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vard Munch 「despair」 1892

 

 

 

철길 너머에서 기차가 온다

 

간이역에서 노을이 탄다

 

그 다음 노을은 기차를 놓친다

 

밀림 끝에서 물소 떼가 풀을 뜯는다

 

강 건너편의 노을이 한 번 더

 

기차를 세운다 먼 우렛소리를 세운다

 

머뭇거리는 기차의 유전자를 지나

 

철없는 부들이 키를 세운다

 

아르니카 꽃이 한 동안 피어 있다

 

 

- 유병근 ‘뭉크에게 보내는 문자메시지’-

 

 

 

 

 

 

 

Giorgio de Chirico 「The Melancholy Departure」 1914

 

 

 

뭉크는 일그러진 존재의 형상과 짙은 색조를 통해 인간 내면의 불안과 공포를 보여준 화가다. 그런 뭉크에게 문자 메시지로 전송하는 시인의 풍경 또한 불안한 기운이 감돈다. 흡사 조르지오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회화를 연상시킨다. 생의 간이역엔 어둠이 내리고 기차는 놓치기 십상이다. '너머' '끝' '건너편' '먼'이란 아득하고 두려운 공간에서 큰 소리 치거나 소외된 채 서로 어긋나는 존재들. 그들이 보내오는 메시지를 받아 판독해내는 것, 그것이 세상과 삶의 내면을 드러내는 그림 혹은 시다. 그나저나 오늘이 뭉크 탄생 150주년인데, 생일을 축하할 겸 이 시를 하늘에 있는 뭉크에게 보내고 싶은데 과연 마음에 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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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의 과학 SE (2disc) - 일반케이스
미셸 공드리 감독,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외 출연 / 와이드미디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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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Scene #1 한 남자의 판타지 보고서

 

 

 

 

 

펠트 천으로 만들어진 하얀 배 속에 나무들이 자라고 역시 펠트 천으로 만들어진 말을 탄 두 남녀가 그 배로 뛰어든다. 남자의 얼굴엔 종이로 만들어진 커다란 당나귀 귀가 붙어 있고, 푸른색과 하얀색 셀로판지의 물결이 뱃전에 부딪힌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만들었을 법한 어설프지만 상상력 넘치는 소품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골판지, 색종이, 가위, 풀만 있어도 아이들은 우주를 창조하지 않던가.

 

아이들의 세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덜 자란 어른 이야기를 미셸 공드리 감독이 영화《수면의 과학》에 담았다. 침대 광고의 카피처럼 느껴지는 영화 제목은 여섯 살 때부터 꿈과 현실 세계를 구분하지 못했던 주인공 스테판이 써 내려가는 판타지에 대한 보고서라고 하면 적당할 듯싶다.

 

미셸 공드리는 제목도 독특한 《수면의 과학》에서 사랑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설렘과 떨림이 시작되고 미세한 통증이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때. 여전히 꿈과 현실은 경계를 잃지만 사랑의 면면은 그럴수록 또렷해진다.

 

 

 

Scene #2 꿈과 현실이 뒤섞인 멜로드라마

 

 

 

 

여섯 살 때부터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던 스페인 청년 스테판은 아버지가 암으로 사망한 뒤 어머니를 찾아 혈혈단신 파리로 온다. 어머니의 배려로 직장도 얻었지만 그는 발명가이자 화가인 그의 취향과 전혀 상관없는 달력 회사에서 기계적인 노동에 종사한다. 어머니와 함께 살던 옛집에 몸을 의탁한 그는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소녀 스테파니를 만난다.

 

처음에는 그녀의 친구 조이에게 마음이 끌렸지만, 섬세하고 여린 스테파니의 호의에 스테판 역시 조금씩 마음을 열고,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그의 머릿속은 그녀로 인해 한층 혼란스러워진다. 혼란스럽기로 말하자면 스테파니도 마찬가지이다. 스테판은 정신분열증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엉뚱한 행동과 말을 일삼아 그녀를 혼란에 빠트린다. 스테판과 스테파니의 로맨스는 이렇듯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친다.

 

 

 

 

 

스테판이 파리로 와서 직업을 구하고 스테파니를 처음 만나는 순간까지 드라마는 비교적 정상적으로 진행되지만, 그 이후 이야기는 이렇다 할 전개를 보여주지도, 절정의 순간을 통해 이야기적 쾌감을 주지도 않는다. 공드리는 스테판과 스테파니가 머무는 현실 세계, 스테판의 뇌 속 세계, 스테판의 꿈이라는 세 개의 시공간을 왔다 갔다 하며 스테판의 의식 구조를 파헤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꿈 속 세계에서의 자기 정체성에 더 큰 편안함을 느끼는 주인공이 멀쩡한 의식세계로 진입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실수가 반복된다. 불안에 사로잡힌 스테판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스테파니에게서 안락을 느낀다. 스테파니는 그 몽상가를 이해해주는 지구상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둘의 사랑은 마치 풀로 붙여 만든 종이인형처럼 소박하지만 동시에 상처받기도 쉽다.

 

그는 여자에게 고백 후 거절이 무서워 현실이 아닌 꿈에서 시뮬레이션을 하고, 현실에서 절망의 골을 느끼는 소심함을 지녔지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은 한결같은 순진무구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영화에서 감독은 스테판을 통해 꿈과 현실의 혼재를 멜로드라마라는 영화적 형식을 가미하여 그의 뛰어난 감각으로 섞어낸다. 하지만, 그러한 요소들의 결합에 의해 나타나는 교집합적인 성격은 장자의 '호접몽'에서 볼 수 있는 허무함보다는 사랑과 상상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도파민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사실 인간이 태어나 성인으로 커간다는 것은 각종 규율 속에서 사회화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선악의 개념 없이 세상을 바라보던 눈에 몇 겹의 필터를 끼우게 됨을 뜻한다. 교육, 종교, 노동 등의 시스템은 사회화를 볼모로 권력을 차지하고 그 조직 논리에 따르지 못하는 자들을 열등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주인공 스테판은 광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때 묻지 않은 상상력과 창의성으로 충만한 그에게 달력 만드는 회사에서 식자를 붙이는 단순 노동을 반복하는 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다. 아름다운 그림 대신 지구촌에 일어난 각종 재앙을 소재로 달력의 그림을 구성한 스테판의 상상력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게끔 명명된 DNA를 가진 그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광인은 과거 한때 천재성을 가진 사람으로 취급됐지만, 중세 이후의 세상에선 그저 집단 감금의 대상일 뿐으로 운명이 조정됐다고 미셸 푸코도 지적하지 않았던가.

 

 

 

Scene #3 소통의 통로, 사랑

 

 

 

 

영화에서 두 주인공은 일종의 장애를 지닌 인물들이며 그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공간' 혹은 '오브제'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공간이나 오브제조차 불완전하다.

 

스테판의 경우 꿈과 현실을 혼재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잡다한 생각, 그날 보고 들었던 것, 온갖 감정, 과거의 추억과 뒤얽힌 오늘의 추억’이란 요소를 집어넣어 ‘꿈 스프’를 요리할 수 있는 공간 스테판 TV를 가지고 있다. 그 공간에서 스테판은 자기의 생각을 실현 시킬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도 할 수 있으며, 어떠한 제약을 받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공간은 단지 스테판에게만 유용하다는 것이 비극이며, 현실에서는 이러한 스테판이 발버둥치는 자기 세계 확장 노력이 무시되고, 제재 당한다는 것이다.

 

스테파니의 경우 어떤 일을 시작한 후 완성을 보지 못하는 장애를 지녔다. 그녀는 자신의 집 방 한 구석에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 한 욕구를 대리충족 시켜줄 수 있는 작은 인형들과 미니어처들을 만들어놓고 진열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그녀는 자신을 대상화하려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완성을 보지 못 하는 그녀는 계속 새로운 것을 널어놓는 행위를 한다. 마치 어린 아이가 호기심에 이것저것 관심을 보이는 듯한 모습이다. 완성되지 않은 소유물에 대한 숫자 늘이기는 스테파니에게 또 다른 욕구 불만의 요소가 된다.

 

이 둘의 이러한 심리적 부재나 결핍의 극복요소로 공드리가 제시하는 것은 ‘가치를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소통의 통로로써 ‘사랑’이다.

 

이건 어떤 이에게 비춰지기엔 흔한 사랑얘기일 수 있다. 하지만 감독은 이 흔하게 비춰질 수 있는 사랑이야기를 소통과 공유가 없는 사랑의 무가치성에 대해 영화 틈틈이 이야기하면서 때로는 스테판이 때로는 스테파니가 되어 그가 창조해내는 상상력의 세계와 더불어 맛깔나게 요리해낸다.

 

 

 

Scene #4 ‘꿈’과 ‘현실’로 만들어 낸 사랑철학서

 

《수면의 과학》은 ‘꿈’과 ‘현실’이라는 사상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사랑철학서’이다. 철학은 인간의 존재와 실재에 대해 고민하게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이성과 감성이라는 도구를 인간은 사용해왔다. 하지만 공드리에게 있어서 그 도구는 ‘꿈’ 이라는 것이며, 그의 체계 잡힌 논리는 이미 필름에 튼튼하게 잡혀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누군가는 공드리의《이터널 선샤인》에 비해 탄탄하지 못한 구성의 허점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같은 주방장의 손에서 나온 다른 맛의 음식일 뿐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굳이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지 않더라도 두 시간 남짓 동화 속 세상에 빠져 있다 나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스테판은 현 사회의 잣대로 가른다면 덜 떨어진 인간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통해 기억에서 삭제되어 무의식에서만 꿈틀대던 시원에 대한 그리움이 울컥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우리의 때 묻지 않은, 그러면서도 날렵했던 꿈의 모서리들이 깎여 나간 자리가 새삼 휑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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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1  Bowdlerism, Comstockery

 

 

 

 

 

 

 

1818년 영국 에든버러의 내과의사이면서 복음주의자인 토머스 바우들러는 자신의 '가족에게 큰소리로 읽어줄 수 없는' 모든 구절을 삭제한 『가족 셰익스피어』라는 제목의 개정판을 출판했다. 셰익스피어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해 당시의 '무절제한 기호'에 야합했다는 것이 그렇게 한 이유였다. 『햄릿』에서 햄릿이 오필리어에게 "아가씨, 당신 허벅지에 누워도 되겠습니까?"라고 묻는 장면을 햄릿이 오필리어의 발치에 눕는 걸로 대체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바우들러는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비종교적, 부도덕한 인상을 주는 구절을 삭제한 개정판을 낼 정도로 자신의 도덕적 기준에 맞춰 불경스러운 표현을 고치는 데 앞장 섰다. ‘책의 내용 중 상스러운 부분을 무단 삭제 또는 정정’을 뜻하는 ‘바우들러리즘’(Bowdlerism)이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오늘날에는 정치적 목적으로 상스러운 부분만이 아니라 그 어떤 부분이든 자신의 뜻에 맞게 삭제하거나 수정하는 것에도 쓰인다.

 

 

 

 

 

 

 

 

 

 

 

 

 

 

 

 

바우들러가 활동했던 영국 반대편 나라인 미국에서도 부도덕한 내용이나 장면을 검열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앤서니 컴스톡이다. 1870년대 반(反)음란 활동에 앞장섰고, 뉴욕퇴폐추방협회 회원들 중 가장 유명했던  뉴욕의 유곽들을 공격할 정도로 컴스톡의 활약은 악명 높았다. 그의 활약 덕분에 1873년 연방 음란 규제법 또는 속칭 ‘컴스톡 법’(Comstock law)이 통과되었다. 그 법의 통과 이후 컴스톡은 체신부 하청 업체 사장으로 변신하여 음란 우편물을 적발하는 일을 맡았다. 그 일을 하는 보상은 벌금에서 일정액을 받는 방식이었으므로, 적발을 많이 할수록 많은 돈을 벌게끔 되어 있었다. 물론 그는 종교적 열정을 갖고 열심히 달려들어 많은 적발을 했다.

 

컴스톡은 사회의 도덕성을 위협할 수 있는 책들을 금지하는 운동을 전개했는데 놀랍게도 그가 금지 조치를 내렸던 작품이나 공연은 끝까지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비도덕적’인 내용만 보이는 즉시, 음란물로 규정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워런 부인의 직업』에서 담배를 피우고, 위스키를 마시는 여주인공의 모습과 그녀의 어머니가 매춘업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출판과 공연 금지를 주장했다. 그가 생각하는 ‘비도덕적인 대상’은 섹스, 마약, 술 그리고 여성해방운동이었다.

 

그는 자신의 활동이 신에게 부여받은 임무라고 생각했다. 하느님 덕분에 컴스톡은 악명 높은 활동을 한 공로(?)로 그의 이름은 컴스톡 법뿐만 아니라 지나친 검열 활동을 비아냥거리는 단어로도 만들어지기도 했다.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검열"이라는 뜻으로 ‘컴스토커리’(Comstockery)라는 단어가 영어사전에 등록되었다.

 

 

 

 

Scene #2  예술이 ‘외설’로 바꾸는 건 간단하다

 

 

 

 

 

 

 

 

 

 

 

 

 

 

 

 

 

 

 

문학작품에서 성(性) 표현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예술적 자유와 사회적 수용을 둘러싼 끊이지 않는 논쟁은 수없이 되풀이 돼왔다. 한때 외설 시비에 휘말렸던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나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남회귀선』 등은 그 후 외설이 아닌 고전의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한국문학 외설 시비 1호로 꼽히는 염재만의 소설 『반노』역시 긴 법정 시비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아낸 경우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문화의 변천에 따라,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예술과 외설의 기준은 판이하게 달라지기 마련이다. 독자에게 성적 충동을 유발하는 포르노그래피와 성(性)을 아름답게 그린 에로티시즘, 이 양자의 차이가 한 작품을 예술과 외설로 구분 짓는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두 성질을 단정적으로 구분하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어느 특정 개인의 사고나 철학이 절대적 잣대가 될 수 없다고 보기에 더욱 그러하다.

 

 

 

 

 

 

 

 

 

 

마르키 드 사드의『소돔 120일』판매금지 처분 논란은 예술 작품에 대해 국가 기관이 검열하는 행위가 정당한가에 대한 문제를 다시금 환기시키고 있다. 예술과 외설을 나누는 ‘음란성’은 그 자체로 모호할 뿐만 아니라 사회 질서의 통제 수단으로 치환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간행물윤리위원회(간윤)가 이 책을 유해간행물로 지정하고 배포중지 및 수거 조처를 내린 이유는 ‘음란’하기 때문이다. 간윤은 “근친상간과 가학·피학적 성행위 등 표현수위가 지나치고 반인륜적 내용이 상당히 전개됐다는 판단에서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러나 출판사측의 반박 입장 표명 이후 재심의 끝에 겨우 청소년 유해매체물(책 표지에 ‘19세 미만 구독불가’ 문구를 표시함)로 유통될 수 있었다.

 

 

 

 

예술 작품을 음란성의 잣대로 바라볼 때 빠질 수 있는 함정 중 하나가 ‘상대성’이다. 일례가 최초의 누드화인 고야의 ‘벌거벗은 마야’에 대한 평가다. 명화로 꼽히지만 한때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음란물’로 인식됐다. 당시 이 그림을 성냥갑에 넣어 판매했던 제조사는 음화 제조판매 혐의로 벌금 5만 원을 물어야 했다. 사드의 소설 역시 일본에서는 1948년 같은 이유로 재판에 부쳐졌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이 선정한 인문사상 추천 100선에 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문제는 국가기관이 이 모호한 잣대로 예술 작품을 검열하는 시도가 사회 통제의 기제라는 점이다. 특히 사회 전반의 보수화 경향이 강해질 때 검열은 심해진다. 우리 사회가 성 문제에 대해 정상 범주에서 벗어났다고 판단되면 굉장히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Scene #3  바우들러리즘, 컴스토커리 그 다음은 간유니즘

 

예술 작품과 외설물은 어떻게든 구분되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순수 예술을 가장한 외설물들이 너무도 범람하고 있다. 이를테면 독자의 성적 호기심이나 본능적 충동만을 자극하는 질 낮은 문학 상품 중에는 성을 팔고 사는 매춘 작품(?) 같은 것들도 섞여 있다. 독자 가운데는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도 얼마든지 있다. 이들에게 여과 없이 파고들어가 이들의 정서를 마구 해치는 무책임한 작가들에게는 일단의 책임을 물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하지만 문학작품을 천편일률적인 사법적 잣대로만 재단하는 난센스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융통성 없는 사회적 통념과 편견에 의해 유럽에서는 스페인 국립 만화대상 등 굴지의 만화 관련 시상식에 상을 받은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 청소년 유해 판정 결정 논란을 겪어야 했다. 출판사의 항의로 다시 한 달 만에 재심의 결과 청소년유해간행물 결정이 취소가 되었다.

 

만화 속에 폭력적인 장면은 차치하더라도, 선정적인 장면이 조금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단지 작품의 초반부, 그리고 중후반부 즈음에 몇 컷 정도가 나올 뿐이다. 간윤은 이 장면들에 ‘음란성’이 강하다는 이유로 청소년 유해간행물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일 뿐, 얼마 안 나오는 장면을 문제 삼은 이유로 예술성 높은 만화작품이 한순간에 '음란물'외 될 뻔했다.

 

문학작품, 특히 소설 작품에서의 성적 묘사는 생명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행위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라 보기 때문이다. 예술이나 문학 행위의 궁극적 목적이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살다가, 어디로 가는가를 알려는 작업이라면 사랑이 충만한 성을 묘사했다면 예술이고, 사랑이 없는 성애를 통해 자극만을 충동질한다면 외설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음란물을 규정하는 간윤의 태도를 곱게만 볼 수 없는 것은 이처럼 야한 장면 몇 개로 유해성을 판단하는 자의적 기준 때문이다. 이야기 전체 맥락을 보지 않고, 부분만 문제 삼아 판단한다면 과연 공정하게 규정했다고 볼 수 있을까? ‘도덕’의 기준을 내세워 문제 되는 부분을 근거로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간윤의 사례는 이번만은 처음이 아니다. ‘간유니즘(Ganyunism, 간윤+ism)’이라는 이름으로 검열 사례를 뜻하는 단어가 사전에 등록되어도 어색하지 않다.

 

우리가 디지털 사회에 살고 있는 이상 국가 검열이 예전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가에서 유통을 금지시킨다고 해도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검열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도 바우들러와 컴스톡의 영혼이 우리 사회에 배회하고 있다. 정상적으로 읽을 수 있는 책 한 권에 ‘음란물, 판매금지’ 딱지를 붙이는 순간, 억울하기 짝이 없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작년에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해서 인기를 얻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롤리타』는 세상, 아니 우리나라에서는 쓰레기통으로 넣어야 하며 섹스 장면이 몇 개 나온 만화 『설국열차』에도 ‘19세 미만 구독 불가’ 판정을 내려야 한다.

 

간윤이여, 제발 제대로 된 검열을 하고 싶다면 책을 읽어라. 국민들 책 안 읽는다는 이유로 독서를 장려하는 문광부 장단에 맞추는 역할은 어울리지 않는다. 간윤의 역할은 독자가 읽기에 유익한 책을 선별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중하게 읽어보고 결정하란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읽고 천천히 유해물이 맞는지, 아닌지 결정해도 나쁘지 않다. 제발 내년에는 책 안 읽은 무식한 티 내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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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13-12-1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번 공감합니다.^^.

cyrus 2013-12-12 12:3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논거가 빈약한데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볼 수 있을 생각인데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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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293] 위대한 개츠비

 

 

 

 

 

 Scene #1 ‘개츠비’라는 이름의 별을 만난 적이 있나요?

 

겨울밤이 깊어간다. 피츠제럴드를 읽는다. 아니 개츠비를 만난다. 그는 초록색 빛으로 반짝이는 별이 되어 밤하늘에 떠 있다.

한때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먼 우주의 한 공간에서 빛이 되어 있을 개츠비는 오늘도 희망을 간직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어디선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다. 그는 누군가의 간절한 열망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어느 날 기적처럼 소원을 이루어주는 별이 되었을 것이다.

짙푸른 어스름이 깔리는 고즈넉한 저녁 무렵에 아무런 이유 없이 파란만장했던 개츠비를 만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얀 설탕가루를 뿌려 놓은듯한 별이 묻어 있는 밤하늘을 보노라면 어김없이 유독 초록색 빛을 발하는 그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내 영혼 깊숙한 곳에 매복해 있다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불쑥 튀어나온다. 내 손목을 잡고 뉴욕 웨스트에그에 위치한 자신의 호화로운 저택에 있는 푸른 정원으로 나를 데려가곤 한다. “내가 개츠비야.” 백만장자라고 믿기 어려운 젊은 남자가 친근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Scene #2 사랑밖에 모르는 남자

 

『위대한 개츠비』는 한 남자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이다. 톰은 데이지를 사랑한다. 그리고 톰은 머틀을 사랑한다. 머틀은 톰을 사랑한다. 윌슨은 머틀을 사랑한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한다. 작중 화자인 닉은 베이커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야말로 사랑 투성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 개츠비와 같이 한 사람만을 일편단심 바라보는,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꿈꾸는 그런 낭만적인 사랑도 존재한다. 저 안개 너머로 비치는 녹색 불을 갈망하면서도 섣불리 다가갈 수 없어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맹목적인 사랑이다. 그녀를 얻기 위한 일념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한다. 신분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동등한 위치에 서서 그녀를 바라볼 수 있도록.

 

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데이지는 순수함을 잃고 향락과 허영에 빠진 여자가 되어버린다. 데이지 그 자체만을 바라보는 개츠비와 달리, 데이지는 그의 수많은 영국산 셔츠를 사랑하는 여자로 변했다. 개츠비도 깨닫는다. 돈으로 충만한 그녀의 목소리를. 그럼에도 개츠비는 데이지를 열망한다. 설사 변해버렸다고 해도 그녀는 그의 삶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사랑이 순수함을 잃는 순간 사람은 병들어 간다. 데이지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톰처럼, 윌슨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머틀처럼 말이다. 톰은 데이지의 허영을 비웃고, 머틀은 윌슨의 무능력함을 비웃는다. 톰과 머틀은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그 또한 병든 사랑이다. 머틀은 톰의 거대한 부를 사랑하며, 톰은 그러한 부를 맘껏 뽐낼 수 있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뿐이다.

 

병든 사랑의 끝은 언제나 아프다. 사랑의 상실은 광기로 번져 결국 살인에 이르게 되고 만다. 개츠비의 사랑을 질투한 톰은 개츠비의 죽음을 재촉하는데 일조했다. 사랑은 사람을 이기주의자로 만든다. 톰은 데이지를 뺏기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향락에 빠져있는 뉴욕, 그러나 그 불빛이 모두 꺼지고 남은 것은 허무뿐이었다.

 

 

 

 Scene #3 개츠비는 위대하다

 

개츠비의 삶의 동력은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곧 '사랑'이다. 인생이란 어찌 보면 가혹함으로 가득한 일장춘몽에 불과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을 대하는 태도는 뻔해진다. 좌절하든지 혹은 비관하든지. 혹은 소설에 등장하는 톰이나 데이지처럼 그냥 주어진 대로, 되는 대로 살 수도 있다.

 

개츠비의 인생 자체는 좌절하든지 비관하든지 혹은 그냥 방관하더라도 될 정도로 힘들고 가혹했다. 그럼에도 그는 삶을 구성하고 있는 조건을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을 위해 이용하고 변화시키며 감내한다. 그리고 그 ‘희망’이 되는 게 더군다나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희망’과 ‘사랑’을 인생의 목표로 삼을 줄 아는 개츠비는 위대하다.

 

개츠비가 상상하고 꿈꾼 세상에 그녀가 없다면 그것은 미완성에 그치고 만다. 즉흥적으로 제 감정을 좇을 뿐인 부박한 여자 데이지가 '돈으로 충만한 목소리'를 가졌다는 걸 알면서도 개츠비는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 오리가 처음 본 대상을 어미라고 생각하듯 일방적인 집착. 누군가는 그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희망’이나 ‘사랑’이란 어찌 보면 추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추상적’이라는 평가로 끝내버릴 수 없는 말들이다. 겉으로 보면 톰과 데이지가 누리는 물질풍요의 삶이나 개츠비가 벌이는 호화파티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시종일관 톰과 데이지의 생활은 그 물질이란 것에 고착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물질적이기는 하나 진정한 삶은 아닌 것들’이 시대의 대세를 형성하고, 그걸 삶의 목표로 여기게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별다른 문제의식 없는 사람들은 육체를 물질로 채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진정한 삶’으로 채워져야 할 영혼과 마음을 가진 존재다. 육체를 채우는 물질을 넘어, 사랑과 희망에 목말라하며 자신의 삶을 사랑과 희망으로 채우고자 했던 개츠비는 위대하다. 그나마도 데이지를 비롯한 더없이 속물 그 자체로만 살아갔던 당시의 사람들에 비해서는 조금 낫다. 그의 일생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잡을 수 없는 모래알갱이처럼 허망하게 살다가 스러져 갈 뿐이었다.

 

누구의 인생인들 모두 끝난 후에 허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살아있는 동안에 자신의 지향점을 향해 전력투구하고 이후 그 모든 결과에 대해서도 자신이 책임지고 감내하고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에 가까운 삶의 행위다. 그래서 개츠비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받을 만한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Scene #4 당신의 초록 불빛은 어디서 반짝이고 있나요?

 

대저택의 불은 꺼지고, 한 남자의 파란만장한 사랑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나처럼 개츠비를 찾을 것이고, 어디선가 개츠비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풀이 자라고, 파도가 출렁이고, 높이 뜬 달이 바다를 비춘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흔히들 희망에 가득 차면 행복하고, 낙담하면 불행할 거로 생각한다. 실은 그렇지 않다. 꿈을 꾸는 사람은 몰락을 두려워하고, 절망한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마음을 추스를 수 있다. 후자가 절망 속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면 위대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투철한 의지로 희망을 향해 나아간다.

 

개츠비는 자신의 신념을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줄 허망함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갔다. 그의 영혼은 생전에 두 팔을 뻗어 하염없이 바라보던 부두 맨 끝에 조그맣게 반짝이는 초록 불빛이 되었다.

 

이것은 허무로 가득한 마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 청춘에 향하는 무언의 외침이기도 하다. 허무를 딛고 일어서 이상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야 한다고.

 

나는 삶 전체를 관통하고 견인해가는 각자의 ‘초록 불빛’이 있다고 믿는다. 손에 잡히지 않지만, 저 멀리 자신만을 위해 반짝이고 있는 불빛은 삶의 울퉁불퉁함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다시 한 번 달음질하게 하는 원동력이 돼준다. 안개 너머 비치는 희미한 녹색 불빛을 의지한 채 그 하나만을 바라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 수 있었던 믿음. 누구나 그 위대함을 가슴에 품을 자격이 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스치는 오늘 밤에도 ‘개츠비’라는 이름의 별이 빛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건넨다.

 

“당신의 초록 불빛은 어디서 반짝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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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의 정복자』 에드워드 윌슨, 사이언스북스

 

 

2013년이 마무리되어 가는 연말이 다가오자, 눈에 띄는 출판계의 화두라면 단언컨대 에드워드 윌슨의 신작 『지구의 정복자』라고 말하고 싶다.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이자 이제는 진화생물학계의 원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의 신작 출간은 ‘왕의 귀환’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진화생문학 분야에서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의 생존기계로 보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이 주류로 굳어졌다. 그러나 윌슨은 이기적 유전자 이론에 반기를 든다. 이 이론이 치명적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자 리처드 도킨스는 윌슨의 책을 집어 던져야 할 정도 수준으로 악평으로 맞설 정도로 과학자들 사이에서 또 한 번 논쟁의 불꽃이 피기 시작했다.

 

윌슨은 책에서 인간의 진화가 ‘혈연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 본능의 결과’라는 학계 정설을 넘어,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 집단 선택’이 인간이 지구를 정복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동안 과학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이기적 유전자’이론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이 책이 선정도서로 선정된다면 오랜만에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같이 읽어볼 생각이다.

 

 

 

 

 

 

 

 

 

 

 

 

 

 

 

 

 

 

* 『명작순례』 유홍준, 눌와

 

지금까지 3번 횟수로 알라딘 신간평가단을 활동하면서 예술 분야 책이 선정되기가 드문 편이었다. 그나마 기억하는 책이 지난 기수 때 선정된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3권이다. 확실한 건 예술 분야 책이 선정된 적이 많지가 않았다. 인문, 과학 분야와 통합되어 있어서 매일 수없이 출간되는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인문학, 사회과학에 비해 선정되는 확률이 희박하다. 심지어 그 다음으로 선정 확률이 적은 과학 분야와 비교해도 밀린다. 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가끔 추천도서 페이지에 구색 맞추기 용으로 한 권 포함시키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신간평가단 활동 기간에 개인적인 바람으로 예술 분야 도서가 선정된다면 이번에는 한국미술 분야 관련 도서가 되었으면 한다. 마침 출간된 책이 유홍준 교수의 『명작순례』다. 저자에 대한 이력과 명성은 이미 널리 알려졌으니 상세한 책 소개는 생략하겠다. 조선시대 명작 49점을 중심으로 작품 100여 점을 소개하고 있다는데 한국미술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절대로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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