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각각의 본성을 별개의 개체에 담을 수 있다면, 참을 수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일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부조리한 존재는 그의 고결한 쌍둥이의 열망과 자책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만의 길을 가고, 정의로운 존재는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높은 곳을 향한 그의 길을 가면 될 것이다. 그는 선행을 하는 가운데 기쁨을 느낄 것이며, 더 이상 이질적인 악마가 행하는 불명예 탓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들 모순되는 한 쌍이 함께 묶었다는 것은, 고뇌하는 의식이라는 자궁 속에 이렇게 극과 극인 쌍둥이가 계속 갈등하며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은 인류가 받은 저주였다. (107쪽)

 

‘후회 없이 살고 싶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다 지난 일이다.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냐?’는 위로도 자주 나눈다. 후회라는 것이 스스로에게 가장 고통스런 채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부끄러움 없이, 후회 없이 살 수 있을까? 윤리적 불감증이나 극도의 오만, 지독한 자포자기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누구든 크고 작은 실수를 하고 사는 이 세상에서 후회 없이 삶의 구원을 바라기 힘들다. 후회 없이 어찌 지난 일을 지나 보낼 것이며, 어찌 다른 미래를 꿈꾸고 현재화할 것인가? 우리의 영혼은 내 안의 하이드에게 도전받으며 견실해질 수 있다. 후회할 일은 철저히 후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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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9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3-10-30 18:3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잔님. 모딜리아니의 연인 잔 에뷔테른 초상화의 프로필에다가 닉네임을 사용하시네요. 화가의 슬픈 러브스토리 때문인 것도 있지만 모딜리아니 그림,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이 소설을 맨처음에 읽었을 땐 그냥 독특한 줄거리의 괴기소설로밖에 안 봤어요. 그러다가 요즘 타 출판사에서 새 번역본이 나온 것도 해서 오랜만에 새벽에 읽다가 인용한 구절에 꽂혔어요. 여생에 앞으로 후회할 일은 분명히 많을거고, 피하기 위해서 심사숙고해도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그럴 수도 없는 운명이죠. 좀 힘들고 피곤해도 나 자신을 단속하기 위해서 고민하고 후회하는 행위는 더 나은 삶을 위한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인생 주기에 있어서 과도기를 거치면 다음 번에는 황금기가 찾아오는 것처럼요. 쟌 에뷔테른님도 가을 잘 보내시고요, 점점 쌀쌀해져가는 날씨 몸 건강하세요. ^^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 도입부에 이렇게 썼다. ‘사춘기 때 나는 인생을 증오해서 자살 일보 전까지 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시절 나는 내 죄와 결점, 어리석은 짓에 대해 깊이 생각하곤 했다. 내 눈엔 내가 불행의 표본처럼 보였다.’

 

그는 그러면서 끔찍한 충동에서 벗어나게 된 건 스스로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결점에 무관심해지는 한편 관심을 밖으로 돌린 다음부터라고 적었다. 외부에 대한 관심 역시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자기혐오로 생기는 것과 달리 생의 본질을 파괴하진 않는다는 주장이다.

 

러셀 같은 이도 그랬으니 보통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10대는 누구에게나 힘겨운 시기다. 사춘기는 더하다. 세상은 뒤죽박죽이고 어른들은 죄다 엉터리 같아 자꾸 화가 난다. 부모가 자신을 이해하기는커녕 무조건 구속하고 강요하려 드는 듯해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기만 하다.

 

부모와 마주하기 싫다 보니 가능하면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부모들의 속을 뒤집는 이런 행동은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 사춘기의 특성이다. 몸은 어른에 가깝지만 뇌, 특히 논리적 사고와 감정 조절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제대로 발달되지 않은 결과라는 얘기다. 안 그래도 힘든데 어렸을 때부터 줄곧 공부에 매달려야 하니 스트레스는 극에 달한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교생까지 자살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대부분 원인은 가정불화 및 가정문제, 우울증, 성적 비관 순이지만 특별한 이유를 찾기 힘든 충동적 자살도 있다니 충격적이다.

 

어른도 그렇지만 아이들은 누구 한 사람만 옆에 있어주고 자신의 얘기를 들어줘도 살아갈 용기를 낸다. 부모의 인내와 보살핌이 중요한 건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의 경우 선생님의 사랑과 격려는 절대적이다. 정신건강 문제가 드러나도 사회적 편견이 두려워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 가정과 사회는 아이들의 정신건강 문제를 세심히 살펴야 한다. 따뜻한 배려와 관심이야말로 청소년을 보호하는 안전장치다.

 

행복의 사회적 요소는 살면서 주위에 믿을 사람이 많아야 된다. 동네 공동체가 활성화된 지역에 사는 사람일수록 더 행복을 느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학자들은 이것을 ‘동네효과(community effect)’라고 한다. 공동체가 활성화되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증거다. 달라이 라마도 ‘원하든 원하지 않던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나 혼자만 따로 행복해지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했다. 행복이라는 영어 ‘happiness’의 어원이 ‘옳은 일은 자신 속에서 일어난다’는 ‘happen’이듯이 개인과 가족이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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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의 ‘술이편’(述而篇)에서 공자는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말한다.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고 있을 때 그 중에 분명히 나의 스승이 있다는 말이다. 세 사람이 길을 간다는 것은 단순한 설정이다. 셋이 길을 갈 수도 있고 다섯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길을 가는 상황을 공자는 예로 들고 있다. 세 사람이냐, 다섯 사람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셋이 길을 가고 있다면 자신을 제외하고 남은 사람은 두 명. 그 두 사람 중에 나에게 스승처럼 무언가 가르침을 줄만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공자는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는 그들이 많이 배워서 학식이 높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즉 그들의 자격 요건을 제한하지 않은 것이다. 그저 같이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만 했다.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많이 배우지 못해서 아는 게 적은 사람일수도 있고 성질이 포악해서 사람들이 슬슬 피해 다니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공자는 자격 요건을 전제하지 않고 무조건 같이 가는 사람이라고만 했다. 그러니 배우지 못한 사람도 성격이 좋지 않은 사람도 스승이라는 말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들이 많으니 주변에서 그리고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다.

 

하지만 공자의 말처럼 자격을 불문하고 ‘무조건 같이 가는 사람’이 나에게 도움을 주는 스승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한비자라면 공자의 말에 반박할 것이다. 세 사람을 잘못 만나면 없는 호랑이 한 마리도 만들 수 있다고(三人成虎).

 

전국 시대 위나라 혜왕은 조나라와 강화를 맺고 태자를 볼모로 보내게 되었다. 태자를 혼자 보낼 수 없어 방총)이란 대신을 따라가게 했는데, 그는 출발에 앞서 임금에게 물었다. "전하, 지금 누가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말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터무니없는 말을 누가 믿겠소." "그러면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믿지 않을 거요." "만약 세 번째 사람이 똑같은 말을 아뢰어도 믿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땐 믿어지겠지." 방총은 한숨을 내쉬고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은 어린애도 알 만한 상식입니다.”

 

거짓도 말하는 입이 여럿이면 솔깃해지게 마련이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 셋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드는 셈이다. 내가 믿을 만한 주변 사람 세 명이 있다고 해도 그들의 말은 진정어린 말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말일 수도 있다. 세 사람이 말하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처럼 반복되는 헛말도 자꾸 들으면 정말 그럴 것이라 믿어지기도 한다.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무서운 ‘사람의 말’이 지금은 인터넷, 특히 SNS를 통해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흉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는 SNS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한다. 평소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지인에서부터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는 저 먼 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많으면 천 명까지 나와 친분이 있는 관계로 만들 수 있다. 이런 복잡한 관계망 때문에 밑도 끝도 없는 괴담과 헛소문, 아무런 근거 없는 거짓말 등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와 SNS를 타고 급속하게 번졌다가 사라지는 일이 반복된다. 무심히 던진 말들이 모아져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황폐화시키고 심지어는 자살에 이르게까지 했던 일이 발생한다.

 

결국 내 주변에 있는 세 명이 나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스승인지, 아니면 거짓과 부조리의 발톱을 숨기고 있는 사악한 호랑이였는지 파악하는 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어느 누군가가 선하다면 그 선함을 보고 배울 것이며 악한 사람이 있다면 그 악함을 보고 느껴서 자신을 고치고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

 

과연 그들이 진짜 호랑이를 그리며 말하는 것인지, 거짓 호랑이를 만들어 말하고 있는지를 똑바로 판단해야 한다. 아무리 여러 사람이 나와서 어떤 달콤한 말로 호랑이가 나타났다 해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 어떤 현상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면 세상의 모든 것이 나에게 스승이 되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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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음의 창으로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달라진다. 삶에 안주하는 사람과 성취하는 사람의 차이는 세상을 보는 마음의 창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안주하는 사람은 설령 성공 가능성이 99%라고 하더라도 1%의 실패 가능성에 연연한다.

 

그래서 실패를 두려워하는 자기 방어적인 시나리오로 최악의 결과를 그려보고는 모험 자체를 시도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일로 성공을 거두더라도 감격보다는 안도감만 느낀다. 성취하려는 사람은 용기가 있고 자신이 직면한 문제에 도전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 비행기가 발명되고 우주선도 탄생할 수 있었다. 성취하려는 사람은 안주하는 사람과 달리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실수한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새로운 일을 시도해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을 했다.

 

 

 

 

 

 

 

 

 

 

 

 

 

 

 

 

『노자』 52장에 보면 ‘견소왈명(見小曰明) 수유왈강(守有曰强)’으로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음(明)이라 하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함(强)이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사소한 변화를 감지하는 명철한 지혜와 날카로운 통찰력을 의미한다. 작은 것을 본다는 것은 자신의 시야에 갇혀 좁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세심하게 감지함으로써 크게 보는 통찰력이다.

 

우리 앞에 닥쳐온 고난 극복에 실로 큰 힘이 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지혜다. 지혜가 기다림의 대상이 아닌 적극적인 훈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지혜의 본질이 우리 마음의 한계를 지각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지혜는 우리가 추구하는 대상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지혜는 끊임없는 훈련의 대상이기도 하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어떤 일에 깊이 몰입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이 없어지는 상태를 'Flow'라 부르고, 플로 상태가 행복과 성취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소통의 창구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지혜는 우리에게 이런 자기중심성이 만들어내는 환상 앞에서 철저하게 겸손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현대사회는 단순한 똑똑함보다는 지혜로움이 더 중요하고, 삶은 단 하나의 정답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나'의 존재와 '우리'라는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항상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처럼 진정한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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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 원형 심리학으로 분석하고 이야기로 치유하는 여성의 심리
클라리사 에스테스 지음, 손영미 옮김 / 이루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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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내면이 무엇을 원하고 말하는지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마음의 고통은 사라진다.

 

 

- 칼 구스타프 융 -

 

 

 

 

 

 

 ♣ "당신 때문에 실망했어요!"

 

 

 

 

 

프랑수아 제라르  「프시케와 에로스」  1797년

 

 

영어로 사랑한다는 표현은 'Make love'와 'Fall in love'라고 하는데 '사랑'이라는 뜻을 깊이 표현한 것은 전자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랑을 ‘Amour'(아모르)라고 부르는 유래를 신화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모르는 이성간의 사랑을 뜻하며 로마 신화에서는 큐피드, 그리스에서는 에로스라고 불리는 연애의 신이다. 그는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늘 황금 화살을 갖고 다녔는데 그 화살에 찔리면 사랑에 빠진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뛰어난 미모로 아프로디테의 노여움을 산 프시케를 혼내주러 갔다가 실수로 자신의 화살에 찔려 사랑에 빠지고 둘은 부부가 된다. 큐피드는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하면 영원히 헤어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하고 동생의 행복을 시기한 언니들의 부추김으로 프시케는 약속을 어긴다. 그녀의 행동에 크게 실망한 큐피드는 떠나게 되고, 프시케는 남편을 찾아 온갖 시련 속에서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된다. 큐피드는 프시케를 구하고 아프로디테에게 간청하여 결혼을 허락 받는다. 비로소 프시케는 불로불사의 생명을 얻는다.

 

이 큐피드와 프시케의 신화는 우리에게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프시케가 약속을 어긴 것은 사랑의 미성숙과 도전을 의미하고 둘째, 남편의 사랑을 되찾고자 시련을 겪는 동안 프시케의 영혼은 성숙하고 셋째, 그 고통의 시간을 통과한 후에야 진정한 사랑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와 사랑의 느낌으로 빠져들 때 그의 어떤 부분이 나를 매혹시키는 걸 느낀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진부한 관계’ 혹은 ‘권태로운 관계’로 사랑의 화면이 변경되면 나를 ‘뻥’ 가게 만든 그 부분 때문에 속이 뒤집히는 걸 경험하게 된다. ‘당신이 있어 행복해요!’가 ‘당신 때문에 실망했어요!’로 바뀌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아마도 쌍방과실이라 봐야 할 것이다.

 

매일 아무 불만, 걱정 없이 마냥 행복한 사랑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사랑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먼지처럼 쌓였다가 털려나간다. 그리고 먼지가 다시 내려앉는 것처럼 믿음은 헛되이 되풀이된다. 서로의 인생에 그늘을 드리우지 않고 저마다의 완벽한 나날을 향유하는 사랑. 하지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이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행복과 또 꼭 그 만큼의 고통을 가지고 태어나니까. 물론 실연이 주는 고통의 크기에는 한계가 없고 인간의 마음은 부서지기 쉽다. 이별은 어느 한 순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갈등이 쌓이면서 끝내 폭발하는 결과물이다. 그런 힘든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별 전후의 얼마간은 상대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다. 다 그 사람 잘못 같고, 함께 했던 지난 시간이 무의미해지면서 허무감이 든다.

 

 

 

 ♣ 진실을 찾으려는 야성적 본능의 호기심

 

만약에 실연당한 여성이 내면의 ‘야성’을 유지하는 여걸이었다면 고통의 시간을 의연하게 대처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심리분석학자이자 심리 상담 전문의인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여성 본연의 야성을 되찾자고 주장한다. ‘야성’, ‘늑대’라는 단어는 남성에게 어울리는 고유 명사다. 반대로 여성은 ‘여우’라고 말한다.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융의 분석 심리학을 사용하는 ‘아니무스’(Animus, 여성의 무의식 속에 들어 있는 남성적 요소)를 근거로 멸종 위기나 다름없는 늑대를 부른다. 본래 여성(woman)의 어원은 늑대(wolf)에서 유래했으며, 여성과 늑대는 선천적으로 사랑이 넘치고 적응력과 직관력이 뛰어나며 씩씩하고 용감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 늑대'의 원형을 세계 민담이나 설화, 동화에서 찾고 있는데 프시케의 모습에서도 ‘어머니 늑대’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자신의 모습을 프시케에게 절대로 보이지 않으려는 에로스는 ‘어머니 늑대’ 특유의 호기심을 억누르는 존재다. 프시케 입장에서는 남편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에로스는 자신의 정체를 알려는 프시케의 호기심을 잊기 위해서 그녀를 왕비 못지않은 편안하고 화려한 생활을 누리게 해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프시케의 언니들은 자신들보다 잘 살고 있는 프시케가 부럽고, 질투한다. 그녀들은 에로스가 프시케에게 한 약속을 어기도록 부추기는데 프시케의 마음에 숨어있던 야성적 호기심의 본능을 깨우게 만든 셈이다. 프시케는 경고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프시케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동화 <푸른 수염> 삽화, 귀스타브 도레 그림

 

 

푸른 수염은 아내에게 진실을 깨닫는 데 필요한 열쇠만 못 쓰게 막는다. 이는 그녀의 여걸, 즉 일의 진상을 알고자 하는 여성의 본능을 없애는 행위다. 야성적 직관을 잃은 여성은 심각한 위험에 빠진다. 푸른 수염의 이 말에 복종하는 것은 정신적인 자살 행위와 같다. 그 무서운 비밀의 문을 열어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73쪽)

 

 

야성적 호기심을 발현하는 프시케의 행동은 클라리사 에스테스가 ‘어머니 늑대’의 원형을 찾아 낸 이야기, <푸른 수염>의 아내와 비슷하다. 푸른 수염은 새 신부인 아내에게 자신에게는 정말 중요한 열쇠 하나를 맡긴다. 그 열쇠는 그동안 자신의 전 아내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살해한 ‘죽음의 방’이었다. 푸른 수염은 외출하면서 아내에게 자신의 성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하는 조건을 달면서, 절대로 ‘죽음의 방’ 열쇠만큼은 열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러나 푸른 수염의 아내 역시 남편의 약속을 어기게 된다. 아내는 언니들과 함께 수수께끼의 열쇠에 맞는 방을 찾아보는 게임을 같이 하는데 진실을 찾으려는 야성적 본능이 드러난다.  

 

 

 

 ♣ ‘삶/죽음/삶’의 여신을 받아들인 프시케

 

다시 프시케와 ‘여걸’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결국 프시케는 그동안 궁금했던 에로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야성적 본능의 대가는 에로스가 그녀를 떠나버림으로써 이들의 사랑은 파멸에 이르고 만다. 산산이 깨어진 사랑, 즉 이별과 실연을 겪게 되면 고통스러운 감정의 사이클을 겪는다. 처음에는 분노였지만, 그 다음은 ‘차였다’는 모멸감, 그리고는 ‘또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 문득 옆에 아무도 없다는 허전한 생각도 들고, 초라한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에드바르트 뭉크  「여자의 세 시기 (스핑크스)」 1894년

 

 

여성은 육체를 통해 삶/죽음/삶의 주기와 아주 가까이 살고 있다. 특히 사랑하고 창조하고 믿는 천부적인 본능을제대로 보전한 이들의 경우 모든 생각과 충동이 자연스러운 리듬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진다. (180쪽)

 

 

 

불처럼 뜨겁게 활활 타오르는 사랑이 이별 후에 식어가고, 먼지가 된 사랑의 재를 털어내지 못하는 감정의 사이클은 우리 삶의 주기와 비슷하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다시 한 번 새로운 삶이 탄생한다.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이런 삶의 주기를 ‘삶/죽음/삶’의 여신이라고 부른다. 여걸은 ‘삶/죽음/삶’의 여신을 받아들일 줄 알고, 그걸 볼 줄 안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삶의 주기를 의연하게 받아들인다.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늑대처럼 말이다.

 

‘사랑’(Amour) 없는 ‘영혼’(Psyche)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에로스를 떠나보낸 프시케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녀 곁에는 '삶/죽음/삶'의 여신이 있었다. 에로스는 다시 만나기 위해 자신을 싫어하는 아프로디테의 과제를 마다하지 않는다. 여러 차례 위기를 맞게 되지만 프시케는 신의 계락을 두려워하지 않고, 강인한 인내력으로 고난을 극복한다. 에로스와의 재회는 진정한 사랑의 부활이다. 즉 영혼이 다시 살아남은 것이다. 완전한 사랑을 누리기 위해서는 언젠가 마주하게 될 이기적인 욕심과 망상을 포용하고 견뎌낼 줄 알아야 한다.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현대사회에서 ‘여걸’이 사라지면서, ‘삶/죽음/삶’의 원형 또한 그 의미가 왜곡되고 퇴색되었다고 말한다.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삶/죽음/삶’의 주기를 이해하고 유지해야 된다.

 

 

 

 ♣ 잃어버린 야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여걸을 되찾고 싶거든 덫을 피하라. 균형 잡힌 삶을 살 수 있도록 본능을 단련하고, 마음껏 뛰고, 소리치고, 원하는 것을 차지하라. 또 그것에 대해 모든 걸 알아내고, 눈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모든 걸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빨간 신을 신고 춤을 추라. 단, 그 빨간 신은 반드시 직접 만든 신발이어야 한다. (250쪽)

 

 

여걸은 훌륭한 여성의 지지자다. 마음보다는 머리로 움직이고, 충동적이기보다는 이성적일 것이며, 상처받지 않으며 그 자체로 완전함을 추구할 것이다. 결국 잃어버린 야성을 되찾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건 나 자신의 문제가 되는 거다. 야성을 억눌리는 덫이 외부에 있는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자신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의 문제이다. 세상에 바라보는 가치관을 바꾸고 자신의 내면을 바꾼다면 삶을 바꾸는 데 일조할 수 있다. 그것이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다.

 

내 안의 호기심을 발현하여 다양한 체험을 마다하지 않고, 외로움과 고독, 실연에 의한 상처도 모두 원초적 에너지로 승화킬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홀로 밤을 지새우는 여성들이여!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여걸, 즉 원초적 야성과 본능을 살살 꾀어내시라! 그러면 내 안의 무기력한 자아는 오늘로 죽을 것이다. 이제 늑대와 함께 춤을 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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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20 17: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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