! 저 여러분들 리뷰, 열심히 읽고 있어요.. 체력이 딸려서..(쿨럭!!) 댓글을 못 달고 있지만, 맘만은 믿어주세요..^^ 깍두기님 기분 좋으시게 이젠 열심히 '아는 척' 할게요.ㅎㅎ 아, 서재지붕 참 멋지군요..!ㅋㅋ

깍두기 2005-12-13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말여요. 도대체 저렇게 예쁜 서재지붕을 누가 만들었을까요? 궁금@..@
=3=3=3=3=3

chika 2005-12-13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깍두기님/ 잘 읽었어요. 전 이우일편이 젤 좋았어요. 아무래도 가장 관심있는 사람이어서 그런지도. ^^;;;
'마주치다 눈뜨다'는 조금 하다 만 듯한 느낌이 들었었는데요(제가 잘 몰라서 그런 느낌이 들었을수도 있겠지만) 이번은 정말 재밌었어요. 글쵸? ^^

깍두기 2005-12-14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우일 참 특이하죠? 내키는 대로 사는 것 같은데 그게 또 멋있단 말예요 ㅎㅎ(알고 보면 할 거 다 하고)
그러고 보니 지승호님 책을 치카님한테 받아서 보았지, 크라잉넛^^
그책도 아주 재밌게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