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시 삼백수 - 스님들의 붓끝이 들려주는 청담을 읽는다
정민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귀로 사물 바라보고 눈으로는 들으니

마음 들음 어이해 귀뿌리를 쓰겠는가?

모름지기 두 귀 먼 것 안타까워하지 말라

소리란 원래부터 듣는 데서 현혹되니.

 

(허응 보우 『의옥 스님에게 보이다. 의옥은 귀가 먹어 주눅이 들었다[示義玉禪人, 玉以耳聾爲屈]』, 136쪽)

 

 

귀로 듣는 것이 무조건 믿어야할 실체가 아닐 수 있다. 과거에는 출처 불분명한 ‘악성 루머’가 심각했었다면, 요즘 기승부리는 부정적 대상이 ‘가짜 뉴스’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가짜 뉴스’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일반 대중은 가짜 뉴스와 악성 루머로 인해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쉽다. 특히 인터넷의 발달로 가짜 뉴스와 악성 루머는 빛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전달되어 군중들의 두려움과 망상을 부추긴다. 특히 박사모와 극우 세력들은 특정 대상을 비난의 표적으로 삼기 위해 악의적인 의도로 거짓을 퍼뜨린다. 가짜 뉴스가 많이 퍼지고, 대중이 여기에 쉽게 현혹될수록 사회 전체가 흔들린다. 그뿐만 아니라 가짜 뉴스로 인해 깊이 파인 심리적 외상까지 치유해야 하는 문제도 남는다.

 

 

평생을 부끄럽게 입으로만 나불대다

끝판에 와 깨달으니 백억(百億)의 말 저편일세.

말을 해도 옳지 않고 말 없어도 안 된다면

사람들 모름지기 자각하길 청하노라.

 

(정관 일선 『임종게[臨終偈]』, 178쪽)

 

 

불교에서 고승들이 입적할 때 평생 수행에서 얻은 깨달음을 전하는 마지막 말이나 글을 임종게(臨終偈)라 한다. 일선 스님이 남긴 임종게는 최후의 반성이다. 스님 역시 평생 입으로 나불대는 속세의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이 뒤늦게 깨달은 것을 산 자의 몫으로 남겼다. ‘가짜 뉴스’에 의지하는 박사모와 극우 세력들은 그것이 마치 진실인 마냥 입으로 나불댄다. 과연 그들이 일선 스님처럼 죽기 전에 자신을 ‘자각(自覺)’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도 여전히 ‘가짜 뉴스’에 속아 넘어가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설정한 ‘가상의 적’에 대항하려고 든다. 자신들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연령에 상관없이 현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귀머거리다. 그들이 알아서 뭘 잘못했는지 자각하기가 상당히 힘들어 보인다.

 

 

그대를 만나서 막야검을 건네주니

칼날에 푸른 이끼 끼지 않게 하시게.

오온산 앞에서 도적을 보게 되면

한 번씩 휘둘러서 하나하나 베시게나.

 

(벽송 지엄 『범준 선백에게 보이다[示法俊禪伯]』, 92쪽)

 

* 오온산(五蘊山) : 현상 세계 전체

 

 

막야검(鏌鎁釼)은 지혜를 상징하는 전설의 검이다. 정신을 옭아매는 아집(我執)을 한 번에 뎅겅 잘라버릴 수 있는, 막야검이 실제로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다. 막야검만 있으면 국민의 정신에 해로운 국가의 도적들을 하나하나 벨 수 있다. 막야검의 주인은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영웅이 된다. 한편 반대로 생각해보면, 막야검은 이 세상에 없는 게 낫다. 막야검의 칼날에 조금이라도 녹슬지 않으려면 검의 주인은 끊임없이 자기 수양에 힘써야 한다. 훌륭한 검을 가질 만한 자격을 갖추는 것이 남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겠지만, 검의 주인에게는 평생 부담을 짊고 가야하는 일이다. 만약 막야검이 주인을 잘못 만나게 되면, 검의 용도가 배움의 목적을 남에게 과시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으로 변질한다.

 

 

뜬 인생 참으로 쏜살같이 지나가니

얻고 잃음 슬픔 기쁨 어이 족히 헤아리랴.

그대 보라 귀천(貴賤)과 현우(賢愚)를 가리잖고

마침내는 똑같이 무덤 흙이 되는 것을.

 

(원감 충지 『사람에게 보이다[示人]』, 34쪽)

 

* 현우(賢愚) :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

 

 

지금까지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교훈적인 선시(禪詩) 세 편을 골라봤다. 이 글의 마지막을 장식한 선시는 특별하다. 인생의 허무함을 강조하는 충지 스님의 선시를 고른 이유가 있다. 생의 끝자락에 서면, 권력과 명예와 부를 누리며 충분히 산 삶이나, 언제나 초름한 결핍으로 산 삶이나 도긴개긴이다. 삶이란 참으로 덧없이 왔다 떠나는 뜬구름 같은 것이다. 가장 불행한 삶의 비극은 죽음이 아니다. 불교에서 인간은 본래 고요하고 청정한 물결과 같은 ‘청정심(淸淨心)’을 갖춰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푸르른 물결에 욕심과 집착의 바람이 몰아닥치면 번뇌와 고통의 파도가 된다. 커다란 파도에 떠밀리면, 원래 이전의 고요한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아웅다웅 싸우다가 결국 허무하게 죽어가는 것, 전체적으로 보면 그런 삶이야말로 불행한 비극이다. 이 세상에 상이한 이해와 갈등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패거리를 지어서 아귀다툼하며,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처절한 혼전을 계속하고 있다. 알고 보면 우리 삶은 아름답고도 살아내기 힘든 시간의 연속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쏜살같이 지나간다. 이 귀한 하루하루를 소중히 생각하면서 갈무리해야겠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3-15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15 17:36   좋아요 1 | URL
박근혜뿐만 아니라 박사모를 뒤에서 지원해준 세력까지 뿌리 뽑듯이 밝혀내야 합니다. 이거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다음 정권에게 향하는 부메랑이 될 수 있어요.

레삭매냐 2017-03-15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학자 정민 샘이 번역을 맡아 주셨군요 ~ 그래서 왠지 더 정겹더라는.

cyrus 2017-03-15 20:38   좋아요 0 | URL
선시가 행 수가 적은 편이고, 정민 교수의 평설 분량이 비교적 길지 않아서 좋았어요. 인상 깊은 선시가 아주 많았습니다. ^^

dellarosa 2017-03-15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꼼꼼한 리뷰 좋습니다. ^^ 그리고 저도 임선스님의 임종계를 읽고 반성해봅니다.

cyrus 2017-03-15 20:39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하게 해주는 선시 몇 편 더 있는데 소개하면 리뷰가 길어질까봐 포기했습니다. 책에 좋은 내용의 선시가 많이 있습니다. ^^

transient-guest 2017-03-17 0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시를 많이 읽으시네요.ㅎ 시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가끔 들여다보는 정도인 저는 이상하게 일본의 와카나 단카 (이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같은 정형시나 짧은 걸 좋아합니다. 사실 민족감정이나 일제의 범행에 대한 태도 같은 것들 말고, 일본문화에 큰 반감이 없네요. 좋은 것도 많고...ㅎ
정민 선생님 책은 몇 권 읽었는데, 다소 고루하지만, 아주 진지한 맛이 있습니다. 다만, 어떤 건 그냥 받아들이기 어려운, 어쩌면 나이든 분들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것들이 없지는 않더라구요.

cyrus 2017-03-17 10:49   좋아요 0 | URL
일본 문화의 장점을 받아들이거나 선호하는 대로 좋아하는 것은 절대로 나쁘지 않습니다. 역사를 속이고,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 정부나 그들의 비호 아래에 활동하는 극우 세력들을 비판해야 합니다. 일본의 과오를 하나도 모른 채 좋은 것만 찬양하는 사람이나 무조건 일본을 배격하는 사람이나 피차일반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합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은 한 번 태어나면 죽는다는 것. 누구도 이 말을 절대로 부정할 수 없다. 당연한 섭리로써 인간의 삶은 영구 장천 계속되지 않는다. 다 알면서도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죽음을 사유하는 예술가는 죽음을 낯선 것이 아닌 고유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죽음을 통해 삶을 사는 자로서의 질적 전환을 시도한다. 허수경 시인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시라는 형식을 통해 중화된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시집이다. 죽음에 대한 허수경 시인의 태도는 적극적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공포를 견디는 동시에 즐기는 독특한 방식 속에 ‘죽음’이 중화되는 공간으로서의 시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라일락

어떡하지,

이 봄을 아리게

살아버리려면?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내 생애의 봄날 다정의 얼굴로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스크랩북 안에 든 오래된 사진이

정말 죽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웃어버리는 거야, 라일락,

아주 웃어버리는 거야

 

공중에서는 향기의 나비들이 와서

더운 숨을 내쉬던 시간처럼 웃네

라일락, 웃다가 지네

나의 라일락

 

(『라일락』 52쪽)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라일락』에서 가장 빛나는 구절이다. 라일락은 죽음의 이미지를 거느리고 있다. 어딘가 모르게 슬픔을 품고 있는 꽃 같은 느낌이 든다. 꽃이 시들기 전에 바람에 의해 꽃잎이 후드득 땅바닥으로 체념하듯 떨어질 것이다. 그래도 ‘웃다가 지는’ 꽃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젊음만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문화에서 죽음만큼이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나이 듦’이다. 시인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일찌감치 파악했다. 그녀는 꽃이 피고 지는 현상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쉬운 언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 중요한 것이 바로 ‘늙어가는 과정을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마음가짐’이다.

 

사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받아들이기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이 들어가는 것이 죽음만큼 두려운 일이 되어가는 것은, 늙음을 ‘아름다움에 대한 모욕’이라 여기는 사회 문화적인 환경과 우리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온다. 결국, 모든 순간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미래에 다가올 죽음을 깨닫는 것이 현재의 삶을 즐겁게 사는 데 매우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 매우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나는 내 섬에서 아주 오래 살았다

그대들은 이제 그대들의 섬으로 들어간다

 

나의 고독이란 그대들이 없어서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나여서 나의 고독이다

그대들의 고독 역시 그러하다

 

고독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지만

기필코 우리를 죽이는 살인자인 것은 사실이다

 

그 섬으로 들어갈 때 그대들이 챙긴 물건은

그 섬으로 들어갈 때 내가 챙긴 물건과 비슷하겠지만

단 하나 다른 것쯤은 있을 것이다

 

내가 챙긴 사랑의 편지지가

그대들이 챙긴 사랑의 편지지와 빛이 다른 것

 

그 차이가 누구는 빛의 차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세기의 차이다

태양과 그림자의 차이다

이것이 고독이다

 

섬에서 그대들은 나에게 아무 기별도 넣지 않을 것이며

섬에서 나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속에는 눈물이 없다

다만 짤막한 안부 인사만, 이렇게

 

잘 지내시길,

이 세계의 모든 섬에서

고독에게 악수를 청한 잊혀갈 손이여

별의 창백한 빛이여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106~107쪽)

 

 

비정한 세상에 대한 어떤 미련도 없이 세상을 등져버리고 싶을 때 선택하는 수단이 ‘고독’이다. 이보다 가장 극단적이고도 불행한 방법은 소중한 자아를 스스로 포기해버리는 ‘자살’이다. 그러나 시인은 고독도 ‘우리를 죽이는 살인자’라고 말한다.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는 인간에게 있어 고독이 과연 무엇인지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한다. 철저한 단절 속에 갇힌 고독은 어두컴컴한 죽음을 떠올린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시인의 고독은 공포와 평안을 잘 분배한 것이다.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의 화자는 자신만의 섬에서 죽음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혼자 했다. 그리고 같은 처지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만 편지로 고백한다. 이 시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꼭 고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꼭 떠나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여기서 보여주는 ‘짤막한 안부 인사’는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사람의 심정을 대변하는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즉 욕구와 욕망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떠나보낼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무한하지만 끝이 있는 고독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찾아오는 평온함.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가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삶과 죽음이라는 두 글자는 상반된 단어이기는 하지만 두 글자는 하나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삶의 끝은 곧 죽음이요 산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본질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시인의 씁쓸한 고백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삶과 죽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본질을 차분하게 비춰주는 시인의 언어는 성찰을 거듭하게 한다. 독자는 허수경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행복의 중심점을 찾을 수 있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름물고기 2017-03-15 13: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혼자 가는 먼 집]을 곱씹어가며 읽었는데 이 것도 구매해야겠어요

cyrus 2017-03-15 16:39   좋아요 1 | URL
《혼자 가는 먼 집》은 안 읽어봤습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제가 처음으로 읽은 허수경 시인의 시집입니다. 구름물고기가 언급하신 시집도 읽어보고 싶군요. ^^

2017-03-15 1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15 20:41   좋아요 1 | URL
시집 리뷰를 어떻게 하면 잘 써야할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그냥 느끼는대로, 생각나는대로 정리해서 쓸려고요. 이 시집, 작년에 읽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Agalma님의 리뷰를 보고, 저도 써봤습니다. ^^

[그장소] 2017-03-15 1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까지 ㅡ 우오~ 넘 맛나게 즐기고 갑니다!^^

cyrus 2017-03-15 20:43   좋아요 1 | URL
제가 고른 시들이 전체적으로 무거운 분위기라서 진지하게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장소] 2017-03-15 23:33   좋아요 1 | URL
제가 생각은 단순한데 시는 이런 시가 좋더라고요 . 가볍게 쓰는 시가 쉬운 시는 절대 아니지만 ... 덕분에 잘 읽었어요 . 아.. 들었어요! 시는 듣는 보는 그런 거 같아요. ^^
 

 

 

지난 3월 7일에 『김훈을 비판하면서 놓친 것』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습니다. 김훈의 아기 성기 묘사에 대한 생각을 소신 있게 밝힌 글이었습니다. 이 글에 대한 몇몇 분들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의견 덕분에 제가 글을 쓰면서 놓친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버리지 못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잘못된 생각의 편린들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문제의 문장을 과학적인 관점으로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분의 공감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 입장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남성과 여성을 철저히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반영된 논지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제가 관음증의 의미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영화나 소설 등 문화계 전반에 숨어있는 ‘관음증적 시선’을 읽어내는 훈련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 나탈리 앤지어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 (문예출판사, 2016)

 

 

『김훈을 비판하면서 놓친 것』을 쓰면서 인용한 나탈리 앤지어의 문장 일부를 다시 읽어봤습니다.

 

 

 

내가 아기였을 때, 어머니는 친구에게 자기 어린 딸을 좀 봐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딸을 수전이라고 부르자. 어머니는 신생아인 나 말고도 더 큰 딸이 있었으므로, 여자아기의 생식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수전의 기저귀를 갈아주다가 음순의 동그란 둔덕 사이로 삐쭉 튀어나와 있는 클리토리스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음경 같지는 않았다. 내 어머니에게는 아들도 하나 있었기 때문에 아기 음경이 어떻게 생겼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여자아기의 것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코끝이나 새끼손가락처럼 보였고, 어머니가 천으로 닦아내자 당혹스러우면서도 신기하게도 약간 단단해졌다. 어머니는 수전의 두드러지게 튀어나온 클리토리스 모양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기 딸들을 생각했고, 토실토실한 외음부 안에 눈에는 잘 안 보이지만 만지면 느낄 수 있는 클리토리스가 깔끔하게 들어가 있는 자기 딸들의 생식기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1]

 

 

 

나탈리 앤지어의 어머니는 튀어나온 음핵(clitoris)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깔끔한 형태의 음핵을 선호했습니다. 저는 그녀의 생각을 ‘남성 중심적 사고’라고 생각했습니다. 튀어나온 음핵을 미관상 보기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을 실제로 본 적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통으로 ‘남성의 성욕을 자극하는 예쁜 음핵’이 있다고 믿었고, 그런 음핵을 가진 여성과의 잠자리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남성들이 있다는 근거만으로 ‘튀어나온 음핵을 선호하지 않는 것’을 ‘남성 중심적 사고’로 일반화했습니다. 나탈리 앤지어의 어머니처럼 여성도 튀어나온 음핵을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고, 깔끔한 음핵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음핵의 형태를 바라보는 여성의 시선에 ‘남성 중심적 사고’가 반영되어 있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여성의 신체를 마음대로 소유했던 과거의 남성들은 음핵이 ‘남성의 성적 만족감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신체 부위’로 생각했습니다. 과거 남성들은 여성이 성적 쾌락을 느낄 수 없는 존재로 생각했고, 심지어 여성이 성적 쾌락을 느낄 자유마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 옐토 드렌스 《마이 버자이너》 (동아시아, 2017)

* 이브 엔슬러 《버자이너 모놀로그》 (북하우스, 2009)

 

 

중세의 남성들은 튀어나온 음핵을 가진 여성을 ‘마녀’로 규정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황당한 내용입니다. 불행하게도 ‘마녀사냥’이 유행하던 시절에는 이 황당무계한 근거가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누구도 이 어리석은 광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마녀재판을 주관하는 집행관의 아내조차도 바보들의 행진에 동참하여 침묵했습니다. 단지 음핵이 튀어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마녀라는 억울한 누명을 받으면서 죽어간 여성이 많았습니다. 제가 인용한 문장은 1593년에 일어난 처형에 대한 목격담입니다.

 

처형이 끝나…… 세 마녀의 숨이 완전히 멎자 집행관은 그들의 옷을 벗겼고, 앨리스 새뮤얼이라는 여성의 발가벗겨진 몸에서 작은 살덩어리를 발견했는데, 마치 젖꼭지인 양 반 인치 정도 길이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집행관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도 보고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그렇게 은밀한, 볼 것이 못 되는 부위를 노출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지만, 결국에는 그토록 이상한 물체를 감추는 것도 꺼림칙해 보였다.[2]

 

 

다음으로 이브 엔슬러(Eve Ensler)의 연극 작품 《버자이너 모놀로그》(The Vagina Monologues)에 수록된 ‘보지에 관한 사실, 하나’를 인용하겠습니다. 이 내용 역시 1593년 마녀 재판에 있었던 상황을 기록한 내용이고요, 《마이 버자이너》에도 나옵니다.

 

 

1593년 마녀재판에서 기혼남성인 한 법관이 처음으로 클리토리스를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악마의 젖꼭지’라고 이름 붙이고 마녀의 유죄 증거로 사용했다. 법관은 ‘그것은 젖꼭지처럼 튀어나온 0.5인치 길이의 살덩어리로, 첫눈에는 알아볼 수 없게 은밀한 부분과 연결되어 있지만 종국에는 너무나도 이상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고 말하며 마녀로 기소된 여성의 그것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까지 다 보여줬다. 구경꾼들은 그런 것을 본 일이 없었고, 그녀는 마녀로 확정 판결을 받아 처형됐다.[3]

 

 

음핵은 여성미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깔끔한 음핵이 예뻐 보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인식이 강할수록 여성도 튀어나온 음핵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튀어나온 음핵이 못생겼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은 자신의 몸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의 몸을 사랑하지 않으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의학적 힘에 의지하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음핵을 외관상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어주는 성형 수술이 있습니다. 이 수술을 담당하는 미국인 의사는 스스로 ‘여성 성기 미용 의사’라고 소개합니다. 《마이 버자이너》의 저자 옐토 드렌스는 음핵도 성형수술의 대상이 되는 세태를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저도 저자의 입장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저는 깔끔한 음핵을 선호하는 것이 남성 중심적 사고가 반영된 인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여성 성기 미용 의사는 성기의 비대칭을 모조리 바로잡을 수 있다고 자랑한다. 그 의사를 인터뷰한 저널리스트는 수많은 사진들을 보았는데, 엄청나게 다채로운 개개인의 다양성이 천편일률적으로 다듬어져 일종의 표준 음부로 탈바꿈한 데 무척 놀랐다. 우리가 보는 포르노 사진들 역시 손질을 통해 다듬은 것이다. 젊은 여성들이 그토록 닮고 싶어 하는 모델은 점점 비현실적인 무언가가 되고 있다.[4]

 

 

포르노 여배우는 카메라 앞에서는 아름답게 포장된 존재입니다. 남성이 좋아하게끔 꾸미는 거죠. 포르노 여배우 대부분은 왁싱으로 음모를 제거합니다. 그러면 카메라로 비추는 음핵은 깔끔하게 보입니다. 포르노를 자주 보는 남성들은 여성의 신체에 대한 환상을 가집니다. 남성이 음모 한 올도 덮여 있지 않은 깔끔한 음핵에 익숙해지면 평범한 여성의 음핵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음모가 수북하다거나 튀어나온 음핵을 가진 여자 친구 또는 아내와의 섹스를 거부하는, 웃지 못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여성의 신체 일부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섹스를 거부하고, 그녀와 헤어지자고 요구하는 남성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런 남성은 여성의 신체가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어리석은 남성의 이야기는 《버자이너 모놀로그》에 나옵니다. 그 이야기의 제목은 ‘음모’입니다.

 

 

 

 

 

 

 

 

 

 

 

 

 

 

 

 

 

* 정희진 엮음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교양인, 2017)

 

 

 

음핵은 신체 일부입니다. 음핵이 조금 튀어나왔거나 모양이 이상해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 성호르몬 이상 원인으로 음핵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질 입구가 막혀 있거나 지나치게 튀어나온 음핵을 가진 여성, 그리고 해부학상 여성의 신체를 가졌으나 남성 생식기와 유사한 신체 기관을 가진 이들을 ‘인터섹스’라고 합니다. ‘남성’과 ‘여성’, 딱 두 가지 성별의 차이가 통용된 사회는 인터섹스를 성의 범주에 벗어난 존재로 규정합니다. 인터섹스를 인정하지 못하게 되면, 의학적인 문제가 없어도 튀어나온 음핵을 가진 여성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튀어나온 음핵을 가진 여성을 ‘마녀’로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 대신 ‘비정상’, ‘잘못 태어난 기형’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거처럼 신체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여성의 신체를 왜곡하고, 억압하는 일이 재현됩니다.

 

어느 분께서 여성은 자기 몸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분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여성 스스로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자유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성 중심적 시선에 갇히는 바람에 자신의 몸이 마음에 들지 않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회 구조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성이 자신의 몸을 부정적으로 보는 자기혐오는 여성 개인 선호에서 비롯된 문제로만 볼 수 없습니다. 거시적으로 보면 가부장제 문화에서 내면화된 증오와 억압입니다.[5]

 

 

 

[1] 나탈리 앤지어 《여자, 그 내밀한 지리학》(《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 구판) 107쪽

 

[2] 옐토 드렌스 《버자이너 문화사》(《마이 버자이너》 구판) 17쪽

 

[3] 이브 엔슬러 《버자이너 모놀로그》 73쪽

 

[4] 옐토 드렌스 《버자이너 문화사》(《마이 버자이너》 구판) 428쪽

 

[5] 이브 엔슬러 《버자이너 모놀로그》 99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3-14 2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14 21:37   좋아요 0 | URL
팬티에 가려지는 신체 부위 선호에 따라서 이성을 만나는 남자들이 이해가지 않았어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오히려 그들이 절 이상하게 생각해요. ˝네가 여자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구나˝라는 식으로 말해요. 이 말이 거의 팩트 폭력급이라서 더는 말하지 못해요. ^^;;

2017-03-15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15 20:36   좋아요 1 | URL
《버자이너 모놀로그》에 인용한 글 제목을 패러디했는건데, 다시 보니까 제목에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어요. 제목 수정했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님의 표현대로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는 ‘밝지 않는 새끼’이다. 그의 인생 자체에서 풍기는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뭉크는 자신의 일기나 편지 등을 통해 자신이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냈다. 그는 내심 누군가가 자신의 마음 상태를 알아주길 바랐다. 자신이 그리는 그림들은 자신 영혼의 일기라고 말했으니 우리는 뭉크의 그림을 보면서 그 속에 숨겨진 화가의 심리를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이 가능하게 하려면 뭉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아야 하며, 그에게 영향을 미친 주변 인물들 간의 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 롤프 스테너센 《에드바르드 뭉크》 (눈빛, 2003년)

 

 

 

롤프 스테너센(Rolf Stenersen)은 뭉크와 가장 가까이 지냈으며 그의 집안일로부터 전시회에 이르기까지 온갖 일을 거들어 준 뭉크의 친구였다. 그는 그림을 수집하는 증권 중개인이었다. 그가 수집한 뭉크의 작품들은 현재 그의 이름을 딴 스테너센 박물관(Stenersen Museum)에 전시되었다.

 

 

 

 

《에드바르드 뭉크》는 뭉크의 사적인 일화와 그의 다양한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롤프 스테너센은 뭉크가 어떻게 우울한 감정을 형성하게 됐는지, 왜 그가 죽음을 주제로 한 그림 제작에 파고들게 됐는지 그 이유에 대해 의견을 밝혔다. 그의 증언과 뭉크의 성격 및 그림을 분석한 의견은 후대의 뭉크 연구자나 뭉크 평전을 쓰는 작가들이 참고하고 있다.

 

 

 

 

 

 

 

 

 

 

 

 

 

 

 

 

 

* 수 프리도 《에드바르드 뭉크》 (을유문화사, 2008년)

* 스테판 크베넬란 《뭉크》 (미메시스, 2014년)

 

 

 

수 프리도의 《에드바르드 뭉크》는 뭉크와 주변 인물들 간의 관계를 아주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 책은 뭉크 관련 도서 중에 자료가 풍부한 편이다. 스테판 크베넬란의 그래픽 노블 《뭉크》는 ‘만화로 만든 평전’인데, ‘만화’라고 가볍게 보면 오산이다. 일단 크베넬란의 책이 불친절하다. 이 만화를 만든 저자는 뭉크의 생애와 예술 세계를 주관적으로 썼다고 밝혔다. 그만큼 크베넬란의 책은 일반적인 뭉크 평전에서 볼 수 있는 연대기적 서술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뭉크 관련 서적 몇 권 참고한 뒤에 그래픽 노블을 본다면 조금 복잡한 뭉크와 주변 인물 간의 관계를 빨리 파악할 수 있다.

 

뭉크의 생애 중에 주목해 볼 내용이 두 가지가 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뭉크와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August Strindberg)의 우정, 그리고 뭉크와 다그니 유엘(Dagny Juell)과의 관계이다.

 

 

 

 

 

뭉크는 노르웨이, 스트린드베리는 스웨덴에서 태어났다. 이 두 사람은 북유럽 특유의 차가우면서도 음습한 기운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했던가. 뭉크와 스트린드베리는 보통 사람들보다 감정이 예민했으며 시시때때로 우울 증세에 시달렸다. 특히 스트린드베리는 우울 증세가 너무 심각한 나머지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조현병을 앓았다. 뭉크와 스트린드베리는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하는 보헤미안(Bohemian)이었다.

 

뭉크는 독일 유학 시절에 보헤미안들과 어울렸다. 보헤미안 그룹 일원들은 다그니 유엘을 ‘아스파시아(Aspasia)’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아스파시아는 원래 아테네의 매춘부였으나 소크라테스가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똑똑한 지성을 가졌다. 그녀는 장군 페리클레스(Pericles)의 애인이 되어 사교계의 여왕으로 이름을 알렸다. 보헤미안 남성들은 다그니 유엘을 ‘아스파시아의 재림’으로 본 것이다. 그녀는 자유연애를 추구했고, 뭉크와 스트린드베리를 포함한 여러 남자와 어울려 다녔다.

 

 

 

 

 

현재까지 뭉크와 다그니 유엘이 실제로 연인 관계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렇지만 뭉크가 다그니 유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없다. 다그니 유엘은 뭉크를 위해 그림 모델이 되어주었다. 수 프라도는 뭉크와 다그니 유엘의 연인 설을 추정하는 근거로 뭉크와 자화상과 뭉크가 그린 다그니 유엘의 초상화를 제시한다. 그녀는 이 두 그림이 결혼하는 남녀의 모습이 연상되는 ‘결혼 초상화’라고 주장한다.

 

 

 

 

 

 

 

다그니 유엘은 폴란드 출신의 시인 스타니스라프 프시비셰브스키(애칭 ‘스타추’)[1]와 결혼했다. 다그니 유엘을 자신의 연인처럼 대했던 뭉크와 스트린드베리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특히나 스트린드베리는 다그니 유엘에 대한 분노와 질투심에 휩싸여 그녀를 악의적으로 비난했다. 스트린드베리가 경멸에 찬 어조로 다그니 유엘을 비난하는 대목이 스테판 크베넬란의 그래픽 노블 《뭉크》에 나와 있다. 수 프라도는 다그니 유엘을 평가한 스트린드베리의 증언을 신뢰하지 않는다. 스트린드베리의 증언은 여성혐오로 가득했고, 지나치게 과장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스트린드베리는 사소한 것에 화를 잘 냈다. 뭉크가 판화 형식으로 친구의 초상화를 제작한 적이 있다. 그런데 스트린드베리는 뭉크의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노골적으로 분노를 드러냈다. 뭉크는 스트린드베리의 이름을 잘못 썼고, 그림 액자에 벌거벗은 여인이 그려 넣었다. 스트린드베리는 뭉크의 그림을 보자마자 엄청난 모욕감을 느꼈다.

 

 

 

 

 

 

이성을 잃은 스트린드베리는 뭉크를 죽일 심정으로 자신의 품속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림 한 점 때문에 일촉즉발의 상황이 온 것이다. 만약 스트린드베리가 그 자리에 뭉크를 총으로 쐈으면 이 두 사람의 우정은 반 고흐(V. van gogh)와 폴 고갱(Paul Gauguin)이 크게 다툰 일화 다음으로 자주 회자하였을 것이다. 고갱 때문에 한쪽 귀를 잘라버린 반 고흐의 과격한 행동이 강렬해서 뭉크와 스트린드베리의 위험천만한 우정이 묻힌 감이 있다. 스트린드베리는 뭉크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자기파괴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스트린드베리의 과대망상증은 심각했다. 뭉크가 자신의 방에 몰래 설치해둔 독가스 배관으로 자신을 죽일 거라고 믿었다.

 

뭉크는 스트린드베리 그리고 다그니 유엘보다 오래 살았다. 스트린드베리는 정신이 피폐해지는 고통 속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다그니 유엘은 자신에게 질투심을 느낀 남자의 손에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스트린드베리와 다그니 유엘은 뭉크의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이다. 뭉크는 다그니 유엘을 향해 악담을 퍼붓는 스트린드베리를 지켜보면서 질투심에 사로잡힌 인간의 감정을 묘사했다. 불타오르는 감정에 지배당해 몸과 정신이 말라 비틀어져 가는 친구의 모습에서 여성에 대한 공포심의 위험성을 느꼈다. 뭉크는 그 공포심이 인간이 죽음을 맞이할 때 느끼는 감정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여성을 묘사한 뭉크의 그림에는 여성 공포증이 녹아들어 있다. 여성을 바라보는 뭉크의 감정이 스트린드베리의 여성혐오와 관련이 없다고는 볼 수 없다. 여성을 끊임없이 질투하고, 남성이 경계해야 할 존재로 여기는 뭉크의 반응은 스트린드베리의 감정 형태와 유사하다. 뭉크에게 스트린드베리는 단순한 예술인 친구가 아닌, 자신의 성격과 감정이 내포된 영혼을 솔직하게 비춰주는 거울 같은 존재였다. 뭉크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연약한 스웨덴산 거울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영혼을 해부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거울을 조심스럽게 다룰 줄 알았다.

 

 

 

 

[1] 스테판 크베넬란의 《뭉크》(미메시스, 2014)에서는 프시비셰비스키의 애칭을 ‘스타쿠스’로 되어 있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3-14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14 16: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14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14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14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yureka01 2017-03-14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가들 중에는 정신이 평범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죠..
예술은 정상의 파괴에서 창조하나 봐요...
그 대상이 자신이건 타자이건 투사되었나 싶어요.....
ㅎㅎ 여자 조심..해야죠..(여자는 남자도 조심)

cyrus 2017-03-14 17:48   좋아요 1 | URL
매우 볼썽사나운 예술가들은 공통으로 자신의 잘못된 행동과 생각을 예술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합니다. 정말 최악의 인간들입니다.

레삭매냐 2017-03-15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래픽노블 <뭉크> 읽기는 했는데 거 리뷰를
쓰지 못했네요. 아무리 허접해도 리뷰를 쓰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말이죠.

아마 당대 문화나 캐릭에 대한 이해가 전반적으로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cyrus 2017-03-15 17:21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에 그래픽 노블로 시작했다가 큰 코 다쳤습니다. 만화라고 가볍게 봤었어요. 결국은 분량이 많은 뭉크 평전을 읽었습니다. 그 책을 읽고 나니까 그래픽 노블 읽기가 수월했어요. ^^;;
 
대통령과 기생충 - 엽기의학탐정소설
서민 지음 / 청년의사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만약 세기의 명탐정들을 한 자리에 불러들여 ‘탐정 어벤저스’를 만들게 된다면, 과연 어떤 인물이 적합할까? 일단 셜록 홈즈(Sherlock Holmes)는 빠지면 안 된다. 탐정 어벤저스에 초대하면, 겉으론 귀찮다고 츤츤거리면서도(퉁명스러운 태도) 자신을 불러주지 않으면 섭섭하게 생각하지 싶다. 그다음 추천 인물은 에도가와 코난. 명석한 추리력을 갖췄을 뿐 아니라 예상치 못한 적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는 무기 아이템(신발)까지 갖추고 있어서 든든하다. 증인이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진술할 수 있도록 ‘회색 뇌세포’ 에르큘 포와로(Hercule Poirot)가 있어야 한다.

 

 

 

 

 

탐정 어벤서스 일원들의 건강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바로 ‘기생충 탐정’ 마태수다. 마태수가 누구냐고? 원래 이름은 ‘마태우스’였다. ‘마침내 태어난 우리들의 스타’의 약자이다. ‘마태수’는 개명한 이름이다. 그는 해로운 기생충에 위협받는 인간들을 돕고, 인간에 이로운 기생충과의 공존을 꿈꾸는 ‘우리들의 탐정’이다. 나는 마태수를 탐정 어벤저스 가입에 강력히 추천한다!

 

 

 

 

 

《대통령과 기생충》은 최초이자 마지막인 ‘엽기의학탐정소설’이다. 이 특이이한 장르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기생충을 소재로 한 탐정소설이다. 2001년 서민 교수가 <딴지일보>에 연재했던 소설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이 추천사를 남겼다. 그의 추천사 마지막 문장 한 줄이 강렬하다.

 

“2백여 년 전 파블로 선생의 곤충기 이후, 최고의 ‘엽기생물문학’이 되겠다.”

 

김어준은 책이 재미있게 보이려고 추천사를 허투루 쓰지 않았다. ‘엽기’라는 단어만 보고 책을 오해하는 것은 금물이다. ‘엽기’가 부정적인 의미의 단어로 알려져서 그렇지, 《대통령과 기생충》을 실제로 읽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엽기’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민 교수의 발상은 ‘상상력’에 가깝다. 엽기의 진짜 매력은 일상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상상력에 있다. 《대통령과 기생충》은 기생충에 관한 상상력의 기록이다.

 

 

 

 

소설에서 기생충은 인간을 괴롭히고, 심지어 인간 목숨까지 노릴 정도로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얼핏 보기에도 독자의 속을 불편하게 하는 묘사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기생충에 대한 묘사는 탄탄한 과학적 근거 위에 상상력을 발휘하여 만들어졌다. 서 교수의 상상력은 아주 건전하며, 절로 웃음이 나온다.

 

마태수는 정의로운 ‘기생충 탐정’이다. 그리고 자칭 ‘비뇨생식기 전문 탐정’이다. 기생충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는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기생충 전도사’가 된다. 기생충의 실체를 잘 모르거나 ‘기생충은 사라져야 할 해로운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기생충 세계의 진실을 알려준다. 《소설 마태우스》의 주인공 ‘형사 마태우스’와 ‘기생충 탐정 마태수’, 이 두 사람을 비교해보면 《대통령과 기생충》이 《소설 마태우스》보다 작품성이 한층 더 향상된 소설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형사 마태우스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은 황당무계하다. 그리고 엽기적인 실수 연발로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이러한 설정에 억지웃음을 유발하려는 듯한 초보 작가의 안간힘이 느껴진다. 《소설 마태우스》는 ‘초보 작가’의 어설픈 면이 확연히 드러낸 작품이다. 반면 《대통령과 기생충》의 마태수는 사건 해결에 진지하게 임하며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인식이 강하다. 그래서 《대통령과 기생충》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게 남아있는 심각한 병폐를 풍자한다. 자신의 몸과 생명에 자해하는 병역기피자들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했고(『입영 전야』), 정력 향상을 위해서라면 야생동물마저 먹는 남자들의 욕심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고환이 흔들리고 있다』).

 

 

 

 

 

『신찬섭을 죽여라』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타임 슬립(Time slip)형 소설이다. 마태수가 유신 체제 시절로 돌아가서 사건을 해결하는 전개가 요즘 큰 인기를 끌고 있는 ‘타임 슬립 수사물’과 비슷하다. 『대통령과 기생충』은 재미를 떠나서 기생충학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저자의 진실한 메시지가 함축된 소설이다. 여기서 마태수는 ‘기생충학자 서민’의 오너캐로 등장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대통령 이름이 ‘노주현’이다. 이 책이 처음 나온 시기를 생각하면, 어느 대통령을 패러디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노주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근엄함을 잊고, 기생충을 제거하는 치료를 받는다. 그의 모습을 보면 평소에 친근하면서도 성격이 소탈한 실제 대통령의 모습이 떠올려진다. 그분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이 책을 보셨으면, 불쾌한 표정을 짓기보다는 재미있어서 웃었을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곧잘 벌이는 악당들은 어쩌면 기생충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채찍을 휘두르는 선생님』 129쪽)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민간인’ 박근혜는 청와대에 머물고 있다. 오늘도 청와대에 당장 나오기는 힘들어 보인다. 청와대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겠지만, 순순히 물러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이 구질구질하다. 4년간 박근혜가 보여준 행적은 국민의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다. 세월호 사고 소식을 접하고도 무감한 반응,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뻔뻔한 태도. 그녀는 ‘최순실’이라는 악랄한 기생충에 지배받았고, 이로 인해 그녀 인생뿐만 아니라 나라가 크게 휘청거렸다. 사익을 누릴 수 있는 ‘줄기세포 연구’만 바라봤던 박근혜의 성격상 ‘기생충학’이 무얼 연구하는지 그리고 기생충학 연구가 계속 진행해야 할 이유를 잘 모를 것이다. 누가 되든 간에 차기 대통령은 기생충학 연구자들을 위해 대대적인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7-03-11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 좋네요. 이달의 당선작으로 추천합니다. 시의적절합니다.
나가라는데도 안 나가고 방콕하는 것을 보면

친박의 여왕에서 숙박의 여왕으로 노선을 갈아타시려는 듯 ! 아이고야, 천박하다.. 참말로.

cyrus 2017-03-11 23:43   좋아요 0 | URL
숙박근혜, 천박근혜.. 근혜는 별명이 참 많아요. ‘별명의 여왕‘입니다. ^^;;

stella.K 2017-03-11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츤츤거리다란 말이 있구나.
괜찮은 말이네.ㅎ

알라딘 초기 때 마태우스님을 알게되고 보내주신 책인데
어디엔가 잘 보관중인데 꺼내보고 싶어지네.
정말 마태님은 엉뚱하고 상상력이 풍부하신 분이야.
요즘 다시 TV에서 뵐 수가 있는데
정통 시사 프로그램까지 접수하셨잖니.
특유의 겸손한 유머는 여전하고.ㅋㅋ

cyrus 2017-03-11 23:46   좋아요 0 | URL
겉으로 무정하지만, 내심 잘 챙겨주는 사람을 ‘츤데레‘라고 해요. 그런데 ‘츤츤‘이라는 말이 일본어라서 자주 쓰고 싶진 않아요.. ㅎㅎㅎ

《대통령과 기생충》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마태우스님이 소설을 다시 쓰면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

2017-03-11 2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11 23:47   좋아요 0 | URL
박씨 부녀 주변에 달라붙어 권력에 기생한 사람들도 많아요. ^^;;

2017-03-12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12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7-03-15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일러스트가 장난이 아니네요 :>

시민 교수님 칼럼을 즐겨 읽고 있는데
예전에 나온 책들 다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cyrus 2017-03-15 17:30   좋아요 0 | URL
‘엽기’를 강조하려고 일러스트를 저렇게 만든 것이 아닌지,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