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디킨슨)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사람이 사랑이라 믿고 살다 보면 온몸에 상처가 나고, 뒤틀린 형태와 내 삶의 옹색한 크기가 정해지게 마련이다.

 

다들 그렇게 살아야겠지만, 잠시 거기에서 벗어난 내 사랑을 온전히 보고 싶다면

 

지금 헐벗은 자기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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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11-08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자신이 단단해져야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상대방도 건강하게 사랑할 수 있는 것 같아요.

cyrus 2013-11-08 21:01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디킨슨의 짧은 시를 읽으면서 그동안 느꼈던 사랑에 대한 제 생각에 대해서 반성할 수 있었어요.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사랑, 결혼, 가족, 아이들의 새로운 미래를 향한 근원적 성찰
울리히 벡.벡-게른스하임 지음, 강수영 외 옮김 / 새물결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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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이라는 개인적인 환상

 

사랑이란 무엇일까? 참으로 어려운 물음이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남녀 간의 낭만적인 관계, 행복한 결혼 생활, 단란한 가정. 일상적이면서도 당연한 내용이지만 이런 것들이 과연 그 답이 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사랑이란 모든 것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어떤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나 그런 사랑을 추구하고 있다면, 어째서 우리는 현실 속에서 그토록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고 힘겨워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역사 속에서 '사랑'에 대한 생각이 언제나 한결 같았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한 관념들은 대부분이 근대 부르주아 사회 이후에 형성된 것들일 뿐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의 사랑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관념체계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중세의 사랑도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과는 많이 다르다.

 

울리히 벡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사랑'이 철저히 근대 산업사회의 산물임을 밝혀내고 있다. 사랑, 결혼, 가족 과 같은 문제들이 결코 개인적인 영역의 것들이 아니라, 산업사회에서의 노동력의 문제, 남성과 여성의 노동시장에서의 역학관계 등의 '사회적인' 영역의 문제임을 그는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이야기되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고귀한' 내지 '모든 존재들의 간극을 메워주는 위대한' 사랑이란 그저 부르주아적 산업사회가 만들어내는 환상임을 울리히 벡은 지적한다. 근대화 과정에서 모든 개인들은 봉건적 전통으로부터 분리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개인화'이며, 비록 그것이 개인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동시에 그 개인들은 세상에 '홀로' 내던져지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유독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홀로 내던져진' 개인들 간의 결합을 중요시하는 관념이 생겨났다. 이런 사실들이 바로 오늘날의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랑'의 근간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현실에서 사랑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랑은 개인적인 영역의 것이다'는 환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비록 개인화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그 개인들을 아우르고 있는 것은 사회경제적 구조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그런 사회경제적 구조들과의 연관성이 같이 이야기되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에 '사랑에 대한 혼란'은 남녀 당사자들의 성격적인 결함으로만 치부되기 십상이다. 결국, 우리는 사랑의 본질 내지 현실을 보려하지 않은 채 '환상'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은 그렇게 미친 짓은 아니다

 

《시네마 천국》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 5분여쯤을 주인공 토토가 혼자서 수많은 영화의 감미로운 키스신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다. 이렇게 낭만적이다 못해 차라리 애처로운 어떤 것으로 정형화되어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사랑은 그 자체로 전부가 아니다. '결혼'(또는 '동거')으로 이어지고, 가족을 이루면서 임신과 출산, '아이'의 문제가 계속해 따른다. 그러면서 낭만은 저 멀리로 증발하고 삶의 전투가 벌어진다. 이것은 나와 그(녀) 사이 둘만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의 문제이자 나아가 우리를 둘러싼 이 사회의 문제인 것이다. 심지어 사람들은 연애의 시간을 넘어 결혼을 결심하려는 단계에만 이르러도 막중한 무게를 느끼게 될 정도다.

 

사회가 점점 복잡할수록 인간의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되던 사랑, 결혼은 사회적인 문제로 탈바꿈해 간다. 몇 년 전에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변덕스럽고도 자연스런 감정의 움직임인 사랑을 왜 결혼이라는 제도로 구속하는 걸 반대한다. 낡은 조건과 새로운 의식의 각성은 상호 충돌하게 마련이다. 급증하는 한국의 이혼율은 이를 반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60대 부부의 황혼 이혼이 급증하고 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을 한다. 왜 결혼을 하는 것일까? 인간의 합리성이 아직도 결혼을 '할 만한 것'으로 보는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이 '정서적인 헌신'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어 저자는 가족과 결혼은 사라지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모호한 말을 던진다. 왜냐하면 "현대(의 개인화)는 여성과 남성들이 헤어지도록 몰아가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양쪽을 서로의 품안으로 다시 밀어 넣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독의 위협이야말로 결혼의 가장 믿을 만한 토대"라고 말한다.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결혼을 하고 싶다면 단순히 '미친 짓'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사랑이나 결혼은 섹스에 대한 생물학적 욕구보다는 정서적인 자기 안정감 또는 소속 의식을 획인하려는 노력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사랑과 결혼보다 인간에게 우선하는 것이 혼자 있지 않기 위한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이혼한 후 남성들이 자신의 혈육에 무섭도록 집착하는 것도 그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 지독한 혼란을 줘도 사랑은 위대하다

 

 

 

 

 

클래스 올덴버그 「빨래집게」 1976년

 

 

이제 사랑을 위해 결혼한다는 것이 더 이상 가족의 구성, 물질적 안정, 부모 되기 등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측면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자기의 개인적인 길을 따라 아주 멀리까지 과감히 나가되 파트너의 끊임없는 후원과 동료애에 기댐으로써 이 두 세계가 가진 최상의 것을 얻는 것을 뜻한다. (293쪽)

 

 

 

최근 들어 사랑과 결혼,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회적 이야기들이 활발해지고 있다. 과연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왜 결혼을 해서 가족을 형성하는지. 이 질문들에 대한 정답은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삶과 우리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만 한다. 설령 정답이 없고, 그 정답을 추구하는 과정이 지독하게 혼란스럽더라도. 그러기에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인 것이다. '정상'이 '혼란'이 되고 이혼은 또 다른 결혼을 부른다. 사랑은 모든 것을 다 던져 버릴 만큼 가혹하면서도 모든 것을 포용할 것 같은 너그러움을 가지고 있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다.

 

하지만 사랑의 반대말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건 '외로움' 즉, 고독의 감정이다. 사회가 무수히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결혼의 의미를 찾아낼 실마리를 대라면 인간의 고독 탈피 욕구에서 찾고 싶다. 그래서 인간은 오늘도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맨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고독을 견디고 일상의 힘겨움을 공유하며 긍정적인 생활 감정으로 발현해 가도록 노력하는 성숙한 두 인격체의 합일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위해 함께 살 것이냐, 따로 살 것이냐, 함께 산다면 어떻게 살 것이냐를 목하 고민 중에 있다고 해도, 사랑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위대한 감정의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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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11-07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동생 교양 리포트 땜시 책이 집에 있어서 읽었던 기억이 살포시~ 사랑해도 고독도 때때로 찾아와~ ㅋㅋㅋ

cyrus 2013-11-07 20:05   좋아요 0 | URL
그렇죠. 고독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악의 감정인거 같아요 ㅋㅋㅋㅋ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 에티카를 읽는다』 스티븐 내들러 / 그린비

 

 

저번 기수 신간평가단 활동했을 때 읽은 책 중에 눈물 닦고 스피노자라는 것이 있었다. 추천도서 페이퍼를 작성할 때 이 책을 추천하지 않았다. 스피노자가 유명한 철학자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때 내가 너무나도 읽고 싶은 책이 여러 권 있어서 특별히 눈길을 주지 않았다. 결국 눈물 닦고 스피노자가 신간평가단 도서로 선정되었는데 생각보다 흥미롭고 인상 깊게 읽었다. 스피노자가 쓴 유명한 에티카속 내용을 토대로 현대 사회가 만들어 낸 마음의 병을 진단하는 일종의 철학 힐링류의 내용이었다. 역시 왜 스피노자가 위대한 철학자로 평가받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에티카읽기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마음먹고 시중에 번역된 에티카를 구입해서 정독하고 싶었으나 마음 가는대로 가고 싶은 곳에 가는 나그네처럼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잡독을 하는 내 독서 성향상 아직까지 시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 더 솔직하게 말자하면 무작정 에티카를 읽기에는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스티븐 내들러의 에티카를 읽는다출간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상당히 반가웠다. 이런 입문서부터 읽기 시작하면 바로 텍스트를 정독하는데 수월하다. 이 책의 저자는 스피노자 연구에 정평이 나 있으며 이미 스피노자의 일대기와 철학 사상의 발달 과정을 정리한 스피노자 : 철학을 도발한 철학자는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출간됐다. 에티카의 핵심을 대중적으로 소개한 입문서가 우리나라에 많지 않을 걸로 기억된다. ..고등학생들 논술시험 대비를 위해 스피노자 사상의 기본적인 핵심을 소개하거나 에티카다이제스트 등의 책들을 제외하면. 이 책이 선정된다면 이번엔 진짜 정본 에티카를 구입할 것이다.

 

 

 

 

 

 

 

 

 

 

 

 

 

 

 

 

 

 

 

* 내가, 그림이 되다』 마틴 게이퍼드 / 디자인하우스

 

 

우리나라에도 유명 화가나 아티스트의 행적 또는 예술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책들이 많이 나오긴 했다. 하지만 급격하게 변하는 현대미술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거 같다. 항상 새로운 유행이 등장하고 금방 지나가고, 지금 수많은 아이돌 가수들이 봇물 터지듯이 나오다가 대중의 인기를 외면 받지 못하면 슬그머니 사라지는 것처럼 현대미술계 또한 그렇다. 하루아침 일어나면 새로운 예술가들이 등장하여 대중에게 주목받는다.

 

내가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컨템퍼러리(동시대의) 예술가들을 소개하는 책들이 많이 나오지 않은 사실이다. 작품 하나가 공개할수록 매번 최고 경매가를 기록하는 데미언 허스트, 최근 대구미술관에서 특별전을 성황리에 마친 일본의 쿠사마 야요이가 그렇다. 그래도 가끔 예술을 좋아하는 독자가 반가울만한 책이 나오긴 한다. 최근에 데이비드 호크니를 다룬 책이 나왔고, 마침 같은 시기에 루시안 프로이트의 삶과 예술을 소개하는 책이 나왔으니 바로 마틴 게이퍼드의 내가, 그림이 되다이다. 마틴 게이퍼드는 미술평론가로서 이미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담을 정리한 다시, 그림이다가 국내에 번역되었다.

 

루시안 프로이드는 상당히 사실적으로 초상화를 많이 제작하는 화가로 유명하다. 그의 초상화 혹은 인물화는 척 클로스의 극사실주의적 초상화에 근접하지는 않지만, 굵은 덧칠로 행하는 붓 터치로도 인물의 피부 그리고 표정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척 클로스의 극사실주의가 너무나도 완벽에 가까운 사실이라면, 프로이드는 추상회화적인 느낌이 있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해야 될까? 마틴 게이퍼드는 생전 프로이드의 그림 작업을 지켜보면서 그와 나눈 대화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인상들을 한 권의 일기 형식으로 풀어냈다. 저자는 흔히 비평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게 되는 주관적인 시선의 덧칠을 하지 않는다. 프로이드가 모델을 나름 사실적으로 표현하듯이, 저자 또한 온전히 프로이드 자체를 독자들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 1913, 세기의 여름』 플로리안 일리스 / 문학동네

 

 

읽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흥미로운 유럽문명사에 관한 주제인데다 의외로 이 책에 대한 독자의 반응이 높아서 추천해봤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신간평가단원 중에 지금까지 이 책을 추천한 분,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1913년이라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해에 근대 유럽사회의 문명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는지 그 해의 문명사를 소개하고 있다.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 제목을 비유하자면 응답하라 1913’ 정도일 것이다.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 때 당시 대중문화의 풍경을 응답하라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1913, 세기의 여름은 이름만 들면 알만한 예술가들이 총출동한다. 카프카, 릴케, 프루스트, 프로이트, 피카소, 클림트 등 수많은 예술가들의 행적을 한 장의 모자이크처럼 펼치며 동시에 1913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근대 문화의 향연을 재현하고 있다.

 

 

 

 

 

 

 

 

 

 

 

 

 

 

 

 

 

 * 『온도계의 철학』 장하석 / 동아시아

 * 『돈의 철학』 게오르그 짐멜 / 길  

 

 

출간되었을 때도 그렇고, 지금 신간평가단이 가장 많이 추천하고 있는 책이다. 하필 두 권의 책 제목에 철학이 들어가 있다. 워낙 많이 소개하고 있는 도서라 굳이 간략한 소개는 생략하고 싶다. 사실 이번 달 신간평가 추천도서로 이 두 권으로 정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추측하자면, 가장 높은 추천 수를 받았으나 선정되지 못할 수 있다.

 

장하석 교수의 책은 이미 출간되지 전부터 구입하려고 벼르고 있던 터라, 이번 선정도서 결과를 보고 난 후에 구입할 생각이다. 그런데 평가단원들로부터 가장 많이 추천받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선정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해당 출판사가 알라딘의 도서정가제 반대에 맞서는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알라딘과 해당 출판사와의 입장 차가 원만하게 좁혀지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도서 선정 과정에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짐멜의 책 같은 경우에는 분량이 많다는 점에서 선정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 막스 베버, 마르크스에 비해 저평가 받은 짐멜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라 조금은 속물적이지만 솔직히 신간평가단 제도를 통해 정가 55000원 가격의 책을 공짜로 받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다만 정해진 서평 작성 기간 내 완독은 물론 서평을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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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아스 라인
기타 (DVD)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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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죽는 것은 없어. 언제나 무엇인가가 남는단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것이 탄생해. 인생은 그런거야.

이유없는 시작이지.

 

- <안토니아스 라인> 속 대사 한 구절 -

 

 

* 미리 밝혀두건대 안토니아스 라인이라는 영화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페미니즘 영화의 정전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의 의미와 가치는 이미 충분히 논의되었기에 나는 여기서 다소 지엽적인 관점으로 영화 속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한다. (사실 이 유명한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여성학이나 영화 관련 수업이 아닌 생뚱맞게 현대미술론수업 영상 자료로 보게 되었다. 그런데 현대미술 수업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하필 교수님이 외부 사정으로 수업 진행이 어렵게 돼서 임시방편으로 영화를 보게 된 것이다)

 

 

 

 ♣ 한 여자의 일생으로 보는 '삶/죽음/삶'

 

안토니아스 라인은 여인 5대로 이어지는 긴 가족사가 넓은 땅과 함께 펼쳐지는 영화이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딸 다니엘을 데리고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안토니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에는 안토니아와 다니엘 둘만 남는다. 굵은 허리에 두리두리한 몸매를 한 아줌마 안토니아는, 평생 성적 방종으로 고통을 준 남편을 원망하고 욕하며 숨을 거둔 어머니와 달리 결혼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이웃집 농부 바즈의 구혼도 물리치고, 여러 이웃들과 어울려 씩씩하게 살아간다.

 

미술학교에 입학한 딸 다니엘이 결혼은 싫고 아이만을 원한다고 하자 적극적으로 상대를 찾는 것을 도와주어서 아이를 갖도록 한다. 태어난 손녀 테레사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아이. 성폭행의 아픔을 겪고 방황하지만 결국 오래 곁에서 지켜준 마을 친구와의 사이에서 딸 사라를 낳는다. 그러니까 사라는 안토니아에게 증손녀, 이렇게 해서 여인 5대를 이루게 된다.

 

마을에서는 쉬지 않고 사람이 죽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끌어안는 안토니아는 '사는 게 인생이며, 인생은 살아야만 하는 것'이라고 증손녀 사라에게 이야기한다. '이 춤이 우리가 출 수 있는 유일한 춤'이라는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 자신의 마지막 날을 예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삶/죽음/삶', 이 영화는 안토니아의 모계 가족이 함께 모여 화목하게 식사를 하는 모습과

주변 인물들이 한 사람씩 차례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교차하면서 보여주고 있다

 

 

나이가 많이 든 안토니아가 이제 죽음을 느끼며 준비한다. 사랑하는 가족을 불러 모아 다가온 죽음을 알리고, 눈감은 채 죽을 준비를 한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죽음이다.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온 몸에 기계 장치를 달고 문 밖의 가족을 그리워하며 죽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추한 모습 보이지 않고 조용히 숨을 거두는 것, 모두가 꿈꾸는 마지막 모습이다.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야 하는 인간의 운명, 그러나 끝나지 않는 인생. 영화 중반부에 점점 가족의 수가 늘어나 화목한 분위기의 가족 식사 장면이 많이 차지한다면 영화 결말부는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잠시 잊고 있었던 죽음의 두려움을 환기시켜준다. 그래서 인생은 누군가 떠난 자리에서 또다시 시작되는 것이라는 엄연한 진리를 영화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하나로 이어지게 처리해서 나타내고 있다.

 

 

 

 

 

미국의 심리분석학자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이러한 인생의 주기를 /죽음/이라고 표현한다. 생명이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며, 죽음에 의한 소멸은 여기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새 생명의 부활이 시작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존재의 본질을 묻는 이 질문은 인간에게는 가장 어려운 숙제이기도 하다. 정확한 해답은 존재하지 않지만 결국, 우리네 인생을 묘사하는 영화는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가 그린 한 폭의 풍경화와도 같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인생의 단계」 1834년

 

 

노을 지는 해변에 다섯 사람이 등장했다. 바다에는 다섯 척의 배가 떠 있다. 다섯 사람은 인생의 시기를 뜻하고 다섯 척의 배는 인간을 의미한다. 스웨덴 국기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두 아이는 유년기, 아이들 곁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는 청년기, 중절모를 쓴 정장 차림의 남자는 중년기,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뒷모습의 노인은 노년기를 상징한다. 이 그림은 프리드리히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생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는 증거물이다. 인생이라는 바다를 향해 출항하는 배들은 활동적이다. 그러다가 무사히 항해를 마치고 완전한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최종 목적지(사람의 인생에 비유한다면 '죽음')에 도착한다. 그러나 또 다른 배들은 미지의 세상을 향해 다시 한 번 돛을 활짝 펼쳐 출항할 것이다.

 

영화는 일레곤다는 안토니아를, 안토니아는 다니엘을, 다니엘은 테레사를, 테레사는 사라를 낳았다는 식의 모계(母系)가 탄생한다. 그리고 탄생과 죽음의 순간을 반복하면서 증손녀인 사라가 안토니아의 임종을 지켜보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러한 순환구조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는 삶과 죽음의 고리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영화제목인 안토니아스 라인은 단순히 안토니아 중심의 모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의 주기라는 예고된 삶의 연대기를 함축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여장부’, ‘어머니 늑대안토니아

 

 

 

 

 

안토니아는 여장부처럼 당돌하면서도 자기 기준이 확고하다. 이웃 농부 바즈가 그녀에게 '내 아들들에게 엄마가 필요하다'고 청혼을 한다. 그러자 안토니아의 대답. '난 아들 따위는 필요 없다.' 그러고는 오히려 되묻는다. '왜 남편이 필요하죠?' 두 가족은 종종 식사를 같이 하며 친숙한 이웃으로 지낸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안토니아는 바즈에게 자신의 성적 욕구를 솔직하고 당당하게 표시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집이 아닌 제3의 장소를 고른다. 숲 속의 오두막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같이 차를 타고 등불 하나 손에 들고 떠나는 두 사람. 안토니아의 딸과 손녀가 배웅한다.

 

한편으로는 클라리사 에스테스가 주장하는 어머니 늑대의 원형을 안토니아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어머니 늑대는 선천적으로 사랑이 넘치고, 적응력과 직관력이 뛰어나며, 씩씩하고 용감한 존재다. 그래서 주체적인 삶으로 개척할 수 있는 당당한 풍모가 느껴진다.

 

각자 자기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가끔 한 식탁에 온 가족이 마주 앉고, 필요할 때는 제3의 장소에서 성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동거에 대해서 단순한 성적, 경제적 문제 해결을 위한 출구냐, 수많은 결함과 문제를 안고 있는 결혼 제도에 대한 대안이냐 하는 논의가 무성한데, 안토니아와 바즈의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노년의 사랑과 결혼을 생각해 봐도 안토니아와 바즈가 하나의 대안은 되지 않을까. 노년의 사랑과 결혼이 호적 문제, 재산 문제 등으로 벽에 부딪치는 경우가 많은데, 각자 자녀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둘 만의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다. 물론 한 쪽이 병에 걸리거나 세상을 떠났을 경우를 예상해서 분명한 약속들을 하는 것이 앞서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안토니아는 주름지고 검버섯 핀 얼굴이 되어서도 여전히 강하고 건강하다. 그리고 넓다. 몸담아 살고 있는 땅을 닮았다. 모든 슬픔과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 안아주는 땅의 얼굴이다. 큰 나무를 닮았다. 저 땅 끝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서서 태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생명을 묵묵히 지켜보는 나무의 모습이다.

 

세상 떠난 어머니를 빼고 여인 4대가 남자에 매이지 않고 생활해 나가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신선하다. 유쾌하기도 하다. 물론 폭력으로 상하는 어린 영혼의 이야기는 눈물 겹지만, 주변 남자들의 폭력과 오만, 위선 등이 깨져 나갈 때도 가끔은 웃음 짓게 하는 여유가 있다. 새로운 가족의 형태니 동거의 한 방식이니 하는 논의에서는 비껴간다 해도, 구원은 결국 여성의 힘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영화는 소리 높이지 않고 말하고 있다. 여성 영화이기도 하지만 우리네 인생을 정확하게 묘사한 영화인 것은 자연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안토니아가 그 넉넉한 품으로 우리를 안아 주고 있다.

 

남자 입장에서 본다면 영화 속 안토니아의 행동이 상당히 충격스러우면서 불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다시 보는 사람이라면 '페미니즘 영화의 정전'이라는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오랫동안 붙어 있는 수식어를 잠시 잊은 채 영화를 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안토니아와 그 주변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고 울고 웃는 장면에 초점을 맞춰 본다면 우리가 잊고 있던 화목한 가족애의 훈훈함, 그리고 가볍지 않은 인생사의 진중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여성 출연자들의 가슴과 음모가 드러나는 베드신이 있는 19금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영화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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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3-11-05 11:27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이 영화 오래 전에 본 기억이 나는데 그동안 잊고 있었네.
꽤 괜찮았던 영화로 기억하는데, 봤을 때만해도 유럽 영화가 익숙치 않아
조금은 뜨아하기도 했어. 다시 보면 어떨까? 지금은 유럽 영화 좋아하게 됐는데 말야.ㅋ
확실히 이 영화는 페미니즘 이상을 뛰어넘는 뭔가가 있지.

요즘은 기억이 가물거려서 어떤 영화는 옛날에 봐 놓고도 안 봤다고
다시 보게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고 있어.ㅠㅠ

cyrus 2013-11-05 20:26   좋아요 0 | URL
처음엔 이름만 들었을 땐, 별 관심 없었다가 막상 보고나니 나름 충격적인(?) 장면도 있고, 생각해볼 수 있는 내용이 있어서 이 영화가 좋았어요. 사실 저도 유럽 영화를 많이 본 건 아니거든요. 그래도 언젠가 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보고 싶네요. ^^
 

 

 

 

 

 

빈센트 반 고흐  「요양원 정원」 1889년

 

 

 

 

 

 

 

 

 

 

 

 

 

 

 

 

 

 

 

요양원 정원의 테라스에 초점을 둔 이 작품에는 소나무와 돌 벤치, 시든 장미 옆을 걷는 환자 셋이 그려져 있다. 빈센트는 번개를 맞고 부러진 나무의 그루터기에 특히 매혹되었다. 그의 문학적 상상력은 이를 우쭐대는 남자의 패배로 보았다. 그림에서 그는 은근히 분노를 표현할 수 있었다. (랄프 스키 『반 고흐의 정원』87쪽)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주어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주어를 잃고 헤매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된 시인의 시를 읽다가 요양원 한가운데 부러진 나무 그루터기로 남은 네덜란드 사내가 생각났다.

 

 

20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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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1-04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흐의 그림은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군요.
기형도 님의 시였나요?

사이러스님, 평온하고 즐거운 한주되세요.

cyrus 2013-11-04 21:2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맞아요. '병'이라는 제목의 기형도 시인이 쓴 거예요. 알라딘 중고샵에서 발행기간이 조금 오래된 기형도 시집을 발견했어요. 오랜만에 시집을 읽고 있었는데 예전에 눈에 들어오지 못했던 이 시를 읽다가 고흐의 그림이 생각났어요. 마고님 말씀처럼 비록 고흐는 자신을 잘려진 그루터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강인한 생명력과 예술혼은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물론 시인이 남긴 시들 또한 마찬가지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