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 첫 번째 글 조각 : 序

 

 

인색함과 방탕함으로 인해 저들은 아름다운 세상을 잃고 저렇게 싸우니, 그게 어떤 것인지 꾸밈없이 말해 주마. 아들아, 행운에게 맡겨진 재화 때문에 인류는 그토록 아귀다툼을 하는데, 그 짧은 순간의 기만을 보아라. 달의 하늘 아래 있고 또 예전에도 있었던 그 모든 황금은, 이 피곤한 영혼들 중 누구도 편히 쉬게 하지 못할 것이다.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 편』제7곡, 58쪽, 열린책들)

 

 

 

 

 ♣ 두 번째 글 조각 : 인디언이 곰을 사냥하는 방법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덫을 사용해 곰을 사냥했다고 한다. 커다란 돌덩이에 꿀을 바르고 나뭇가지에 밧줄로 메달아 놓으면 훌륭한 덫이 된다. 꿀을 바른 돌을 발견한 곰은 먹음직스러운 먹이로 생각하고 다가와 발길질을 하면서 돌덩이를 잡으려고 한다.

 

그러면 곰의 발길에 채인 돌덩이가 진자운동을 한다. 밀려갔던 돌덩이가 돌아올 때마다 곰을 때린다. 곰은 화가 나서 점점 더 세게 돌덩이를 때린다. 곰이 돌덩이를 세게 때리면 때릴수록 돌덩이는 더 큰 반동으로 곰을 후려친다. 마침내 곰은 나가떨어진다. 곰은 이 기묘한 폭력의 악순환을 중단시킬 방법을 생각해낼 줄 모른다. 그저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해 더욱 안달할 뿐이다.

 

만일 곰이 돌덩이 때리기를 중단하면 돌덩이도 움직임을 멈출 것이고 돌덩이가 일단 멈추면 곰은 그것이 밧줄에 매달려 있을 뿐 움직이지 않는 물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곰은 이빨로 밧줄을 잘라 돌덩이를 떨어뜨려 꿀을 핥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곰은 힘으로 자신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는 듯 행동할 때가 많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일단 힘으로 제압하려 든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 나오는 일화다.

 

 

 

 ♣ 세 번째 글 조각 : 가이아가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지구가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라면 그 이름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영국의 저명한 대기학자인 제임스 러브록이 같이 산책을 하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윌리엄 골딩에게 물었다.  "가이아(Gaia)가 좋겠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이지."

 

지구가 하나의 생명체라는 가설, 즉 "가이아 이론"은 이렇게 해서 이름 붙여졌다. 1978년 제임스 러브록이 창시한 이 이론에 따르면 지구는 인간처럼 살아 있다고 본다. 외부 조건이 변하더라도 내부조건을 일정하게 유지함으로써 생물체가 살기에 적합하도록 능동적으로 환경을 조정하는 일종의 유기체가 지구라는 주장이다. 물론 기성 학계로부터는 이론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설로 보고 있다.

 

꼭 가이아 이론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연장선상에서 인간을 지구라는 생명체에 질병을 일으키는 병원체로 비유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대기오염 같은 환경파괴는 말할 것도 없고 농사 등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활동을 포함한 일체의 인간 활동이 지구라는 생명체에는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이들은 지진, 이상기후 등 인간에 해를 끼치는 자연재해야말로 병원체를 몰아내기 위한 지구의 자기방어활동이라고 말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신작 『제3인류』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가이아를 소환한다. 그런데 이야기 중간에 등장하는 가이아의 독백은 슬프고 분노에 차 있다. 지구상의 생명체에 대한 우월함에 사로잡힌 인류가 가이아에게 해를 끼치고 있으니까.

 

“인간들이 이렇게 깊이 파고들어 올 때는 언제나 똑같은 이유가 있어. 내 석유를 퍼 올리려는 것이지. 이 물질은 바로... 나의 피, 나에게 없으면 안 되는 검은 피이다. 저들이 그 사실을 알아주면 좋으련만. (중략) 대개의 경우 저들은 매번 똑같은 이유로 그것(석유)을 내게서 훔쳐간다. 목적은 그저 분주하게 움직이는 데 사용하기 위함이다. 대개의 경우 저들의 목표는 저희의 출발 지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29쪽)

 

정식적으로 소설가가 되기 전부터 과학소설을 탐독했던 베르베르는 ‘명탐정 셜록 홈즈’ 시리즈로 유명한 영국의 추리 작가 코난 도일의 선구적인 SF 소설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도일 SF’의 홈스라고나 할 챌린저 교수가 등장하는 ‘지구가 비명을 질렀을 때’라는 단편이 있다. 이 소설은 지구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상정한다.

 

챌린저 교수가 시추기로 지구의 지각을 뚫고 마침내 지하 13.2㎞의 ‘속살’을 찔러대자 지구가 무시무시한 비명을 지른다는 얘기. 러브록이 주창한 이른바 ‘가이아 이론’과 유사한 설정이다. 그러나 가이아 이론이 발표된 게 1979년이고 도일의 단편은 1928년에 나왔으니까 50년이나 시대를 앞선 작품이다.

 

지구는 인간의 생리현상과 비슷하게 살아 숨쉰다. 체온(대기)과 허파(아마존 유역 등 삼림지대), 피와 수분(바다, 강) 그리고 신체(암석, 흙)를 지니고 숨 쉬며 살아온 생명체다. 인류의 눈 먼 탐욕 때문에 지금 가이아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좀 가혹한 얘기지만 인간이 개발이나 산업화 등의 명분으로 지구에 어떤 일을 해왔는지 돌이켜보면 그럴 법도 하다. 어쨌든 이 논리를 확대하면 화산폭발, 지진, 홍수 등 인간에게는 재앙인 자연재해는 지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유해 세균’을 털어내는 자기 정화작용이라고 할 만하다. 실제로 자연재해는 과거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인간의 잘못에 대한 신의 분노로 믿어졌거니와 가이아 이론은 이를 생명체 지구의 분노로 바꿔놓은 셈이다.

 

하지만 인류는 가이아의 비명을 듣지 못한다. 그녀가 흐르는 ‘자기 정화’와 우리를 향하는 분노가 담긴 눈물의 의미를 모르는 건 당연하다. 그동안 참고 쌓아왔던 가이아의 분노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슈퍼 태풍 ‘하이옌’이 휩쓸고 지나간 필리핀의 상황을 지켜본 전 세계 사람들은 지구가 주는 경고의 무서움을 느꼈을 것이다. 허나 가이아의 비명을 직접 듣기 위해 ‘신성한 소통’을 시도하려는 오로르(『제3인류』에 등장하는 여주인공)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또다시 잊을 것이 분명하다.

 

 

 

 ♣ 네 번째 글 조각 : 이야기에 심어 놓은 '가능성의 나무' 

 

베르베르는 데뷔작『개미』부터 『타나타노트』『뇌』『신』과 같은 두 권 이상 분량을 뽑는 장편뿐만 아니라 단편도 집필했다. 그는 이야기를 빠르게 지어내는 능력을 유지하고 싶어서 매일 저녁 한 시간을 할애하여 단편소설을 썼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럼으로써 오전 내내 ‘두꺼운 소설’을 쓰는 데서 오는 긴장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단편은 단순히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부차적인 장르가 아니다. 『개미』부터 지금까지 발표한 모든 소설과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읽어 본, 나름 ‘베르베르’의 팬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독자라면 단편과 백과사전에서 보여준 무한한 상상력이 장편으로 연장된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이라는 친숙한 소재에 ‘만약...’으로 시작하는 낯선 상상력의 옷을 입히고, 진지한 성찰까지 더해져 장편으로 재등장하는데 독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려준 전작에 보여준 상상력을 환기시켜 준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보자. 베르베르가 선보이는 전개방식대로 과거로 돌아가 기억해보는 것이다. 2002년은 월드컵으로 한반도는 붉은 함성이 가득했지만, 그 때도 베르베르의 인기는 식지 않았으니 이 때 나온 첫 단편 모음집이 『나무』다.

 

여기에 수록된 이야기 중에 ‘가능성의 나무’라는 제목의 단편이 있다. 이제 막 베르베르의 문학적 상상력에 입문한 독자라면 그것의 원천들을 모은 총합이라 할 수 있는 『나무』를 읽어 볼 것을 권한다. 『나무』를 읽었는데 그 이야기가 어떤 내용인지 기억이 안 난다고? 그러면 다시 읽어 보라. 특히『제3인류』1권을 읽기 시작하지 전에 읽으면 흥미로운 독서를 체험할 수 있다.

 

‘만약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면’ ‘만약 어떤 고기를 먹는 사람들 모두가 그 고기 때문에 똑 같은 질병에 감염된다면’ ‘만약 우리 뇌를 컴퓨터에 직접 접속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등등 꿈에서 ‘만약…’으로 시작되는 글귀가 적힌 잎사귀가 달린 나무를 보았다. 나무가 자라 가지와 잎이 퍼져나가면서 ‘만약…’이 이루어지는 미래를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베르베르의 상상력을 듬뿍 먹고 자란 ‘가능성의 나무’이다.

 

그런 가능성의 나무가 있다면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폭력이 방지되고, 다음 세대의 행복이 보장될 것이다. ‘가능성의 나무’는 컴퓨터에 설치된 프로그램의 이름이기도 하다. 상상의 컴퓨터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가정을 입력해서 인간 사회의 나아갈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다는 낙관적인 꿈은 상징하고 있다.

 

 

 

 

 

M. C. 에셔 「뫼비우스의 띠 II (불개미)」 1963년

 

‘과거’와 ‘미래’의 경계가 없는 ‘가능성의 나무’ 위에

호기심 많고 상상력이 넘치는 베르베르의 개미가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다

 

 

‘가능성의 나무’는 절대로 시들어서 죽지 않는다. 영원불멸하다. 인간이 자유롭게 무한한 상상력을 펼쳐나가는 것처럼 이것을 영양분으로 기반을 둔 나무는 계속 자란다. 말 그대로 무한성의 나무이기도 하다. ‘가능성의 나무’가 있는 시간은 고정적이지 않다. 유동적이며 연속적이다. 10년 전 과거 때 생각한 가능성이 우리 눈앞에 현실로 이루어지고, 지금 10년 후의 모습을 예상한 미래의 가능성은 새로운 ‘현실’로 전환된다. 무한한 ‘가능성의 나무’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과거’와 ‘미래’의 구분 경계가 무의미하다. ‘무한대(∞)’를 뜻하는 기호처럼 말이다.

 

 

 

 

 

 

베르베르는 ‘가능성의 나무’를 시간과 장소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타임머신처럼 자신의 이야기에 한 그루씩 심어 놓는다. 두 번째 단편 모음집인 『파라다이스』(1권 ‘내일 여자들은’)에서 잠깐 언급되며 미래를 볼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주인공이 나오는『카산드라의 거울』에도 나온다. 『제3인류』에서는 좀 더 과학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이름으로 독자와 재회한다. 나탈리아 오비츠 대령의 휴대용 컴퓨터에는 ‘미래로 가는 일곱 가지 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상상력을 토대로 인류에게 가능한 진화의 일곱 가지 모습을 담고 있다. 여기서도 작가는 자신의 영감을 준 문학적 상상력의 대선배를 오마주하고, 예전에 발표한 소설의 핵심 코드를 슬그머니 삽입했다.

 

세 번째 길인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로봇의 등장을 경고하는 내용은 공상과학 소설의 한 획을 그은 카렐 차페크의 『로봇』을, 네 번째 길인 ‘우주의 식민지화’에서 거대 우주선 ‘우주 나비 2호’가 언급되는데 인류의 미래를 위해 제작된 동명의 거대 우주 범선이 나오는 『파피용』을 연상시킨다. (프랑스 어 ‘Papillon’은 ‘나비’라는 뜻이다)

 

 

 

 ♣ 모자이크를 마무리 짓는 다섯 번째 글 조각 :

   과연 우리는 다음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제3인류』에 펼쳐지는 인류의 모든 지식이 버무려진 삼라만상은 독자들의 눈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정보가 아니다. 독자에 의해 능동적인 의미가 부여되는 객체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 속에는 동물과 곤충에 대한 과학적 정보는 물론이고, 그것을 통해 느끼는 작가의 철학, 가치관, 인간의 오묘함과 형이상학적 사고 등 다양한 것들이 담겨 있다.

 

『제3인류』 는 소설이 아니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삼라만상의 백과사전’이다. 인간의 판단이란 자신에게는 절대적일 수 있지만 전체적 관점에서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 또한 이와 같은 ‘시간/지식’의 상대성과 절대성이다. 『파라다이스』의 부제대로『제3인류』의 세계는 ‘있을 법한 미래, 있을 법한 과거’ 그리고 ‘있을 법한 지식’이 공존한다. 우리는 이러한 기준을 통해 '가능성의 나무'를 살피고 가꿀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두 권 분량으로 압축된 흥미진진한 상상력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쫓기에는 『제3인류』가 주는 독서의 무게감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가이아는 자신의 보존을 위해서 계속 불어나는 인류 급증 현상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산아 제한 등과 같은 예방적 억제를 하지 않는 이상, 인류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력 또한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다.『인구론』이라는 책에서 인구의 증가를 억제하지 않으면 인류는 치명적인 파멸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 멜서스의 생각(있을 법한 과거)과 유사한다. 비록 오늘날의 세계는 맬서스의 예측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왔다. 그의 생각은 빗나간 예언이었으며 틀린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이유로 과거에 ‘공상의 예언’으로 치부되고, 폐기되었던 생각과 상상력은 수십 년이 지나서야 현실로 등장하는 선례가 많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2013년이 아닌,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미래에 멜서스의 예언이 적중할 수도 있다(있을 법한 미래). 아무리 기술과 과학이 나날이 발전해도 인류의 과욕 때문에 몸살 앓는 지구의 중병이 심해진다면 대규모 식량 부족 사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파라다이스』에는 만일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지구의 50억 인구가 목숨을 잃고 20억이 살아남을 거라는 상상이 쓰여 있다. 이번 슈퍼 태풍의 위력을 보면서 사람들은 아무리 현대 문명의 과학이 발달해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보잘것없는 인간의 겸허함을 배운다. 하지만 그 시간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라는 종은 어느새 자신들의 존재의 덧없음을 망각하기 시작한다.  『제3인류』에 나오는 삼라만상은 크게 보면 인류 스스로 자초한 멸망이 만들어 낸 거대한 파노라마다. 하물며 남북한 간의 싸움부터 시작해서 종교적 차이와 갈등으로 서로 심장에 총을 겨누는 종고 전쟁까지 말할 것도 없다. 모든 싸움의 불씨인 종교와 광신적 국가주의가 없어진다면 이 세상에 파라다이스가 올까? 지구상에서 인간끼리의 전쟁이 종식된다 해도,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자연재해의 무서움은 우리에게 내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과 공포를 안겨준다. 언제 우리의 오늘이 끝장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오늘을 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카산드라의 거울』에서 미래를 보는 카산드라 카첸버그가 재판을 받는 중에 아기 검사의 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지구는 우리의 부모들이 물려준 것이 아니다. 지구는 우리의 아이들이 빌려준 것이다!” 과연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가능성의 나무’를 많이 심는다고 해서 우리의 지구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 수 있을지 예측하고 최소한 다음 세대들에게 우리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깨끗한 지구의 오염을 중단할 수 있을까?

 

베르베르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를 ‘인류 전체의 폐경기’라고 비유한 적이 있었다.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결혼과 가족의 무게는 희박해지고, 믿고 기대며 살아야 할 식량도, 마음도, 정신도 고갈이 나고 있는 형편이다. 앞으로 우리는 가이아의 복수를 극복해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 슈퍼 태풍보다 강도가 센 자연의 복수를 만날 수 있다. 과학 기술에 점점 의존하는 인류는 오만해져만 간다.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달콤한 꿀에 집착하여 탐욕에 눈이 먼 곰처럼 폭력을 믿는다. 오만하고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이여, 가이아의 복수가 두렵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애벌레가 본 것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의 내용은 어른이 되어서도 잔잔하게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다. 나비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어떻게 꽃들에게 희망을 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알에서 깨어나 애벌레, 고치가 되는 과정들을 통해 한 마리 나비가 되기까지의 과정들 자체가 희망이기 때문에 꽃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상상하기도 한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호랑 애벌레가 기둥의 정상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에 일어난 일이다. 천신만고 끝에 꼭대기에 거의 다다랐을 때 애벌레는 기쁨보다는 실망과 분노감을 느끼게 된다. 애벌레가 죽기 살기로 올랐던 기둥은 세상에 유일한 기둥이 아니었던 것이다. 수백만 애벌레가 아무것도 없는 꼭대기까지 올라오느라 평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애벌레는 그제야 깨닫는다.

 

주인공 애벌레가 목격한 장면은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높게 뻗은 수천 개의 기둥 중에서 이 시대에 가장 높은 기둥을 꼽으라면 아마도 돈과 부동산, 그리고 사회적 성공의 기둥일 것이다. 하지만 이 기둥들이 있다고 해서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서 밝혀지고 있다.

 

 

 

 ♣ 돈과 성공이 행복을 위한 절대적 기준일까?

 

 

 

 

 

 

 

 

 

사람들은 지금보다 돈이 많으면 더 행복할 거라고 믿고 열심히 돈의 기둥을 오르려고 한다. 그러나 데이비드 브룩스는 『소셜 애니멀』에서 돈과 행복의 상관성은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물론 부유한 사람일수록 행복할 확률이 높고, 부자 나라일수록 행복할 경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상관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크지 않다.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의 수천억 원대 갑부들의 행복도를 조사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돈이 많은 갑부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행복지수는 미국인의 평균보다 약간 더 높았을 뿐이다. 게다가 그들이 행복한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었다. 가족이 있고, 친구들이 있고, 삶에서 무언가를 성취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그들은 답했습니다. 말하자면 돈은 행복의 결정적인 기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도 호랑 애벌레가 올랐던 기둥은 돈의 기둥이나 성공의 기둥이었을지도 모른다. 열심히 정상을 향해 오르지만, 막상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쉬쉬하며 무턱대고 오르기만 하는 욕망의 기둥들.

 

 

 

 

 ♣ 인간관계의 중요성

 

최근 행복과 관련해서 주목하는 것이 행복감이다. 호랑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가 밟고 밟히는 경쟁의 기둥에서 내려와 둘만의 사랑을 나눌 때 느끼는 행복감. 관계는 확실히 앞의 두 기둥보다 내밀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성인 남녀 814명의 일생을 70여 년간 추적 조사한 하버드대 조지 베일런트 교수팀의 연구도 이를 뒷받침한다. 연구 결과, 65세까지 충만한 삶을 산 사람 중 93%는 어린 시절 형제자매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를 바탕으로 조지 베일런트는 『행복의 조건』에서 “행복하고 건강하게 나이 들어갈지를 결정짓는 것은 뛰어난 지적 능력이나 계급이 아니라 인간관계”라고 단언했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과 돈, 부동산의 가치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는 반면에 친밀한 유대감이나 힘들게 노력하는 과정 같은, 정작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조건들은 지나치게 낮게 평가한다고 지적했다. 분명한 것은 돈이나 부동산 보유 능력, 사회적인 성공이 행복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밝히기는 어렵지만, 사회적인 유대와 행복 사이에는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 행복을 위한 사유와 탐색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니, 지금까지 나온 ‘행복’에 관한 수많은 연구결과만 본다고 해서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정확한 방법을 도출한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일일 수 있겠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무엇이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지 판단하는 데 무척 서툴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왔다. 자신이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을 리 만무하다. 남들이 언젠가부터 오르기 시작한 기둥을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뒤처지지 않으려고 무작정 오르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는 꿈조차도 온전한 자기 자신의 꿈이기보다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이식받는 경우가 많다. 요즘 초등학생들의 꿈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1990년대만 해도 대통령과 장관, 과학자 등 다양한 직업을 꿈꾸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요즘 초등학생들은 교사, 공무원이 일순위다. 고용 환경이 불안한 시대에 출세보다는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하게 된 탓이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몇몇은 호랑 애벌레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그저 먹고 자라는 것만이 삶의 전부가 아닐 거라는 생각으로 보다 출세지향적인 행복을 찾아 나설 것이다. 몇몇은 노랑 애벌레가 그러했던 것처럼 행복의 기준을 외부에 두지 않고 자기 안에서 찾을 것이다.

 

 

 

 

 

 

 

 

 

 

 

 

 

 

 

중요한 건 어떤 행복을 추구하든 행복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하다. 공부도 필요하다.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은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행복은 돈이나 성공, 관계에 있다고 말할지라도 스스로에게 한번쯤은 반문해야 한다. 그리고 미래의 아이들에게 행복을 스스로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자신이 어느 때 행복한지 진지하게 탐색하지 않고 행복을 얻기란 쉽지 않다.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지 않고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스터리의 법칙 - 내 안에 숨겨진 최대치의 힘을 찾는 법
로버트 그린 지음, 이수경 옮김 / 살림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떻게 하면 나비가 될 수 있나요?”. “애벌레인 너의 모습을 버릴 수 있을 만큼 너무 너무 날고 싶은 마음을 가져야지. 나를 잘 보거라. 지금 고치를 만들고 있단다. 마치 숨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치란 피해 달아나는 장소가 아니란다. 참 모습을 찾기 위해서 거쳐 가는 곳일 뿐이지. 나비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거야. 다만, 아주 천천히 만들어질 뿐이란다. 나비가 없다면 이 세상의 꽃들은 사라질 거야”. (트리나 폴러스  『꽃들에게 희망을』중에서)

 

 

 

 

 ♣ 소년 모차르트의 피나는 노력

 

경박하지만 놀라운 재능을 지닌 천재 모차르트와 그의 재능을 시기하며 괴로워하는 범인(凡人) 살리에리를 그린 영화 《아마데우스》. 그 도입부엔 모차르트의 교향곡 25번이 짧게 흐른다. 모차르트가 교향곡 25번을 작곡한 나이는 열일곱. 모차르트는 우리에게 ‘하늘이 내린 천재’의 대명사로 꼽힌다. 하지만 사실을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다.

 

매우 어린 나이에 작곡을 시도한 것은 대단했지만 어린 아마데우스가 발표한 초기 작품들은 전혀 비범하지 않았다. 사실상, 그의 초기 작품은 단지 다른 유명 작곡가들의 모사에 불과했다. 11세부터 16세까지 작곡한 초기 일곱 개의 피아노 콘체르토 작품들은 독창성이 거의 없고, 심지어 모차르트가 썼다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모차르트가 독창적인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은 작곡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어서였다. 그 10년이라는 수련기 동안 모차르트는 그만의 내공을 키웠다. 모차르트는 4살 때부터 아버지인 레오폴트에게 음악을 배웠으며, 레오폴트는 모차르트와 함께 연주여행을 다니며 철저하게 음악을 가르쳤으며 끊임없이 피아노 연습을 시켰다. 뛰어난 천재로 각광받은 모차르트의 이면에는 천재가 되기 위해 감수해야 했던 고통이 숨겨져 있었다. 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면서 소년 모차르트는 늦은 밤까지 피아노 앞에 붙들려 있어야만 했다.

 

말콤 글래드웰이 쓴 『아웃라이어』에 소개된 1만 시간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어떤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이루고자 할 때에는 1만 시간을 투자해야 그 성과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 3시간씩 10년 연습하면 되고, 6시간씩 연습하면 5년이 걸린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재능은 타고나는 것,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새롭게 형성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말에 설득력이 있다.

 

 

 

 ♣ 내면에 있는 능력을 끌어올리는 ‘마스터리’

 

모차르트는 오랜 반복된 노력 끝에 마침내 자신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취를 끌어낼 수 있는 ‘마스터리’(Mastery)를 확보했다. 모차르트가 갖고 있는 힘, 이 ‘마스터리’는 주변 세계와 타인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장악하며 자유자재로 다스리는 힘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으로 마감시간이 정해진 상황에서 발휘되곤 한다.

 

이런 식이다. 지금 당장 오늘 밤까지 하지 않으면 아주 곤란해지는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다른 사소한 일들에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내 자신이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 간신히 데드라인 몇 분 전에 주어진 과제를 해결한다. 이것이 바로 ‘마스터리’의 경험이다.

 

많은 사람이 ‘마스터리’가 특정한 소위 위대한 천재들만 획득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평범한 사람도 일생에 한번쯤은 ‘마스터리’라는 힘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단연코 ‘마스터리’는 천재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에 따라 자신의 분야를 정하고 그 분야에서 적절한 수련기를 겪으면 누구나 끌어낼 수 있는 힘이다.

 

모든 것이 자기 자신 속에서 응축되어 기술과 경험을 자유자재로 끌어 쓰게 되는 순간,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부분이 아닌 ‘전체를 느끼는 감각’을 얻게 된다. 그러면 ‘내 안에 숨겨진 최대치의 힘’을 평상시에도 어려움 없이 끌어내어 탁월한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경지, 즉 ‘거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위대한 거장들의 삶에서는 미래의 성취에 밑거름이 되는 기본 역량이 형성되고 발달하는 특정한 시기가 있게 된다. 이런 거장들의 삶 속에서 다양한 분야에 상관없이 공통적인 과정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마스터리’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이상적 수련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마스터리’를 형성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인생의 과업을 발견한다. 올바른 직업적 길을 찾는 첫 번째 할 일은 어릴 적부터 좋아한 일, 남이 시키지 않아도 몰입한 일이 무엇인지 기억해내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목표의 일을 설정했다면 ‘나비의 애벌레’ 시절과 같은 일종의 수련기를 거쳐야 한다. 수련기에 ‘거장’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서 수양의 과정을 멈추지 않는다. 수련기에 습득한 지식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계속할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마스터리’의 주변에 견고한 벽을 세워놓았다. 하지만 이 벽은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누구나 적절한 수련기를 겪으면 내면에 잠재된 능력을 끌어낼 수 있다.

 

 

 

  ‘노력’과 ‘열정’ 없이는 거장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남과 다른 탁월한 전문성을 발휘하거나 창의적인 사람은 만나면 도대체 어떤 노력을 해서 저렇게 되었는지 물어본다. 즉 우리는 탁월함이나 창의력을 갖춘 개인의 특성이 그렇지 않은 사람과 비교할 때 무엇이 다른지 개인 차원에서 알아보려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남다른 탁월성과 창의성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묻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로버트 그린의 표현대로 신(神)이 내린 천재 따위는 없으며 열정을 파고든 거장만 있을 뿐이다.

 

자기 회의에 빠지는 기간을, 연습하고 공부하는 지루한 시간을, 어김없이 겪게 되는 실패를, 시샘하는 자들의 가시 돋친 비판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강인한 회복력과 자신감을 키워나간다. (31쪽)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꾸준히 노력한다고 해서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이든 일주일에 한 번 7시간 몰아 하는 것은 쉬워도, 매일 1시간씩 꾸준히 계속하는 것은 어렵다. 결의만 하고 중도에 포기한 경험이 훨씬 더 많다. 개인의 꿈과 야망을 이루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 도중하차하고 만다. 대부분 좋아서 시작하게 된 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개인별 능력에 큰 차이가 나는 원인변수로 개인의 동기, 집중력, 성취 의욕, 멘토의 지도력 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인내의 세월을 견뎌야 한다. 자기의 열정을 알고, 자기를 훈련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한 단계 도약을 위한 변화, 거기에 따르는 고통은 아름답다. 그러나 인고의 세월은 나비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의 열정이 있기에 감내할 수 있다. 열정은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힘’이다. ‘열정’을 딛고 노력하는 자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 미래의 달콤함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일만 시간의 법칙’이 소개된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를 읽은 독자라면 이보다 조금 더 두꺼운 로버트 그린의 신작을 차례차례 읽으면서까지 저자의 메시지를 파악하지 않기를 권한다. 굳이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으며 관심 있는 장에 소개된 사례 중심으로 읽는다면 좋을 것이다. 사실 인용된 사례를 제외한다면 저자가 독자에게 강조하는 성공하는 삶을 위한 하나의 처세술로 매번 강조되는 것이다. ‘노력’과 ‘열정’. 이것이 하나의 단어로 축약된 것이 ‘마스터리’다.

 

‘마스터리의 법칙’을 착실하게 따라 실천하다보면 ‘마스터리’를 획득할 수 있고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에 구멍을 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수적천석(水滴穿石)과 같이 꾸준하게 한 우물을 파는 노력이 있어야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넓은 세상에서 나보다 더 구름을 잘 알고, 나보다 더 구름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게 보여주오!" (22쪽, 민음사)

 

 

헤세는 소설 『페터 카멘친트』에서 자신의 구름 사랑을 예찬했다. 보들레르도 산문집 『파리의 우울』 첫 번째 시 ‘이방인’에서 노래했다. ‘나는 구름을 사랑하오. 지나가는 저 구름……저기…저기…저 찬란한 구름을!’ 구름을 사랑하는 시인이 많다.

 

 

 

 

 

 

 

헤세의 구름 사랑은 자신의 첫 번째 소설인『페터 카멘친트』뿐만 아니라, 초기 시에서도 볼 수 있다. 헤세의 첫 시집은 1899년 『낭만적인 노래』로 그가 18~21세 때 쓴 시들을 모아서 수록했다. 헤세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구름을 즐겨 봤고, 관찰했을 것이다.『페터 카멘친트』가 1904년에 출간된 사실을 생각해보면 ‘구름’을 바라보는 헤세의 시점이 습작 시기에 맞물려 있고, 시와 소설을 비교하면 구름을 사랑스럽게 묘사하는 분위기면에서도 상당히 유사하다.

 

 

파란 하늘에, 가늘고 하얀

보드랍고 가벼운

구름이 흐른다.

눈을 드리우고 느껴 보아라.

하얗게 서늘한 저 구름이

너의 푸른 꿈속을 지니는 것을.

 

 

- 헤르만 헤세 「한 점 구름」(『헤르만 헤세 시집』21쪽) -

 

 

구름은 시인들의 몽상을 자극하는데, 헤세는 구름의 몽상을 따라가지 않고, 구름의 본질과 기질을 캐고자 한다. 오랜 관찰 끝에 시인이 바라본 구름은 고향에 대한 향수와 청춘의 열병에 시달리고 있는 젊은 이방인의 영혼,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구름은 모든 방랑, 모든 탐구, 갈망과 향수의 영원한 상징이다. 구름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수줍어하고 그리워하며 고집스럽게 매달려 있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은 시간과 영원성 사이에서 매달려 방황한다. (23쪽, 민음사)

 

시인은 자기가 구름에 대해 확실히 아는 한 가지를 이야기한다. 새파랗게 맑은 하늘은 구름이 생성과 소멸을 또렷하게 펼쳐 보이는 스크린이다. 시인은 중얼거린다. 구름, 너 역시 쓸쓸하구나. 허공에서 태어나 허공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구름. 소년 헤세가 바라보는 구름은 이렇다.

 

 

 

 

내가 나 자신에 질문한다. 최근에 구름을 본 적이 있는가. 요즘 나도 그렇다고 손들고 싶다. 가을하늘 못지않게 아름다운 게 사실 비 오고 난 후의 구름이다. 흰색의 물방울체가 파란색을 바탕으로 벌이는 그 다채롭고도 깊고 선명하면서도 아득한 변화와 이동의 장엄. 자연 속 최고의 창조물이 아닐까 싶다. 인생무상(無常)의 덧없음이 아니라 인생과 자연이라는 거저 주어진 무상(無償)을 확인시켜주는 존재다.

 

그런 구름을 어린 시절엔 자주 올려다봤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곧잘 그렇게 거꾸로 올려다봤던 구름들은 하늘이 두 발을 받쳐주는 땅이기도 함을 어린 머리에도 깨우쳐주곤 했었다. 그런 놀이를 더는 하지 않게 되면서 어린이라는 순수한 시절과 결별한 게 아니었을지.

 

어른이 되어 낮의 하늘로 고개를 드는 때는 애써 눈물을 감춰야 하거나, 날씨를 확인할 때 정도뿐이다. 낮의 일상은 어른에게 우두커니 고개를 젖히거나 누워서 구름의 변화나 흐름 따위에 눈과 마음을 주게 하지 않는다. 사실 밤하늘의 별보다 더 올려다보기 힘든 게 낮의 구름이다.

 

 

 

 

 

 

 

 

 

 

현대 이전에는 어른들도 그렇지 않았다. 1803년 루크 하워드라는 허름한 차림의 한 약사 출신 젊은이가 당시 유행하던 과학발표극장에서 구름을 적운 권운 층운 같은 유형으로 나누고 이름을 붙였을 때 당시 어른들은 아이들처럼 열광했다. 하워드의 발견이나 작명 자체보다 구름에 대한 그들의 열광이 기상학에 역사적인 방점을 찍게 했다.

 

재상이자 시인이었던 괴테는 '구름을 분류한 사람'을 일부러 초청해 만나고 '하워드를 위하여'라는 구름처럼 풍성한 헌시를 쓰기도 했다. 풍경화의 역사를 시작한 화가 존 컨스터블도 하워드의 구름에 영향을 받아 저 유명한 구름 그림들을 그렸다. 구름은 그 전에도 있었으되 구름에의 새삼스런 열광이 한 시대의 과학과 예술 전체를 새로이 드높인 것이다.

 

컨스터블은 유독 구름을 주제로 한 습작을 많이 남겼으며 그의 풍경화에는 지상의 구름이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운다. 그는 실제 자연보다 더 그럴듯하게 그리는 것을 거부했는데 아마도 그는 찬찬히 하늘의 구름과 날씨와 바람을 꼼꼼히 관찰하면서 일지에 적었을 것이고 그보다 더 오래 정성껏 그림들을 다듬었을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인 모네는 순간 변화하는 빛의 흐름을 일순간에 포착해 캔버스 위로 옮기고자 노력했다. 모네의 작품은 대부분 위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외광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어두운 색감 위에 밝은 색채를 사용하여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자연을 감싸고 있는 대기의 미묘함이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적인 분위기와 그 느낌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도록 묘사되었다. 폭풍에 흔들리는 나무나 출렁이는 물결, 그 물에 비친 검푸른 구름이 지금도 매우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듯 다음 순간과 느낌이 상상된다.

 

도시의 하늘은 온통 뿌연 회색하늘뿐이라지만 요즘 내가 본 찬란한 구름들은 대부분 대학교 캠퍼스에서 본 것들이었다. 희뿌연 도시에서 살짝 벗어난 교외로 가서 문득 고개를 젖히고 걸음을 멈추며 새털, 뭉게, 비늘, 면사포 같은 모양의 구름들을 만날 수 있다. 운이 좋으면 구름이 되지 못한 물방울이 만든 투명한 무지개 빛깔도 본다.

 

 

 

 

 

존 컨스터블  「구름 습작」 1822년

 

 

긴 여로에서

방랑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스스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구름을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해나 바다나 바람과 같은

하얀 것, 정처 없는 것들을 나는 사랑한다.

고향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누이들이며 천사이기 때문에.

 

 

- 헤르만 헤세 「흰 구름」중에서 (『헤르만 헤세 시집』65쪽) -

 

 

 

청년기에 마주하는 구름은 마음에 품은 꿈과 방황과 방랑의 가치를 꼽아보게 한다. 장년기의 구름은 인간이라는 미약한 존재로서의 순백할 수 없었던 날들에의 고백과 겸손에 마음을 여미게 한다. 구름의 시인 헤세는 또 말한다. 방랑의 기쁨과 슬픔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구름을 이해할 수 없다고.

 

 

 

 

 

헤르만 헤세  「계곡 풍경」 1930년

 

 

변화무쌍한 구름의 모양을 보면 온갖 상상이 떠오른다. 누군가의 모습이 연상되는가 하면, 그리운 사람의 마음을 전해주는 것도 같고, 영락없는 천상의 그림이라는 생각도 든다. 때때로 먹구름이 몰려오면 금세라도 저주를 퍼부을 듯하다. 한 군데 머물지 못하고 늘 이동하는 구름을 우리네 삶에 빗대어 인생무상을 노래하기도 한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는 구름을 두고 향수, 낭만, 방탕, 원망이라고 했나 보다.

 

구름은 그 부드러운 기운이 지상까지 전해져 땅의 무거움을 들어 올려 주는 것 같다. 우리가 지상에서 마주치는 생활의 무거움을 기중기처럼 가볍게 살짝 끌어준다. 지상에 내린 구름 그림자는 구름 발자국과도 같아, 침묵의 언어로 잠시 동행하는 친구가 된다. 먹구름은 먹구름대로, 슬픔과 우울함이 없는 삶은 기괴한 삶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구름의 귀한 존재감은 현실을 벗어난 다른 곳으로 안내하는 데 있지 않을까? 그러고는 진짜 삶이 어떤 것인지 살짝 맛보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구름이 현실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구름은 바로 우리 머리 위에 있다. 삭막한 도시 속에서 우리는 구름의 존재를 가끔 잊고 살 뿐, 구름은 현실의 머리 위에 있다. 구름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늘과 우주까지 보는 시야를 확대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하늘을 봐야 구름도 본다. 하늘은 누워서 보는 게 제격. 방바닥에라도 누워 유리창을 올려다보자. 통유리창이라면 더 좋겠지만, 작은 유리창 한 장도 충분히 하늘을 담는다. 사람 등짝만 보지 말고, 잠시 고개를 젖히고 하늘 위에 있는 구름을 다시 보자, 구름을 이해해 보자.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철나무꾼 2013-11-10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하늘을 자주 쳐다본답니다, 늘 그렇고 그런 일상에, 쉼표를 찍는 의미루다가...ㅋ~.
대낮의 하늘은 햇살 땜에 눈을 잠시 찌푸리게도 되지만,
밤에 조각달이나 눈썹달이라도 걸린 하늘을 바라보면,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어 좋아요.

헤르만 헤세는 그림도 좋군요.
님 덕분에 제 눈이 호사네요, 감솨~(__)

cyrus 2013-11-11 21:06   좋아요 0 | URL
가끔 캠퍼스 혼자 걷다가 하늘 위의 구름을 보는 순간, 콱 막힌 마음이 뻥 뚫려요. 나무꾼님 말씀대로 고요한 밤하늘도 좋아요. 하늘을 볼 수 있는 작지만 여유로운 시간이 참 좋습니다. 참고로 헤세의 그림은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시집에 수록되어 있어요.

수이 2013-11-11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네의 이 감수성이란-

cyrus 2013-11-11 21:06   좋아요 0 | URL
가을이니까요~ :)

프레이야 2013-11-11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무상으로 보는 게 많은 계절입니다.
구름을 이해하는 아주 좋은 방법 얻어 가네요^^

cyrus 2013-11-13 00:2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구름을 보고 느낄 줄 아는 여유로운 가을 보내세요 :)

그렇게혜윰 2013-11-12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세의 그림 참 좋아해요!
오늘은 나가면 구름으르 잘 만나 봐야겠어요^^

cyrus 2013-11-13 00:3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요즘 가을하늘 좋을 때죠.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헤세 시집에 수채화 그림이 실려 있습니다(책 광고는 아닙니다 ^^;;)
 
과학혁명의 구조 - 출간기념50주년 제4판 까치글방 170
토머스 S.쿤 지음, 김명자.홍성욱 옮김 / 까치 / 201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비트겐슈타인의 오리? 토끼?

 

 

만일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식생활 문화를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이 우리의 ‘젓가락’을 보았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도 손으로 식사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민족은 젓가락을 공사 중에 사용하는 삽과 같은 도구로 생각하고 불필요한 물건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오히려 자신들이 가진 문화 안에서 젓가락과 가장 비슷하게 생긴 대상을 떠올리고 그 대상에 해당되는 단어를 사용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오리라고 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이것을 토끼라고 볼 수 있다. 그림은 불변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관점의 차이에 의해 해석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이것을 보고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은 각자 나름대로의 해석의 틀이 있고 그 틀 위에서 사물을 새롭게 이해하고 재정립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7’이란 수를 동양에서는 좋은 수로 생각하지만, 서양에서는 좋지 않은 수로 생각하는 것은 사물을 이해하기 전에 사물을 해석하는 사회적인 틀이 각 사람마다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현상과 사물이라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현상과 사물을 보는 눈이 서로 다른 사람이 있다면 패러다임(Paradigm)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에 보는 시각에 변화가 있으면 패러다임이 전환(Paradigm Shift)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관점이 바뀐 것이다.

 

 

 

 ♣ 과학은 발전되는 것이 아니다

 

‘패러다임’이란 사전적인 의미로는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틀이나 개념의 집합체’를 말한다. 1962년 미국의 철학자 토머스 쿤이 그의 저서 『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책에서 처음 제시한 개념으로,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주변 세상을 지각하고 이해하며, 해석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토머스 쿤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찰스 다윈의 말을 인용한다.

 

나는 이 책(『종의 기원』)에서 제시된 견해들이 진리임을 확신하지만, … 오랜 세월 동안 나의 견해와 정반대의 관점에서 보아왔던 다수의 사실들로 머릿속이 꽉 채워진 노련한 자연사학자들이 이것을 믿어 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 그러나 나는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는데, 편견 없이 이 문제의 양면을 모두 볼 수 있을 젊은 신진 자연사학자들에게 기대를 건다. (262~263쪽)

 

 

다윈은 왜 이렇게 이야기했을까? 쿤은 왜 이 이야기를 인용했을까? 다윈은 지금까지 쌓아 왔던 모든 지식체계를 완전히 뒤바꾸는 학설을 발표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윈 스스로 이 이야기를 과학자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토마스 쿤은 다윈이 완전히 새로운 주장을 제시하면서 기존의 사고 틀을 뒤집었던 것처럼 과학이 발전해 왔다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결국, 과학은 ‘발전해 온’ 것이 아니고 ‘이어져 온’ 것이다.

 

과학과 지식은 일반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이어져 왔을까? 정상과학의 시기에는 하나의 패러다임 하에서 연구 작업이 이루어진다. 패러다임이란 기본형, 표준형이다. 패러다임이란 말은 원래 쿤이 언어학에서 차용한 용어인데, 한 동사의 기본형에서 온갖 활용어가 파생되듯이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여러 가지 과학적 인식과 모델이 생겨난다. 따라서 과학적 인식뿐만 아니라 과학적 이론, 나아가 과학자 집단의 공유된 관념과 가치관, 관습까지도 모두 그 지배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한 패러다임을 의문시하는 과학적 증거들이 누적되고 시기가 무르익으면 그 모순은 곪아터지게 된다. 이렇게 과학혁명은 정상과학에서 이상 현상이 일어나거나 새로운 것이 발견되었을 때 촉발된다.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정상과학에서 누적된 성과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과학혁명은 정상과학을 연장하는 선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불연속적으로, 비약적으로, 단절적으로 일어난다. 이때 기존의 것은 철저하게 부정된다.

 

다윈 이전에도 진화론과 비슷한 학설은 많았다. 그런데 다윈 이외의 학자들은 ‘생명체는 어떤 목적을 향해서 발전해 온 것이며, 어떤 미개한 존재가 인간으로 된 것 역시 발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윈이 그것은 ‘발전’이 아니고 순전히 ‘자연의 선택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다윈의 이론을 받아들이려면 생명체에 대한 개념 규정을 새로 해야 하고,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인간의 정체성 또한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존의 사고 체계에 심각한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웬만해선,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을 때까지 새로운 학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우리에게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쿤의 과학관

 

장기 게임을 예로 든다면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것은 ‘게임에서 이기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다. ‘장기의 규칙을 통째로 바꾸는 일’이다. 그런데 이것을 단순히 ‘발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쿤이 말했듯이 발전이라는 것은 기존의 어떤 것을 더 개선시키는 일이고, 결국은 과거의 어떤 것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전혀 새로운 이론을 등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의 것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결국 과학은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변환된다. 그래서 과학은 ‘발전이 아닌, 완전히 뒤바뀌는 혁명’을 거듭하는 전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역사는 마치 계속 발전해 온 것처럼 포장되고, 과학 교과서는 이렇게 왜곡된 형태로 기술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지금까지 과학의 업적을 인정받을 수 있고, 젊은 과학도들이 더 열심히 공부하게 할 수 있으니까. 과학이 발전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발전이 아니라는 사실’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수도 있겠다.

 

쿤은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전혀 해답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 출간 50주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쿤의 과학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이 책을 읽고, 연구하는 과학자나 독자들은 지금도 쿤이 이 책을 통해 던지고자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고 있다. ‘과학이 이렇게 패러다임의 전환을 거듭해 간다면, 과학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과거와 연결되지 않은 전혀 새로운 이론의 등장이 과학사를 통째로 뒤바꾼다면 과학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패러다임이 전환 가능하다면 도대체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궁금하다면 그 답은 책을 읽는 우리가 찾아야한다. 출간 100주년에 이를 즈음에 미래의 독자와 연구가들은 쿤의 과학관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표시하고,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탐구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쿤의 과학관을 논하는 이 과정 또한 ‘패러다임 전환’으로 볼 수 있겠다.

 

우리는 ‘패러다임’이라는 꽤 정의하기 어려운 말을 마구 쓴다. 심지어 과학뿐만 아니라 사회나 역사 전체를 구성하는 과정을 설명할 때도 사용한다. 또 행정학에서도 ‘패러다임’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게 사용한다. 그러나 이 책을 단 한 번이라고 읽은 사람들 중에 ‘패러다임’의 진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현재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의 서문이 추가되고, 새롭게 개정된 번역본을 읽었지만, 여전히 ‘패러다임’이라는 단어 속에 있는 방대한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버겁게 느껴진다. 개정판을 읽으면서 ‘패러다임’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