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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추락 - 프로이트, 비판적 평전
미셸 옹프레 지음, 전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 프로이트의 마지막 인터뷰

 

오래된 전통을 보존하는 도시에는 꼭 크고 작은 박물관이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대영박물관처럼 크고 유명한 박물관이 있는가 하면, 위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박물관도 있다. 이런 작은 박물관들은 대개 그 위인이 생전에 거처하던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경우인데, 위인이 생전에 쓰던 가구는 물론이고 옷과 책들, 모자와 펜 한 자루까지 세심하게 보관해놓은 곳이 많다.

 

이와 같은 개인 박물관 중에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박물관이 있다. 그의 박물관은 학자와 문인이 많이 사는 런던 북부의 햄스테드에 숨듯이 자리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지만, 런던에서 눈을 감았다. 유대인인 프로이트는 만년에 오스트리아가 나치스에게 점령당하자, 팔순의 노구를 이끌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런던은 서른 번이 넘는 구강암 수술로 병색이 완연한 노학자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프로이트는 생의 마지막 1년을 런던에서 지내다가 메어스필드 가든 20번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메어스필드 가든 20번지가 지금의 프로이트 박물관이다.

 

프로이트 박물관에 가면 그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가 망명한 1938년 겨울, BBC 라디오는 이 집에서 프로이트와 마지막 인터뷰를 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정신분석학을 처음 주장한 이래 나는 많은 이에게 비난과 모욕, 핍박을 받았다. 이제 시간이 흘러 세상은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인정해주고 있다. 나는 이 사실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나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자신의 숭배자를 까발리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발견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과 함께 지성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3대 혁명으로 꼽힌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이성의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인간이 무의식의 노예에 불과하단 사실을 밝혀냈다.

 

지금까지 프로이트의 생애와 학문 세계를 조망한 책은 수없이 많이 나왔다. 프로이트 연구자들이 인정했던, 가장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은 영국의 정신분석가 어니스트 존스가 프로이트 사후 1953년부터 1957년까지 총 3권, 1500페이지에 달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의 생애와 사상>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도 나오듯이 어니스트 존스는 프로이트 생전 그의 제자이자 추종자로, 국제 정신 분석 학회를 조직한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프로이트 옆에서 그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제자이고 측근이기에 객관적으로 프로이트의 삶을 조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니스트 존스의 책보다 보다 실증적이며 균형적인 시각으로 프로이트를 접근한 책이 피터 게이의 <프로이트: 인생>이다. 900페이지가 넘는 피터 게이의 책은 이미 2년 전에 국내에 번역되었다. 피터 게이는 프로이트의 논문과 저서, 편지를 샅샅이 검토했을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에게 정신 분석을 받았던 환자를 찾아가 인터뷰하는 등 발로 뛰며 이 평전을 썼다. 가장 큰 특징은 저자가 직접 정신 분석을 공부해 프로이트의 내면을 읽어내려 시도했다는 것. 이를 토대로 프로이트가 남긴 사소한 농담이나 실수에서도 행간을 읽어내는 방식으로 프로이트의 체취를 책 속에 담아냈다.

 

그러나 이 책마저도 프로이트를 설명하기에는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옹프레다. 그는 ‘반(反)철학사’라는 제목의 6권짜리 책을 통해 전통철학에 반기를 든 비주류 철학자이다. 특이하게도 그가 프로이트 숭배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셸 옹프레는 피터 게이 못지않게 어마어마한 분량의 프로이트에 관한 모든 자료를 근거로 소개하면서 신랄하게 자신의 숭배자를 까발린다. 프로이트가 무의식과 욕망이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규명하며 인간 내면의 '불편한 진실'을 낱낱이 까발렸다면 환자의 정신을 분석하던 이 위대한 유대인 자신의 심리상태는 과연 어땠을까.

 

 

 

 ♣ 프로이트와 비밀의 열쇠

 

작품과 작가의 삶은 무관하거나 혹은 그래야 한다는 ‘몰개성’ 이론이 글쓰기 일반을 대변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것은 훌륭한 작가가 지녀야 할 덕목으로 제시된 것이었지만 작가의 삶의 편린들이 작품 해석에 불필요하게 개입하는 것을 방지하는 나름의 유용함도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의 정신분석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에 대한 소소한 것까지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전적 연구의 한 구절에서 자신의 삶과 정신분석의 역사는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있다며 이렇게 고백했다.

 

 

 

 

 

살바도르 달리 「관료의 프로이트적 초상화」 1936년

 

불멸의 그리스와 현대의 차이에는 프로이트만이 존재한다. 불멸의 그리스 시대엔 신플라톤 학파의 순수한 인체가, 현대에는 정신분석학에 의해서만 열리게 되는 서랍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살바도르 달리)

 

 

 

“정신분석과의 관련성을 배제한다면 나의 개인적 경험들은 아무런 흥미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프로이트의 개인사를 자세히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을 이해하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프로이트는 자신의 손에 몰래 쥐고 있는 이 ‘열쇠’를 주변 사람들에게 공개하기가 꺼리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이론은 철저한 자기분석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죽어서 자신의 이름만 남길 원했지만, 영원토록 숨기길 원했던 비밀의 ‘열쇠’는 무덤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그 열쇠는 지금 자신을 숭배했던 철학자 미셸 옹프레의 손에 쥐어졌다.

 

옹프레는 정신과 의사가 되어 프로이트를 상담용 소파에 편히 눕게 한다. 혹시 프로이트가 당황할까봐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시가 한 대를 슬쩍 내밀어본다. 드디어 그가 ‘자유연상’을 하기 시작하면 옹프레는 굳게 잠겨 있는 프로이트의 책상으로 다가간다. 그러면서 책상의 서랍에 숨겨진 물건 찾듯이 그 안에 보관된 ‘프로이트 엽서’에 적힌 지적 우상의 내면을 과감히 드러낸다.

 

 

 #1 첫 번째 서랍 : 아버지 야콥 프로이트

 

프로이트의 책상 가장 큰 비중을 자지하는 서랍 하나를 열어 보면, ‘아버지’가 있다. 그의 생애에서 아버지가 차지한 자리는 결코 작지 않다. 프로이트가 인간 사회의 근원을 이룬다고 생각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성(性)적인 환각이 부모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가설에서 시작된다. 즉 아버지를 (어머니를 사이에 둔) 경쟁자로 증오하는 남자아이는 아버지가 자신을 거세할 것이라며 불안해하는데, 여성의 생식기를 관찰함으로써 거세의 실제적인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경쟁하기를 포기하고 대신에 아버지를 자기와 동일시하고 내면화함으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아버지 야콥 프로이트는 보헤미아에서 빈으로 이주한 상인이었다. 장사는 동유럽에서 유대인들이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으나 아이가 많은 프로이트 일가는 늘 가난에 쪼들렸다. 어느 날 소년 프로이트는 아버지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아버지가 젊을 때, 새 모자를 쓰고 거리를 걷다가 한 독일인에게 모욕을 당한 이야기였다. 독일인은 일부러 야콥의 모자를 떨어뜨리며 “이 유대인 놈아, 인도에서 내려가지 못해!” 하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소년 프로이트는 당연히 아버지가 맞서 싸웠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런 불평 없이 차도로 내려가서 진창에 떨어진 모자를 주웠을 뿐이었다. 당시 동유럽에서 유대인이 이런 대우를 받는 건 다반사였으나 프로이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 일은 아버지를 ‘절대적이고 완벽한 이상형이었던 남자’로 생각하던 프로이트를 실망에 빠뜨렸고 후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대표되는 그의 정신분석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아버지와의 개인적 경험과 인상을 토대로 현상을 분석하고 이론을 만든 것이다. 이에 대해 옹프레는 근친상간에 대한 욕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이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화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프로이트는 콤플렉스의 전시장과도 같았다. 핍박받는 소수 민족 출신에다가 변변치 못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질투와 그로 인한 죄의식 등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2 두 번째 서랍 : 자기검열

 

프로이트는 유명해지기도 전인 1885년 벌써 14년간의 모든 메모, 편지, 논문 발췌문, 작업 중 원고를 일차로 없애버렸고, 이후 같은 자료 파괴 행위를 여러 번 반복했다. 심지어 한번은 젊었을 때 “동성애적 경향”을 이야기할 정도로 절친했다가 결국 절교하게 된 친구 빌헬름 플리스에게 보낸 편지를 플리스 사후 미망인에게서 돈을 주고라도 사들이려 했다. 물론 없애버리기 위해서. 프로이트는 전기 작가들을 골탕 먹이려고 그렇게 없앤다고 짓궂게 농담을 했다. 진심이 무엇인지야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죽은 뒤에 자신을 잘 알지도 못할 것이 분명한 전기 작가에게 편집당할 재료가 된다는 것이 싫었을 수도 있다. 무의식과 의식의 편집권을 둘러싼 투쟁이 전공의 하나인 그가 자신의 삶의 편집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의 삶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남에게 노출되는 것을 매우 꺼려했다. 그래서 말하자면 자신의 삶에 대한 위생 처리를 해 버린 것이다. 생전의 프로이트의 태도를 익히 보아온 존스가 프로이트 사후에 아무리 용기를 내 전기를 써도, 스승에 대한 존경과 그가 내린 무언의 지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3 세 번째 서랍 : 오류, 조작

 

여전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제도권 학계에서 완전히 수용되지 못하거나 늘 비판 대상이 되고 있다. 놀라울 만한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검증 가능성은 여전한 시빗거리다. 정신분석의 유일한 도구가 언어이고, 대상을 충분히 재현하지 못하는 언어의 한계로 인해 이런 비판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지나치게 직관에만 의존한 프로이트의 어처구니없는 추론 또한 분명히 지적되어야 한다.대표적인 것이 프로이트가 분석한 도라의 사례다. 그에 따르면 도라는 자신의 아버지, 아버지를 간호하는 내연녀, 내연녀의 남편 K씨 모두와 동일시하며 동시에 증오한다. 프로이트는 도라와 K씨와의 스킨십에 대해서도 작용(자극) 반작용(흥분)이라는 생리, 물리학적 관점으로만 접근한다. 이처럼 기계적이고 경직된 해석과 가부장적인 권위로 환자의 주장을 묵살하는 독단,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것을 성욕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려는 방식은 그의 측근들조차 돌아서게 만든 주요 원인이었다. 그에게 진찰받고 난 1년 후에, 도라의 정신 상태는 더욱 피폐해졌으며 몸이 극도로 허약해지기 시작했다. 적어도 임상 치료에 관한 한 정신분석은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고 볼 수 없는 이유다. 수많은 치료 실패와 재발 사례들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프로이트의 환자들에 관한 사례들은 프로이트가 직접 조작하고, 환자를 가상으로 만들어냈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유명한 환자 중 한 명인 ‘안나 O’가 정신분석으로 치료됐다는 주장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 늑대 인간 사례로 알려진 러시아 청년 세르게이 판케예프도 프로이트로 인해 치료된 것이 아니라 92세에 사망하기까지 70년간 10명의 정신분석가에게 치료를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 네 번째 서랍 : 코카인과 담배

 

과거에 코카인이 만병통치약으로 각광받던 시절이 있었다. 주범은 놀랍게도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였다. 그는 아편 중독에 시달리던 동료 의사를 코카인으로 10일 동안 치료한 후 "완전히 해방시켰다"며 코카인을 중독 위험이 없는 기적의 약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코카인은 전 유럽을 휩쓸었다. 그러나 그 동료 의사는 나중에 코카인 중독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5년간 코카인을 규칙적으로 흡입하면서 “중독성 없이 지속적 행복감을 제공한다”는 예찬과 함께 주변에 권하기도 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애연가였다. 죽기 전까지 말 그대로 줄담배를 피웠다. 그로 말미암아 말년에 구강암으로 서른 번의 수술을 거듭하면서도 그는 담배를 결코 놓지 않았다. 치료제로 복용하던 코카인에는 중독되지 않았던 그가 오히려 담배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시가는 그에게 지적인 자극제였고, 프로이트는 그것 없이 정신분석학의 탄생은 불가능했다고 고백했다.

 

 

 

 ♣ “나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프로이트 박물관에 흘러나오는 프로이트의 육성에서 마지막 한 줄의 문장이 인상 깊다. “나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말은 프로이트의 평생을 압축한 것일지 모른다. 실제로 그의 인생은 탄생부터 사망까지 투쟁으로 점철됐다. 그리고 조용해 보이는 이 남자는 무쇠보다 더 강한 의지로 모든 장애물에 맞섰다. 일찍이 프로이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신념을 가진 인간은 무한정 강하며 결코 죽지 않는다.” 실제로 그랬다. 유대인이라는 태생도, 교수의 길을 포기하게 만든 가난도, 정신분석학에 쏟아진 학계의 비난과 공격도, 빈 시민들의 경멸 어린 시선도, 심지어 죽음마저 그를 무릎 꿇릴 수 없었다. 그는 강한 적을 만나면 더욱 강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아무리 강철 같은 의지를 지녔더라도 그 역시 한계가 있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었다. 무의식을 분석해 인간 심리의 저변을 해석해내고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진 프로이트도 욕망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면 그 자신이 콤플렉스, 신경증(히스테리, 공포불안), 도착증 환자였던 셈이다. 학문적 기여도에 비해 오랜 세월 학계의 변방에 남아있었던 그는 세상이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인정해 주기를 바랐고 노벨상에 대한 욕심도 남달랐다. 상담용 소파에 누운 프로이트의 이런 이야기를 그 자신이 직접 들었다면 어떤 진단을 내릴까? 분명한 점은 프로이트도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환자였다.

 

미셸 몽프레의 책은 매우 논쟁적이어서 프로이트의 추종자들에겐 상당히 불쾌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사상가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될 수 있다는 기본적 인식을 전제한다면, 그의 도발적인 문제제기는 프로이트의 생전이나, 또는 그의 사후 줄기차게 따라다녔던 ‘비판’의 연속선에서 이해할 때 유익할 것이다. 물론 이 ‘비판’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후예들이 대답을 해야 하겠지만. 옹프레의 프로이트 평전이 나오더라도 그와 프로이트 추종자들 간의 투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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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11-26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어쩐지 털보들의 나날이로군요.

cyrus 2013-11-26 22:56   좋아요 0 | URL
요즘 형님도 수염이 잘 나는가보죠? ㅎㅎㅎ

루쉰P 2013-11-26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여전히 독서에 날을 새우고 진보하는 청년으로 지내고 계시는 군요 ㅎ
너무 오랜만에 와서 인사 드리죠? ㅋ
프로이트도 저에게 상당히 관심이 많은 사람이에여.
저도 항상 저의 무의식에 관심이 많거든요.
공부한다고 책상에 영어 책을 피면 15분 뒤엔 전 정확하게 휴대폰을 들고 웹툰을 보고 있어요...
왜 일까...대체 내 무의식의 무엇 땜에 이럴까...
이런 생각을 곧잘 합니다 ㅋ
여전히 좋은 글이에요 ㅋ 왠지 나중에 교수님 하실 거 같은 포스 ㅋ

cyrus 2013-11-26 22:5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루쉰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요즘 저도 프로이트 심리학에 관심이 있어서
<꿈의 해석>도 조금씩 읽어보고 있는 중이에요. 심오하면서도 수긍가는 부분도 있지만,
융 심리학도 공부해볼만 합니다. 저도 이번 학기 졸업반인데 딴 짓하고 싶은 생각이 많아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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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표창원.지승호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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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워라

더 이상 분노할 수 없다면

내 영혼 죽어 있는 것 아니냐

완장 찬 졸개들이 설쳐대는

더러운 시대에 저항도 못한 채

뭘 더 바랄게 있어 눈치를 보고

비굴한 웃음 흘리는 것 아니냐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이제 그만

주민등록을 말소하고

차라리 파락호처럼 떠나버리자

아아 새들도 세상을 뜨는데

좀비들만 지상에 남아 있구나

 

- 정희성 「부끄러워라」-

 

 

 

 

 ♣ 정의 따윈 잊고, 눈 감으며 지내라고?

 

 

 

 

 

 

Look down, look down 눈을 내리깔아라, 눈을 내리깔아라. / Don‘t look ’em in the eye 그들과 눈을 맞추지 마라. (…) Look down, look down 눈을 내리깔아라, 눈을 내리 깔아라. / You‘ll always be a slave 너는 언제나 노예일 뿐이니까.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많은 이들이 손꼽는 명장면 가운데 하나가 거대한 함선을 이끄는 죄수들의 절규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첫 장면이다. 웅장한 멜로디에 비참함과 절망감이 사무치는 가사가 흘러나오는 이 장면을 볼 때면 오늘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정’(不正)과 ‘부패’ 앞에서 ‘정의’를 푹 숙이고 눈을 감는 비겁한 공직자와 대중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법의 상징으로 오늘날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그리스 신화 속의 ‘정의의 여신’ 디케(Dike)다. 디케 조각상은 대개 한 손에 저울, 다른 손에는 칼이나 법전을 쥐고 있다. 저울은 형평성을, 칼은 엄정함을 나타낸다. 디케는 또 눈을 감거나 안대로 가리고 있는데, 이는 판결에서 주관성을 배제하겠다는 뜻이다.

 

서울 세종로의 옛 대한변호사협회 자리에는 지금도 한 손에 저울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칼을 집은 채,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하는 모습의 디케 상이 서 있다. 옛 사법연수원에도 눈을 지그시 감은 디케 상이 있었다. 지금 우리 대법원의 로고 또한 디케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나 상징은 상징일 뿐, 실제 법집행 과정은 그다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들의 비리와 오류를 덮으려고 자신들이 써야 할 안대로 국민의 눈을 가리려고 한다. 한국의 디케는 눈을 가리지 않았다. 실체적 진실만을 두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뜻이겠지만 시야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오게 마련이다.

 

 

 

 ♣ 범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무식한 지도층들

 

법(法)은 순리다. 법은 물 수(水) 변에 갈 거(去)로 이뤄진 글자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이치를 담고 있어 모두 상식이라고 여기는 것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상식을 벗어나면 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

 

국정원 댓글 사건이 법적으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채 물고 늘어지는 갈등만 이어지고 있다. 확실한 증거와 증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한 채 김학의 전 법무부차관이 무혐의를 받음으로써 세상을 떠들썩한 파렴치한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법에 따라 재판하는 판사들이 법, 곧 순리를 거스르겠다는 의미로 보일 수밖에 없다.

 

검찰은 더하다. 검찰은 ‘정의롭다’는 말을 즐겨 쓴다. 정의는 바른 도리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바르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름은 흑백이 아니다. 바를 정(正)은 하나(一)에 이름(止)을 말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누구나 같은 결론에 이름을 뜻한다. 정권을 비판하는 일에는 날선 칼을 들이대고 지난 정권의 인사들만 잡아들이는 일은 정의와는 거리가 있다. 검찰은 서민들의 범죄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만 힘센 이들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국가 발전에 공헌한 점, 공직에서 오랫동안 복무한 점, 기업 운영으로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 점 등의 이유로 정치인과 경제인에 대해 솜방망이 구형을 했다. 법은 거미줄과 같아 힘이 없는 이들은 붙잡지만 힘센 자는 찢고 나간다고 하는데 우리 현실이 그 짝이다. 법이 그물이 되어 힘센 자는 꽁꽁 묶고 작고 힘없는 이들은 성긴 구멍으로 빠져나가도록 할 수는 없을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법은 그물보다는 거미줄에 가깝다. 또 검찰에는 ‘정의롭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다. 국정원 댓글 사건 당시, "보수주의자로서, 고백하고 요구하고 경고합니다"라는 글을 올리고 강단에서 물러난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가 그 중 한 사람이다. 예전에 진행했던 시사 프로그램 제목대로 ‘정의’라는 이름을 내세우면서 법을 집행하는 소수 지도층에게 날카로운 돌직구를 날린다.

 

우리나라 지도층들은 너무 무식해요. 그 사회의 시스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지와 신뢰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과 지배 체제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그러니까 당장 눈앞의 불이익을 막기 위해서 움직이죠. 장자연 사건, 김승연 회장 사건, 전경환 사건, 제가 지적하는 문제들이 그런 사건이거든요. 다 보고 있고, 다 알고 있고, 오로지 모르고 있는 것은 수사하는 경찰, 검찰, 범원뿐인 것 같아요. (중략) 조금만 똑똑했더라면 바로 그 앞에서 자신의 병든 팔을 자르는 심정으로,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자신들의 한 부류이자 동료일 수도 있는 해당되는 범법 행위자를 엄하게 처벌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거죠. (중략) 그렇게 우리 제도와 시스템을 믿어달라는 것이 보수의 모습인 건데요. 우리나라는 그게 아니고, 거꾸로예요. (15~16쪽)

 

결국 범죄에 대한 국가의 인식 부재는 우리 사회 전체에 통용되어야 할 ‘정의’과 ‘도덕’의 의미가 무색해지게 만들며 우리의 상식에 벗어난 거대 국가 범죄를 끊임없이 잉태한다는 것이다.

 

 

 

 ♣ 범죄자, 괴물이 아닌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낸 병

 

전문 인터뷰어인 지승호는 한국적 범죄의 특성과 연쇄살인의 사회적 배경부터 시작해 불법 도박과 스포츠 승부 조작, 공소시효, 오원춘 사건, 국가 범죄에 가담한 경찰 등 범죄와 관련된 수많은 소재를 제시한다. 현직 경찰관으로도 일했던 국내 최초의 프로파일러이자, 연쇄살인 등 다양한 범죄를 분석해온 표창원 전 교수를 통해 한국사회를 진단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다음 돌직구 질문의 표적지는 독자에게 향한다. 이웃집에서 벌어진 단순 강도에서부터 거대한 국가기관의 부정까지, 범죄를 애써 외면하고 침묵하는 사람들의 사회에서 혹시 당신도 공범이 아니냐고. 

 

그는 범죄자가 늘 우리 주변에 있다고 말한다. 나와 상관없는 '괴물'이 아니라는 의미다. 표 전 교수는 프로파일러로 활동했을 때 연쇄살인범, 영아살해범 등 다양한 범죄자를 만났다. 그들은 대부분 기가 꺾인 상태였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애정을 못 받아본 사람들이라 조금만 관심을 보여도 마음을 열었다. 

 

표 전 교수는 연쇄살인의 사회적 징후가 뚜렷하면 지진ㆍ태풍 대비에 맞먹는 사회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연쇄살인은 태풍 한번 부는 것 이상의 사망자가 나온다. 2000년대 들어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별도의 괴물이라기보다 사회병리 현상이 돌출하는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빈부격차, 낮은 취업률, 학교 폭력 등이 그 징후다. 태풍에 대비하는 것처럼 대응할 필요가 있다. 성장보다는 복지와 분배에 집중하고, 분노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이상 성격자를 찾아 치료하는 등의 예방책이 있다.

 

 

 

 ♣ 범죄 앞에서 부인하는 대중의 침묵

 

‘과연 당신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용기가 있습니까?’ 표 전 교수가 독자들에게 향하는 묵직한 돌직구 같은 질문에 용기 있게 받아 칠 수 있는 독자가 있을까?

 

한 여론조사에서 ‘대한민국 사회가 공정한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3.8%가 ‘공정하지 않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또 청소년 대상 조사에서는 44%가 ‘10억원을 준다면 징역 1년 정도 살짓을 저지를 수 있다’라고도 응답했다. 모두가 퍽퍽하고 삭막한 불신과 의심, 경계, 피해 의식의 악순환 속에 빠져 있는 듯하다. 이런 사회적 불합리와 부조리들이 사람들에게 잠재된 분노를 만들고 다시 이것이 왜곡된 방향으로 무서운 범죄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가령 당신은 직장에서 당신의 인사고과 책임자가 한 직원에게 성차별적 발언을 하는 걸 언뜻 들었다. 또는 마을에서 나치 부대원들이 민간인을 총살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치자.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이렇다. ‘눈감아 버린다/못본 체한다/보고 싶은 것만 본다/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모르는 게 약이다/그건 나와 무관해/침묵의 음모/괜한 평지풍파 일으키지 마라/전체 사회가 현실을 부정하고 있어/차라리 몰랐다면/외면해 버렸지/심지어 자신도 인정하지 않았어.’

 

사회학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스탠리 코언의 말을 빌리자면 이러한 경험의 밑바탕에는 '부인'(不認)이라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부인을 심리적 방어기제로 개념화했는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불편한 사실에 직면했을 때 그것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많아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인권을 침해한 가해자뿐만 아니라 이를 보거나 인지한 관찰자, 심지어는 피해자조차도 때로는 사실 정보를 어떤 식으로든 부정하거나 제쳐두거나 재해석하게 된다.

 

인권을 해치는 범죄와 이에 따른 인간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재생산하는 데에는 가해자와 관찰자(방관자)의 완고한 ‘부인’에 가까운 침묵이 자리 잡고 있다. 가해 권력의 인권침해 부인은 이를 방관하는 일반대중의 태도와 무관할 수 없으며, 일반대중의 부인은 가해 권력의 행위를 정당화해주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눈감는 상태, 곧 ‘부인’과 ‘침묵’은 또 다른 국가 범죄에 냉소하고, 제2의 신창원, 오원춘을 등장하게 만든다.

 

 

 

 ♣ 사람은 되지 못해도 부정과 불의에 둔감한 좀비가 될지 말자

 

우리 사회를 위한 표 전 교수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정의를 제대로 세우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단다. 이건 초등학생 때도 배웠는데도 이상하게 우리는 실전에서는 써먹지를 못한다. 오히려 나쁜 짓은 자기에게 이로울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따라 하려고 한다.

 

표 전 교수는 또 보수와 진보의 좌우 갈등도 폭력을 키우는 요인으로 본다. 극단적인 대립이 폭력을 낳는다는 의견이다. 진보와 보수가 조금씩 자기 견해를 양보하고 범죄에 대한 균형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해소된다면 국가 공권력· 강자 등의 도덕 윤리 회복이 원활해진다. 권력과 정부가 솔선수범하고 엄정한 법규를 세워야 폭력에 대한 근본적 치료가 가능해질 수 있다.

 

그리고 잊을 만하면 나오는 부정과 불의에 우리는 둔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덮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됐다고 믿고 싶어 하며,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외치는 나라다. 불의에 침묵하고 부인하는 국가의 전형이다. 영국의 보수주의 대표 정치이론가이자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는 “선한 자의 침묵은 악의 승리를 도와준다. 침묵은 곧 동조고 방관이며 우리 사회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고 했다. 이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조그마한 관심과 배려에 대해 침묵과 외면으로 두 눈을 내리 깔고, 한 발 물러 서있을 때가 많다. 사람은 되지 못해도 부정과 불의에 둔감한 좀비가 될지 말자. 우리 사회에 대해 주변에 대해 관심과 행동보다 침묵과 방관으로 악의 승리를 도와주고 있는 공범 역할을 하고 있지 아닌지 성찰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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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 파탈 - 치명적 여인들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이명옥 지음 / 시공아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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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자에게 가장 약한 존재는 남자다. 남자는 아름다운 여자만 보면 사랑하고 싶은 본능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남자는 아름다운 여자와의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싶어 하고 때문에 미모의 여자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남자의 유혹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옛날에는 여자가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과 맞설 수 없었다. 때문에 여자는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세상을 쥐고 흔드는 남자를 유혹하는 기술을 터득했다. 그녀들에게 미모는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미모의 여자들은 남자의 소유욕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쉽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유독 아름다운 여자가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이야기가 많다. 그런 여자들을 팜므 파탈(Femmes fatales)이라고 한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레이디 릴리트」 1868년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1868년 작 「레이디 릴리트」는 19세기말 유럽 문화를 지배했던 팜므 파탈의 원조 격 그림으로 꼽힌다. 릴리트는 태초에 이브가 생겨나기 전에 아담의 여자다. 릴리트는 이브처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지지 않고 흙으로 빚어졌다. 그녀는 정숙한 아내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했다. 음탕한 릴리트의 유혹을 걱정한 하나님은 아담을 보호하고자 그녀에게 벌을 내려 낙원에서 추방해버린다. 그리고 아담에게 이브를 선사한다. 유대신화 속 최초의 여성인 릴리트가 거울을 보며 화장하는 모습의 이 그림은 오늘의 영화 및 광고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팜므 파탈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다.

 

 

 

 

 

콜리어  「릴리트」  1892년 

 

 

존 콜리어의 ‘릴리트’는 낭만파 시인 키츠의 《라미아》라는 시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작품이다. 키츠는 그의 시에서 릴리트를 황금빛과 초록빛 그리고 청색의 무늬가 있는 뱀으로 비유했는데 콜리어는 릴리트의 악녀 이미지를 뱀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으로 묘사했다.

 

이 그림에서 아름다운 육체를 소유하고 있는 벌거벗은 릴리트는 뱀에게 몸이 감긴 채 황홀경에 빠져 있다. 시각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 여자와 뱀을 함께 그려 넣었다. 그는 릴리트의 유혹을 갈망하면서도 거부하고 싶은 남자의 이중성을 표현했다. 뱀은 인간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동물이지만 뱀과 여자를 연결시켜 성적인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1614~1620년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름다운 여인 유디트는 음탕한 릴리트와는 전혀 다른 여인이다. 잔인하고 야만적인 앗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는 이스라엘의 도시 베툴리아를 침략한다. 마을이 홀로페르네스 군대에 철저히 유린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름다운 미망인 유디트는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기로 한다. 유디트의 미모와 달콤한 말에 속아 홀로페르네스는 그녀를 연회에 초대한다. 홀로페르네스에게 술을 먹여 유혹한 유디트는 그가 잠들자 칼을 꺼내 그의 목을 베어버린다. 이스라엘은 그녀의 행동에 용기를 얻어 앗시리아 군대를 물리친다.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 1」 1901년

 

 

나라를 구한 여인 유디트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화가들이 즐겨 찾는 주제였지만 구스타프 클림트는 유디트를 성적 대상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는 작품 「유디트 1」에서 유디트를 남자의 목숨을 빼앗은 요부로 표현했다. 이 작품 속의 유디트는 왼쪽 가슴을 노출한 채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들고 있다. 넓은 금빛 목걸이를 하고 있는 유디트의 얼굴은 굳어 있지만 몸은 여성으로서 매력을 뽐내고 있다. 클림트는 이 작품의 제목을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라고 표시했지만 그가 표현한 유디트는 사실 살로메에 가깝다. 목이 베인 세례 요한의 입술에 키스를 하는 살로메의 모습과 섹스를 무기로 적의 머리를 베어버린 유디트의 모습이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살로메 - 사랑하는 남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파멸의 여자

 

 

 

 

 

오브리 비어즐리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삽화 」 1894년

 

 

 

《구약성서》에서 유디트가 나라를 위해 남자를 유혹했다면 살로메는 사랑을 소유하기 위해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했다. 헤롯왕의 의붓딸 살로메는 그가 베푸는 만찬에서 매혹적인 춤을 춘다. 그 춤에 반한 헤롯왕은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한다. 성서에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것은 어머니 헤로디아다.

 

하지만 오스카 와일드(1854~1900)의 희곡 《살로메》에서는 주인공 살로메가 세례 요한을 사랑하지만 세례 요한은 그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 복수심에 불탄 살로메는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헤롯왕을 유혹하고 그 대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다.

 

 

 

 

 

귀스타브 모로 「환영」 1875년

 

 

오스카 와일드의 영향을 받아 사랑하는 남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살로메를 표현한 최고의 작품이 귀스타브 모로(1826~1898)의 「환영」이다.

 

이 그림에서 살로메는 가슴을 노출한 대담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춤을 추면서 화면 중앙에 있는 세례 요한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공중에 떠 있는 세례 요한은 피를 흘리며 살로메를 바라보고 있다. 세례 요한의 얼굴 주변에는 금빛 후광이 둘러져 있다. 화면 왼쪽 살로메의 매력에 빠져 있는 헤롯왕은 의자에 앉아 있다. 이 작품에서 살로메는 비극적 사랑에 빠진 냉혹한 여인의 모습보다는 이국적인 배경 위에 농염한 아름다움과 유혹적인 춤으로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모습으로 표현됐다.

 

 

 

 

 

사실 팜므 파탈은 사회적으로는 여성을 옥죄던 관습과 도덕에서 벗어나 권리와 욕망을 요구하기 시작한 새로운 여성상에 대한 남성중심사회의 반발이자 두려움의 표현이었다. 그저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수동적 존재였던 여성이 그러나 실제로 거부할 수 없는 마력으로 남성을 주도해 치명적 불행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남성의 공포가, 세기말 유럽사회를 달구었던 팜므 파탈 논의에 담겨있다.

 

20세기에 이르러 여성들의 목소리가 수면에 올라오면서 특히 지식인과 예술가 사이에서 여성 혐오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남성우월에 초점을 맞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여성을 혐오하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을 근거로, 여성의 열등성과 그들이 남성에게 미치는 치명적 영향력에 대한 이론이 난무했다.

 

특히 사진과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가 출현해 팜므 파탈 이미지는 문학과 미술보다 더 큰 대중적 영향력을 획득한다. 이에 따라 팜므 파탈은 자연스럽게 그림에서 스크린으로 옮겨간다.

 

마릴린 먼로는 할리우드 팜므 파탈의 전설적인 존재다. 먼로는 "나를 숭배하던 남자들은 표현하는 방식은 달라도 모두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내게 키스하고, 품에 안고 싶어 안달하는 것은 모두 내 탓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먼로는 남성들의 우상이었고, 섹스의 화신이었다. 먼로는 에로틱한 요부, 백치미의 표본으로 각인돼 있다. 많은 영화에서 섹시하지만 머리는 텅 빈 금발미녀로 출연했기 때문이다.

 

 

 

 

 

팜므 파탈의 이미지는 이중적이다.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악이 공존한다. 우선 남성을 단번에 사로잡는 외모, 성적 매력을 갖고 있다. 또 내면에 뜨거운 욕망을 갖고 있다. 그 욕망은 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현모양처, 청순미인과는 정반대로 '나쁜 여자'들이다.

 

이렇게 팜므 파탈이 출현했던 시기와 배경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현대의 대중들이 19세기 말에 창조된 팜므 파탈에 열광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팜므 파탈은 성적 금기를 깨는데 따르는 희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조르주 바타유는 '인간은 금지된 성에 탐닉할 때 죽음보다 강렬한 쾌감을 느낀다'고 주장했다. 굳이 바타유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성욕은 억압할수록 커지며 두려움은 욕망에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역사와 예술에서 입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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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예술이고 예술이 사람 자체이다. 삶의 기록에 감정을 담으면, 그 글자들이 리듬을 타고 음악으로 표현되며, 손에 리듬을 타면 그림으로 표현된 작품이 된다. 나라는 인생을 보여주는 자화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색감이나 느낌의 분위기들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참 매력적이다. 잔잔한 음악과 비 내리는 저녁, 창가에 앉아 인생 이야기를 나눔은 눈물과 웃음이 가득한 예술로 승화되어진다. 프리다 칼로와 에디트 피아프도 그들의 슬픈 인생을 예술을 통해 극복했고, 그 극복의 예술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냈다. 두 여인의 예술은 인생이라는 작품과 같다.

 

 

 

 

 

프리다 칼로  「상처 입은 사슴」 1946년

 

 

 

자화상을 많이 그린 프리다 칼로는 뛰어난 외모와 재능이 많지만 불운의 교통사고로 척추와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평생에 걸쳐 수술대에 올랐고,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절망에 빠진 나날을 그림으로 승화시켰다. 결혼을 통해 한 남자의 아내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길 원했지만 벽화 제작 화가로 유명한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외도와 몇 차례의 유산은 평생을 고독과 외로움으로 점철되게 했다.

 

특히 리베라와 친동생 크리스티나와의 외도는 프리다 칼로에게 배신이라는 깊은 상처를 안겼다. 결국 이혼 후 홀로 여행하며 방황의 삶을 살았지만 결코 리베라를 정신적으로 떠나 보내지 못했다. 프리다에겐 리베라는 연인이자 동지, 그 이상의 존재였으며 어떤 것으로도 대신 할 수 없는 인생의 동반자였기 때문이다.

 

1940년대 말 그녀는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오른쪽다리를 절단하고 몇 차례의 수술의 실패를 거듭하며 휠체어와 침대 신세를 지고 살았지만 그림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죽기 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일기에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적었다. 이는 죽음을 오히려 행복한 외출로 받아들이고 삶의 고통과 외로움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의미라고 감히 짐작해본다.

 

 

 

 

 

 

 

 

 

 

 

 

 

 

 

에디트 피아프는 ‘노래는 사랑이고 사랑은 노래’라고 말했다. 빈민가 차가운 길바닥에서 방랑곡예사 아버지와 길거리에서 노래하는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다.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매음굴을 운영하는 친할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아버지와 유랑생활을 하며 노래 동량으로 지냈다.

 

그녀의 삶은 너무나도 불행했다. 교통사고, 두 번의 결혼과 이혼, 첫 번째 아이의 사망, 남편의 피살,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남자에게 배신 그리고 ‘마지막 연인’ 권투챔피언 마르셀 세르당은 비행기를 타던 중 추락해 사망했다. 자책감에 칩거하고 삭발, 마약과 알코올중독으로 망가진 몸으로 4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비록 불행, 비극, 스캔들, 알코올과 마약 중독에 찌든 삶이었지만 사랑을 갈구했고, 노래를 향한 그녀의 진실성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해준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박인환  《세월이 가면》-  

 

 

   

 

 

 

 

 

 

세월은 약이라 하여 아픔도 치유된다 하였거늘, 그렇지만 한평생 잊지 못해 세월 따라 애틋하기만 더한 것이 지나간 세월 우리를 뜨겁게 달궜던 사랑이다. 프리다 칼로와 에디트 피아프의 삶과 그림이 희미하게 상기시키면 박인환 시인의 ‘세월이 가면’이 더욱 아련하게 느껴진다. 그 가운데서도 이 구절이 가슴에 물밀듯 와 닿는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 (중략)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차가운 바람이 부고 가을비가 고요히 내리는 지금 유리창 밖 어두운 밤에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가 내 서늘한 가슴을 스치 흘러간다.  

 

 

 

.

 

 

만약 어느 날 갑자기

나와 당신의 인생이 갈라진다 해도

만약 당신이 죽어서 먼 곳에 가 버린다 해도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겐 아무 일도 아니에요.

나 또한 당신과 함께 죽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끝없는 푸르름 속에서

두 사람을 위한 영원함을 가지는 거예요.

 

사랑은 오로지 하나. 동서양의 시공(時空)에도 달라질 수 없는 본질. 영원하기가 이를 데 없는 감정의 실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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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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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번째 글 조각 : 序

 

 

인색함과 방탕함으로 인해 저들은 아름다운 세상을 잃고 저렇게 싸우니, 그게 어떤 것인지 꾸밈없이 말해 주마. 아들아, 행운에게 맡겨진 재화 때문에 인류는 그토록 아귀다툼을 하는데, 그 짧은 순간의 기만을 보아라. 달의 하늘 아래 있고 또 예전에도 있었던 그 모든 황금은, 이 피곤한 영혼들 중 누구도 편히 쉬게 하지 못할 것이다.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 편』제7곡, 58쪽, 열린책들)

 

 

 

 

 ♣ 두 번째 글 조각 : 인디언이 곰을 사냥하는 방법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덫을 사용해 곰을 사냥했다고 한다. 커다란 돌덩이에 꿀을 바르고 나뭇가지에 밧줄로 메달아 놓으면 훌륭한 덫이 된다. 꿀을 바른 돌을 발견한 곰은 먹음직스러운 먹이로 생각하고 다가와 발길질을 하면서 돌덩이를 잡으려고 한다.

 

그러면 곰의 발길에 채인 돌덩이가 진자운동을 한다. 밀려갔던 돌덩이가 돌아올 때마다 곰을 때린다. 곰은 화가 나서 점점 더 세게 돌덩이를 때린다. 곰이 돌덩이를 세게 때리면 때릴수록 돌덩이는 더 큰 반동으로 곰을 후려친다. 마침내 곰은 나가떨어진다. 곰은 이 기묘한 폭력의 악순환을 중단시킬 방법을 생각해낼 줄 모른다. 그저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해 더욱 안달할 뿐이다.

 

만일 곰이 돌덩이 때리기를 중단하면 돌덩이도 움직임을 멈출 것이고 돌덩이가 일단 멈추면 곰은 그것이 밧줄에 매달려 있을 뿐 움직이지 않는 물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곰은 이빨로 밧줄을 잘라 돌덩이를 떨어뜨려 꿀을 핥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곰은 힘으로 자신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는 듯 행동할 때가 많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일단 힘으로 제압하려 든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 나오는 일화다.

 

 

 

 ♣ 세 번째 글 조각 : 가이아가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지구가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라면 그 이름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영국의 저명한 대기학자인 제임스 러브록이 같이 산책을 하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윌리엄 골딩에게 물었다.  "가이아(Gaia)가 좋겠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이지."

 

지구가 하나의 생명체라는 가설, 즉 "가이아 이론"은 이렇게 해서 이름 붙여졌다. 1978년 제임스 러브록이 창시한 이 이론에 따르면 지구는 인간처럼 살아 있다고 본다. 외부 조건이 변하더라도 내부조건을 일정하게 유지함으로써 생물체가 살기에 적합하도록 능동적으로 환경을 조정하는 일종의 유기체가 지구라는 주장이다. 물론 기성 학계로부터는 이론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설로 보고 있다.

 

꼭 가이아 이론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연장선상에서 인간을 지구라는 생명체에 질병을 일으키는 병원체로 비유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대기오염 같은 환경파괴는 말할 것도 없고 농사 등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활동을 포함한 일체의 인간 활동이 지구라는 생명체에는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이들은 지진, 이상기후 등 인간에 해를 끼치는 자연재해야말로 병원체를 몰아내기 위한 지구의 자기방어활동이라고 말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신작 『제3인류』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가이아를 소환한다. 그런데 이야기 중간에 등장하는 가이아의 독백은 슬프고 분노에 차 있다. 지구상의 생명체에 대한 우월함에 사로잡힌 인류가 가이아에게 해를 끼치고 있으니까.

 

“인간들이 이렇게 깊이 파고들어 올 때는 언제나 똑같은 이유가 있어. 내 석유를 퍼 올리려는 것이지. 이 물질은 바로... 나의 피, 나에게 없으면 안 되는 검은 피이다. 저들이 그 사실을 알아주면 좋으련만. (중략) 대개의 경우 저들은 매번 똑같은 이유로 그것(석유)을 내게서 훔쳐간다. 목적은 그저 분주하게 움직이는 데 사용하기 위함이다. 대개의 경우 저들의 목표는 저희의 출발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29쪽)

 

정식적으로 소설가가 되기 전부터 과학소설을 탐독했던 베르베르는 ‘명탐정 셜록 홈즈’ 시리즈로 유명한 영국의 추리 작가 코난 도일의 선구적인 SF 소설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도일 SF’의 홈스라고나 할 챌린저 교수가 등장하는 ‘지구가 비명을 질렀을 때’라는 단편이 있다. 이 소설은 지구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상정한다.

 

챌린저 교수가 시추기로 지구의 지각을 뚫고 마침내 지하 13.2㎞의 ‘속살’을 찔러대자 지구가 무시무시한 비명을 지른다는 얘기. 러브록이 주창한 이른바 ‘가이아 이론’과 유사한 설정이다. 그러나 가이아 이론이 발표된 게 1979년이고 도일의 단편은 1928년에 나왔으니까 50년이나 시대를 앞선 작품이다.

 

지구는 인간의 생리현상과 비슷하게 살아 숨쉰다. 체온(대기)과 허파(아마존 유역 등 삼림지대), 피와 수분(바다, 강) 그리고 신체(암석, 흙)를 지니고 숨 쉬며 살아온 생명체다. 인류의 눈 먼 탐욕 때문에 지금 가이아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좀 가혹한 얘기지만 인간이 개발이나 산업화 등의 명분으로 지구에 어떤 일을 해왔는지 돌이켜보면 그럴 법도 하다. 어쨌든 이 논리를 확대하면 화산폭발, 지진, 홍수 등 인간에게는 재앙인 자연재해는 지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유해 세균’을 털어내는 자기 정화작용이라고 할 만하다. 실제로 자연재해는 과거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인간의 잘못에 대한 신의 분노로 믿어졌거니와 가이아 이론은 이를 생명체 지구의 분노로 바꿔놓은 셈이다.

 

하지만 인류는 가이아의 비명을 듣지 못한다. 그녀가 흐르는 ‘자기 정화’와 우리를 향하는 분노가 담긴 눈물의 의미를 모르는 건 당연하다. 그동안 참고 쌓아왔던 가이아의 분노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슈퍼 태풍 ‘하이옌’이 휩쓸고 지나간 필리핀의 상황을 지켜본 전 세계 사람들은 지구가 주는 경고의 무서움을 느꼈을 것이다. 허나 가이아의 비명을 직접 듣기 위해 ‘신성한 소통’을 시도하려는 오로르(『제3인류』에 등장하는 여주인공)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또다시 잊을 것이 분명하다.

 

 

 

 ♣ 네 번째 글 조각 : 이야기에 심어 놓은 '가능성의 나무' 

 

베르베르는 데뷔작『개미』부터 『타나타노트』『뇌』『신』과 같은 두 권 이상 분량을 뽑는 장편뿐만 아니라 단편도 집필했다. 그는 이야기를 빠르게 지어내는 능력을 유지하고 싶어서 매일 저녁 한 시간을 할애하여 단편소설을 썼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럼으로써 오전 내내 ‘두꺼운 소설’을 쓰는 데서 오는 긴장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단편은 단순히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부차적인 장르가 아니다. 『개미』부터 지금까지 발표한 모든 소설과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읽어 본, 나름 ‘베르베르’의 팬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독자라면 단편과 백과사전에서 보여준 무한한 상상력이 장편으로 연장된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이라는 친숙한 소재에 ‘만약...’으로 시작하는 낯선 상상력의 옷을 입히고, 진지한 성찰까지 더해져 장편으로 재등장하는데 독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려준 전작에 보여준 상상력을 환기시켜 준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보자. 베르베르가 선보이는 전개방식대로 과거로 돌아가 기억해보는 것이다. 2002년은 월드컵으로 한반도는 붉은 함성이 가득했지만, 그 때도 베르베르의 인기는 식지 않았으니 이 때 나온 첫 단편 모음집이 『나무』다.

 

여기에 수록된 이야기 중에 ‘가능성의 나무’라는 제목의 단편이 있다. 이제 막 베르베르의 문학적 상상력에 입문한 독자라면 그것의 원천들을 모은 총합이라 할 수 있는 『나무』를 읽어 볼 것을 권한다. 『나무』를 읽었는데 그 이야기가 어떤 내용인지 기억이 안 난다고? 그러면 다시 읽어 보라. 특히『제3인류』1권을 읽기 시작하지 전에 읽으면 흥미로운 독서를 체험할 수 있다.

 

‘만약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면’ ‘만약 어떤 고기를 먹는 사람들 모두가 그 고기 때문에 똑 같은 질병에 감염된다면’ ‘만약 우리 뇌를 컴퓨터에 직접 접속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등등 꿈에서 ‘만약…’으로 시작되는 글귀가 적힌 잎사귀가 달린 나무를 보았다. 나무가 자라 가지와 잎이 퍼져나가면서 ‘만약…’이 이루어지는 미래를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베르베르의 상상력을 듬뿍 먹고 자란 ‘가능성의 나무’이다.

 

그런 가능성의 나무가 있다면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폭력이 방지되고, 다음 세대의 행복이 보장될 것이다. ‘가능성의 나무’는 컴퓨터에 설치된 프로그램의 이름이기도 하다. 상상의 컴퓨터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가정을 입력해서 인간 사회의 나아갈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다는 낙관적인 꿈은 상징하고 있다.

 

 

 

 

 

M. C. 에셔 「뫼비우스의 띠 II (불개미)」 1963년

 

‘과거’와 ‘미래’의 경계가 없는 ‘가능성의 나무’ 위에

호기심 많고 상상력이 넘치는 베르베르의 개미가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다

 

 

‘가능성의 나무’는 절대로 시들어서 죽지 않는다. 영원불멸하다. 인간이 자유롭게 무한한 상상력을 펼쳐나가는 것처럼 이것을 영양분으로 기반을 둔 나무는 계속 자란다. 말 그대로 무한성의 나무이기도 하다. ‘가능성의 나무’가 있는 시간은 고정적이지 않다. 유동적이며 연속적이다. 10년 전 과거 때 생각한 가능성이 우리 눈앞에 현실로 이루어지고, 지금 10년 후의 모습을 예상한 미래의 가능성은 새로운 ‘현실’로 전환된다. 무한한 ‘가능성의 나무’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과거’와 ‘미래’의 구분 경계가 무의미하다. ‘무한대(∞)’를 뜻하는 기호처럼 말이다.

 

 

 

 

 

 

베르베르는 ‘가능성의 나무’를 시간과 장소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타임머신처럼 자신의 이야기에 한 그루씩 심어 놓는다. 두 번째 단편 모음집인 『파라다이스』(1권 ‘내일 여자들은’)에서 잠깐 언급되며 미래를 볼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주인공이 나오는『카산드라의 거울』에도 나온다. 『제3인류』에서는 좀 더 과학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이름으로 독자와 재회한다. 나탈리아 오비츠 대령의 휴대용 컴퓨터에는 ‘미래로 가는 일곱 가지 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상상력을 토대로 인류에게 가능한 진화의 일곱 가지 모습을 담고 있다. 여기서도 작가는 자신의 영감을 준 문학적 상상력의 대선배를 오마주하고, 예전에 발표한 소설의 핵심 코드를 슬그머니 삽입했다.

 

세 번째 길인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로봇의 등장을 경고하는 내용은 공상과학 소설의 한 획을 그은 카렐 차페크의 『로봇』을, 네 번째 길인 ‘우주의 식민지화’에서 거대 우주선 ‘우주 나비 2호’가 언급되는데 인류의 미래를 위해 제작된 동명의 거대 우주 범선이 나오는 『파피용』을 연상시킨다. (프랑스 어 ‘Papillon’은 ‘나비’라는 뜻이다)

 

 

 

 ♣ 모자이크를 마무리 짓는 다섯 번째 글 조각 :

   과연 우리는 다음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제3인류』에 펼쳐지는 인류의 모든 지식이 버무려진 삼라만상은 독자들의 눈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정보가 아니다. 독자에 의해 능동적인 의미가 부여되는 객체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 속에는 동물과 곤충에 대한 과학적 정보는 물론이고, 그것을 통해 느끼는 작가의 철학, 가치관, 인간의 오묘함과 형이상학적 사고 등 다양한 것들이 담겨 있다.

 

『제3인류』 는 소설이 아니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삼라만상의 백과사전’이다. 인간의 판단이란 자신에게는 절대적일 수 있지만 전체적 관점에서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 또한 이와 같은 ‘시간/지식’의 상대성과 절대성이다. 『파라다이스』의 부제대로『제3인류』의 세계는 ‘있을 법한 미래, 있을 법한 과거’ 그리고 ‘있을 법한 지식’이 공존한다. 우리는 이러한 기준을 통해 '가능성의 나무'를 살피고 가꿀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두 권 분량으로 압축된 흥미진진한 상상력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쫓기에는 『제3인류』가 주는 독서의 무게감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가이아는 자신의 보존을 위해서 계속 불어나는 인류 급증 현상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산아 제한 등과 같은 예방적 억제를 하지 않는 이상, 인류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력 또한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다.『인구론』이라는 책에서 인구의 증가를 억제하지 않으면 인류는 치명적인 파멸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 멜서스의 생각(있을 법한 과거)과 유사한다. 비록 오늘날의 세계는 맬서스의 예측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왔다. 그의 생각은 빗나간 예언이었으며 틀린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이유로 과거에 ‘공상의 예언’으로 치부되고, 폐기되었던 생각과 상상력은 수십 년이 지나서야 현실로 등장하는 선례가 많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2013년이 아닌,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미래에 멜서스의 예언이 적중할 수도 있다(있을 법한 미래). 아무리 기술과 과학이 나날이 발전해도 인류의 과욕 때문에 몸살 앓는 지구의 중병이 심해진다면 대규모 식량 부족 사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파라다이스』에는 만일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지구의 50억 인구가 목숨을 잃고 20억이 살아남을 거라는 상상이 쓰여 있다. 이번 슈퍼 태풍의 위력을 보면서 사람들은 아무리 현대 문명의 과학이 발달해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보잘것없는 인간의 겸허함을 배운다. 하지만 그 시간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라는 종은 어느새 자신들의 존재의 덧없음을 망각하기 시작한다.  『제3인류』에 나오는 삼라만상은 크게 보면 인류 스스로 자초한 멸망이 만들어 낸 거대한 파노라마다. 하물며 남북한 간의 싸움부터 시작해서 종교적 차이와 갈등으로 서로 심장에 총을 겨누는 종고 전쟁까지 말할 것도 없다. 모든 싸움의 불씨인 종교와 광신적 국가주의가 없어진다면 이 세상에 파라다이스가 올까? 지구상에서 인간끼리의 전쟁이 종식된다 해도,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자연재해의 무서움은 우리에게 내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과 공포를 안겨준다. 언제 우리의 오늘이 끝장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오늘을 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카산드라의 거울』에서 미래를 보는 카산드라 카첸버그가 재판을 받는 중에 아기 검사의 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지구는 우리의 부모들이 물려준 것이 아니다. 지구는 우리의 아이들이 빌려준 것이다!” 과연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가능성의 나무’를 많이 심는다고 해서 우리의 지구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 수 있을지 예측하고 최소한 다음 세대들에게 우리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깨끗한 지구의 오염을 중단할 수 있을까?

 

베르베르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를 ‘인류 전체의 폐경기’라고 비유한 적이 있었다.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결혼과 가족의 무게는 희박해지고, 믿고 기대며 살아야 할 식량도, 마음도, 정신도 고갈이 나고 있는 형편이다. 앞으로 우리는 가이아의 복수를 극복해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 슈퍼 태풍보다 강도가 센 자연의 복수를 만날 수 있다. 과학 기술에 점점 의존하는 인류는 오만해져만 간다.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달콤한 꿀에 집착하여 탐욕에 눈이 먼 곰처럼 폭력을 믿는다. 오만하고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이여, 가이아의 복수가 두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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