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 나랑 비슷한데...’

 

 

 

 

 

 

 

 

 

 

 

 

 

 

 

 

 

다음의 글을 읽고 스스로에게 적용해보자.

 

 

당신은 규율을 지키거나 제약이 따르는 상황을 불만스러워한다. 하지만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어느 정도의 규칙과 통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지나친 망설임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친 적이 있다. 당신은 만족할 만한 증거가 없으면 타인의 의견을 잘 수용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의견을 불편해하는 타인이 있을까 봐 조심하는 편이다.

 

 

당신은 내향적이며 과묵한 편이다. 하지만 공감을 확신하는 상대에겐 외향성이 발휘되고, 과감해진다. 한마디로 기회가 오면 충분히 사교적인 사람으로 변모한다. 당신은 가끔 비현실적일 때도 있다. 숨어 있던 진짜 아버지가 나타나 수억 짜리 건물을 증여한다거나, 현빈 같은 남자가 우주여행을 하자고 프러포즈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의 당신은 알뜰하며, 현실에 만족하는 편이다.

 

 

위의 글이 자신의 성격과 어느정도 부합될까. 심리학자인 B.R. 포러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이 평가서가 자신의 성격을 얼마나 잘 설명하는지 점수를 매기라고 주문했다. 결과는 5점 만점에 4.26점.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의 성격과 비슷하다는 답을 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평가서는 신문의 점성술 내용을 대강 짜맞춘 것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성격특성을 자기만의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심리적 경향바넘 효과(Barnum Effect)라고 한다. 19세기 말 곡예단에서 사람들의 성격과 특징 등을 알아내는 일을 하던 바넘에서 유래했다. 혹은 성격 진단실험을 통해 처음으로 증명한 포러의 이름을 따서 '포러 효과'라고도 한다.

 

바넘은 19세기 말 미국에서 서커스단을 이끌었던 유명한 곡예사다. 그는 서커스 도중에 관객을 아무나 불러내어 직업이나 성격 등을 알아맞히는 것으로 인기를 끌었다. 신통력이 뛰어났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보편적으로 들어맞는, 이를테면 "당신은 활발한 성격이지만 때로는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내성적인 면도 가졌군요"라고 말해도 관객은 저절로 "어쩌면 그렇게 잘 맞힐까?"라고 감탄하기 마련이었다. 바넘 효과는 유행가를 자신의 이야기인 양 착각하는 현상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사람들이 답답할 때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서 그의 신통력에 탄복하는 것도 바넘 효과가 작용한 것이다.

 

 

 

 

 ♣ 사주는 사주일 뿐

 

어제 KBS 2TV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에서 ‘사주점에 빠진 친구’가 등장했다. 점에 빠진 친구는 손금, 관상, 사주를 보느라 용돈을 다 썼고, 아침마다 오늘의 운세를 본 후 그곳에 적힌 내용대로 실천했다. 그리고 오늘의 운세에 ‘사람들 앞에서 말조심할 것’이라고 나오면 밤 12시가 지날 때까지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으며, ‘오늘은 차조심 할 것’ 이라는 운세를 보면 그날은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유명한 점집의 복채를 준비하기 위해 막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운세 내용을 있는 그대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 방송에서는 우스갯소리로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지만, 사실 주변 사람 입장에서는 운세와 점을 그대로 믿는 사람과 함께 생활하면 심적으로 피곤하거나 친밀감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또 사주 결과 때문에 극단적인 결정을 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가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파혼 소식을 전해왔다. 이유가 황당하기 그지없다. 사주를 봤는데, 서로 궁합이 안 맞더란다. 주변에도 사주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일부는 아주 맹신하는 사람도 있다. 어제 방송에 나온 ‘점에 빠진 친구’처럼 말이다.

 

주변에서도 흔히 정초에 본 사주에서 올해 운이 안 좋다며 크게 낙담하거나 자신감마저 잃는 사람을 발견하기도 한다. 생년월일시만 가지고 성격은 물론 과거와 미래를 그렇게나 소상하게 말할 수 있다니 신기하고 재밌긴 해도, 과연 어디까지 믿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혈액형별 성격도 보면 그럴 법한 성격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 A형은 다정다감하고, B형은 바람둥이이라는 둥, O형은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AB형은 사이코다? 필자는 B형이지만 지금까지 바람을 핀 적이 없었고, 독창적이지만 제멋대로라며 AB형 아니냐는 소리도 종종 듣는다. 그리고 세상에 지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혈액형별 성격이나 심리테스트, 오늘의 운세에서는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성격을 모호하게 풀어 놓는다. 그런 두루뭉술한 묘사일지라도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자신의 특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혈액형 성격론은 이미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이론으로 판명난지 오래다.

 

사람은 대개 부정적인 점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법이다. 대체적으로 혈액형 성격론에서 사람들이 맞다고 여기는 부분은 부정적인 요인이다. 사람은 긍정적인 점보다 부정적인 요인에 더 신경을 쓰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은 혈액형 성격학에서 말하는 성격적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사람은 때론 소심하고 때론 활달하다. 진득하게 하나에 집중하다가도 쉽게 싫증을 내는 게 사람이다. 일관성이 있다가도 때론 제멋대로 이거나 변덕스럽다. 때로는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창조적이었다가 너무 개성이 넘쳐나기도 한다. 때론 얌전하다가도 광기를 갖기도 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했듯이 혈액형 성격론은 그 태생부터가 의심스럽다. 혈액형 성격론은 1880년대 독일에서는 우생학적인 관점에서 발생 했다. 칼 란트슈타이너가 1901년 ABO식 혈액형을 만들었고 그 이후 연구한 결과 1910년대 아시아 인종은 B형이 많고, 유럽은 A형이나 O형이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유럽인들은 아시아인을 낮추고 백인을 높이기 위해 B형을 열등하게 만들었다. 일본에서는 일본인들이 유럽인과 같이 A평과 O형을 강조하면서 혈액형 성격론이 굳어진다. 그래서 B형 성격론은 적은 혈액형이므로 매우 편파적인 측면이 많다.

 

 

 

 

 ♣ 진짜 ‘나’를 알려는 자세

 

철학관의 훈수나 타로점을 믿지 않고, 혈액형별 성격 분석에 시큰둥한 나 같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바넘 효과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편견이나 선입견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또 다른 편견이 될 수도 있다. 보편타당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고 편견이나 선입견을 극복한 판단적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 바넘 효과의 진실 유무를 떠나 세상의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영혼이 몇이나 될까.

 

 

 

 

 

 

 

 

 

 

 

 

 

 

우리는 자신에 대해 매우 궁금해 한다. 소크라테스가 지적하기 이전부터 자신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이러한 이해를 통해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심리적 에너지 낭비를 막으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좋아하거나 높이 평가하는 점은 강점으로 키우려하는 반면,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하고 평가 절하하는 부분은 약점으로 숨기려고 한다. 자기 스스로 속이는 일종의 자기기만을 함으로써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긍정적인 것만 노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주변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다. 자신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을 통해 타인의 성격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자신을 알 수 있을까. 전문적인 성격분석 서비스나, 인터넷에 나도는 여러 가지 성격 검사도 있지만, 주변 사람을 통해서 더 잘 알 수 있다. 부모는 자녀를 통해서, 직장인은 동료를 통해서, 또한 친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들이 나에 대해서 하는 말이 자신의 성격을 아는 데 가장 큰 팁이 된다. 주변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이 자신을 아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또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자신을, 사람을 아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사실 사람들은 일이 잘되고 상황이 좋을 때보다는 힘들거나 난관에 부딪쳤을 때 원래 성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더 많다. 상황이 좋고, 어려움이 없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적절한 사회기술로 상황에 대처하지만 위기상황일 때는 기술보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내비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자신을 알아가는 일은 끝이 없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처한 상황에 따라, 만나는 사람에 따라 성장하기도 하고 퇴화한다. 또 자신을 알아가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눈과 귀를 닫고 자기가 아는 대로 고집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수천 년 전에 죽은 그리스 철학자는 오늘도 ‘너 자신을 알라’고 한다. 이에 심리학자 융은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의 의미라고 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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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9-25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이 글을 읽으니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명한 인물의 본보기로 삼았고, 평생을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데 몰두했던 몽테뉴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그가 말했던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에는 우리와 남들 사이만큼이나 차이가 있다"는 말은 두고두고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싶더군요.

* * *

운은 우리들을 좋게도 나쁘게도 하지 않는다. 운은 우리들에게 그 재료와 씨를 제공할 뿐이다. 우리의 마음은 운보다도 더 강하며, 행복 또는 불행한 조건의 유일한 원인이 되고, 자기 마음대로 운을 돌리며 적용한다.(몽테뉴)

"항상 동일한 인간으로서 행세하기는 대단히 어려움을 명심하라."(세네카)

cyrus 2013-09-25 21:37   좋아요 0 | URL
몽테뉴의 명언이 제 글과 잘 어울리면서 좋아요. 오렌님 덕분에 몽테뉴와 세네카의 좋은 명언 알아갑니다. ^^

김성환 2014-11-17 0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리엔탈리즘 - 개정증보판 현대사상신서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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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월한 서양 vs 열등한 동양

 

꽃과 여자의 옷에서 봄이 피어난다고 한다. 요즘 지하철에서 내려 길을 오가면서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있다. 짧은 치마에 살결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거리를 당당하게 걸어가는 여자들이다. 경기가 불황일수록 여성의 미니스커트는 짧아지고, 립스틱 색깔은 짙어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경기가 어려우면 아무래도 여성들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액세서리를 구입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자신의 몸 자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심리적 요구가 증대한다고 한다.

 

미니스커트를 입는 사람과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는 우리의 사유나 관념이 자의적이고 주체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 관념체계의 깊은 틀은 근대화의 급속한 발전과 자본주의의 서구중심적 사고방식으로 물들어진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도외시하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을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했다. 세계화라는 거대한 슬로건 앞에 점점 동양 문화는 어두운 터널 속으로 사라지고 점점 오리엔탈리즘에 사로잡히게 됐다. 즉 ‘우월한 서양’ 대 ‘열등한 동양’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각인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들 관념체계 안에 당연한 지식으로 자리 잡은 서구중심적 사고방식으로서 오리엔탈리즘은 사회구조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사회구조적 재생산 과정을 단순히 폭로하는 것만으로는 기존의 왜곡되고 종속적인 문화 상황이 해체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우리는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경제 발전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경제 성장과 사회 발전에만 치중했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화는 뒷전에 처져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서양 중심 사고가 중심 담론이 됐다.

 

 

 

 ♣ 오리엔탈리즘이 만든 이분법적 사고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적’인 것에 대해 사람들이 과학적, 합리적, 논리적, 이성적이란 긍정적 이미지와 물질적, 제국주의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는 반면에 ‘동양적’인 것에 대해 이와 반대로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논리적, 비이성적’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나마 ‘명상적, 신비적’인 단어가 긍정적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러한 서구식 담론의 편견과 왜곡된 동양 이미지가 바로 사이드가 말한 오리엔탈리즘이다.

 

서구의 문화적 헤게모니에 너무나 오랫동안 종속된 결과일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 스타일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알지 못하는 타 문명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문화적 편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서구의 동양 지배 프로젝트와 맞물려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표상체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서구의 체계적인 ‘동양의 동양화’ 과정에 의해 동양의 이미지는 왜곡돼 왔기 때문에 사이드는 이제까지도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동양, 형용사가 붙지 않은 동양이 존재한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것은 각종 주의와 주장으로 포장된 오리엔탈리즘이 동양 대신 동양을 말해왔기 때문이며, 그렇지 않은 동양은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를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스트들 스스로가 동양과 대치되는 위치에 자신의 위치를 선정하기 때문이며, 실제 생활과 정신생활 양면에서 사실상 동양 밖에 있는 ‘그들의 외면성’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듯 오리엔탈리즘에 길들여진 우리는 서구 문화를 우월하게 의식하고, 동양 문화를 비하하게 되는 것이다.

 

기업은 소비자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것보다는 욕구를 창출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즉 자신들이 생산한 제품을 소비자의 필요성보다는 욕구를 자극해 많이 판매함으로써 최대 수익을 얻음을 그 목표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부단히 창출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에 동원되는 수단이 광고이다.

 

광고는 소비자들이 날마다 받아들이는 메시지의 한 형태다. 소비자가 받아들인 총 메시지는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통해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의견, 호감, 불쾌감 등을 형성한다. 이런 상황을 기업들은 전통적인 콘셉트를 가지고 소비자들의 욕구를 발생시키기보다는 서양적인 무엇인가에 마케팅 전략을 찾고 있다.

 

서구 우월주의에 입각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동서양의 차별적 이분법을 광고 속에서 찾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재생산과 강화는 모든 영역에서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 가운데 현대 소비 사회에서 이미지 형성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광고는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광고 속에 불려 들어가 ‘표면상으로는 자율적으로 흐르는 회로’, 그러나 실제로는 광고에 의해서 ‘주의 깊게 준비된 회로(오리엔탈리즘)’를 통해 부재된 시의를 스스로가 채우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광고에 의미를 부여하고 광고가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악순환은 계속된다.

 

 

 ♣ 내 안에 서양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가장 큰 문제는 동양인들이 서구인들의 왜곡된 사고방식을 내면화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오랜 식민지 지배를 통해 동양인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거나 혹은 서구 문화에 영향을 지나치게 크게 받은 나머지, 오리엔탈리즘을 자기의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 언어, 행동, 사고방식으로 표출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하고, 자신이 사고하고 믿는 대로 행동한다는 점에서 이런 문제가 더욱 큰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 정신의 왜곡을 가져오게 되며, 왜곡된 사고방식으로 인한 잘못된 행동까지 초래하게 된다. 더 나아가 타인을 타인으로서 이해할 수 없게 되고, 타인을 타인으로서 이해할 수 없게 된다면 인간은 타인에 대해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다.

 

매년 유행하는 미니스커트가 거부감보다는 친근감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의 한 단면은 아닐까. 한복을 입고 거리를 지나가는 여자를 보기는 어렵다. 결혼식이나 환갑 같은 행사장에서나 잠시 보는 것이 우리 전통의상의 현실인 것이다.

 

‘뚱뚱해도 다리가 예뻐서 짧은 치마가 어울리는 여자’를 희망하는 유행가 가사처럼 짧은 치마가 어울리는 여자를 희망하는 남자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당당함을 표현한다’, ‘날씬한 다리로 칭찬받고 싶어서다’, ‘더 예쁘게 보여주고 싶다’ 등은 여자들 의견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서구지향적인 의식이 무의식을 점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 의식 속에 열등한 동양과 우월한 서양이라는 것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우월한 서양’, ‘열등한 동양’이라는 오리엔탈리즘의 이분법적 사고는 이제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서구인 시각으로 우리를 볼 것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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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힘 - 상처받지 않고 행복해지는
레이먼드 조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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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들은 모두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한

 

우리 인간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와 연(緣)을 맺게 되고, 그 연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최소한 자신을 낳은 부모와 가족의 연은 존재한다.

 

혹여 이런저런 연이 다 끊겨 도무지 연을 찾을 수 없기라도 하면, 김춘수 시인이 ‘꽃’이란 시에서 열망했듯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고 나도 그의 이름을 불러줘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 있는 관계가 되기를 열망한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한 줄 시구 속에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싶어 하는 우리 인간 본연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세상에 사람은 많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매우 외롭다고 한다. 관계가 없으면 이 세상 수십억 인구는 그저 걸어 다니는 허수아비에 불과할 뿐이다. 관계가 없으면 말 그대로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이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인간관계를 이루고 있지만, 공통적인 한 가지는 누구나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관계란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삶의 기술이다.

 

 

 

 

 관심, 먼저 다가가기, 공감, 진실한 칭찬, 웃음

 

사회생활을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의 80% 이상이 ‘인간관계’ 때문이라고 한다. 일 자체로 받는 스트레스보다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의 강도가 훨씬 높다는 말이다.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이란 책에 보면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그가 그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사람의 존엄성에 상처를 주는 것이야말로 죄악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사람에 대한 배려와 진심, 그리고 신뢰를 위한 태도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레이먼드 조가 쓴 <관계의 힘>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중요하면서도 쉽게 잊고 마는 인간관계 맺는 방법을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 쓴 자기계발서다. 가상의 글로벌 완구업체 원더랜드의 기획2팀장 신우현은 어린 시절 친척들에게 배신당한 기억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가진 인물이다. 신은 자신의 속마음을 상대방에게 편안하게 표현하는 것을 꺼린다. 같은 부서에 일하는 직원을 친한 동료라기보다는 일을 위한 파트너 정도로만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이 조금만 다르다거나 일을 미숙하게 처리하면 차갑게 쏘아 붙인다.

 

신은 원더랜드의 공동창업주 조 이사라는 인물에게 위임장을 받는 역할을 맡게 되면서 그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온다. 조 이사는 괴짜다. 위임장을 주는 조건으로 신에게 “1주일에 한 명씩, 한 달에 네 명의 친구를 만들라”는 미션을 제시한다.

 

미션을 하나씩 수행하면서 신은 그동안 잊고 있던 관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관심, 먼저 다가가기, 공감, 진실한 칭찬, 웃음. 먼저 다가가고, 먼저 공감하고, 먼저 칭찬하고, 먼저 웃으면 상대방과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감정을 형성할 수 있다. 다섯 가지 교훈을 통해 조 이사의 미션을 실행한 신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사람에 대한 행복을 느끼기 시작한다.

 

 

 

 

 ♣ 행복의 원천은 ‘사람’

 

과거보다 냉혹한 생존 게임에 내몰린 지금 세대는 좀 더 따뜻하고 희망적인 인간관계를 원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행복의 원천은 ‘사람’, 즉 ‘타인과의 관계’이다. 두 사람 간 상호작용의 산물인 관계는 사람들을 성장시켜 가는데 필수적인 부분이다.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감정이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 이해받고 있다는 감정 그 자체가 성장할 수 있는 변화에 영향을 준다. 즉, 상대방을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공감하려고 애쓰는 노력 그 자체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 자아 존중감을 높여 주게 된다. 이는 긍정적인 변화로의 시작을 초래하게 된다. 상대방에게 먼저 다가가 그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고 공감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세심하게 생각하는 진실성이 필요하다. 관심은 좋아한다는 단어와 혼용되기도 하지만 관심이라고 하는 것은 좋고 싫고의 개념이 아니라 조건 없이 긍정적인 인정을 하는 타인에 대한 배려이다.

 

누군가로부터 관심을 받고 인정받는다는 느낌은 자신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 삶의 에너지원이 된다. 본인을 향한 칭찬을 갈망하는 것이 인간이고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주길 바라게 된다. 칭찬, 인정, 이해를 바탕으로 한 관계 형성이 인간관계를 풍부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재능이 있어도 인간관계가 좋지 않아서 실패한 사람도 많다. 좋은 인간관계는 인생의 윤활이자 처세의 기본인 것이다. 인간관계를 소홀히 한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에 투자를 하지 않는 미련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결국 이 세상은 나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다. <관계의 힘> 속에 주인공 신이 살고 있는 공간은 가상이지만 결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을 한 권의 책으로 축소한 것 뿐이다. 우리 곁에 조 이사 같은 인생 멘토가 곁에 없다면 책 중간에 중요한 포스트잇처럼 등장하는 관계에 관한 조언과 명언을 그냥 가볍게 넘겨봐서는 안 된다. 당신의 인생을 윤택하게 만드는 데 유용한 삶의 교훈이다.

 

책의 마지막 종이 한 장 다 넘겼다면 주변을 돌아보라. 지금부터라도 남에게 항상 무언가 바라는 사람보다, 내가 먼저 남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진심으로 맺은 인간관계는 언젠가는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온다. 훗날 나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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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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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방진 신문팔이

 

 

 

 

 

 

 

우리는 누구나 녀석을 알고 있었다. 녀석은 정말 이상한 신문팔이였다. “동아일보요, 서울신문이요, 중앙일보요, 민국일보요, 내일 아침 한국이요, 내일 아침 조선이요, 경향신문 있습니다. 신아일보 있습니다.” (238쪽)

 

 

 

이상한 신문팔이 소년은 매일 저녁 9시쯤 좌석 버스로 서대문을 지날 때면 각종 신문을 외쳐댄다. 비좁은 시내버스를 비집고 올라와서도 정작 신문을 파는 데는 정신을 쓰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는 신문을 파는 일보다는 자신이 외쳐대는 대사를 즐기면서 그것 때문에 웃음을 참지 못해 하는 건방진 신문팔이 소년이었다. 잠깐 버스가 서 있는 동안에 신문을 팔면서도 서두르지 않고 여유 만만하게 외쳐대는 그 목소리와 느긋하면서도 일정하게 이어졌다 끊어지는 대사가 특이했다. 그 자신 그런 대사를 즐기고 있음이 틀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본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지난 가을 추석날 저녁. 어떤 사내가 밤 버스를 타야 하는데 그날은 걸어서 광화문에서 서대문을 걸어가게 되었다. 문득 버스를 보낸 소년이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달이 비친 밤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리는 것을 사내가 엿들었다. 버스에서 외쳐대는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추석날 저녁 이후 며칠 뒤부터는 그 소년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소년이 버스를 놓쳤거나 아니면 감기라도 걸려 못 나오는 것일까? 그런데 10여 일이 지나도 소년의 모습을 목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잠바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예의 웃음기를 잃지는 않았으나 무엇인지 허전한 표정을 지으며 버스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옆구리에는 신문 뭉치가 들려 있지 않았다. 신문도 팔지 않으면서 왜 버스 정류소에서 배회하고 있는 것인가.

 

사내 하나가 광화문에서 서대문까지 걸어서 가다가 그 소년을 만났다. 둘이 대면한 것이다. 사내가 소년에게 신문을 팔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소년은 민국일보라는 신문사가 폐간되어 버리는 바람에 동아, 서울, 중앙, 민국일보라고 외칠 때 리듬에 맞춰 부르는데, 민국 일보가 없어져서 어색해 버린다는 거였다. 그 소년은 민국일보가 폐간되자 신문을 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신문 파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민국일보를 뺀 채 다시 외치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신문을 팔 것이라고 했다.

 

“말하나마나지요. 신문을 팔아야지요. 그렇지만 아직 소리가 그전처럼 신이 나질 않아요. 민국일보가 다시 나와 준다면 좋겠지만......” (247쪽)

 

 

소년이 다시 신문을 파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연습이 잘 안 되는 모양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도록 소년은 나타나지 않았고, 민국일보는 다시 복간되지도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권력의 앞잡이가 된 신문들

 

이청준의 단편소설 <건방진 신문팔이>가 발표된 해는 1974년. 이때는 한국 언론의 암흑기였다. 유신 정권의 통제 속에 공정한 보도를 해야 할 신문은 강제적으로 폐간되었다. 민국일보처럼 정권에 밉보인 끝에 폐간하는 신문이 많았다. 일부 신문은 시퍼런 권력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의 앞잡이 역할을 했다. 권력의 힘을 믿고 폭력의 자유를 선택한 것이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만큼 민족 정론지를 자처한다. 자신들이 일제에 항거했으며,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 불씨를 지폈고, 민주화 이후에는 권력 감시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불행하게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이런 일방적인 주장을 사실이라고 믿는다. 특히 젊은이들은 이들 거대 신문사들이 어떤 치욕스러운 역사를 감추고 있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다.

 

사실 역사를 돌아보면 한국 언론은 이미 일제 강점기부터 폭력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왔다. 강자인 일본 제국주의와 군사 독재에 언론의 자유를 포기하고 약자인 민중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유를 누렸다.

 

 

 

 

 

 

 

동아일보는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을 자신들이 항일 민족지였다는 주장의 근거로 내세운다. 1936년 8월 10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지워서 게재한 곳은 몽양 여운형 선생이 사장으로 있었던 조선중앙일보였다. 그러나 그때는 인쇄 품질이 좋지 않아 총독부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11일 뒤 동아일보에도 일장기가 지워진 사진이 게재된다. 이길용 기자가 경영진 몰래 편집해서 올린 사진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송진우는 이길용 기자를 불러다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버렸다”고 호통을 쳤다. 이사장 인촌 김성수와 고위 간부들은 사진 한 장 때문에 신문사가 무기정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전전긍긍했다.

 

 

보전(보성전문-고려대의 전신) 이사실에서 이 사실을 전화로 연락 받은 인촌은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 급히 동아일보사로 오는 자동차 안에서 인촌은 히노마루(일장기)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33쪽)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사건은 동아일보보다 조선중앙일보가 먼저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정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들의 뇌리 속에는 '동아일보가 먼저'라는 생각이 우세하다. 왜냐하면 동아일보가 창간기념일 등을 통해 그동안 '일장기 말소 사건'을 자신들의 최대 업적인 양 대대적으로 미화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1922년에 물산장려운동을 홍보했을 정도로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았고, 수시로 폐간을 당하여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기부터 친일 행적을 보이기 시작했다.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김성수는 학병을 모집하는 글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쓰는 한편, 전쟁물자 지원에도 앞장서는 친일 활동을 하였다.

 

조선일보는 1937년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을 ‘아군’이나 ‘황군’으로 불렀다. 그해 12월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1면 머리기사로 ‘아군의 승승장구’를 대서특필했다. 친일신문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일제 기관지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폐간년도인 1940년까지 조선일보의 신년호 1면은 대부분 일본왕의 신년 하례행사와 총독의 연두사로 채웠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친일 행각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놀라운 건 해방 이후 이들의 생존 방식이다.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논란이 거셌던 1945년 12월,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한다”는 왜곡 보도를 내보낸다. 실제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주장한 쪽은 미국이고 소련은 시기가 짧을수록 좋다는 의견을 냈다. 동아일보의 보도는 명백한 오보였지만 그 여파는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동아일보의 보도 이후 신탁통치에 찬성한 세력은 좌익으로 몰리고 친일파와 미국을 상전으로 모시는 외세의존 세력들이 오히려 지배계층을 재구성했다. 다수 국민들의 반식민지․반외세 감정을 포착해 ‘신탁통치는 또 다른 식민통치’라는 선전구호 아래 국내의 자주·민주세력을 매도하고 친일파를 다시 등장하게 만들었다.

 

민족 자주의식을 말살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데 앞장섰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해방 이후에 신문 보도를 통한 이념 갈등을 고착화시켰다. 일제의 앞잡이들이 해방 이후 미군의 앞잡이가 됐던 것처럼 이 신문들은 좌익을 적으로 내몰면서 일제 시절에 쌓은 권력 기반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민족지를 참칭하는 것은 참으로 후안무치한 일이다.

 

 

 

 언론탄압 속 한 줄기 희망, 동아투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반공을 명분으로 친일파 공화국의 탄생에 주도적으로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군부의 5·16 군사 쿠데타를 적극 지지했으며 유신독재를 노골적으로 찬양했다. 여기에 중앙일보도 찬양 일색의 기사와 논조를 보내기 시작했다. 정권의 폭압에 눈 감고 인권유린을 외면하고 역사를 왜곡했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폭도들의 반란으로 매도했고 전두환 정권이 내려 보낸 보도지침을 충실하게 따랐다.

 

박정희 정권이 구사한 가장 반민주적인 통치행위는 언론의 비판에 재갈을 물린 공작이었다. 유신독재 아래서는 수시로 긴급조치를 선포해 특정 이슈에 대한 언론의 비판적 보도를 금지했다. 언론 공작 중 가장 심한 것은 비판적 언론인의 강제해직과 광고탄압이었다. 특정 언론사가 눈 밖에 나면 그 광고주들을 겁박해서 수입원을 틀어막았다. 국가안보를 위해 설치한 중앙정보부 같은 국가정보기관이 광고주인 기업인을 겁박하는 야만적 공작을 담당했다.

 

1974년 젊은 동아일보 기자들 중심으로 10.24 자유언론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중앙정보부는 이 신문에 광고를 게재해 온 기업들을 압박했다. 동아일보는 곧바로 광고 해약사태에 직면했다. 신문은 광고면을 백지로 둔 채 인쇄됐다. 정권 측의 광고탄압이 알려지자 전국적으로 성원광고들이 답지했다. 그러나 독자들의 성원광고는 지속적으로 장기화할 수는 없다. 그것으로 신문사의 광고 수입을 대체하기엔 턱 없이 모자랐다.

 

당시만 해도 동아일보사의 총수입은 대체로 구독료와 광고료가 반반 정도여서 지금에 비하면 광고 수입의 비중이 그다지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영상 광고료 수입은 매우 중요했다. 광고 수입의 숨통을 조이는 공작으로 신문사 사주 측은 결국 비판적 기자들을 해직시키면서 중앙정보부와 타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동아일보사는 130여명의 기자를 해직시켰다.

 

당시 동아일보에서 거리로 쫓겨난 기자들이 결성한 동아일보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언론 뿐 아니라 한국의 정치, 사회문화, 학계 및 교육 분야에서 실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1977~78년 엄혹하던 유신독재 말기에도 이들은 ‘동아투위소식’이라는 제3의 언론을 만들어 배포했다. 제도권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반독재 시위와 인권탄압 사건들을 게재했다. 정권 측이 가만 둘리 없었고 동아투위는 위원장과 총무 상임위원 전원이 불법 연행, 구속, 기소당했다. 동아투위의 등장은 한국의 언론사와 민주화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제도언론에 맞서 언론의 사명을 일깨워주었다.

 

 

 

 진보 신문도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동아일보, 한겨레신문 전직 기자였으며 현재 통아투위 위원장으로 활동 중인 원로 언론인 김종철은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거대 신문사들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공개한다. 그러나 진보 진영에 위치하는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역시 연륜이 느껴지는 원로 언론인의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들 역시 공정한 언론의 사명과 어긋나는 행보를 보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이승만 정권 시절 조선일보, 동아일보보다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기록한 중도 노선 신문이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보도를 많이 내다가 잠시 폐간되기도 했다. 4월 혁명 이후 출범한 장면 내각 정권 시절에 복간되었다. 그러나 거대한 권력의 대세 앞에서 공정성과 중립성을 그대로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경향신문도 5.16 군사 쿠데타를 찬양하고 한때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장면 내각을 비판하는 논조를 펼쳤다.

 

한국 언론 보도의 가장 큰 문제점을 두 가지를 꼽자면 이념에 치우친 편향적인 논조를 펼친다거나 특정인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킬 수 있는 자극적인 상업주의적 보도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박연차 게이트 사건에 조중동 보수 언론과 경향, 한겨레 등 진보 언론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인신공격성 보도를 내놓았다. 그랬다가 노 전 대통령 사망 이후 보수, 진보 언론은 추모 보도를 내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추모 열기에 보수, 진보 언론이 합세했다. 노 전 대통령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노무현 죽이기’에 나섰던 언론이 ‘노무현 살리기’로 돌변한 것이다.

 

 

 

 

 ♣ 힘있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신문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최근 종편채널 JTBC는 가장 영향력 있고 신뢰도 높은 손석희 보도담당 사장을 앵커로 내세워 사실·공정·균형·품위를 강조하는 뉴스의 시작을 알렸다. 종편채널에 재벌 기업들이 주주로 참여한 사실을 본다면 방송의 공정성을 기대하기 힘든 구조다. 과연 ‘언론-기업’으로 연결된 침묵의 카르텔을 JTBC가 깰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일이다.

 

‘힘 있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뉴스’뿐만 아니라 신문도 나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력과 대자본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공정한 사실을 보도할 수 있는 자유언론의 가치가 확립되어야 한다.

 

필화사건으로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한 천관우 선생은 권력 앞에서 공정의 정도를 상실하고 무기력해지는 언론계를 ‘연탄가스 중독’의 비극이라고 표현했다. 연탄, 그리고 대놓고 기사 검열에 나서는 중앙정보부 기관원이 사라진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한국 신문은 왜 ‘힘 있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신문’이 되지 못하는가?

 

힘없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폭력의 자유를 누리던 시대는 지났다. 한국 언론이 ‘보이지 않는 힘’을 무서워한다면 균형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보수와 진보 매체는 종합적인 시각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언론 보도가 위축된다면 공론의 장이 축소될 수 있다. 수용자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진실성이 있는 보도를 위해 검증의 저널리즘을 실천한다면 언론 보도의 신뢰를 높일 수 있다.

 

한국 현대사와 함께했던 언론의 옹졸한 행보가 남긴 흔적을 보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조중동에 대한 분노에만 그쳤다면 이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다. ‘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신문’은 있어도 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은 훌륭한 언론인들도 있었다. 그들의 업적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 역사 앞에서 대하는 우리들의 올바른 자세이다. 특히 언론인을 꿈꾸는 젊은이라면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의 책은 필독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프랑스의 원수 샤를 드골은 반민족적 행위를 일삼은 독일 나치 협력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때 가장 먼저 법의 심판을 받은 피고인들은 언론인들이었다고 한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던 시기 때 독일을 찬양하고 연합군과 드골 세력을 비난했던 기록의 증거들 때문에 ‘히틀러의 나팔수’들은 처벌을 받게 되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있다. 문장의 힘은 무력(武力)을 무력(無力)화시킨다. 하지만 펜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자신의 심장을 날카롭게 찌를 수 있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진짜 언론인은 힘 있는 사람을 찬양하는 건방진 ‘나팔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힘 있는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정론직필의 ‘명사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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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 - 노동은 우리의 감정을 어떻게 상품으로 만드는가
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 이가람 옮김 / 이매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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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웃으세요, 웃으면서 일하세요!

 

“일곱 살짜리 애를 업고서 눈길을 헤쳐 가며 공장에 데려가고, 데려오고 했어요. 아이는 하루 열여섯 시간씩 일했죠. 애가 기계 옆에 서서 일하는 동안 제가 꿇어앉아 음식을 떠먹인 적도 많았어요. 아이가 기계 옆을 떠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기계를 멈출 수도 없었으니까요.” 이 아이는, 증기기관에 석탄과 물을 공급하듯 일하는 동안 식사를 공급받는 ‘노동의 도구’였다. 벽지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어느 아이의 어머니가 1863년 영국 아동고용위원회에 제출한 증언을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인용한 것이다.

 

<자본론>이 출간된 지 백여 년이 지난 뒤 미국 델타 항공의 승무원 연수센터 강당이다. “여러분, 근무할 때는 진심을 담아 웃어야 합니다. 미소는 여러분의 가장 큰 자산입니다. 나가서 그 자산을 활용하세요. 웃으세요. 진심을 담아서 웃는 겁니다. 진심으로 활짝 웃으세요.” 강의를 하는 조종사는 미소를 승무원의 자산이라고 말했다. 얼핏 보기에는 공장 노동에 시달리는 19세기의 어린이와 20세기의 승무원을 둘러싼 환경의 차이는 아주 큰 것 같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생각지 못한 공통점에 이르게 된다. 승무원의 경우 서비스를 제공할 때의 감정 상태도 서비스의 한 부분이다. 그들은 항상 웃으면서 일을 해야 된다.

 

 

 

 

 ♣ 정신을 병들게 만드는 감정노동

 

미국의 사회학자 혹실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자신의 감정을 고무시키거나 억제하는 것을 ‘감정노동’이라고 불렀다. 그는 미국 항공회사의 승무원과 추심원을 대상으로 감정노동에 대한 연구를 하였으며, 타인의 기분을 좋게 하는 승무원이나 타인을 불쾌하게 하고 위축되게 만드는 추심원이 하는 일을 똑같이 상대방의 감정을 변화시키기 위해 수행하는 노동이라고 보았다. 항공 승무원과 추심원으로 대표되는 감정노동의 양극단을 묘사한 이유는, 이 두 극단 사이에 놓인 직업들에서 요구하는 감정적인 업무의 엄청난 다양성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미국 전체 노동자 중 3분의 1 이상이 감정노동을 포함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인정받지도 못하고, 존중받지도 못하며, 고용주들이 업무상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고려한 적도 거의 없다시피 한 업무 차원을 경험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감정노동자 덕분에 공적 생활 속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날마다 완전히 모르거나 또는 거의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믿고 즐겁게 거래할 수 있는 것이다. 혹실드는 기업의 세계에 전면과 후면이 있다고 본다. 전면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후면은 그 서비스의 내용을 추심한다. 사회복지사, 주간 탁아 보모, 의사, 변호사는 비공식적인 직업 규범과 고객의 기대를 고려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감정노동을 감독한다. 감정노동에도 성별 차이가 있다. 남성이 종사하는 직업 중 감정노동을 포함하는 직업은 4분의 1 정도이지만, 여성이 종사하는 직업에서는 그 비율이 절반을 넘는다.

 

지속적인 감정의 억제, 감정 관리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거짓된 자아를 지속적으로 연출하는 것은? 혹실드는 자아도취적 거짓 자아를 발전시키는 것이 남성에게 더 큰 위험이라면, 이타주의적 거짓 자아를 발전시키는 것은 여성에게 더 큰 위험이 된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의 감정노동의 대가로 기업은 이윤을 거둬들이지만, 상업적 목적을 위해 내면의 실제 감정과 달리 특정한 감정을 표출하는 업무를 오래도록 하게 되면 노동자들은 자기 소원, 소외, 진정성 상실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고 한다.

 

 

 

 

 ♣ 감정노동자, 함부로 대하지 말자

 

과잉 친철은 누구에게나 부담스럽다. 대형마트에 들어서면 여성 점원은 예의 ‘고객님 어서 오십시오’라며 허리를 90도로 꺾는다. 일순간 고객은 혹시 아는 사람인지 눈길을 주게 된다. 인사와 말투는 깍듯하고, 미소 역시 안면 신경을 마비시킬 정도로 얼굴에서 지워질 줄 모른다. 처음 어리둥절했던 심사는 이내 어색하고 불편함으로 바뀐다. 고객과 점원 사이,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감정의 충돌과 부조화가 일어난 것이다.

 

감정노동자들의 감정적·정서적 소진은 일차적으로 대기업들의 고객제일주의 탓이다. ‘고객은 왕’이란 슬로건에 맞추자면 접객 종사자들은 노예 아닌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상품의 질로 승부하는 고도 자본주의 시장에서 이러한 웃음과 친절 마케팅은 시대착오적인 게 분명한데, 여전히 상품의 조악함과 경영진의 무능을 엄폐하는 유효한 수단이 되는 서글픈 현실이다.고객은 또 어떠한가. 정말로 ‘왕’으로서 손색이 없는가. 종업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듯, 고압적인 자세로 억지를 부리고 함부로 하대를 하며 스스로 못난 꼴을 보인 ‘진상’ 손님은 아니었는지, 반성은 하되 아니라고 자신하기는 어렵다. 기업주와 함께, 우리 모두가 감정노동자의 노동강도를 참을 수 없는 수위로 높인 주범인 것이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가족 관계에서도 어린아이가 아니면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다 드러내지는 않는다. 부모 또는 자식으로서 감정 관리를 하고 기본예절을 지킬 때 화목한 가정이 유지된다. 물론 감정노동자와 고객의 관계는 경제적 거래 관계라는 조건이 있지만, 거래에 합당한 만큼 주고받는 것이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겠는가? 아무리 돈을 준다 한들 거기에 욕설을 듣고 뺨 맞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지는 않을 터. 둘러보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 중에도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감정노동과 그 치유에도 관심을 가져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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