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1권을 읽어보신 독자라면 그 책에 인용된 프랑수아 비용(Francois Villon)의 시구를 봤을 것이다.

 

 

저는 가난하고 늙은 여인입니다

아주 무식해서 읽을 수도 없어요

그들은 저희 마을 교회에

하프가 울려 퍼지는 천국과

저주받은 영혼들이 불타는 지옥을 그려서 보여주었어요

하나는 내게 기쁨을 주지만

다른 하나는 두려움을 줍니다

(《미학 오디세이 1》 150쪽)

 

 

이 시의 제목이 『어머니를 위한 발라드』로 되어 있다. 발라드(ballade)란 유럽 중세에 유행한 자유로운 형식의 담시(譚詩)다. 《미학 오디세이 1》에 인용된 시구는 전체 내용의 일부이며 비용이 1461년에 발표한 <유언의 노래(Le Testament)>에 수록되었다. 발라드의 원제는 ‘Ballade pour prier Nostre Dame’이다. 이 제목은 ‘성모에게 기도하기 위한 발라드(송면, 《유언시》)’, ‘성모에게 기도하는 발라드(송면, 《프랑수아 비용 : 그 생애와 시 세계》)’, ‘성모에게 기도드리는 발라드(김준현, 《유언의 노래》)’로 번역되었다.

 

 

저는 아무 것도 모르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불쌍한 늙은 여자외다.

제가 속하고 있는 성당에는

수금(竪琴)과 비파(琵琶)가 그려진 천국의 그림과

죄인들이 업화에 타는 지옥의 그림이 있는데

하나는 저를 무섭게 하고 하나는 저를 기쁘고 즐겁게 하나니

 

(『성모에게 기도하는 발라드』 중에서, 《유언시》 128쪽)

 

저는 늙고 불쌍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글자 한 자 읽을 수 없는 여인입니다.

제가 속한 교구의 교회에서, 저는 봅니다,

하프와 류트가 있는, 그림으로 묘사된 천국을,

그리고 단죄받은 죄인들을 불길에 끓이는 지옥을,

하나는 저를 두렵게 하며, 다른 하나는 기쁨과 즐거움을 줍니다.

 

(『성모에게 기도드리는 발라드』 중에서, 《유언의 노래》 53쪽)

 

 

그런데 《유언의 노래》에서는 원제가 ‘Ballade pour prier Notre Dame’으로 되어 있다. ‘Nostre’에서 ‘s’가 빠졌다. 오자로 보일 수 있으나 ‘Notre Dame’도 ‘성모’를 뜻하기 때문에 인쇄상 오류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아마도 ‘Nostre Dame’은 중세 시대에 사용했던 고어(古語)였을 것이다. 그런데 ‘Nostre Dame’을 인터넷 불어사전에 검색하면 ‘성모’가 아닌 생각지 못한 단어가 나온다.

 

‘Nostre Dame’은 예언가로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의 본명과 같다. 우리가 잘 아는 이름은 라틴어고, 그의 프랑스어 본명은 ‘미셸 드 노스트르담(Michel de Nostredame)’이다. 그래서 시의 제목을 ‘노스트르담에게 기도하는 발라드’로 읽을 수 있다. 이것만 가지고 비용과 노스트라다무스의 연관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전혀 관련이 없다. 비용은 1431년에 태어나서 1463년(추정)에 사망했고, 노스트라다무스는 그보다 훨씬 늦은 1503년에 태어났다. 굳이 두 사람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시를 쓴 사실 그것 하나뿐이다. 비용은 8행시로 구성된 시를 남겼고, 노스트라다무스는 4행시로 이루어진 예언 시를 남겼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시는 세기말에 다시 주목받았고, 지구 종말론을 언급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떡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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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프 2017-02-07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심오합니다

cyrus 2017-02-08 11:01   좋아요 0 | URL
비용의 시 중에 심오한 분위기를 내는 것들이 꽤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 의식이 반영된 것도 있어서 지금 보기에는 좀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유언의 노래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4
프랑수아 비용 지음, 김준현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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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 · 첨언합니다 (2017년 2월 10일 작성)

 

제가 2월 7일, 그리고 오늘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유언의 노래》 13연 8행시에 문제를 제기하는 글을 썼습니다. 오늘 오전에 ***님(의 댓글이 ‘비밀’로 되어 있어서 실제 닉네임을 거론하지 않았습니다)께서 제 의견에 대한 이견을 내놓았습니다. ***님의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제가 참고했던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원문이 잘못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원문은 1860년대에 나온 것이고, 그 후로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반영된 시의 순서와 머릿수가 체계적으로 정립되었습니다. 《유언시》의 송면 교수와 《유언의 노래》의 김준현 교수는 새롭게 정리된 원본 시집을 참고해서 번역했을 겁니다. ***님이 2012년에 나온 불영 대역본 시집의 시의 순서와 머릿수가 두 권의 번역본과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프로젝트 구텐베르크’는 과거 자료를 디지털화해서 옮겼기 때문에 최근의 연구 성과를 반영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원문을 가지고 두 권의 번역본에 대해 문제점이 있다고 주장한 의견이 잘못되었음을 밝힙니다. 잘못 전달될 소지가 있는 내용은 '취소선'으로 그었습니다. 좋은 의견을 주신 ***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프랑수아 비용(François Villon)의 《유언시》(문학과지성사, 1980년)와 《유언의 노래》를 같이 읽었다. 전자의 책은 3,000행이 넘는 비용의 시를 모두 번역한 전집 형태의 완역본이고, 후자의 책은 선집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두 책의 출간 연도의 차이가 무려 36년이나 된다. 그만큼 번역 어투에도 크게 차이가 난다. 당연히 《유언의 노래》가 읽기 편하다. 《유언시》는 한문이 조금 섞여 있고, 이제는 촌스러운 티가 나는 80년대 외래어 표기법의 흔적이 있다.

 

무모하게 프랑스어 원전 텍스트까지 참고했다. 텍스트는 프로젝트 구텐베르크(Project Gutenberg)에 있는 <Oeuvres complètes de François Villon>(프랑수아 비용 전집)이다.

 

※ 링크 : http://www.gutenberg.org/files/12246/12246-h/12246-h.htm

 

 

솔직히 말하면, 나는 외국어 공부에 담 쌓은 지 오래 되었다. 당연히 프랑스어 기초조차 배운 적이 없다. 그래도 원문을 참고하는 이유가 있다. 프랑스어를 한국어로 번역된 텍스트만 가지고 번역이 좋다 나쁘다고 비교 · 평가하는 건 번역에서 중요한 논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번역문이 최대한 원문과 가깝도록 옮긴 건지 따지려면 비용의 시에 관심이 많은 불문학 전공자가 해야 하는 것이 맞다. 나는 번역자가 문장을 어떻게 이해했고 해석했는지 알고 싶어서 원문을 참고했다.

 

삼중(三重)의 독서를 하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원문을 참고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두 번역본에 공통된 문제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점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전에 원문과 이를 번역한 문장들을 소개해본다.

 

 

 

* 《유언시》 53쪽

 

그리고 메트르 로베르 발리에게는

산인지 계곡인지 알 수 없는

고등법원의 말단 서기이기에

목로주점 ‘장화’에 맡겨 둔

나의 긴 바지를 남겨 준다.

우선 그에게 내어 주기 바라거니와

그의 애인 쟌 드 밀리에르에게 입힌다면

여간 잘 어울릴 것이 아니로다.

 

* 《유언의 노래》 16쪽 (『산도 골짜기도 분간하지 못하는』)

 

또 로베르 발레,

산도 골짜기도 분간하지 못하는

고등법원의 불쌍한 서기에게

내 주된 유증물을 정하노니,

선술집 ‘장딴지’에 담보물로 잡힌

짧은 반바지를,

그의 연인인 잔 드 밀리에르에게

매우 걸맞은 머리쓰개가 되도록

그에게 즉시 주기 바란다.

 

 

원문에는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아 사라진 고어(古語)가 많다. 우리말로 번역된 두 개의 문장을 비교해보면 문맥상의 차이가 확연히 보이지만, 이를 분석하는 일은 불문학 전공자가 하는 게 맞다. 내가 문제 삼고 싶은 건 따로 있다. 두 번역본은 『산도 골짜기도 분간하지 못하는』 8행시 구절 전체를 ‘13연(XIII) 97~104행’으로 소개했다. 그런데 이 8행시 구절은 ‘13연’이 아니라 ‘14연(XIV) 105~112행’이다. 《유언시》를 번역한 故 송면 교수가 13연으로 알려진 8행시를 실수로 빠뜨리고, 14연의 8행시를 13연으로 착각한 것일 수 있고, 아니면 송 교수가 번역하기 위해 참고한 저본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라고 해도, 번역자의 책임을 완전히 면하기 어렵다. 원래 13연의 8행시가 누락되니까 15연의 8행시가 엉뚱하게 ‘14연’으로 표기되어 있고, 뒤에 나오게 될 구절의 연 표시마저 다 틀렸다. 19연의 8행시는 ‘18연’으로 되어 있고, 송 교수는 19연에 원문을 알 수 없는 8행시 구절을 옮겼다. 프랑스어를 잘 몰라서 아직까지 《유언시》의 19연으로 소개된 8행시 구절의 원문을 찾아내지 못했다.

 

 

또 하나, 야경대장(夜警隊長)에게는

투구를 주기로 정해 두고

가게의 대를 어루만지며 야경을 도는

사보(徙步)의 야경 대원들에게는

훔친 멋있는 물건

피에르 오 레 가(街)의 초롱을 남겨 준다.

그리하여 만약 그들이 나를 샤틀레 감옥으로 연행하면

나는 세 개의 백합 무늬의 방을 차지하리로다.

 

(《유언시》 56쪽, 번역자 송면 교수가 ‘19연’으로 잘못 소개한 8행시)

 

 

《유언의 노래》의 번역자 김준현 교수는 비용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고려대 불문학과 부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그마저도 30여 년 전에 송 교수의 실수를 재현했다. 김 교수도 《유언시》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비용의 시를 번역했을 때 《유언시》를 참고했을 수도 있다. 송 교수의 번역본을 참고했든 안 했든 간에 13연의 8행시가 빠뜨린 채, 14연의 8행시를 13연으로 소개한 것은 중대한 오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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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사회 - 인간 사회보다 합리적인 유전자들의 세상
이타이 야나이 & 마틴 럴처 지음, 이유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생명의 최소 단위는 세포다. 원시의 바다에서 단세포생물이 처음 출현한 그 날부터 계보를 이어 내려오면서 세포는 점점 복잡한 구조를 가진 고단위의 생명체로 진화해왔다. 세포를 만들어내고 그 세포가 생존에 더욱 적합하도록 진화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바로 유전자다. 지금까지 유전자나 유전학에 대한 대중 과학서들이 대체로 ‘이기적 유전자’나 ‘이타적 유전자’라는 관점에서 자연현상을 풀어나갔다면, 《유전자 사회》는 통합적인 관점에서 유전자 세계를 조망하고 순례한다. 유전자는 필연과 우연, 변화와 정체, 이기심과 이타심 같은 수단들을 필요할 때마다 적절히 사용하여 생명을 연속시켜 나간다. 이제껏 진화의 문제가 ‘생존 경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진화 과정’에 집중돼 있었다. 그러나 유전자 확산을 목적으로 한 진화 과정은 아무 의지 없이 진행되는 자연선택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그것은 사회 안에서 협동하고, 경쟁하는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결국 “생명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려면 먼저 우리가 ‘유전자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유전자 정보는 생명을 이루어줄 뿐만 아니라 개성까지 갖춰 준다. 사람의 개성이나 체질이란 서로 다른 극히 일부의 염기서열 차이에서 오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유구한 세월 동안 환경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적응하며 진화해 온 존재이며, 어느 생명체도 그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부분 질병은 유전자들의 돌연변이에 의한 기능 이상 때문에 비롯된다. 인간 역시 다른 생물과 함께 진화의 과정 중에 있다. 유전자들의 변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 유전자 돌연변이를 통해 여러 질병이 생기기도 하지만, 더 우수한 형질이 만들어지기도 하며 그것으로 생명체의 다양성도 유지된다.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면 언젠가는 암도 정복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과학에 대한 지나친 맹신과 막연한 기대감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지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유전자들이 다음 세대에 자신들 유전자 정보를 물려주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생명체는 죽지만 유전자는 번식을 통해 계속 지구상에 살아남는다. 암세포는 원래 정상 세포의 유전자가 발암 요인에 의해 돌연변이가 일어나 생긴다. 기하급수적으로 숫자를 늘려가며 주위의 정상조직을 파괴하고 자신의 졸병들을 혈관을 통해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급기야 인간의 생명을 앗아간다. 따라서 암은 유전자가 역동적으로 진화하면서 만들어진 과정의 근본적인 결과다. 이런 시각에서 암의 발생 이유를 이해한다면, 우리가 암을 예방하기 위해 턱없이 비싼 건강식품이나 비법 등에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붓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런 노력을 통해 내 몸에 존재하는 암 발병 가능성을 가진 유전자의 존재를 거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흰머리가 나고, 눈과 귀가 어두워지고, 치아가 약해지는 것이 순리인 것처럼, 암이 발생하는 원인은 인간이 유전자 속에 가진 정보일 수 있다.
 
《유전자 사회》는 ‘유전자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식의 ‘유전자 결정론’을 깔고 있지 않다. 유전자가 사람의 모든 것을 좌우한다는 발상은 위험하다. 유전자 결정론은 다양한 인간의 삶을 획일화하고,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념적 근거가 된다. 《유전자 사회》는 이 극단적인 생각과 전혀 관련 없다. 《유전자 사회》의 저자들은 인류의 유전자가 인종과 관계없이 99.9% 일치함에도 인종차별이 일어나는 이유를 짚어본다. 인종 간의 유전적 차이를 연구하는 것이 인종차별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문화적 변이’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은 유전자와 문화적 요소(관습과 교육)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나는데 문화적 요인이 더 큰 영향을 준다. 유전자란 해당 개체 생명체의 행동유형을 규제하긴 하지만 그런 유형은 사회적 및 자연적 환경의 영향을 전적으로 받는다. 달리 말해서 기존 진화이론과 달리 유전자 역시 고립된 것이 아니라 외부환경의 조건에 따라 서로 변화할 수 있다. 《유전자 사회》는 인간이 모든 생물 종의 가장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로부터 무수히 많은 것을 받았고, 지금도 그들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여 우리를 겸허하게 한다. 인간은 생명의 역사라는 기나긴 여정에서 목적지가 아니라 유전자 세계 속의 간이역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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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2-07 06: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회학의 분석 단위가 ‘개체‘에서 ‘유전자‘로 내려가면서, ‘개인의 의지‘나 ‘생각‘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국가‘의 개념과 개체로서 ‘개인‘이 이제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과학의 발전이 가져온 사회학의 변화인 것 같습니다^^

cyrus 2017-02-07 12:43   좋아요 1 | URL
흔히 유전자를 인간 수명 연장을 위해 알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유전자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고, 여전히 연구해야 할 것이 아주 많습니다. 유전자 세계를 하나의 사회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과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
 

 

 

["헌책 팔아 빌딩 짓는다는 시절 있었는데..."] 오마이뉴스, 20172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47&aid=0002140306

 

 

 

어제 발견한 좋은 기사입니다. 헌책방을 소개한 글을 볼 때마다 반갑고,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2014년 처음으로 뿌리서점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뿌리서점을 상징하는 간판이 된 책이 주인을 기다립니다!’라 문구는 여전했습니다. 만일 저 간판 하나 없어지면 헌책방에 들어설 때 낯설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뿌리서점 사장님의 말씀 속에 한국 현대사 격동의 물결이 남기고 간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거대한 물결 속에서 헌책방 하나만 믿고 치열하게 헤쳐나간 사장님이 존경스럽습니다. 사장님 말씀대로 여기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입니다.

 

 

 

 

 

 

 

 

 

 

 

 

 

 

 

 

 

 

 

헌책방은 책의 역사가 잠들어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헌책방 주인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사를 목격했고, 혼자서 묵묵히 지키고 있는 정령입니다. 오늘도 헌책방 주인은 여전히 책의 곁을 떠나지 않고, 책을 만들고 진열합니다. 그리고 무한히 자신과 세계를 향해 책을 접었다가 다시 펴기를 반복합니다. -뤽 낭시는 이러한 서점상의 일을 삼중의 명령이라고 했습니다.[1] 헌책방 주인은 매일 수많은 책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변화무쌍한 세계 속에 가치가 있을 만한 책들을 건져내고, 새 주인을 만나기를 고대하면서 책장에 꽂아 소중히 보관합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그곳은 독자들의 접촉 횟수가 아주 적습니다. 헌책방 주인의 손길을 많이 거친 책들은 새로운 주인, 즉 독자들이 자신을 활짝 펼쳐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헌책방의 책들 대부분은 출판연도가 상당히 오래됐습니다. 저보다 먼저 태어난 책도 있고요, 제가 태어난 해에 나온 책도 있습니다. 그래도 출간된 지 20년 훌쩍 넘긴 책은 나이가 많은 노인과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헌책방은 양로원인 셈이죠. 책들은 여전히 소통에 가담하고 싶어 합니다. “, 안 늙었어. 아직은 팔팔하다네.”라고 말하는 노인의 고집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나이 든 책들보다 한참 늦게 태어난 젊은 독자들은 그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과 귀는 스마트폰으로 향해 있으니까요. 사실 책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스마트폰입니다. 헌책방 밖에는 책보다 더 재미있는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새로 나오는 책들의 등장에 나이 든 책들의 입지가 점점 좁아집니다. 가끔 2010년대에 나온 젊은 책들이 간혹 헌책방에 머무를 때가 있습니다. 정말 그들은 먼지가 쌓이기 전에 잠깐 머무릅니다. 오래 머물러봤자 최소 일 년입니다. 젊은 책들은 나이 든 책들보다 새 주인을 만날 확률이 높습니다.

 

아무리 헌책방을 예찬해봤자 헌책방을 갑자기 찾는 손님은 없을 겁니다. 헌책방은 직접 가봐야 합니다. 그러면 헌책방의 매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헌책방 내부에는 먼지가 많고, 눅눅한 냄새가 코를 건드립니다. 게다가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춥습니다. 손님이 찾기에 아주 열악하고, 불편한 공간입니다. 요즘 거대하고, 아늑하고, 음악이 흐르고,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오프라인 중고서점의 등장으로 헌책방을 찾는 발길이 더 뜸해졌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헌책방에 드나들면서 2, 30대 손님이 한 시간 이상 책을 고르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 예외의 경험 딱 한 번 있었습니다. 젊은 남녀 커플이 헌책방에 와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한 권을 찾느라 3, 40분 머무른 적 있었습니다. 헌책방에 오래 머무르는 손님들의 평균 연령층은 5, 60대입니다. 그런데 이분들 대부분은 책을 사는 목적 때문에 헌책방을 찾는 것이 아니라 헌책방 주인과 친분이 있어서 찾습니다. 이분들은 몇 시간 동안 헌책방 주인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렇다고 이분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곰팡내 나는 헌책방에 이런 분들이 많이 와야 사람 냄새가 나는 헌책방이 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이분들이 나이가 나이인지라 몸이 불편하면 헌책방에 방문하기 어렵습니다. 그분들과 같이 나이 먹어가는 헌책방 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헌책방 주인의 하루는 노쇠한 체력 하나만 믿고, 헌책방의 문이 닫히지 않기 위해서 버티고 있습니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보려고, 그리고 정말 몇 안 되는 단골손님들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헌책방을 홀로 지킵니다.

 

-뤽 낭시는 책을 진지하면서도 덧없는 사유라고 했습니다.[2] 아주 멋지면서도 맞는 말입니다. 한편으로 헌책방의 생존기를 생각하면 그 말이 서글프게 느껴집니다. 물론, 낭시는 그 말 다음에 우리가 끈질기게 공유하는 사유라고 덧붙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헌책방 안에서 이러한 사유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일이 희박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헌책방을 자주 찾는다고 해도 이 진지한 사유의 거래가 얼마나 오래 갈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작년 10, 제일서점의 예고 없는 폐점을 두 눈으로 목격하면서 사유의 거래를 했던 그동안의 세월이 덧없음을 느꼈습니다. ([갑작스러운 이별] 20161018일 작성)

 

그래도 저는 대구의 모든 헌책방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곳에서 끈질기게 공유하는 사유의 거래를 추구하고 싶습니다. 뭐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헌책방에서 좋은 책을 찾고, 읽는 것이 그저 즐겁기만 합니다.

 

 

 

[1] -뤽 낭시 사유의 거래에 대하여43

[2] 같은 책, 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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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7-02-06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사 재미있게 읽었어요
엄청 돈 버셨더군요ㅎ
좁은 공간에 복도까지 쌓여진 책을 보니
과연 손님이 있을까 싶은게 절로 삶의 무게가 느껴지던데 격세지감입니다.
인터넷의 발달이 누군가를 이렇게도 죽여왔구나 싶어요~

cyrus 2017-02-06 22:09   좋아요 1 | URL
세월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서 좋은 것들이 사라지거나 잊히는 상황이 아쉬워요.

해피북 2017-02-06 2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사도 잘 읽고 글도 재밌게 잘 읽었어요. 종종 헌책방 탐방기를 올려주셨던 덕분에 헌책방에 대한 남모를 동경도 생기고 ㅎ 물론 곰팡이냄새는 조금 맡더라도 하루쯤 발품 팔아가며 책들 사이를 누벼보고 싶은 충동도 들게합니다. 작년에 알라딘 중고샵 방문 횟수가 1회라서 까마득하게 느껴지던 참이었는데 글을 읽고나니 막 달려가보고 싶네요 ㅋㅂㅋ

cyrus 2017-02-06 22:11   좋아요 1 | URL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 있는 헌책방에 한 번씩 방문해서 연재 형식으로 글을 써볼 생각도 한 적 있었어요. 1년 서재 활동 프로젝트인 거죠. 그런데 현실은.. ㅎㅎㅎ

대학생 때 이런 목적의 여행을 하지 못해서 후회됩니다.

지금행복하자 2017-02-06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저에게 헌책방은 참고서팔러간 기억밖에 없어요.. 알라딘 중고서점은 헌책방으로 안쳐 주니까요 ㅋㅋ

cyrus 2017-02-06 22:13   좋아요 0 | URL
대부분 사람들이 생각하는 헌책방의 이미지가 참고서 구하거나 팔 수 있는 곳이죠. 저 어렸을 때 교과서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어요. 그때 아버지가 직접 헌책방에 가서 똑같은 교재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

아무 2017-02-07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 사는 곳엔 헌책방이 한 곳뿐인데, 책이 워낙 많아 둘러보기도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오랜만에 다시 찾아가봐야 될 것 같네요 ㅎㅎ

cyrus 2017-02-07 16:48   좋아요 0 | URL
혼자서 책을 찾기 힘든 헌책방일수록 좋습니다. 그러면 오기가 생겨서 다음에 또 한 번 가고 싶어져요. ^^

stella.K 2017-02-07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헌책 장사도 무시할 게 아니구나.
난 그거해서 밥은 먹나 싶었거든.
이름난 서점들이 중고샵을 하는 것도 이유는 있겠어.ㅋ

cyrus 2017-02-07 16:51   좋아요 0 | URL
헌책방 사장님이랑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가 아니라서 하루에 받는 수입이 얼마인지 여쭈어보지 못했어요. 가게 임대료 때문에 푹 쉬지 못하고, 가게에 나서는 모습을 보면 안쓰러워요.
 
사유의 거래에 대하여 - 책과 서점에 대한 단상
장 뤽 낭시 지음, 이선희 옮김 / 길(도서출판)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책은 다른 세계와 통하는 하나의 창이다. 색다른 경험을 간접적으로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 현상을 타파하고 사유의 영역을 넓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독서이다. 읽는 행위가 단순히 보는 행위와는 다르다. 책은 우리 뇌리에 더욱 깊이 각인시켜 준다. 그래서 어떤 책을 읽고 크게 감명받았다면 그의 일생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기도 한다. 사고하는 능력, 인생을 만드는 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다. 스스로 자신만의 길을 선택해서 걸어가는 것이다. 책 속에 기록해 둔 진리의 흔적을 따라가서 읽어내는 것, 그것은 마치 우리가 잠시 여유를 갖고 길을 거닐며 사색하는 산책과 유사하다. 좀 깊이 생각하면 독서는 글을 매개체로 글쓴이의 ‘마음을 읽는 것’이고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장-뤽 낭시는 독서를 통해 자기 자신과의 끝없는 대화를 나누고, 자기 생각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을 ‘거래(commerce, 교류)’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독서를 통한 ‘만남’은 우리 사유의 폭을 넓히고, 유연한 사고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타인(다른 독자)을 좀 더 포용할 수 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듯이 한 권의 책을 만나면서 자신의 미래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선호하는 책만 골라 읽는 편식성 독서의 문제점은 다른 책들이 독자에게 말 거는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결국, 이는 좁은 영역에 스스로 갇히는 우둔함을 자초한다. ‘자신만의 세계’에 도취해 본인은 불행하게도 전혀 이를 깨닫지 못한다. 사유의 거래를 거부하거나 피하는 인간은 자기만의 철옹성을 구축해 사유의 폭을 더 이상 넓히지 못하는 완고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쯤에서 누구라도 ‘자신만의 세계’가 과연 무엇인지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껏해야 자기가 속한 지리적 · 공간적 환경 속에서 보고 듣고 읽고 이를 토대로 느끼고 판단하고 상상하는 범주가 전부다. 지극히 제한적이다. ‘자신만의 세계’를 벗어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책과 독자들을 지속적으로 만나려면 서점에 가야 한다. 지식의 전파와 깊은 사유의 생성 모두 서점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서점에서는 여전히 책이 넘쳐나고 도서 전문 강좌나 자발적 독서 모임도 많아졌다. 이 현상만 가지고, 우리나라 독서 문화가 정착되었다고 볼 수 없다. 또 우리 사회가 지식이 부족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며 소통하면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이끄는 무언가가 없기 때문이다. 암울하게도 독자들을 유혹하는 서점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독자의 눈길을 받지 못한 책은 ‘닫힌 책’이다. 즉 읽히지 않은 책이다. 이것은 책이 아니다. 책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독자가 ‘닫힌 책’을 열어야 한다. ‘열려라, 참깨!’ 당연히 안 열린다. 이 주문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너무 허술하기 짝이 없는 패스워드다. 책 자체가 펼쳐질 뿐이지 그 속에 담긴 내용이 독자를 향해 펼쳐지지 않는다. 우리가 암만 ‘독서는 넘나 좋은 것, 책을 읽읍시다!’라는 진부한 주문을 강요하듯이 외쳐 봐도 책 읽는 사람이 늘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책이 펼쳐지겠나. 알리바바는 동굴 속에 숨겨진 보물이 궁금해서 패스워드를 정확히 기억해내 동굴을 여는 데 성공했다. 알리바바처럼 호기심이 많고, 어떤 것이라도 궁금해 알아보려고 하는 독자가 많아야 한다. 그런 독자에게 책은 항상 펼쳐져 있다. ‘열린 책’은 시공을 초월해 자유롭게 다른 세계와의 만남을 연결해 준다. 알리바바형 독자는 자신에게 유익한 지식이라는 보물을 건져내기 위해 갖가지 세계와의 경험을 쌓으면서 사유의 거래를 시도한다. 사유의 거래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독자들이 모여서 활발하게 거래를 시도하는 곳이 ‘알라딘 북플’이다. 이곳에 독자들이 매일 리뷰를 쓰며 자신과의 대화 또는 다른 독자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양파를 까듯 끝이 없는 즐거운 사유 거래의 연속이다. 이게 꽁꽁 언 채 있는 답답한 세상을 여는 하나의 방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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