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현상, 저만 그런가요? 어제까지는 중고도서 표지가 보였는데, 오늘은 램프 마크만 보입니다. 일시적인 버그 현상이라고 믿습니다. ‘보관함’에 중고도서가 있는데, 표지가 보이지 않으니까 책 제목을 알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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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2017-02-05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근래 계속 알라딘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거 같아요. 저도 얼마 전에 <사회주의, 생동하는 유토피아>를 보관함에 넣으려고 했는데, 책이 검색이 되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네이버를 경유해서 보관함에 넣었던.. 설 이후로 시스템 문제가 자꾸 생겨서 불만이 조금씩 쌓이네요ㅠ

cyrus 2017-02-05 15:09   좋아요 0 | URL
설 연휴 이후로 서버 개선 작업을 했는데도 여전히 버그가 뜨는군요. 이번에는 책 검색하면 저자 이름이 안 보여요.
 

 

 

 

 

 

연금술은 과학에 완전히 밀려 '사이비 학문'으로 전락했다. 신비주의적 색채가 짙은 연금술은 오컬트(Occult) 문화의 범주에 속한다. 이제는 비금속을 금과 같은 금속으로 전환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연금술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혹시 어딘가에 은둔 생활을 하면서 옛날 연금술 지식을 토대로 연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연금술사의 목표가 금을 만드는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엘릭서(elixir), 즉 만병통치약을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연금술사들은 끝내 금과 엘릭서를 만들어내는 과업에 실패했다. 그래도 오늘날의 연금술사들은 점성술과 최면술 등 동원하여 영적 탐색을 도모한다.

 

 

 

 

 

 

 

 

 

 

 

 

 

 

 

 

 

 

 

 

 

 

 

 

 

 

 

 

 

 

 

앨리슨 쿠더트의 《연금술 이야기》(민음사, 1995)'민음의 과학'이라는 시리즈 명으로 출간됐다. 과학적 논리에 한참 벗어난 연금술이 '과학'의 범주에 포함되어 소개한 점이 이채롭다. 연금술을 '과학'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호불호의 반응으로 나뉜다. 회의주의자들은 연금술이 근대 과학의 발전에 공헌했어도 마법과 미신이 반영된 오류의 학문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연금술이 근대과학이 확립된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인류사에 숱한 흔적을 남긴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합리주의의 대명사격인 데카르트는 젊은 시절에 연금술을 탐닉했고, 근대 물리학의 대부인 뉴턴도 말년에는 연금술에 심취했었다.

 

 

 

 

 

 

 

 

 

 

 

 

 

 

 

 

 

 

역사학자 브루스 T. 모런은 연금술이 과학혁명을 결정적으로 이끈 중요한 학문으로 본다. 그의 주장은 '미신' 혹은 '신비주의'로 알려진 연금술의 일반적 관념을 거부한다. 그뿐만 아니라 과학혁명을 연금술과 같은 마법 혹은 신비주의와의 단절로 보는 기존 인식과 배치된다. 연금술사들은 금과 엘릭서를 얻는 목표를 이루어지지 못해 연이어 실패하더라도 자신들만의 정밀한 관찰과 실험 방식으로 세계의 신비를 풀려고 했다. 연금술사들이 엘릭서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무병장수를 누릴 수 있는 비결을 찾으려는 현대의 과학자들과 비슷하다.

 

 

 

 

 

 

 

 

 

 

 

 

 

 

 

 

 

 

스위스의 연금술사 파라켈수스(Paracelsus)는 의사이기도 했다. 그의 의학은 신비주의적 연금술과 과학이 결합하여 있다. 파라켈수스는 대우주와 소우주로 이루어진 천계의 조화가 무너지면 질병이 생긴다고 믿었다. 그리고 질병 치료를 위한 궁극의 비약을 만들고자 했다. 파라켈수스의 업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과거의 과학이 합리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과학혁명은 이성이 압도적으로 이끌어서 이룩한 역사적 결과가 아니라 미신과 이성이 상호작용하면서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연금술사들은 열심히 노력하는 데도 매번 실패하는 '노력형 바보'이다. 비록 연금술은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이 되었어도 그들이 연금술에 진지하게 임하는 자세는 공부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요즘, 귀감이 된다. 연금술사들은 현자의 돌 제조법 같은 아주 중요한 연금술 지식을 알아듣기 어렵게 기록했다. 연금술의 기초도 모르는 일반인이라면 그들이 기록한 지식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연금술사들은 연금술 지식을 기호와 상징, 암호 등 다양한 표현 방법으로 복잡하게 기록하여 다음에 태어날 연금술사들을 괴롭혔다. 그래도 난해하면서도 사변적인 연금술이 오랫동안 학문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연 세계를 알고 싶은 본능적인 앎의 호기심과 공부에 대한 진지한 태도 덕분이었다. 연금술사들은 연금술을 공부할 때 항상 이 격언을 기억했다.

 

 

"읽고, 읽고, 또 읽어라.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여라.

그리고 얻게 되리라."

(lege, lege, relege, ora, labora et invenies)[1]

 

 

연금술사들은 열심히 연금술 책을 읽고, 최선을 다해 인생의 지혜로움을 얻어 나간다면 궁극의 진리를 얻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들의 진지한 태도는 중세 기독교 수도사들의 공부법과 유사하다. 12세기 수도사 후고는 성경 읽기의 전범을 보여주었는데, 일차적으로 성경을 자구적으로 읽었으면 그 두 번째로 알레고리를 해석한다. 이 두 가지 과정을 거쳐 성경에서 발견한 진리의 조각들을 질서정연하게 정리한다. 연금술사들은 수수께끼 같은 암호와 언어들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해석했고, 그렇게 연금술을 통해 세상을 이해했다. 즉, 연금술사의 공부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기도 했다. 우리가 연금술사보다 똑똑하다고 해도 그들의 공부하는 자세를 따라가지 못한다. 사실 연금술사를 '노력형 바보'라고 놀릴 수 없다. 가끔 우리는 말도 안 되는 미신에 쉽게 사로잡힌다. 미신을 둘러싼 진실 여부를 검증하지 않는다. 그렇게 공부와 담쌓은 인간은 이성과 합리성으로 포장한 채 똑똑한 척하면서 살아간다. 평생 죽을 때까지 공부하지 않을 자, 연금술사에게 돌을 던지지 마시라.

 

 

 

[1] 《도해 연금술》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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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2-04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모름지기 공부는 좀 고통스럽게 할 필요가 있는데 말야.
난 성경을 계속 조금씩 읽기는 하는데 구약은 정말
끝까지 읽는다는 게 쉽지가 않아.
어떤 사람 성경이 너무 좋아서 하루종일 읽었다는 사람 보면
부럽기도 하고 넘사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마디로 성령이 임한 거지.ㅠ

cyrus 2017-02-05 11:28   좋아요 0 | URL
군대에 생활했을 때 읽을 책이 없어서 성경을 읽은 적이 있어요. 물론 저도 읽다가 중도에 포기했어요. 제 군대 동기는 하루 일정 끝나고 쉴 때 성경 공부를 했어요. 제가 무교이지만, 그 친구 공부하는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졌어요. ^^

낭만인생 2017-02-04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금사는 과학자였네요..

cyrus 2017-02-05 11:28   좋아요 0 | URL
연금술이 약간 과학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서니데이 2017-02-04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7-02-05 11:2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yureka01 2017-02-04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세시대 연금술사들이 화학과 금속의 발전 토대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연금술의 연구가 없었더라면 산업혁명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던....

cyrus 2017-02-05 11:30   좋아요 0 | URL
금속의 성질을 이해하고, 그걸 얻어내는 방법을 발견해내는 인류의 업적에 연금술사의 노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 - 우리가 잃어버린 보수의 가치
로저 스크러튼 지음, 박수철 옮김 / 더퀘스트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전통주의, 분단, 지역주의 등 여러 가지 변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도에서 보수주의를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다. 지키고자 하는 질서 · 가치가 분명치 않다. 반공 이념의 논리에 경도된 사회적 성향을 말하는가. 아니면 안정 추구의 논리를 그렇게 부르는가. 일단 사회의 기본 틀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 온건한 변화를 수용하는 사람들을 주류인 보수주의자라고 무리하게라도 규정키로 하자.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중산층은 심하게 흔들리고, 재벌은 다수 국민의 원망과 불신을 받아왔다. 이들이 아니라면 서민들이 보수주의자인가. 그럴 리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수를 단순히 반공주의로 간주해 자신들을 보수로 이해하고, 보수 야당 세력을 진보라고 비판해 온 군부 독재의 기준이 보수-진보 논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또한, 서구의 보수는 군부 독재에도 또 지역주의에도 근거하지 않지만, 한국의 보수는 친일 세력에 그 뿌리를 두고, 독재와 지역주의와 반공 이념에 의존했다. 비생산적인 우리나라 정치는 흑백논리의 불모다. 이분법에 찌든 보수주의자들에겐 조화와 절충이 용납되지 않는다. 양보나 타협은 곧 변절이나 패배로 치부될 뿐이다. 중도나 중용 역시 용인되지 않는다. 회색분자로 매도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런 행태가 ‘내 편’은 무조건 따르고 ‘네 편’은 무조건 내치는 패거리 문화로 이어진다.

 

한국에 ‘자칭’ 보수주의 세력은 있어도 보수주의의 정의가 없다. 보수 철학을 근간으로 하더라도 합리적 보수라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도 투명하고 공정해야 하고, 사회정의에 부합돼야 한다. 영국의 보수주의 사상가 로저 스크러튼의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는 보수주의에 대해 냉정한 성찰을 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서양의 지적 전통 위에서 보수주의의 이념적 기원과 그 전개과정을 특유의 관점으로 서술하면서 보수주의의 복잡한 전개과정을 분석해 보여준다.

 

보수주의는 계몽주의를 내세운 근대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통과의 가차 없는 단절을 바라는 계몽주의가 정점에 달했던 프랑스혁명의 이데올로기적 · 정치적 반응의 결과로 나온 것이 보수주의다. 이처럼 근대성의 부정에서 나온 것이 보수주의였고 근대성의 대변자로 자임한 것이 자유주의였다. 고전적 보수주의를 단순히 수구나 반동(反動)으로 받아들인다면 잘못된 해석이다. 고전적 보수주의는 점진주의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옛것만을 수구하거나 새로운 사회변화에 역행하는 반동과 다르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점진적인 개혁에도 찬성한다. 이들이 개혁하는 목적은 나라와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런 점에서 개혁이 진보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셈이다. 1970년 이후 보수주의는 변신을 시도한다. 당시 진보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항했던 보수주의는 하이에크의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수용한다.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포용한 보수주의를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수주의는 냉전 시대부터 시작해서 극우만이 보수인양 이야기된다. 서구처럼 근대적 의미에서의 보수주의를 한 번도 제대로 경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 세력과의 공정한 대화와 논쟁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 간의 대화는 이념에 치우친 이익집단의 싸움판으로 변질했다. 보수주의가 살 길은 도덕성을 회복하고, 보수 이념에 맞는 개혁을 지지하면서 원칙을 지켜나가야 한다. 스크러튼이 내세우는 보수주의의 핵심 원칙은 ‘자유’와 ‘책임’이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주위의 의견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얘기만 고집스럽게 세우는 보수 세력은 자기성찰의 능력이 원천적으로 결여된 극우주의자라고 해야 마땅하다. 다양성의 가치와 덕목을 거스르는 극우주의자는 법을 무시하고, 관용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기에 무슨 자유와 도덕이 있으며, 어떻게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보수주의자는 현실 세계의 관행들이 자신의 철학과 다르다고 격분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차분하게 개혁방안을 기획하고 설득을 통해 국민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다. 우리 사회의 역할에 합당한 보수주의자의 품격이 없다. 대통령의 대통령다움이 없고, 언론의 언론다움이 없고, 지식인의 지식인다움이 없다. 법과 도덕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집단적 광기가 작동되다 보니 배려도 관용도 따뜻함도 없다. 한 사회 전체가 성숙하려면 성찰과 배려가 행동 속에서 조화를 이뤄야 한다. 가치를 사회 속에 실현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보수주의는 ‘이승만과 박정희 얼굴의 보수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보수주의’다. 전자는 ‘차이’와 ‘이견’을 낯설어하고 비정상으로 여기는 문화적 유전자가 있다. 미래의 후손에게 이승만과 박정희의 업적을 가르치려고 한다. 반면 후자는 인간의 한계를 잘 알고 있으며 늘 책임을 자신에게 찾는다. 또 과거의 지혜를 미래의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노력한다. 보수는 희생과 책임의 상징이다. 보수는 그 사회의 책임 있는 중심 세력으로서 공동체를 위해 더욱 헌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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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2-04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때론 보수주의자가 다수주의자로 보이곤 합니다. 자신들의 의견, 지지자가 더 많으니(자의적이면서, 통계도 자의적ㅎ) 옳다라고 말하는 억지주장들을 보면. 어떤 주의자라 할 때 그 합리성에는 늘 한계가 있죠.
케이시 <장소의 운명>에서 흥미로운 제시가 있습니다. 세계 대전 속에서 장소를 한꺼번에 잃은 사람들에겐 추구해야 될 가치가 달라졌다고. 그래서 핵무기는 모든 장소를 없앨 공공의 적. 이데올로기는 장소를 잃은 사람들에겐 잃지 않을 정신적 장소였을 겁니다. 즉 한국에서 6.25 이후 공고해진 반공주의가 단순히 어떤 세력의 공작이나 세뇌로만 뿌리를 내린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죠. 그렇더라도 한국의 보수주의는 대수술이 필요합니다.
보수주의든 진보주의든 집단 이기가 아닌 공동체주의로 작동할 한국이길 기원합니다

cyrus 2017-02-04 16:52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말로만 ‘보수 개혁’만 외치지 말고, 국민들이 수긍할 수 있는 보수주의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보수 개혁’을 지향하는 바른정당 소속 정치인들은 어떻게든 표심을 얻어 보려고 새누리당과 선을 긋는데, 그런 단기적인 행보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샤벳 2017-02-04 21:07   좋아요 0 | URL
동감

yureka01 2017-02-04 1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흔히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보수는 상당히 왜곡되었죠. 지켜야할 가치로운 것이란 보편적이고 타당성을 담보로 해야하거든요.정의.믿음.신뢰.정직.이런가치가 역사성을 가진 보수거든요.그런데 작금의 보수는 안보라는 구실로 권력에 빌붙어서 꼴통이 되었죠.

cyrus 2017-02-04 16:54   좋아요 0 | URL
새누리당이 ‘안보’만 찾는 바람에 정작 ‘자유’와 ‘정의’, ‘신뢰’의 가치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qualia 2017-02-04 20:10   좋아요 0 | URL
새누리당 무리들의 안보는 그들만의 안보죠. 기득권을 위한 안보, 친일/외세의존세력을 위한 안보, 사적 정권 유지를 위한 안보일 뿐입니다. 그것을 나라와 민족, 국민을 위한 안보로 위장한 것일 뿐입니다.

공정한 탄핵 심판에 전념해야 할 헌재 위원 중에 특정 종교인인 한 위원이 극우 세력 언론과의 (기획) 인터뷰에서 좌빨,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나라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고 황당하기 짝이 없는 개솔(bullshit)을 운운하더군요. 다는 아닙니다만, 지금 한국의 50~60대 이상 세대 중 대부분이 저런 개솔스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탄핵은 물 건너간 것이 아니냐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제발 제가 틀리길 바랍니다만.)

이 지독히도 노예스런 국민들과 그 나라, 한국은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충격적이고 굴욕적인 사건을 거듭해서 겪어도, 나라가 절단나고 다시 망해도 궁극적으로는 결코 깨닫지 못할 국민이고 민족이고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과격하게 보일 텐데요. 저도 그건 압니다만, 한국/한민족은 반드시 망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역사가 미래를 예견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미래에 인구폭발, 기후격변, 전세계적 식량부족, 자원고갈 등등의 사태가 벌어질 것이 확실시되고, 핵무기 따위 가공할 대량파괴 무기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고, 강대국 간의 충돌 위험성도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추세로 볼 때, 인류사에서 3차대전이나 그에 준하는 전쟁 발발은 필연이라고 봅니다. 헌데 역사 속에서 우리 한국/한국인들이 어떻게 각종 대규모 전쟁에 임해왔는가를 살펴보면 답은 이미 나와 있다고 봅니다. 2차대전 말기 패망해가는 일제한테 선전포고 하나 못한 한국/한국인들이었죠. 너무나 비굴하고 너무나 수동적인 노예들의 필연적 행동 양태였던 것입니다. 독립은 남들이 가져다준 것이었지 우리가 자력으로 쟁취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지금이 21세기라서 달라진 것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외세 의존 성향과 동족끼리의 대결의식은 더 강화됐고, 한반도가 남북, 전라/경상으로 사분오열됐으니 훨씬 더 악화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쭝궈, 닛뽕, 러시아, 미국, 등등의 자국 이기주의, 제국주의적 성향도 현대적 방식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강대국끼리의 적대적 공존을 위해 그들끼리 밀약하고 그들 마음대로 약소국의 생사여탈권을 결정할 수 있는 국제정치역학적 환경도 더욱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았던 구한말에 견줘볼 때 지금이 결코 더 나아 보이진 않습니다. 그 정반대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결론은 한국은 망할 것이고 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세와 대결하기는커녕 자기 민족끼리 피를 흘리며 극렬한 대결에 광분하는 어리석은 민족은 필연적으로 멸망에 이를 것이고 또한 반드시 멸망해 없어져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자연법칙이고 인류의 당위일 것입니다.
 

 

 

 

 

 

 

 

‘문학과지성사’는 1975년에 창립된 출판사다. 내가 소장한 ‘문학과지성사’ 출판물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프랑수아 비용의 《유언시》다. 초판 발행연도가 1980년 12월 1일이다. 이때 나온 책의 가격이 2,500원이다. 이 책을 알라딘 온라인 중고샵에 샀을 때 가격은 12,000원이었다. 이 정도 가격이면 비교적 싼 편이다. 프랑수아 비용(Francois Villon)은 프랑스 중세 말기에 활동한 시인이다. 예전에 이 시집을 다룬 졸문 두 편을 쓴 적이 있어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관련 글 :

[두 사형수를 위한 보헤미안 랩소디] (2012년 8월 23일 작성)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유증합니다] (2016년 5월 21일 작성)

 

 

 

 

 

 

 

 

 

헌책방이나 알라딘 중고매장에 가면 항상 사는 책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문지 스펙트럼’ 그리고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다. ‘문지 스펙트럼’을 제외하면 나머지 두 출판물 시리즈는 지금도 계속 발행 중이다. 다만, 나온 지 오래된 책은 절판되었다.

 

 

 

 

내가 모은 ‘문학과지성 시인선’ 목록을 살펴보면 ‘김갑수’가 쓴 시집이 눈에 띌 것이다. 맞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 ‘김갑수’가 맞다. 연기자 김갑수 말고 종편 방송에 자주 출연하는 문화평론가 김갑수를 말한다. 원래 이 분은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1984년에 시를 발표했고, 첫 번째 시집이 바로 ‘문학과지성 시인선 No. 84’ 《세월의 거지》다. 사실은 김갑수 씨가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이 시집을 사면서 알게 됐다. 처음에 시집의 저자 이름을 봤을 때 동명이인인 줄 알았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No. 10’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은 김광규 시인의 처녀시집이다. 이 시집에 고등학생 문학 교과서에 수록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가 있다. 역시 같은 시집에 수록된 『도다리를 먹으며』와 함께 언어영역 문제집이나 모의고사 지문으로 등장한다. 이 두 편의 시는 학창시절 문학 수업시간을 통해 알게 됐다. 개인적으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좋아한다.

 

 

 

 

 

1976년 <문학과지성> 겨울호에 첫 선을 보인 조세희의 연작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은 1970년대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위대한 작품이다. 어둡고 짙은 산업화 시대의 그늘 속에 살아가는 하층민의 삶을 담아낸 이 작품은 조세희의 대표작으로 크게 각인됐다. 그래서 《난쏘공》 이후에 나온 작품들 역시 문학적 가치가 있음에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1983년에 출간된 《시간여행》은 조세희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난쏘공》이 1970년대 시대상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면, 《시간여행》은 1980년대 시대상을 조명한 작품이다. 두 작품을 굳이 세세하게 비교하면서 읽지 않아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숫자만 달라졌을 뿐, 우리 사회의 그늘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니, 사회 전체를 뒤덮는 그늘의 범위가 더 커지고 말았다. ‘난장이’로 비유된 사회적 약자들의 꿈이 과거보다 더 이루어지기 어려워졌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저자 노르베르토 보비오(Norberto Bobbio, 1909~2004)는 이탈리아의 정치학자이다. 그는 ‘자유’를 표방하는 자유주의자와 ‘평등’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자(혹은 사회주의자) 간의 길고 긴 대립의 과정을 분석하면서 이 서로 다른 정치적 개념의 결합을 모색한다. 조국 교수는 이 책을 추천하면서 여전히 낡은 이념에 사로잡힌 ‘얼치기 좌파’들이 읽어야 하는 필독서로 소개했다. 그렇지만 요즘 혼란스러운 시국을 생각한다면, ‘얼치기 좌파’보다는 ‘가짜 우파’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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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2-03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제는 구하기 힘든 멋진 책이 많군요! 흥미롭게 잘 봤습니다!

cyrus 2017-02-04 10:31   좋아요 0 | URL
절판된 책들은 출판사 창고에서도 찾기 어려울 겁니다. 출판사는 책을 만들 때 반드시 비매품 보관용 한 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책 한 권 펴내는 일이 출판사의 역사가 되니까요. ^^

해피북 2017-02-04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앙! 헌책방을 자주 다니신다셨는데 이런 보물을 찾으셨군요 ㅎㅎ 그런데 김갑수님이 ㅋㅋ 시인이셨다는건 몰랐어요. 강적들이나 황금알에 나오셔서 가끔 봤는데 시인이라니 왠지 느낌이 달라지네요 ㅋㅡㅋ

cyrus 2017-02-04 10:40   좋아요 0 | URL
비록 사기만 해놓고 읽지 않은 책이 꽤 많지만, 이런 이벤트에 응모하기 위해서 사 모으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

김갑수씨를 처음에는 클래식 음악과 커피를 좋아하는 문학평론가인 줄 알았어요. 시집을 내셨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어요. <세월의 거지>가 김갑수씨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입니다.
 
라요하네의 우산
김살로메 지음 / 문학의문학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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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곳에서라면 어디에나 있는 ‘관계’. 그 다양한 맥락 속에 거짓과 위선, 희망과 진실이 한데 엉킨 삶의 모습이 있다. 김살로메의 소설집 《라요하네의 우산》에는 관계 맺기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인간 사이의 관계 맺기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핵심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상처를 캐고 보듬는 가운데 얻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관계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은 운명적으로 자신의 타자가 된다. 작가는 “내 안의 위선과 진실, 내 안의 악마성과 순진성 사이에 소설이 존재”[1]한다고 말한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일상의 삶은 흔들리고 부서진 것이 되며, 때로는 그것마저 실재감을 잃어버린 환상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타인과의 관계 맺기 역시 불모와 불가능, 변질로 끝나기 십상이다. 자아의 정체성이든, 타자와의 관계든 거기에는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일’[2]이 깃들여 있다. 그럼에도 작가는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일’을 공감하고 탐색하는 자세가 삶을 구성하는 능동적인 힘임을 믿는다.

 

『알비노의 항아리』의 주인공들은 빙 둘러 가는 접촉을 통해 힘겹게 관계 맺고 있다. 남편과 아내는 너무 다르다. 남편은 굳건한 일상의 틀을 지키면서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아내는 피부와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하는 알비노(Albino)라는 희귀 질환을 겪고 있다. 이 병의 원인에 대해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아내는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선입견 속에 살아간다. 일상의 세계는 인간끼리의 접속이 힘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위험에 노출돼 있다. 아내의 소변을 정력제로 확신하는 남편의 어머니는 말해지지 않은 부부 사이 마음의 틈을 점점 벌어지게 한다. 언제 깨질지 모른다. 아무리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만 언제 깨질지 모른다. 그러나 마침내 부부는 서로 참다운 사랑을 확인함으로써 합일될 수 있는 관계에 도달한다.

 

『암흑 식당』은 자신에게 부과된 강제적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우리 자신들이 모순적으로 겪고 있는 내면적 그늘을 남다르게 포착해내는 깊이를 내보이고 있다. 암흑 식당은 형상이 유발하는 선입관과 현혹이 완전히 차단되는 장소다. 그래서 지겨운 일상에서 눈을 돌려 암흑 식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는 은밀해서 달콤하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의 가면을 벗기 위해 진짜 가면을 쓴 암흑 식당 손님들의 기이한 관계 맺기는 타인의 욕망 대상이 된다. 섹스는 이성적 합일을 완성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체험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섹스조차도 그토록 열망한 사랑의 확인이 아니라 현대인의 불행을 보여준다.

 

작가는 『라요하네의 우산』에서 불안한 인간의 내면을 무심하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조각난 사건들을 보여주면서도 어떤 가능한 자기만의 세계를 그려낸다. 소설의 등장인물 샌드리는 시메트리(symmetry) 증후군에 시달린다. 그녀는 ‘균형’이라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고 그 이미지의 압박감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이 소설에서 언급되는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은 샌드리가 자신의 삶 속에 묻혀 있는 상처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자기 앞의 생》은 합리적인 우리 삶의 심층에 자리 잡은, 남모르게 앓고 있는 고통에 주목하는 문학 고유의 영역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평범하게 보이는 일상적 관계의 뒷면에는 잊힌 상처가 있다. 그것은 선천적으로 기형적인 육체의 아픔일 수도, 인간 사이에서 주고받는 고통의 기억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두는 상처라는 이름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다. 《라요하네의 우산》의 매력은 요란스런 사건의 전개 대신 일상생활 속 아픔과 극복 과정을 잔잔한 어투로 복원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정신적 상처와 결핍의 모습은 생활을 통해 간간이 새어 나오는 슬픔이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상대방에게 속이지 않고, 또 자신을 속이지 않고, 자신의 나약함을 상대방의 결점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해하고 안아줄 수 있는 것. 그것이 이 소설집에서 확인할 수 있는 상처 치유력을 가진 정신적 약재들이다. 관계의 어긋남에서 비롯된 상처란 다시 관계 속에 던져져야만 진실하게 아물어 갈 수 있다.

 

 

 

 

[1] 작가의 말, 317쪽

[2] 『라요하네의 우산』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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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2-03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요..관계함으로써 상처가 없을 수가 없죠..서로 생채기를 내고..다시 보듬고..그래서 아물고 ...그러므로써 관계가 더 단단해져야하거든요..문제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이거 없다면 관계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니까요. 가급적이면 서로가 상처를 주고 받기보다는 위로와 헌신과 희생으로 오고가면 더 좋겠지요.....

cyrus 2017-02-03 17:13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면 감정이 상하는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살면서 겪어야 할 일입니다. 서로 간에 감정이 다치지 않도록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게 안 되면 어렵게 맺은 관계를 회복하기 어려워요.

페크pek0501 2017-02-03 15: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통스럽거나 부끄러운 일’이 나만의 경험이 아니고 다른 누구도 겪은 일이라는 걸 확인할 때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요즘 공감하는 친구가 참 필요한 거구나, 친구 없는 사람은 외롭겠구나, 생각하게 되어요.
제일 듣기 싫은 말 중 하나는 ‘복에 겨워 그러는거야.˝라는 말이에요. 같은 일이라도 사람에 따라서 느끼는 강도가 다름을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요...

cyrus 2017-02-03 17:16   좋아요 0 | URL
오늘 본 인터넷 뉴스 내용인데요, 30대 이후부터 친구 수가 줄어든다고 합니다. 저도 20대 후반을 살아오면서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나를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친구가 소중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2017-02-03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03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04 09: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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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4 10: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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