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퍼센트 우주 - 우주의 96퍼센트를 차지하는 암흑물질ㆍ암흑에너지를 말하다
리처드 파넥 지음, 김혜원 옮김 / 시공사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우주의 탄생

 

인류는 오래전부터 '우주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그 끝은 어디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어왔다. 수십 년 또는 수억 년 전의 과거 우주의 모습을 현재의 별빛을 통해 감상하며 그 경이로운 모습에 전율을 느끼기도 하고, 우주의 진화에 대해 궁금해 하기도 한다.

또한 우주에 숨어있는 정보를 분석하여 우주탄생의 단서를 찾기도 하고, 미래 우주의 운명을 예측하기도 한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우리는 우주의 많은 부분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우주는 여전히 결정적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인류가 그 베일을 벗겨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주는 시간과 공간조차 없는 절대적인 무에서 생겨났으며 지금 무한히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 현대물리학계의 정설이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은 시간을 거꾸로 돌려 이론적으로 우주를 수축시켜나가면 지금의 우주가 태초에 모래알보다 작은 한 점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37억 년 전, 태초의 우주에는 시간도 공간도 물질도 없었다. 단지 초고온 초고밀도의 특이점이 있었을 뿐이며, 우주의 모든 물질과 힘은 원자알갱이보다 작은 이 특이점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특이점이 대폭발(Big bang)하면서 원시우주가 탄생했다.

 

이처럼 빅뱅은 절대적인 무에서 우주의 시공간을 동시에 탄생시켰다. 빅뱅 후 1초가 되었을 때 우주는 100가 넘을 정도로 뜨거웠고, 3분이 지나면서 온도가 10이하로 낮아지면서 수소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38만 년이 되었을 때, 온도가 3000정도로 낮아지면서 처음으로 전자가 원자 내부에 붙잡혀서 중성원자가 생기고, 에너지가 빛으로 방출되면서 그 빛이 암흑 속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빅뱅 이후 점점 낮아진 우주의 평균온도는 지금 영하 270(3K: -270)로 냉각되어 있다.

 

 

 

 

 ♣ 우리가 보고 있는 우주는 고작 4퍼센트

 

우주에 있는 물질은 시공간을 휘게 하여 중력을 만든다. 이 중력은 또한 물질을 끌어당겨 별과 은하를 만들면서 주위의 물질을 삼키기도 한다. 만약 우주에 물질이 충분하다면 중력 작용에 의해 우주가 다시 수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극초단파 탐사선(WMAP)이 관측한 최근자료에 의하면,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포함한 행성과 별들은 우주를 이루고 있는 총 물질과 에너지의 4퍼센트에 불과하다. 그중에서도 수소와 헬륨 등 가벼운 원소들이 대부분이고, 질소, 산소 등의 무거운 원소는 0.03퍼센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우주가 이처럼 텅 비어있다면 지금의 우주가 유지될 수 없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럼 나머지 96퍼센트는 무엇일까. 74%는 암흑 에너지고, 22%는 암흑 물질이다. 나머지 96퍼센트에 해당하는 물질에 암흑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도 그 물질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의 정체를 모르면서도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관측 결과에 따르면 은하는 우주가 탄생한지 10억 년 이내에 태어났다고 보고 있다. 그렇지만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질량이 부족하기에 중력으로 신속하게 모여서 커다란 가스 구름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원소로만 우주가 이루어졌다면 10억 년 이내에 은하가 탄생할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은하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은하를 조종하는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런 물질과 에너지가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바로 질량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전하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전자파가 나오지 않아서 우리가 알 수 없을 뿐이다. 쉽게 말해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는 몸을 숨긴 채 이 커다란 우주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2007네이처지에 실린 한 편의 논문은 이런 가설을 입증했다. 우주는 빠르게 팽창하고 있으며, 이렇게 우주가 가속 팽창하는 것은 물질들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에너지보다 큰 에너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96퍼센트 우주의 영향

 

이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의 성분을 규명하기 위해 많은 과학자들이 오늘날 연구에 몰두하고 있지만 여전히 정체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미래의 우주는 보이지 않는 이 두 힘, 수축하려는 중력과 팽창하려는 암흑에너지의 치열한 싸움에 의해 그 운명이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중력이 이기면 우주가 수축하여 다시 붕괴할 것이고, 암흑에너지가 이기면 우주는 한없이 팽창하여 해체될 것이다.

우리가 빛으로 관찰할 수 있는 우주물질의 양은 너무 적어 현재 가속되고 있는 우주팽창을 멈출만한 충분한 중력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만약 중력과 암흑에너지의 싸움에서 암흑에너지가 승리하면 우주팽창은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천억 년 후에는 은하와 은하 사이 또는 별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져 빛의 이동마저도 쉽지 않을 것이므로 암흑만이 우주공간을 지배하는 삭막한 우주가 될 것이다.

은하들이 하염없이 멀어져 가면서 우주의 모든 물질이 해체되고,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찬란한 별들도 아득히 저 멀리 사라져 버리기에, 점차적으로 빛마저 볼 수 없는 황량한 암흑우주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이다. 신화와 전설이 죽고, 모든 것이 잠드는 그런 암울한 시대가 도래 할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있기에, 어쩌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밤하늘이 가장 아름다운 우주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알퐁스 도데의 <별>에서 목동과 소녀가 함께 바라본 하늘과 별은 낭만적이었고 또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하늘이 과학자들에게는 의문으로 가득 차있고, 그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별>의 마지막에 나오는 목동의 독백이 기억이 난다. “나는 수많은 별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별 하나가 길을 잃고 헤매다 지쳐 내 어깨 위에서 잠들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을 비춰주는 밤하늘의 별이 암흑 물질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을 알퐁스 도데는 몰랐다.

 

 

 

 

* 이 책은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과학자들의 여정을 한 편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 책 한 권만으로 암흑 물질과 우주에 관한 최신 연구 내용을 이해하고 파악하기에는 과학 기초 개념을 잘 모르는 독자에게는 무척 어렵다. 기초 배경지식 없이 책을 읽다가는 과학자들의 뜨거운 경쟁과 분투를 그려 낸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몰입하기는커녕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심지어 과학적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그림이나 사진, 도표가 단 한 장도 없다. '암흑 물질'과 관련된 우주에 관한 기초 지식을 습득하고 난 후에 이 책을 읽기를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기문과의 대화 - 세계 정상의 조직에서 코리안 스타일로 일한다는 것에 대하여 아시아의 거인들 2
톰 플레이트 지음, 이은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사계절의 사나이

 

 

리더란 무엇인가? 무거운 책임과 의무로 점철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구성원들의 밝은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상과 비전, 목표와 전략. 리더들에게 이러한 단어는 너무나도 친숙하다. 하지만 자신의 원칙과 상반되는 현실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

 

 

16세기 초 영국의 왕 헨리 8세의 권력에 저항하다 처형된 토머스 모어의 일생을 그린 영화 <사계절의 사나이>(Man for all seasons)를 통해서 리더라면 반드시 겪게 되는 ‘원칙과 현실의 조화’ 문제를 볼 수 있다. 모어는 가톨릭 신자로서 로마에 충성했다. 그는 헨리 8세의 이혼에 반대했고 왕이 영국국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에 반대했다. 모어는 결국 국왕의 노여움을 샀고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했다.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는 토머스 모어를 ‘사계절의 사나이’라고 불렀다. 그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모어의 숭고한 인격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모어는 영국의 위대한 정치가, 사상가로 칭송받지만 영화에서는 자신이 세운 원칙과 현실을 조화시키지 못해 괴로워하는 인물로 나온다.

 

 

 

 ♣ '아시아 인 유엔 총장'으로서 산다는 것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리더십을 보게 되면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토머스 모어가 오버랩 된다. 반 총장은 개인으로서의 삶보다는 공무가 우선이며 솔직하고 정직한 청렴한 공직자 이미지다. 그래서 정치적 견해를 유지하면서 개인적 소회를 밝히는 데 있어 매우 신중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민감한 질문에 요리조리 빠져나가길 잘한다고 해서 ‘기름장어’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그런 그가 입을 열었다. ‘아시아 정보통’으로 손꼽히는 전 LA타임스 논설실장 톰 플레이트와의 대담집 <반기문과의 대화>에서다.

 

 

반 총장과 저자 톰 플레이트는 2010년부터 2012년 사이, 두 시간씩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진행한 대담을 비롯해 사적으로 만나 나눈 여섯 차례의 대화를 나누었다. 반 총장에 관해 쓴 다른 책들이 그의 어린 시절부터 유엔 사무총장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면, 이 책은 유엔 사무총장이 되고 난 후의 이야기를 본인의 입을 통해 전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지닌다.

 

 

 

임기 초반 반 총장이 마주친 현실의 벽은 뜻밖에도 내부에 있었다. 기존 유엔 직원들과의 조화가 어려웠던 것이다. 반 총장은 고위급 외교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면서도 겸손한 편이다. 그런 아시아 스타일을 서구 언론뿐만 아니라 사무국 직원들에게는 달갑지 않다.

 

그러나 반 총장은 말보다 성과가 우선이고 솔선수범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개인의 카리스마보다 집단의 리더십, 즉 모든 사람의 지지와 합의를 기반으로 조직을 움직이는 리더십이 우선이라는 신념을 지켰다. 아이티 대지진, 칠레 광산 붕괴, 파키스탄 홍수 등 세계 재난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해 국제사회의 구호를 요청하는 등 적극적인 현장형 리더십을 보였다. 

 

이 책은 유엔이라는 조직과 사무총장이라는 직무의 한계도 보여준다. 유엔 사무총장은 오직 도덕적 힘과 권위, 그리고 회의 소집권만 있다. 모든 결정과 자원은 회원국에서 나온다. 분명한 한계 속에서 반 총장은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이라는 불가능한 꿈을 위해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다. 다른 국가 지도자들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동시 휴전’ 선언을 이끌어내기 위해 분주할 때, 그는 ‘동시 휴전’의 프레임을 탈피해 이스라엘의 ‘일방적’ 휴전을 성사시켰다.

 

 

 

 ♣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더 강하게 만든다

 

 

“많은 이들이 제게 유엔 사무총장은 세상에서 가장 불가능한 직업이라고 충고했습니다. 해보니까 알겠습니다. 이 일이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요. 농담 삼아 회원국이나 친구들에게 말하곤 합니다. 제 임무는 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가능한 임무로 만드는 것이라고요. 이게 제가 하는 일입니다. 제정신이든 아니든.” (47쪽)

 

 

 

유엔 사무총장의 임무는 공직에 대한 사명감 없으면 할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불가능한 일이다. 사시사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끊이지 않은 ‘정글’의 세계를 국제 평화와 안전이 유지되는 ‘정원’으로 만드는 중대하면서도 불가능한 역할을 반 총장이 6년째 맡고 있다.

 

다시 영화 <사계절의 사나이>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처형 직전 토머스 모어는 마지막으로 사형집행인에게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의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정직한 원칙을 지키려고 했다. 반 총장도 세상에서 가장 불가능한 직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더 강하게 만든다.’ 톰 플레이트는 철학자 니체의 격언을 언급하면서 차분하면서 강직한 성품의 반 총장을 평가했다. 내․외부에서 비롯된 현실의 벽을 두려워하지 않고 꿋꿋하게 맞서 극복한 그의 끈기는 유엔총회 193개국 만장일치로 연임에 성공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야말로 반 총장은 서구 언론의 집중포화와 유엔 조직 및 직원들과의 갈등과 반발 속에서도 공직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세계 정상의 조직을 이끌어나가는 ‘세계절의 사나이’다. (세계절: ‘세계’와 ‘사계절’을 합친 조어)

 

 

열네 시간동안 이루어진 대화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낸 반 총장의 모습은 리더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알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시련을 극복하고 실패를 이기는 힘은 결국 자기 자신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스스로를 이해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바로 안다는 것은 리더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저 최고의 자리에 있다고 해서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리더란, 리더라는 자리에 부합하는 실력과 윤리적 원칙, 위기관리 능력 등을 갖춘 관리자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1-24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쓴 서평 중 최악의 내용. 다시 봐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글.

http://blog.aladin.co.kr/haesung/9079157 (2017년 1월 24일 작성)

레삭매냐 2017-01-26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같으면 창피해서 슬쩍 지웠을 텐데 대단하십니다...

그나저나 그 때의 미꾸라지와 지금의 미꾸라지는 다른
사람일지 자못 궁금해졌습니다.

cyrus 2017-01-28 08:22   좋아요 0 | URL
글 한 편을 쓰면, 정말 정성들여 쓰는 성격이라서 못 쎴다고 생각하는 글을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시 고치기도 합니다. 이 글은 통째로 지우고 싶은데, 그냥 놔뒀습니다. 글 한 번 지운다고 해서, 부끄러움이 잊는 건 아니니까요. ^^;;
 
다시 새롭게, 지선아 사랑해
이지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잿더미를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다시 시작된 삶

 

“어젯밤 11시 반쯤 서울 한강로 1가에서 만취 상태의 운전자가 몰던 갤로퍼가 마티즈 승용차 등 여섯 대와 추돌했습니다. 이 사고로 마티즈 승용차에 불이 나서 차에 타고 있던 스물세 살 이 모 씨가 온몸에 3도의 중화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습니다. 경찰 조사 결과 갤로퍼 승용차 운전자는 혈중 알코올 농도 0.35퍼센트의 만취상태였습니다.”

 

회사에 출근하면서, 학교를 가는 길에, 혹은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흔하게 듣는 사건과 사고에 관한 뉴스들. 우리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불의의 사고에 너무나 무딘 지도 모르겠다. 내성이 생길대로 생겨버린 걸까. 누군가의 자살 소식 앞에서도, 혹은 서울 이편에 살고 있는 한 남성의 죽음의 소식 앞에서도 너무 쉽게 망각하는 우리.

 

불에 데어본 사람만이 불의 뜨거움을 감각적으로, 온 몸으로 알 수 있다. 불에 덴 사람을 지켜보는 타인은 그저 ‘뜨겁겠다’라는 위로의 말만을 건넬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진심이라도. 결국은 불이 준 뜨거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제 앞에 나와 불의 잔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잔상은 생각보다 너무 오래가고, 그 상처는 깊다.

 

‘대한민국 화상 1등’이라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심각한 화상을 입은 이지선 씨에게 의료진조차도 ‘살아도 사람 꼴이 아닐 것’이라며 비관적 태도를 보였지만 그녀는 7개월간의 입원과 40번이 넘는 고통스러운 수술, 그리고 재활 치료를 이겨내고 코와 이마, 볼에서 새 살이 돋아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제2의 인생을 맞이한다. 잿더미를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삶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책으로 만들어졌고 최근 다시 한 번 브라운관을 통해 당당히 대중 앞에 섰다. 그녀는 스스로 증거가 되었다.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꽃다운 얼굴이 아니라 삶을 사랑하는 긍정적인 의지임을.

 

 

 

 

 ♣ 그저 행복하기 위해 노력할 뿐

 

그녀의 입술에서는 ‘감사’라는 고백이 많이 나온다. ‘살아있어서 흰 눈도 보고 추운 겨울을 다시 맞을 수 있어’ 감사하다는 것이 그녀가 말하는 고백의 내용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통해 자신의 삶을 위로받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우리는 위로가 아닌 반성을 하게 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상황이, 마음이 시키는 대로 놔두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절망한 사람의 끝은 너무나 자명하다. 지선 씨는 ‘절망은 사람을 죽이는 것’임을 스스로 배웠다. 누가 보아도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마음이 시키는 대로, 절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던 것이 절망적인 순간들마다 그녀가 해온 일이다. 그것이 절망이 그녀를 죽이지 못하도록 지선 씨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지금까지도 이렇게 ‘평범한’ 오늘을 누리며, 오늘보다는 더 달짝지근할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내 버려두지 않는 것,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고통 속에서 절망의 급류에 휩쓸리지 않고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슬픔의 폭풍우 속에서 넘어지지 않고 서 있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외로움의 눈보라 속에서는 눈을 뜨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녀 또한 너무 괴로워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먹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정말 어렵다’는 말보다 더 무게가 실린 ‘쉽지 않다’는 말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쉽지 않은 일일수록 더 많이 애써야 하기에 더 의미 있다. 쉽지 않은 일이기에 더욱 열심을 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삶이 늘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저 행복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행복은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기에. 이런 그녀를 일으켜 세운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가족들의 사랑이다. 가족들 또한 신을 원망하기도 하고 지선 씨와 함께 괴로워하기도 하지만, 결국 강한 믿음과 서로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힘든 현실을 극복해 나간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지선 씨의 책에서는 칙칙함이나 우울함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 어떤 정상인보다 밝고 명랑하다. 그녀는 책에서 자신과 같은 중 증장애인을 ‘VIP’라고 표현한다. 맞는 말이다. 장애인들은 우연치 않은 기회에 삶의 비밀을 들여다 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 가지지 않고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선 씨는 죽음의 문턱과 편견의 문턱을 넘은 특별한 사람이다. 그녀의 책은 희망의 메시지로 가득하다. 인생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는 차가운 마음, 세상을 향한 조소와 냉소로 가득 찬 우리.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은 문을 꽁꽁 닫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을 활짝 열어놓고, 궂은 날씨든 좋은 날씨든 그것을 음미할 줄 아는 게 진짜임을 알게 하는 이 책은 책꽂이서 10년 20년 꽂아둘수록 깊이 있게 발효될 문장들이다.

 

 

 

 ♣ 고난을 사랑과 축복으로 여기는 특별한 사람

 

나무를 자세히 살펴보면 굴곡이 심한 나무일수록 당도가 높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사과보다는 배가, 배보다는 감이, 감보다는 포도가 당이 높다. 나무가 자기 몸을 흉하게 하면서까지 굴곡을 만들어 당도 높은 과일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굴곡진 인생이 값진 열매를 맺는 것 같다. 고통과 희생 없이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당도 높은 과일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굴곡진 인생의 지선 씨는 화상을 입은 후에 오히려 감사하다며, 베스트셀러를 썼고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일을 많이 하고 있다.

 

특별한 사람이란 남들과 다른 사람이다. 그녀는 일그러진 외모를 지니고 있어서, 화상 사고를 경험하고 이겨내서 특별하다. 그리고 그러한 외모 덕분에 남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었고 남들이 하기 어려운 재활 상담학이라는 공부를 선택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좀 더 많이 받을 수 있었고, 그 사랑을 소중히 여길 수 있었다.

 

지선 씨는 자신의 얼굴이 알려진 이후부터 주위 사람들로부터 ‘예뻐요’, ‘참 아름다워요’ 하는 인사를 많이 받는다고 한다. 이는 그를 놀리는 것이 아니고 진정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진 한 영혼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결코 감당하기 쉽지 않은 시련 속에서도 그녀가 선택한 것은 절망이나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희망이고 용기였다. 홀로 지내는 어둠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지내는 밝음이었다.

 

오늘은 미래를 향한 나의 남은 인생의 첫날이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오늘이다. 그녀는 인생을 덤으로 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감사하다고 말한다. 이 책을 통해 그녀는 특유의 밝음과 사랑의 에너지를 아낌없이 발산하고 있다. 나는 염치없이 그녀의 은혜를 넙죽 받았다. 고통 속에서도 희망과 삶에 대한 감사를 붙드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향기를 품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를 직접 만난 일이 없지만 언젠가 그를 만나면 나도 정답게 인사하리라. ‘지선 씨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해 준 모든 사람들도 더불어 사랑합니다.’라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잘잘라 2013-09-27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힐링캠프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모습 보면서 많이 울었어요.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고통이기에 책으로는 보지 말아야겠다했는데, 님의 리뷰를 읽으니 아무래도 한 권 사서 책꽂이에 꽂아두어야겠습니다.

cyrus 2013-09-28 22:16   좋아요 0 | URL
원래 힐링캠프를 잘 안 보는데 지선씨가 나온다길래 저도 보게 됐어요. 여전히 명령하고 쾌활한 성격은 여전하더군요. ^^
 
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에는 읽기 거북했던 소설

 

문학 작품과 관련된 의미 효과 중에는, 작품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과 독자 사이 혹은 둘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 있다. 텍스트의 해석 과정 모두가 독자의 계기를 포함한다는 해석학적인 맥락에서의 말이 아니다. 그보다 더 나아가서, 특정 작품을 대하는 데 있어서 독자가 평정을 잃게 되는 경우, 그 작품과 관련된 무언가에 끌려서 그 무언가가 보게 하는 것만을 볼 수밖에 없게 되는 경우, 다소 모호하지만 뭐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앞서 문학 작품이 주는 의미 효과가 아니라, 문학 작품과 관련된 의미 효과라 쓴 것도 이런 까닭이다.

 

좀 더 확장하자면, 작품과 독자 외에 이 둘의 관계를 결정짓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작용을 하는 제3의 항목이 개입되는 경우를 고려할 수 있다. 이러한 개입이 독서의 방향에 영향을 끼치고 그럼으로써 작품을 온전히 읽어내는 데 장애가 되는 경우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앞서 밝힌 갈래들을 염두에 두고 좀 더 명확히 말해 보자면, 이 작품에 대한 타인의 언급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몇 차례 겪었던 것이다. 이 작품이 어떻게 생겼는지 감을 잡으며 비로소 다 읽게 된 것은 최근에 원제로 새롭게 번역된 것을 읽은 지금에 와서이다.

 

이 작품을 끝까지 읽어낼 수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내 기억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독서 체험이 거북했다. <노르웨이의 숲>은 내가 군 복무했을 때 어느 내무반에 가면 한 권씩 꽂혀 있었다. 한번은 고참 하나가 내게 말했다. 이건 그저 여자 세 명하고 연애하고 섹스하는 얘기라고(사실 더 적나라한 군대 말투로 말했었다). 그러고 보니 아니랄 것도 없었다. <노르웨이의 숲>에는 세 가지 타입의 여자가 나온다. 순수한 나오코, 발칙하고 되바라진 미도리, 달뜬 청춘 시절을 지나온 연상의 레이코 여사. 이 땅의 많은 청춘들은 와타나베이기를, 미도리가 되기를 염원했을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와타나베 분위기를 내고 있어도 미도리 같은 여자아이의 눈길을 끌 수 없다는 데 있었지만.

 

책장을 펼치고 읽어가다가 어느 순간, 나는 내가 노르웨이의 숲 한가운데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어디까지 읽었나 하는 궁금증에 책의 뒤쪽을 몇 차례 더듬어 보았다. 낭패감은 여기서 찾아왔다. 뒷부분을 펼쳐보면 어느 곳이든 기억에 없는 데, 거기까지 읽어가다 보면 읽은 것은 분명하게 되고, 또 그렇게 되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건망증적 고아가 된다는 것에 무척 기분을 상했고 나는 결국 책읽기를 그만두었다.

 

이런 정도면 그냥 안 읽어도 좋을 텐데, 무슨 까닭에서인지 나는 4년 만에 다시 노르웨이의 숲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끝까지 읽어보겠다는 욕망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처럼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 <노르웨이의 숲>에 대해서 짤막한 감상을 세련되게 말한 걸 본 적이 있는데 살짝 부러 우면서도 샘이 났던 건 사실이다.

 

 

 

 다양한 빛깔로 채색할 수 있는 무색의 숲

 

<노르웨이의 숲>은 열려 있는 작품이다. 세상에 나온 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읽는 사람들이 저마다 제 빛깔로 채색할 수 있는, 그야말로 색채가 없는 소설이다. , 이 소설은 해석을 달고 있지 않다 하겠다. 서사의 구조 자체가 실상은 회상 형식으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술자에 의한 편집자적인 논평이나 요약 등이 거의 없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소설에서 서술자의 태도나 인생관, 의식 수준 등은 서술 자체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숲>은 그렇지 않다. 서술 시점의 서술자가 함부르크 공항의 자신을 바라보며, 서른일곱 살이던 그때의 그가 다시 18년 전의 일을 기억하는 이중의 회상 구조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회상의 주체에 의한 의미부여 등이 거의 없는 것이다.

 

소설은 극적이다. 극문학이 그러한 것처럼 현재 빚어지는 장면 장면들이 그 자체로만 제시될 뿐, 서술자에 의한 해석이나 규정 등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서술자 자신이 작품의 표면에서 사라져 버린 까닭이다. 그 빈자리에서 독자들인 우리는, 저마다 제 기억을 되살리며 작품의 서사에 나름의 빛깔을 덧보탤 자유를 얻는다.

 

이러한 자유는, 시점 화자이자 주인공인 와타나베로 해서 한층 더 확장된다.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작품의 주 내용이 철저히 와타나베의 시선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그 와타나베라는 인물 자체가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나름의 기준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노르웨이의 숲>은 철두철미 와타나베가 보고 듣고 겪는 것, 그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이야기해 주는 것, 그가 보내고 받는 편지들의 내용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곧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겪지 않은 일들, 그가 알 수 없는 일들은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만나지 않을 때, 나오코, 미도리, 레이코도 이 작품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오직 그의 상념 속에서만 희미하게 존재할 뿐이다.

 

더 나아가서, 이 희미한 존재들은 정말로 희미하게 존재하는데, 이는, 그들과의 관계 맺음이 와타나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의 존재 자체가 와타나베에게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가 희미하기 때문이다. 성년식을 겪고 있다 할 열아홉 스무 살의 와타나베는 세상을 해석하려는 의지도 세상을 읽고서 의미를 추려 내거나 구축할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열아홉 스무 살의 나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할 테니 조금도 이상할 건 없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인물이 그런 면모만으로 작품 속에 등장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앞서 말했듯이, 작가로서의 서술자의 측면이 거의 부재한 것은 일반적인 소설 유형에서는 매우 드문 까닭이다. 특징적으로 요약하자면 '침묵하는 서술자의 설정'이라고 할 이러한 특징이 <노르웨이의 숲>을 독특한 작품으로 만들어 주며,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의 각 장면 장면에 나름대로의 의미를 덧칠할 수 있게 해 준다. <노르웨이의 숲>이 자기 고유의 색채를 갖지 않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가리킨다.

 

 

 

 11년 뒤에 다시 한 번 그곳을 순례할 수 있을까?

 

작품이 열려 있다 해도 그렇게 열어 놓은 하루키의 머릿속까지 모호하게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품의 평가에 소용될 만큼의 작가론 차원의 정보를 나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결국 작품의 평가를 시도한다 해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인데, 어찌 됐든 다행인 것은, 그럴 의도가 내게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상실의 시대>를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태도로, 때론 조금 깎아내리는 말투로 이 책을 둘러싼 이런저런 수다에 열심히 끼어들어 왔다(가벼운 수다라기보다는 독설에 가까웠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좋든 싫든 나 역시 이 책으로부터 적잖은 세례를 받았던 게 틀림없다. 이번에 다시 읽게 되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문장에 주목했었다.

 

<상실의 시대>의 첫머리는 서른일곱이 된 와타나베가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며 스무 살 무렵을 회상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서른일곱의 나이라... 지금으로부터 11년 뒤다. 아직까지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삶을 실감으로 부딪쳐 느껴 보기도 전에 어쭙잖은 거리를 두고 멀뚱멀뚱 지내다 아까운 청춘 다 흘려보낸 걸 뒤늦게 깨닫게 되는 시기. 그 서른일곱의 나이가 되면 나는 과연 이 책을 다시 한 번 펼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
로버트 트리버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살림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cene #1  인류 최초의 범죄

 

 

 

 

 

렘브란트 반 레인 「아담과 하와」 1638년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 하느님이 세상을 만들 때 사람이 살 수 있는 낙원을 세웠다. 그곳에 두 나무를 심었는데,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선악의 나무였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그중에서 선악의 나무에 열린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하면서 “너희들이 먹는 날에는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뱀이 등장하고 사람을 유혹했다. 유혹을 이기지 못한 하와가 먼저 선악의 나무열매를 먹고, 아담에게도 먹게 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은 낙원에서 쫓겨나게 된다. 인류 최초의 부부는 이렇게 해서 힘든 노동과 고통, 죽음을 맛보게 된다.

 

아담을 미혹해 뱀의 말을 듣게 한 하와는 왜 금지된 선악의 열매를 먹었을까? 그것은 “죽지 않고 하나님같이 된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그들도 하느님처럼 되고 싶었다. 선악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뱀의 유혹에 사로잡힌 나머지 영원불멸한 하느님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인류 최초가 저지르는 범죄(?)의 한 순간을 묘사한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면 아담이 선악의 열매를 입에 대려는 하와를 제지하려고 한다. 아담은 손가락 하나를 하늘로 올리며 하느님의 명령을 하와에게 상기시킨다. 그러나 하와는 뱀의 거짓말에 속아 하느님의 지시를 어겼을 뿐 아니라 아담도 공범자로 만들어버렸다.

 

렘브란트는 최초의 범죄가 순식간에 일어났다고 보지 않았다. 뱀이 유혹했을 때 아담과 하와는 탐스러운 열매 앞에서 망설였으며 ‘정말 먹어도 될까’라며 갈등했음을 보여준다. 순간의 고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은 지시하신 말씀을 거역하는 쪽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잃어버린 것이다.

 

 

 

 Scene #2  우리 뇌에 살고 있는 나기만씨

 

인간의 감각기관은 현실을 왜곡 없이 인식할 수 있도록 진화해 왔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보고 들은 정보를 뇌가 ‘인식’하는 과정에선 왜곡이 일어날 수 있다. 스스로를 속이는 ‘자기기만’을 행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인 로버트 트리버스는 “기만과 간파의 반복교차가 진화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기만과 간파가 이루어지는 관계의 행위는 이미 창세기부터 시작되었다. 낙원에서 펼쳐진 ‘기만하려는 자’(뱀)과 ‘간파하려는 자’(아담)의 대결은 결국 ‘기만하려는 자’가 이긴다. 하지만 이 대립의 판도를 바꾸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자기기만하는 자’(하와)였다.

 

기만과 자기기만의 문제는 도처에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특히 남녀 간에도(!) 자주 발생한다. 조직 차원에서의 자기기만은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게 만든다. 인간 몸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갈등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우리 뇌 안에는 합리적으로 생각하려는 이성과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나(자기)기만’씨가 있다.

 

우리 의식이 뇌에 전달된 정보를 왜곡하고 거짓 기억을 만들면서 부도덕한 행위조차 합리화하는 것이 자기기만이다. 뇌는 좋은 의식은 살리고 나쁜 생각은 지움으로써 더 행복해지려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자기기만의 사고 회로는 무조건 상대방을 속이거나 부도덕한 행위를 은폐하기 위해서만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기분을 좋게 하려는 방어적 차원을 넘어 생존을 위한 공격적 본능의 방편으로도 사용된다. 지나친 자신감의 표현이나 과시적인 행동, 과잉통제 등이 그렇다. 단순히 거짓말하는 차원을 넘어 왜곡된 상황을 사실이라고 스스로 믿는 게 살아가는 데 유리한 점이 많다. 기만이 발각되더라도 ‘나도 몰랐다’는 식의 자연스러운 반응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Scene #3  자기기만의 위험성

 

하지만 기만의 유혹에 빠져버린 하와가 타락한 것처럼 자기기만이 주는 혜택은 일시적이지만 대가는 너무나 클 수 있다. 사실 남과 자신을 기만함으로써 얻는 혜택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자기기만을 한다거나 기만술을 악의적으로 사용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이나 사회 전체에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전략이 위험하다는 점을 인지했음에도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상대방의 강력한 주장에 밀려 막연하게 일을 추진하다가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직언을 계속 무시하면 부정적인 것은 걸러지고 긍정적 내용만 경영층에게 전달되는 조직의 침묵만 아니었다면 1986년 챌린저호는 공중에서 폭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1986년 1월 28일 승무원 7명을 태운 미국의 챌린저호가 발사 73초 만에 공중에서 폭발했다. 이후 조사 과정에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폭발 확률에 대한 내부 견해에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낙관적 태도로 일관하던 중간 관리자들이 실무 연구원의 의견을 상부로 전달하지 않은 자기기만의 침묵으로 인해 참사를 초래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집단 내의 자기기만을 그대로 방치하면 똑똑한 다수가 모였다고 해도 멍청하고 어리석은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회의 분위기를 상상해 보라. 대통령이 특정 사안에 대한 무슨 말을 하면 참석한 각료는 물론 전문가들도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그 말에 토를 달기 어렵다. 회의에 앞서 많은 준비했을 것이라는 판단과 함께 대통령 결정이 맞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아무리 말해 봤자 대통령 생각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절대 권력자 앞에서 어쭙잖게 토를 달았다가 ‘뼈도 못 추릴 수 있다’는 두려움에 참석자 입을 얼어붙게 만든다. 문제를 정확하게 알면서도 한 번도 언급되지 못한 채 지나쳐버리고 만다. 이러다 보면, 대통령이 참석하는 회의에서 토론은 사라지고 일방적 훈시와 설교만 이어진다.

 

생존을 위한 공격적 기능의 자기기만 또한 문제가 있다. 동물들이 위급한 상황에서 몸을 부풀리는 것처럼 자신을 과대포장하다 보면 엉뚱한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자신의 배를 부풀리는 개구리처럼 말이다. 다른 개구리보다 몸집을 크게 만들기 위해 배를 크게 하다가 끝내 터져서 죽고 만다.

 

자신의 현재를 과시하기 위해서 과거를 의도적으로 조작하거나 은폐하는 기만적 행위를 하게 된다. 3대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북한의 김씨 일가 우상화와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우익의 모습에서 집단적 기만의 문제점을 볼 수 있다. 둘 다 공통적으로 자화자찬과 자기정당화를 위한 거짓 역사 서사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거짓 역사 서사는 집단의 통일성을 이룩하는 데 쓸 수 있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북한 우상화 작업은 북한 내부 사회의 결속을 다지는 데 있으며 일본 우익의 역사 왜곡은 설령 거짓이라고 한들 일본인이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 목표다. 자기 조상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긍정적인 것으로 교체하는 것이다.

 

 

 

 Scene #4  똑똑하고 착한 악마가 되라

 

저자는 "과신과 무의식을 피하려고 노력해야하고, 쉽지는 않지만 자기기만에 빠질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고 강조한다. 자기기만의 늪에 쉽게 빠질 수도 있지만 조그만 더 꼼꼼하게 자신의 편향을 알아차린다면 위험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자기기만 편향도 더 무섭고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 집단적 자기기만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과신과 무의식의 만남을 치명적이라고 경고한다. 최악의 사고(思考)가 한 사람이 아니라 집단 전체를 지배한다고 생각해보라.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 집단 내부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못할 것이며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탁월한 결정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집단적 자기기만 사고를 막으려면,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이야기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어떤 생각이던 자유롭게 말하며 난상토론을 벌이는 브레인스토밍에서도 이런 역할이 중요하다. 바로 ‘데블스 에드버킷(Devil's advocate)’이다. 데블스 에드버킷은 의도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하면서 선의의 비판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결국 우리 스스로 똑똑하고 착한 악마가 되어야 한다. 우리 뇌 속에 숨어 살고 있는 ‘하이드’(Hide) 나기만 씨와 싸울 줄 알아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