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퀴아노의 흥미로운 이야기
올라우다 에퀴아노 지음, 윤철희 옮김 / 해례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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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56] 재미있는 이야기

 

 

 

 

영국 중학생들은 자국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정규 수업시간에 배운다. 2008년부터 11∼14세 중학생들이 노예제도의 실상과 영향, 저항운동과 폐지 과정 등을 배우도록 의무화되었다. 학생들은 제국주의 시대 영국이 어떻게 노예무역에 개입했고 노예무역이 영국 무역과 산업혁명, 국제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등을 전반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동안 영국 중학교 역사 과목에서 제1,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대학살 등은 정규 수업내용에 포함돼 있었으나 노예제도는 배제돼 있었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 언급되는 핵심 인물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이 새롭게 포함되었는데 그 중 눈여겨 볼 이름이 바로 올라우다 에퀴아노라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인물이다.

 

노예서사의 원형은 올라우다 에퀴아노의 자서전이다. 나이지리아 태생의 노예였던 그가 1789년에 쓴 ‘아프리카인 올라우다 에퀴아노, 혹은 구스타프 바사의 재미있는 인생이야기’는 자신의 경험을 상세히 묘사해 베스트셀러가 됐다.36판을 찍을 정도로 널리 읽혀 그는 18세기 말에 미국 흑인이 보여준 독립정신의 대표 인물로 여겨졌다. 이 책에서는 아프리카로부터 서방에 이르는, 즉 노예로의 관문인 ‘중간항로’의 참혹함을 지옥으로 하강하는 은유로 표현했다.

 

지금의 나이지리아에서 1745년 태어난 에퀴아노는 11살 때 여동생과 함께 노예 사냥꾼에게 납치된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인 미국의 버지니아로 팔려간 그는 주인 마이클 파스칼 밑에서 일하면서 그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니며 읽기를 배우고 기독교 신자가 된다.

 

그는 이후 무역업을 하는 로버트 킹에게 팔려갔다.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킹은 노동의 대가로 에퀴아노가 모은 40파운드를 받고 자유의 몸이 되게 해준다. 이후 영국으로 간 에퀴아노는 노예무역 폐지 운동가들과 합류, 강연에 나서고 자서전 출간 이후로 노예제도 폐지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백인 여성과 결혼해 적잖은 부를 쌓을 정도로 영국 정부가 신뢰하는 흑인으로 명성을 누렸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영국 사회에 야만적인 노예무역을 반성하고 이를 없애자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에 불을 불인 것은 노예 출신 작가 올라우다 에퀴아노의 자서전이었다. 에퀴아노는 자서전에서 입에 쇠로 재갈을 물린 채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며 고문과 중노동에 시달리는 노예의 비참한 삶을 생생하게 전했다.

 

주인님 밑에서 일을 맡아 하는 동안 나는 내 불행한 동료 노예들에게 자행되는 온갖 종류의 잔혹 행위를 자주 목격했다. 나는 새로운 니그로들을 판매용 화물로 취급하는 일을 자주 했다. 그런데 우리 사무원이나 다른 백인들이 여자 노예들의 순결을 잔혹하게 짓밟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일은 꾸준히 벌어지는 관행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일이 벌어질 때면, 그들을 도울 도리가 없는 나는 약간은 주저하면서도 늘 상황에 굴복해야만 했다. (166쪽)

 

 

이 책이 펭귄 클래식 100선에 꼽힌 것은 그만큼 문학사적으로도 이 책의 가치가 높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만큼 노예 문학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작품이다. 아프리카 노예 출신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영어 표현력과 사건 묘사 능력이 뛰어나다. 책 속에서 성경 구절과 밀턴의 『실락원』 구절 등을 적재적소에 인용하는 것으로 보건대 에퀴아노는 지적 수준도 매우 높았다.

 

인간 특성의 하나는 잠재력을 계발시킬 가능성에 있다. 특히 장애나 제약을 극복하고 가능성의 단계를 드높인 인간 승리자에게 우리는 존경에서 우러나오는 찬탄을 아끼지 않는다. 에퀴아노가 그런 인물이었다. 노예무역을 금지하도록 영국의회에 낸 청원서도 서두에 소개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문학적 가치도 없는 내 글을 읽게 하는데 대해 용서를 간청해야 됨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고통 받는 동포를 구해 내기 위한 도구가 되려는 희망으로 고무된 것이니 만큼, 그 대담함이 용서되리라 믿는다.” 당대 백인이 갖고 있던 흑인에 대한 지능적, 도덕적 열등함에 대한 편견을 꼬집고, 흑인은 글로써 자신을 표현하기에 너무 무식하다는 통념도 뒤집어 놓았다. 비록 영국인으로써 명예로운 대우를 누려도 ‘흑인’으로써의 정체성만큼은 잊지 않았다. 노예 해방 운동을 위해 순회 여행을 다닐 때나 저술을 할 때에는 구스타프 바사라는 이름을 씀으로써 아프리카인임을 내세웠다.

 

비록 에퀴아노가 영국에서 인정받는 흑인 명사가 되었으나 그의 사후 10년 만인 1807년, 노예무역법이 폐지되기에 이른다. 사실 힘 있는 자들이 만든 노예제도법보다 더 무서운 건 노예를 잔인하게 대하는 비윤리적인 대우와 그들을 멸시하는 인식이다. 노예의 삶은 때론 동물보다 못했다. 잔혹한 매질에 시달리는 데다 음식부족으로 반 아사 상태에서 때로는 돼지와 먹을 것을 놓고 다툰다. 극단적인 노동으로 움직임이 둔한 열서너 살의 노예를 몽둥이로 쳐 죽이는 여성 노예 주인이나 남자다움을 과시하기 위해 노예를 처형했다는 노예감독도 있었다. 오랜 노예 생활을 몸소 체험했고, 끔찍한 노예의 삶을 목격한 에퀴아노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인식의 변화를 꾀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인종 차이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자행됐다. 미국에서 심심찮게 일어난 인종에 관련된 ‘증오범죄’나 세계의 인종분규가 이를 증명한다.

 

에퀴아노의 자서전은 그가 단순히 노예의 한 많은 삶을 극복하고 ‘브리티쉬 드림’을 이뤄냈다는 것이 아니다. 독특한 통찰력을 통해 노예의 심리 상태 및 노예 제도가 흑인들에게 안겨준 고통을 보여주고 있다. 제목의 ‘흥미로운’이라는 단어에 노예제 폐지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일부 영국 상류층 사람들은 단순히 사회 진출을 꿈꾸는 흑인의 성공 스토리로만 치부했을 것이다. 흑인 노예가 따르는 차를 마시면서 편안하게 안락의자에 앉아 사회적으로 성공한 흑인의 자서전을 흥미롭게 읽는 어느 영국 귀족의 모습이 어렴풋이 상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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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3-11-03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책 제목 자체가 좀 잘못된 것 같다만
너의 리뷰 제목도 좀 헷갈리는데가 있는 것 같네.
제목은 그렇게 쓰고 별점은 네개라서 말이지...ㅋ
아무튼 영국 사람들은 대단하네.
일본도 좀 배워야 할텐데 말야.

근데RP는 뭐지?^^

cyrus 2013-11-03 23:27   좋아요 0 | URL
이 책 원제를 풀이하면 '에퀴아노의 흥미로운(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왜 이런 제목을 짓는지 궁금했어요. '흥미로운', '재미있는'이라는 형용사가 없으면 책이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흑인 노예의 비참한 생활상을 묘사하는 내용이 있다는 사실만 보면 그렇게 흥미롭지는 않죠. 그리고 별 네 개를 준건, 에퀴아노 이 사람이 노예 해방이 되고나서 바다를 항해하는 여행을 하게 되는게 전 그 부분이 좀 지루했어요. 노예제의 부당함에 대한 내용이 없으면 흑인 노예의 성공담이 되었을꺼에요.
 

 

 

 

 

 

 

시뮬라크르라는 말은 사건·이미지와 의 동일한 말로서 순간적인 것, 지속성을 가지지 않은 것, 자기 동일성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 자체로는 지각되지 않으며 오직 감각 가능한 최소시간 내 그들의 합(지각)만이 지각가능하다. 따라서 플라톤에 따르면 시뮬라크르 쪽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존재는 점점 더 적어지며 그에 따라 가치 또한 점점 적어지게 된다.

 

사건은 물체에 ‘부대하고’ 언어에 대해 ‘표현전도’, 즉 언어의 표현을 통하여 사건이 분절된다. 따라서 사건을 사유한다는 것은 물질적인 차원과 정신적인 차원, 자연의 차원과 문화적 차원의 접촉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도 시뮬라크르를 사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는 공간보다는 시간을, 엄밀한 결정론보다는 우연, 창조, 불연속 등을 중시한다.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등장한 문제가 시뮬라크르이다. 모델과 사본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 위에 근거한 플라톤주의를 전복시킴으로써 우리 현실의 삶에 대한 새롭고 깊은 통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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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3-11-01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뮬라크르 하믄, 보드리야르밖에 생각이 안난다능~ㅎㅎ

사이러스님, 11월 단풍이 아름답게 들었더이다~ 단풍구경하면서 저무는 가을을 만끽하시길~^^

cyrus 2013-11-02 22:00   좋아요 0 | URL
보드리야르의 책도 읽고 있는 중인데 어렵네요.. 이 글을 쓰면서 제가 개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네요.. ^^:;
감사합니다. 야무님. 어제 서울에 갔는데 날씨가 참 좋더라고요. 간만에 느껴보는 가을 날씨였어요.
 

안녕하세요, 민음사입니다. ^^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03 윤고은 <밤의 여행자들>

에 이어 금세 새로운 서평 이벤트로 찾아왔습니다. 


서평단 책을 소개하기 전에 한가지 힌트를 드리자면,

윤고은 작가와 마찬가지로 

혈기가 넘치는(!!) 젊은 소설가라는 점입니다.


이번 서평단의 주인공은 바로

2013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자인 이재찬

「펀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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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올해의 작가상「펀치」는 내신 성적 5등급, 외모도 5등급인

18살 여고생 방인영이 40대 계약직 공무원 ‘모래의 남자’에게 부모 청부살해를 의뢰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담았습니다. 


방인영은 재력과 명예를 고루 갖췄지만, 재벌총수와 사회 고위층의 비리를 변호하는

아버지를 경멸하며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방 변호사'라고 칭합니다. 


또한 자신의 성적에 열을 올리며, '방 변호사'에게 사랑받기 위해 몸무게 유지에

여념없는 어머니에게도 등을 돌립니다.


방인영은 '딸을 외고 보내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계급이기에 억울함'(p.12)을 가진 부모에게,

혈연이기에 잔존할 수 밖에 없는 자잘한 애정까지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문제의식 뿐만 아니라, 이재찬 작가만의 경쾌한 말맛과 뒷통수를 때리는 신선한 시각은

책을 덮을 때까지 눈을 뗄 수 없는 속도감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2013 오늘의 작가상 심사평 중_

이 소설이 지닌 온갖 장점 중에서 이른바 ‘타고난 감각’ 혹은 ‘선천적 재능’으로 부를 만한 것 하나만을 꼽으라면, 나로서는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는 흑마술’이라 대답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건 사기다. 그러나 이 작가가 제대로 사기를 쳐 주어서 나는 기뻤다.

—심사평 중에서|박형서(소설가)

 

이야기가 경쾌하고 문장이 좋다. 문장들을 읽어 가다 보면 사물(사태)의 본질을 재빨리 포착해서 이를 발랄하게 드러낼 줄 아는 감각이 느껴진다. 우리 문단에 의미 있는 한 방을 날려 줄 수 있는 작품이다.

—심사평 중에서|정영훈(문학평론가·경상대 국문과 교수)




2013 오늘의 작가상 수상자 이재찬 작가, 그는 누구인가?_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0년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에서 「버스, 정류장」이 당선되었고,
 이 작품은 2002년 3월 김민정, 김태우 주연의 동명 영화(명필름 제작)로 개봉되어 호평을 받았다. 2013년 장편소설 『펀치』로 제37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장편소설 『안젤라 신드롬』으로 제5회 자음과모음 네오픽션상을 수상했다.

영화 「버스, 정류장」을 보신 분들에게 
더없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 


2013 오늘의 작가상 이재찬 장편소설 <펀치> 중_
한국 여자의 몸매는 전통적으로 '상체 빈약, 하체 튼튼'이다. 
걸 그룹들은 그런 역사를 정면으로 거스른 '가슴 육덕, 하체 부실'이다.
몸매로는 신이 창조한 역사를 어겼지만 걸 그룹이 부르는 노래 가사는
남성이 창조한 여성의 역사에 고스란히 복종하고 있다.
"오빠 나 좀 봐. 나를 좀 바라봐." 이건 질투심이 아니다. p.20

"1등급이 아니면 기회조차 잡지 못해."
방변호사가 한 말이다. 1등급은 유전자와 부모의 재산이 결정하는 거다.
주인공이 될 수 없기에 난 궤도에서 이탈할 테다. 
안그러면 내 인생은 보나 마나 평생 들러리일테니까. p.25 

엄마와 방 변호사도 시장에서 만나 흥정한 거 아닌가.
각자의 가치를 높인 후 적당한 소비자를 물색하고 판매하기 전에
스스로 사랑을 세뇌한 후 결혼한 거 아닌가.
열성 유전자만 물려준 건 사랑이 부족해서 그런 걸까. 
사랑이 충만했다면 우성유전자들이 내가 됐을까. p.56

맨발로 엘리베이터까지 쫓아 타면서 동생한테 쌍욕을 퍼부은 
방 변호사는 누가 뭐래도 자타 공인 대한민국 엘리트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전형적인 한국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다. p.57


이재찬 작가만의 예리한 시각과 경쾌한 말맛이 느껴지시나요?


2013년 올해의 작가상「펀치」를 읽고 
서평을 써주실 분 들은 아래의 양식으로 해당 날짜까지 지원해주시면 됩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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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 : 아방가르드의 문화사 - 몽마르트에서 사이버 컬쳐까지
마크 애론슨 지음, 장석봉 옮김 / 이후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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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마르셀 뒤샹은 변기에 ‘샘’이란 제목을 붙여 전시회에 출품했다. 오늘날 이 작품과 유사한 신형 디자인의 매끈한 ‘샘’들이 예술 작품으로서의 존경은 받지 못한 채 도처에서 사람들의 생리적 욕구를 해결해주고 있다.

 

우리가 아는 ‘아방가르드’의 모습이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우리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괴짜 예술가들의 창의력 또는 기행(奇行)의 산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술의 개념을 뒤집는 ‘파괴적’ 행위와 실험들이 자아내는 진풍경들이다. 아방가르드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끝나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는 경계를 탐험’하는 작업으로써, 그 실천 방법에는 상반된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이미지 감각 충동을 좆아서 내면으로 여행’하는 방법으로서, 이 경향의 예술가들은 명상 신비주의 약물 심지어 자해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다른 하나는 ‘반항을 밖으로 표출해 경직된 규범 도덕 제도에 맞서는 예술을 창조’하는 방법으로서, 이 그룹에 소속된 예술가들은 ‘선언문을 작성하고 관객을 공격하며, 심지어 이들의 예술을 이해 못하는 관료들을 비난’ 함으로써 성과를 올리고 쾌락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끈질기게 지적하듯 아방가르드는 ‘전위’에 앞서 ‘반항’이었다. 모택동도 ‘조반유리(造反有理)’라 했으니, 반항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시초가 ‘일상생활, 도덕규범, 예술규범 등이 한 줄로 깔끔하게 늘어서’ 있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예술가라면 누구나 폭로할 수 있을 정도로 종이처럼 얄팍’한 중산층의 얄팍한 삶과 문화에 대한 반항으로 비롯됐다. 그러나 반항을 아방가르드의 전제로 본다면, 반항이 일반화되고 ‘제도’가 되는 순간 아방가르드는 설 땅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문제다. 저자도 그 점을 걱정하고 있다. ‘세계 도처가 아방가르드라면 도대체 뭐가 아방가르드인가?’ ‘충격적인 예술이 록 밴드처럼 대중성을 확보했다면 그 날카로움은 없어져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그 점을 잘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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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들라크루아 「단테의 배」 1822년

 

 

 

 

 

현실이 어렵고 세계가 불투명하게 보일 때, 마음이 어둡고 패잔감이 쌓여갈 때 떠올리는 그림이 하나 있다.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단테의 배」다. 그림을 보면 중앙에는 두 인물이 서 있다. 왼쪽은 르네상스 이탈리아 시인인 단테이고, 오른쪽은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이다. 등을 보이며 노 젓는 이는 지옥의 뱃사공 카론이다. 이들 주위로 지옥의 저주받은 자들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몰려들고 있다. 폭풍우가 몰아치듯 하늘은 어둡고 물결은 출렁이며 저 멀리 성벽이 검은 연기 속에 불타고 있다. 단테는 스승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지옥을 돌아다닌다. 이 대목은 지옥문을 지나 ‘디스’라는 도시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단테는 흰 옷에 수도사의 붉은 두건을 쓰고 있다. 왼팔은 스승에 기댄 채 오른쪽을 보며 구명을 청하듯 손을 흔들고 있다. 버질은 그 옆에서 갈색 망토를 두르고 월계관을 쓴 채 믿기 어려울 정도의 평정을 유지하는 듯하다. 단테를 다독이듯 그는 그 왼손을 잡고 있다. 요동치는 물결에 배는 금세라도 뒤집힐 듯하다. 지옥의 무리들은 뱃전을 잡거나 사람을 밀치거나 서로 싸우고 있다. 배를 드러낸 채 탈진해 있는가 하면, 배 뒷전을 물어뜯는 이도 있다. 단 한 사람, 노를 젓는 카론이 위치한 건너편에서 오른팔을 배에 걸친 사람만이 화면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다. 이 그림을 보는 당신네는 누구인가라는 듯.

 

지옥의 사람들이 배 주위를 에워싼 채 불안과 분노로 흔들리고 있다면, 배 안의 두 사람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상대적으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내게 현실에 대면하는 어떤 자세로 보인다. 거대한 현실의 격랑 한가운데에 휘말려 사투를 벌이는 우리네 인생을 보는 거 같다. 밀려오는 현실의 파도 앞에서 성난 얼굴로 밀치고 찢고 뜯고 때리는 사람들의 싸움. 분노를 이기지 못하면 늘 불안하다. 이들의 광분과 두 시인 사이의 대조. 어둠과 빛, 광기와 정적, 삶과 죽음의 드라마. 이 모든 것은 선명한 색채 안에 녹아있다. 단테가 『신곡』에서 묘사한 장면보다 한층 더 입체적이다. 들라크루아가 묘사한 지옥은 파괴와 살육, 그리고 화재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인간의 영원한, 나아질 수 없는 야만을 증거”한다. 관객의 시선은 저주받은 자들에게서 항해하는 자, 노 젓는 자에게서 손짓하는 자로 나아가고, 명상하는 자로부터 허우적거리는 자로 다시 돌아온다.

 

오늘의 우리는 단테처럼, 또 단테를 그린 들라크루아처럼 지옥의 강을 따로 떠올릴 필요가 없다. 지금의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도 육체도 고통의 기억 없이, 추방의 경험 없이 살 수는 없을까? 스스로 인간성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수치에 불과하다. 살아 있을 때 선하지 않으면 진흙 속 돼지와 다를 바 없다. 예술의 보편성은 바로 이 점, 당파나 관점을 벗어나 오늘의 지옥을 반성하는 데 있다. 그래서 죽은 자의 영혼 이야기는 산 자의 행동에 대한 얘기가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들라크루아의 그림도, 단테의 시도 그르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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