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7나폴레옹(Napoléon)이 이끈 프랑스군은 포르투갈을 점령한 후 곧바로 스페인으로 향한다. 당시 스페인의 내정은 불안정했고, 왕실은 무능하고 부패했다. 페르난도 7(Ferdinand VII)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폐위되었다.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페르난도 7세를 쫓아냈고, 그 자리에 자신의 형 조제프 나폴레옹(Joseph Napoleon)을 임명했다. 동생 덕분에 조제프는 호세 1(Jos I)’가 된다. 그러자 스페인 민중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민중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프랑스군은 무력을 동원한 강제 진압에 나섰다. 프랑스군은 이집트 원정 중에 데리고 온 이집트 용병 맘루크(Mamlūk) 기병대까지 동원하여 스페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 고야, 영혼의 거울(다빈치, 2011)

* 함순용 상처 입은 지성, 그로테스크 고야(함박누리, 2017)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점령할 무렵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de Goya)는 스페인 최고의 궁정화가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는 6년 동안 프랑스군이 스페인에서 자행한 사건들에 영감을 받아 최고의 걸작을 내놓게 된다. 82점으로 이루어진 판화집 전쟁의 참화. 이 판화집은 전쟁의 공포를 관람자의 눈앞에 바짝 들이댔다. 고야는 당시 상황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의 방식대로 그려냄으로써 표현의 자유와 현실성을 동시에 확보하게 된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고야의 하인이 전쟁의 참화에 포함될 판화를 그리고 있는 고야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왜 이런 비참한 것을 그리려고 하십니까?” 그러자 고야는 인간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이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잔혹한 것을 두 번 다시 용납해선 안 된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 (이때 고야는 이미 청력을 잃은 상태다. 그런데 고야는 어떻게 하인의 질문을 듣고 대답했을까? 귀는 들리지 않아도 상대방의 말을 알 수 있는 고야만의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조제프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구체제를 지탱하는 봉건 제도, 종교재판 등을 없애고, 개혁을 시도한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과 계몽주의에 깊은 인상을 받은 친불파 스페인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한다. 고야 역시 자유주의와 계몽주의를 지지했다. 프랑스군이 저지른 만행을 알면서도 고야는 생계를 위해 스페인을 지배하는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바쳤다. 하지만 조제프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독립을 갈망하는 스페인 민중들의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고, 조제프는 왕위에 오른 지 6년 만에 폐위되었다. 쫓겨났던 페르난도 7세가 다시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한다. 고야는 부역자로 찍힐 뻔했으나 고야의 능력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페르난도 7세는 그를 궁정화가로 재임명한다. 그러나 페르난도 7세는 민중의 기대를 저버리고 전제정치 강화에 나섰다.

 

 

 

 

 

 

 

 

 

 

 

 

 

 

 

 

* 자닌 바티클 고야 : 황금과 피의 화가(시공사, 1997)

 

 

 

조제프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보다 한 살 위인 이다. 그런데 고야 : 황금과 피의 화가(시공사, 1997) 97에 보면 조제프를 나폴레옹의 동생으로 나와 있다. 최근에야 이 책의 오류를 발견했다. 이 책은 나온 지 20년이나 된 책이다. 지금까지 쇄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이 사소한 오류를 바로잡았는지 모르겠다.

 

 

 

 

 

 

 

 

 

 

 

 

 

 

 

 

 

* 로제 마리 하겐, 라이너 하겐 고야(마로니에북스, 2010)

* 웬디 버드 디스 이즈 고야(어젠다, 2016)

 

 

 

 

오늘날까지도 고야의 생애 대부분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렇다 보니 고야 관련 책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고야의 행적에 대해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고야(마로니에북스, 2010)디스 이즈 고야(어젠다, 2016). 이 두 권의 책으로 종군 화가로서의 고야의 활동 여부에 대해 어떤 관점을 취하는지 대조해보면 흥미롭다.

 

 

전쟁의 참화는 프랑스 혁명의 이상 혹은 고야의 영광스러운 국가 이름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대량 학살, 그리고 종종 어느 편의 사람들이 죽이고 죽임을 당했는지 알기 힘든 장면들을 보여준다. 이것은 서구 미술사에서 새로운 것이었다. 전투에 대한 기존 묘사는 승리에 대한 영광을 그려왔다. 고야는 혼돈과 전쟁으로 인해 어떻게 평화롭던 시민들이 잔혹한 야수로 변하는지에 흥미를 갖는다. 고야가 전쟁 특파원은 아니었기 때문에 상상력을 동원했다.

 

(로제 마리 & 라이너 하겐, 고야55~56, 57, 글 작성자가 임의로 편집하고 인용함)

 

 

180810, 고야는 호세프 파라폭스 장군과 동행해 사라고사로 갔다. 사라고사는 6월에서 8월까지 포획된 상태였다. 이 시기에 그린 그림들은 전쟁의 재앙연작에 사용된다. 11월에 고야는 도피했다. 12월에 두 번째 포위가 시작되자 고야는 자신이 그린 스케치 작품들 중 일부를 없애 버렸다. 이는 그 작품들이 프랑스 군들의 손에 들어가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웬디 버드, 디스 이즈 고야63)

 

 

※ 『전쟁의 재앙전쟁의 참화를 말함.

 

 

 

고야가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은 자신의 고향 사라고사에서 머무른 건 사실이다. 고야 : 황금과 피의 화가에서도 이 사실이 언급된다.

 

 

1808615, 프랑스군이 사라고사를 공략했다. 공략에 실패한 프랑스군이 마침내 8월에 퇴각하자 돈 호세 데 팔라폭스 장군는 고야에게 시민들의 영웅적인 행동을 그릴 수 있도록 도시의 참상을 돌아보고 조사하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12월에 프랑스군이 다시 돌격해 오면서 이 계획은 중단된다.

 

(자닌 바티클, 고야 : 황금과 피의 화가100)

 

 

 

돈 호세 데 팔라폭스(José de Palafox) 장군의 요청으로 고야는 프랑스군에 짓밟힌 고향의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팔라폭스는 프랑스군에 저항하는 스페인 민중들을 이끈 장군이다. 그러므로 고야는 비정규군 소속 종군 화가로 볼 수 있다

 

고야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전쟁의 참화』를 형상화했다. 하지만 판화에 나오는 일부 장면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비록 고야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내기 어렵지만, 고야는 안전한 곳에서만 머무르면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따라서 “고야가 전쟁 특파원은 아니었기 때문에 상상력을 동원했다라는 구절이 독자들한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고야가 전쟁터에 직접 가보지 않고 오로지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엄연히 따지자면 전쟁 특파원종군 화가는 동일한 직업이 아니다. 전쟁 특파원은 전쟁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직업이라면, 종군 화가는 전쟁 상황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선전용 전쟁화를 그리기도 한다. 고야는 도시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고, 이성과 인간성마저 파괴하는 전쟁의 위력을 전달하려고 전쟁의 참화를 제작했다. 그는 전쟁 특파원으로서 역할을 충분히 했다. 다만 그는 전쟁의 선전에만 몰두하는 종군 화가는 아니었다. 그는 프랑스군에 맞서 싸우다가 희생한 스페인 민중들을 빛나는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았고, 민간인을 잔혹하게 죽이는 프랑스군을 살육 기계로 묘사하지도 않았다. 고야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철저히 배제하여 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려 광기 어린 분노를 표출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다.

 

고야를 안다고 생각한 사람들(필자도 포함된다)전쟁의 참화일부만 보고 있을 뿐이다. 나무에 목매달려 죽은 스페인 민중의 시체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벌거벗은 민간인의 성기를 절단하고, 여성을 강간하는 등 만용을 저지르는 프랑스군을 묘사한 그림들만 보게 되면 프랑스군의 광기만 각인된다. 그렇지만 고야가 목격한 전쟁은 서로 간에 피를 흘릴수록 프랑스군과 스페인 민중 모두 파멸하는 증오와 광기의 전쟁이었다. 고야는 이성을 잠재우는 전쟁의 광기를 판화로 기록하려고 했다. 전쟁의 참화는 전쟁을 통해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또 인간의 광기란 얼마나 잔인한지를 보여준다.

 

 

 

 

[1] 함순용, 상처 입은 지성, 그로테스크 고야(함박누리, 2017),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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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6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26 14:25   좋아요 0 | URL
전쟁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지 모르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네이버 댓글창에 기웃거리죠.

2017-09-26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전에 도서관에서 미술사강의 듣다가 재미없어서 나왔어요.
고야도 잠깐 나왔는데 cyrus님 강의로 보충하고 갑니다.
재밌게 잘 읽었어요^^

cyrus 2017-09-26 17:24   좋아요 0 | URL
사실 미술은 재미없어요. 그림 하나를 알려면 그림과 관련된 열을 알아야 할 때가 있어요. 확실한 것은 미술을 주제로 쓴 제 글도 읽어 보면 재미없어요. 제가 핵노잼형 글을 쓰는 편입니다. ^^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가는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무지개 따라 올라갔던 오색빛 하늘나래

구름 속에 나비처럼 나르던 지난날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포크송으로 편곡된 얼굴의 노랫말이다. 얼굴은 추억 저편에 간직해뒀던 과거의 기억을 톡톡 건드리는 노래다. 이 노래를 들으면 아스라이 마음에 그리운 이의 얼굴이 스친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라는 노랫말이 그림 그리기의 시작점을 아주 적절하게 설명해준다. 그 점에서 모든 사람은 타고 날 때부터 잠재적 화가이다. 붓과 물감이 없어도 우린 마음이라는 캔버스에 추억을 그린다. 따라서 나는 그림은 눈으로 보면서 감지하는 외적 형상보다는 슬픔이나 고통, 그리움과 같은 내적 정서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 김형구 르동(서문당, 2004)

* 오광수, 박서보 감수 르동(재원, 2004)

* 질 장티 외 상징주의와 아르누보(창해, 2002)

* 모리스 세륄라즈 인상주의(열화당, 2000)

* 이연식 응답하지 않는 세상을 만나면, 멜랑콜리(이봄, 2013)

    

 

 

실제로 상징주의 미술(symbolism art)을 전개한 화가들은 눈은 마음을 바라보는 창이라고 생각했다. 상징주의 미술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충실히 표현하기보다 생각, , 무의식 등의 소재를 이용해 관념과 환상의 세계를 표현하는 미술 사조다. 프랑스의 비평가 조르주 알베르 오리에(Georges-Albert Aurier)는 처음으로 상징주의 미술의 시작을 선포한 인물이다. 그는 그림은 관념적이고 주관적이어야 하며 초월적인 감수성이 없는 화가는 학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하는 상징주의 화가가 바로 오딜론 르동(Odilon Redon)이다. 르동의 그림은 몽환적이다.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고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르동은 내면적 생활의 권리를 실천한다. 그가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현실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이다. 르동은 자신의 일기 A soi-même에서 내면세계를 가시적인 현실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썼다.

 

 

예술가는 삶의 두 가지 세계, 즉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두 개의 현실에 대해 눈을 뜨고 있어야만 한다. 만약 두 세계를 분리시키려고 한다면 우리들의 예술은 보다 감소되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줄 수 있는 고상함과 탁월함은 사라지게 된다.”[1]

     

 

르동은 외면적 현실 묘사에 치중하는 인상주의 미술을 사고(思考)와 영감(靈感)’을 떼어내는 미술이라고 비판한다. 그가 즐겨 그린 그림 소재는 눈으로 확인하기 힘든 미생물, 잘린 목, 괴물, 신화 등이다. 이들은 불가사의하고, 현실에서 불가능한 존재이다.

 

 

 

                     

 

 

                 

 

 

 

                          

 

 

 

그는 괴기스러운 소재에 접근하는 자신의 방식을 불가능한 존재에 인간적인 형식으로 생명을 부여하는 일[2]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르동이 묘사한 괴물은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효과를 일으킨다. 이렇다 보니 르동을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상상의 세계에만 탐닉한 화가로 평가받기 마련인데 그의 회화적 기량마저 비판 대상이 된다. 그러나 르동이 추구하는 환상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르동은 동시대 화가들과 다른 개성적인 화풍을 유지했다. 르동은 눈으로 보는 현실을 보지 못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 너머의 세계(상상의 세계)’를 정확히 볼 줄 아는 마음의 눈을 가진 장님이다.

 

르동은 어린 시절부터 고독을 맛보면서 성장했다. 그는 보르도(Bordeaux)에 있는 지방인 페일르버드(Peyrelebade)에서 외삼촌 밑에서 자랐다. 외삼촌이 운영하는 농장은 어린 르동에 회화적 영양분을 제공한 토양이었다. 르동은 풀과 나무만 있는 농장을 캔버스 삼아 상상의 세계를 그려나갔다. 그래서 그는 눈으로 보는 즐거움보다는 마음으로 보는 즐거움, 즉 상상력이 깃든 아름다움에 일찍 눈을 뜨게 된다. 르동 친척이 페일르버드의 농장을 매각했을 때 르동은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그에게 페일르버드 농장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는 소중한 곳이고, 외롭고 말 없는 자신을 화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준 제2의 고향이었다. 르동은 일기에서 농장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나는 지난 날 그렸던 저 슬퍼 보이는 내 예술의 근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안에 있으면 나 자신밖에 없다는 고독한 유배지이며 수도원이나 다를 바 없었던 페일르버드의 대지였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막막하고 황폐했던지…‥ 내가 그곳에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그곳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눈으로 보는 즐거움은 아예 박탈당하고 없었던 그곳에서는 정신력과 상상력이 분풀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3]

    

 

 

           

          

 

 

 

             

 

 

 

 

르동은 초기에 렘브란트(Rembrandt)고야(Goya)의 영향을 받아 목탄화와 석판화를 제작했다. 그는 흰색과 검은색만으로 상대를 제압할 매력을 끌어내는 애매모호한 어둠의 세계[4]를 묘사했다.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르동은 유화와 파스텔(Pastel)화에 전념하여 부드러우면서도 환상적인 풍경, , 사색에 빠진 인물 등을 그렸다.

 

 

 

 

              

 

 

     

 

특히 감은 눈은 어딘지 모르게 영적이고 숭고한 분위기를 드러내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담백하다. 이 사람은 눈을 감은 채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깊은 마음속 보이지 않는 관념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는 건 르동이라서 가능한 일이다. 이 그림은 르동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1] 모리스 세륄라즈 인상주의1991년 구판, 170

 

[2]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 상징주의 미술(열화당, 1987), 83

 

[3] 오광수, 박서보 감수르동, 재원, 10

 

[4]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 상징주의 미술(열화당, 1987),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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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7-09-21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김건모가 리메이크한<얼굴>이란 노래가 떠오르네요^^

˝누구의 얼굴인지 나는 모르겠어.
술취한 내손이 누구를 그려놓은건지.
새하얀 종이위에 흔들리듯 그려진
낯익은 소녀의 얼굴~˝

cyrus 2017-09-21 16:57   좋아요 1 | URL
제 글을 보는 분들은 눈치 챘을 겁니다. 지난 주 일요일 <서프라이즈>에서 가곡 ‘얼굴’의 탄생 비화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저 그 방송을 보고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인터넷 검색창에 ‘얼굴 노래’로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나왔던 검색 결과가 김건모의 ‘얼굴’이었습니다.. ^^;;

임모르텔 2017-10-14 0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노래 , 어릴적 엄마가 늘 불러주셔서 오래도록 남는 노래인데 잊었다가, ..그리움이 밀려오네요. 그러다가 르동의 그림보고 반했어요! 블러그보는내내 무기력한 일상의미로에서 반딧불이를 따라가는 느낌입니다..ㅎ

cyrus 2017-10-14 16:10   좋아요 0 | URL
<서프라이즈>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얼굴’이 만들어진 사연이 소개됐어요. 그 방송 덕분에 노래 제목을 알게 됐어요. 아주 오래 전에 라디오에 흘러나온 ‘얼굴’을 한 번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제목을 몰라서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듣는 노래가 될 뻔했습니다. ^^;;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마르틴 사파테르(Martín Zapater). 이 두 사람의 우정은 특별하다. 두 사람은 20여 년 간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친분 관계를 유지했다. 현재는 고야가 사파테르에게 보낸 편지들만 남아 있다. 그래도 이 편지가 남아 있어서 고야의 성품과 사생활을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사파테르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고야와 동갑내기라고 보는 학자가 있고, 어떤 학자는 사파테르가 고야보다 일곱 살 어린 동생이라고 주장한다.

 

 

 

 

 

 

 

 

 

 

 

 

 

 

 

 

 

 

 

 

 

 

 

 

 

 

 

 

 

 

 

 

 

 

 

 

 

 

 

 

 

 

 

* 《고야, 영혼의 거울》 (다빈치, 2011년)

* 자닌 바티클 《고야 : 황금과 피의 화가》 (시공사, 1997년)

* 새러 시먼스 《고야》 (한길아트, 2001년)

* 엘케 폰 라치프스키 《프란시스코 데 고야 : 붓으로 역사를 기록한 화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년)

* 파올라 라펠리 《고야 : 검은 관능의 시선》 (마로니에북스, 2009년)

* 로제 마리 하겐, 라이너 하겐 《고야》 (마로니에북스, 2010년)

 

 

 

사파테르에 보낸 고야의 편지들을 보면 친구를 향한 화가의 진심 어린 우정이 느껴진다. 고야가 사파테르에게 자신의 업무 활동(그림 제작), 사냥 일정, 그리고 아내의 출산 소식까지 편지로 언급하는 걸 보면 사파테르를 친구 그 이상의 가족처럼 여겼던 것 같다. 고야는 사냥을 엄청 좋아했다. 편지에서 ‘이 세상에서 사냥보다 즐거운 일이 없다’(1781년 10월 6일)라고 썼다.

 

고야는 초콜릿도 좋아했다. 사파테르에게 맛있는 초콜릿을 보내달라고 여러 번 부탁한다. 사실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전설적인 바람둥이 카사노바(Casanova)가 초콜릿을 즐겨 마심으로써 여성들을 끌어들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초콜릿은 굴과 함께 자연이 준 최고의 최음제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그런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고 심리적인 느낌일 뿐이다.

 

초콜릿에 들어 있는 ‘페닐에틸아민(phenylethylamine)’이란 물질은 몸의 에너지 수위를 높이고 심장 박동을 올려서 행복한 기분을 만들어준다. 반면 실연에 빠졌을 때는 그 생성이 중지돼 버린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연인과 헤어진 사람의 상당수는 초콜릿을 간절하게 원한다고 한다. 그러나 초콜릿에 들어있는 페닐에틸아민이 소량이라서 사람의 기분에 영향을 주는지는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만약에 고야가 초콜릿을 최음제로 즐겼다면, 그는 여러 명의 여인 또는 매춘부들과 어울렸을 것이다. 그가 쓴 편지에 ‘세라피아’라는 수수께끼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세라이파가 고야와 알고 지내는 익명의 여인 중 한 명일 수 있다. 귀머거리가 된 상태에서도 알바 공작부인(Duchess of Alba)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꼈던 거로 봐서는 고야의 여성 편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된다. 그러나 고야와 공작부인은 연인 관계로 발전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나이 차가 크고, 이미 고야는 쉰 살을 넘긴 유부남이었고, 귀가 먹은 상태였다.

 

고야는 궁정 화가인 프란시스코 바예우(Francisco Bayeu)를 만나 본격적으로 전업 화가로 활동하게 된다. 고야는 그의 동생인 호세파 바예우(Josefa Bayeu)와 결혼했다. 고야는 자신의 아내를 ‘페파(Pepa)’라고 불렀다. 스페인에 영향력 있는 궁정 화가의 처남이 되면서 궁정 화가가 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데 성공한다. 프란시스코는 자신의 제자나 다름없는 고야가 자신과 맞먹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일까. 그는 심심찮게 고야의 그림에 태클을 걸어 고야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호세파는 여섯 혹은 일곱 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아들 한 명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출산 후유증 때문인지 호세파는 잔병치레가 잦았다. 고야는 아내의 근황을 아주 짤막하게 친구에게 전했다.

 

 

 

1777년 1월 22일

페파가 예쁜 아들을 낳았네, 잘 있게. (34쪽)

 

 

1780년 8월 23일

페파가 아주 예쁜 아들을 낳았네. 덕분에 우리는 생각보다 빨리 만날 수 있을 걸세. (43쪽)

 

 

1782년 12월

아내가 9일 전 유산의 후유증으로 몸져누웠다네. (59쪽)

 

 

1784년 12월 4일

이달 2일 아내가 아주 예쁘고 튼튼한 사내아이를 낳았다네. 어제 프란시스코 페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 (78쪽)

 

 

1785년 8월 5일

자네가 다정한 편지를 보낼 즈음, 아내가 몸져누워 있었다네. 유산의 조짐은 없지만 꽤 많은 피를 흘려 가족과 의사를 긴장시켰지. (88쪽)

 

 

 

호세파는 고야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놀랍게도 고야는 자신의 아내 초상화를 단 두 점만 그렸다. 그런데 유채로 그려진 그림 한 점이 호세파를 그린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호세파가 세상을 떠난 뒤에 고야는 며느리의 친척 레오카이다 웨이스(Leocadia Weiss)와 사랑에 빠졌다. 호세파로 알려진 유채 초상화가 고야의 새 애인이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다. 그렇게 되면 고야의 아내로 알려진 그림은 딱 한 점만 남는다.

 

 

 

 

 

 

옆모습을 그린 초상화는 유채 초상화와 비교하면 볼품없다. 주로 습작용 데생(dessin)을 할 때 쓰는 초크(chalk)로 그려졌는데, 고야의 화려한 명성을 생각하면 그녀의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 웬디 버드 《디스 이즈 고야》 (어젠다, 2016년)

 

 

 

나는 고야가 정말로 호세파를 사랑했는지 궁금하다. 편지에 아주 잠깐 언급된 고야의 아내는 ‘성공한 화가의 아내’가 아니라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연달아 애를 낳아야 하는 ‘출산 기계’의 모습이다. 《디스 이즈 고야》(어젠다, 2016)의 저자는 고야가 분명히 아내를 사랑했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냈다고 말한다. 글쎄, 납득이 가지 않는 주장이다. 고야가 입신양명을 위해 프란시스코 바예우의 여동생과 결혼했다면, 과연 이 결혼 생활이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프란시스코와 고야의 관계를 생각하면 고야는 처남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를 아내에게 표출할 수도 있다. 분명한 건 고야는 아내보다 친구 사파테르를 더 좋아했다.

 

 

1790년 12월

 

난 부부 침실의 쾌락과 즐거움보다도 자네를 더 사랑한다네.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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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9-20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초콜릿을 별로 안 좋아해.
안 좋아한다기 보다 있으면 먹긴하는데
없으면 굳이 찾아 먹진 않게되더군.
그래서일까? 난 요즘 달달한 로맨틱 드라마 갈수록
안 보게되더군. 이게 초콜릿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과
연관성이 있을까?ㅋㅋ

이 글 읽으니 얼마 전 본 고야 영화가 생각이 나는군.

cyrus 2017-09-20 18:39   좋아요 1 | URL
단맛 나는 초콜릿도 좋아하지만, 건강을 위해서 카카오 95% 초콜릿을 많이 사 먹어요. 요즘 나오는 드라마들은 전개 방식이 뻔해요. 결말을 미리 예상하면서 드라마를 보는 거죠. 특히 아침 드라마는 심해요. 인터넷 유머 게시판에 본 내용인데, 방송 3사 아침 드라마 모두 재벌 집안에 자란 엄마가 딸을 찾고, 그걸 방해하는 악인 인물이 등장한대요. ^^
 

 

 

 

 

 

 

 

 

 

 

 

 

 

 

 

 

 

 

 

 

 

 

 

 

 

 

 

 

 

 

 

 

 

 

 

* 알프레드 상시에 《자연을 사랑한 화가 밀레》 (곰, 2014)

* 정진국 《제국과 낭만》 (깊은나무, 2017)

* 즈느비에브 라캉브르 외 《밀레》 (창해, 2000)

* 스테판 게강 외 《프랑스 낭만주의》 (창해, 2000)

 

 

 

 

《제국과 낭만》 (깊은나무, 2017)이라는 책에 보면 생소한 이름의 화가들이 소개된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알렉상드르 가브리엘 드캉(Alexandre Gabriel Decamps, 1803~1860)이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드캉은 1828년에 그리스로 건너갔다. 《제국과 낭만》에서는 드캉이 프랑스를 떠나 여행을 하기 시작한 연도를 ‘1828년’이라고 적혀 있는데, 《프랑스 낭만주의》 (창해, 2000)에는 ‘1827년’으로 나와 있다. 아무튼, 드캉은 그리스와 터키의 이즈미르(Izmir)를 거쳐 중동으로 향했다. 프랑스인 화가는 그곳에서 머물면서 이국적인 동양 문화와 정취에 매료됐다. 오늘날에 드캉은 ‘잊힌 화가’로 남아있지만, 생전에 그의 작품들은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유행을 타고 큰 인기를 끌었다.

 

 

 

 

 

 

드캉의 대표작은 『이즈미르 순찰대』(1831년)다. 이즈미르는 옛날부터 무역도시로 번성했던 지역이고, 호메로스(Homeros)의 출신지로도 알려졌다. 1426년 오토만제국에 편입되었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리스의 침략을 받아 그리스 영토가 되었다. 1923년에 터키 영토로 복속되었다. 드캉의 그림은 이즈미르 순찰대가 말을 타고 도시를 순찰하는 장면이다. 이 그림으로 드캉은 ‘오리엔트 화풍의 대가’로 인정받았다. 동양 문화에 심취했던 작가 겸 미술비평가 테오필 고티에(Theophile Gautier)는 드캉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승승장구했던 드캉은 말년에 파리 근교에 있는 퐁텐블로(Fontainebleau)에 거주한다. 퐁텐블로는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를 포함한 바르비종 화파(Barbizon School)의 근거지였다. 드캉은 밀레가 사는 마을에 정착했다. 그런데 그에게 허울 없이 지내는 친구가 딱 한 명만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밀레였다. 밀레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동료인 알프레드 상시에(Alfred Sensier)밀레와 드캉의 ‘은밀한(?)’ 관계를 밀레 전기에 기록했다. 다음 내용은 상시에의 밀레 전기 국역본 《자연을 사랑한 화가 밀레》 (곰, 2014)에서 인용했다.[1] 이 인용문의 일부는 《제국과 낭만》에도 나오는데[2], 사실 《제국과 낭만》의 저자인 정진국 씨가 밀레 전기를 번역했다.

 

 

 

 밀레의 삶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다. 여러 해 전부터 퐁텐블로에서 살고 있던 드캉과의 관계다. (드캉이 열 살 연상.) 드캉은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일찍이 쿠르베(courbet,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필자 주)의 그림에 푹 빠졌다가 그를 직접 만나고 난 뒤로 금세 멀어졌다. 그는 밀레를 만나보고 싶어할 만큼 그의 예술성에 놀라웠다.

 

어느 날 드캉이 밀레의 화실로 찾아왔다. 수염이 부스스하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화가 드캉이요.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소.”

 

놀란 밀레는 반색을 했다.

 

“당신 그림이 참 좋더구먼. 솔직하고 지칠 줄도 모르고. 그림 좀 봅시다.”

 

 

(중략)

 

 

드캉은 거의 몰래 밀레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는 마을 초입에 자기 말을 매어두고 아무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후원(後園, 집 뒤에 있는 작은 정원-필자 주)으로 드나들었다.

 

“밀렵꾼처럼 당신을 놀래주려 했지. 어떤 화가도 보고 싶지 않거든. 당신만 보려고.”

 

그는 이렇게 매년 수차례씩 아무도 모르게 다녀갔다. 그가 사망하던 1860년까지 계속된 잠행이다. 그는 밀레와 몇 시간씩 그림 이야기를 했다. 당대 화가들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는 밀레의 살림집에는 들어간 적이 없다. 또 퐁텐블로의 자기 집으로 초대하지도 않았다.

 

밀레는 드캉이 특이하고 지성적인 인물이며 과거의 거장들과 당대 화가들을 보는 눈도 건전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감이 부족했다. 기병대원처럼 두꺼운 갑옷 속에 자신의 깊은 약점을 감추고 있었다. 그림에 대한 생각이 너무 많아 단호한 목표보다 수단에 너무 집착했다.

 

“나는 그가 한 번도 진심에서 우러난 말을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그의 말은 독하고, 냉소적이며 정확한 비평을 했다. 자기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도 그랬다. 그는 항상 길을 찾지 못해 고생하는 사람 같았다. 그런 고뇌에 가득한 고상한 사람이었다.”

 

 

 

상시에는 드캉을 ‘친해지기 어려운 괴팍한 사나이’으로 묘사했다. 밀레의 ‘현장매니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상시에는 밀레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 인물이다. 그가 밀레의 집에 몰래 드나드는 드캉의 기이한 행동을 수상쩍게 여기는 건 당연했다. 밀레의 영향을 받은 드캉은 퐁텐블로의 소박한 정경을 그리는 일에 천착했으나 사냥하는 도중 낙마하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드캉은 동양 문화를 향유하는 유행에 맞춘 그림을 제작하여 일찍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고, 밀레는 유행을 따르기만 하는 획일적이고 시끄러운 파리의 분위기를 어려워했다. 결국 밀렌는 화가로서의 명예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뒤로 한 채 파리를 떠나 시골에 정착했다. 당연히 밀레의 화풍은 파리지앵(parisien)이 선호하는 미적 취향과 거리가 멀었고, 그가 그린 농촌 그림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인정받았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오늘날 두 사람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 에드워드 W.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2015)

* 존 맥켄지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 (문화디자인, 2006)

* 이주헌 《지식의 미술관》 (아트북스, 2009)

* 이주헌 《역사의 미술관》 (아트북스, 2011)

 

 

 

미술 서적에서 ‘드캉’이라는 이름을 찾기가 어렵다. 내가 지금까지 확인된 드캉을 언급한 책이 총 다섯 권이다. 앞서 나온 정진국 씨가 쓴 《제국과 낭만》과 밀레 전기, ‘창해 ABC북 시리즈’《밀레》(창해, 2000)《프랑스 낭만주의》, 그리고 존 맥켄지의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문화디자인, 2006)이다. 《제국과 낭만》을 제외하면 나머지 네 권은 품절, 절판되었다. 어차피 네 권의 책들은 드캉을 이해하는 데 깊이 있는 문헌이 되지 못한다. 품절, 절판된 네 권의 책에 드캉이 언급된 내용을 모두 합쳐봤자 고작 문장 한 줄 나온다. 그래서 이 글을 썼을 때 그닥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국내에 ‘오리엔탈리즘 미술’을 소개한 문헌이 부족한 편이다. 맥켄지의 저서가 나올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오리엔탈리즘 미술을 배제한 에드워드 사이드’ 때문이었다. 맥켄지는 그림 속에 감춰진 오리엔탈리즘을 심도 있게 분석하여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2015)이 놓친 부분을 보완했다. 아쉽게도 맥켄지는 자신의 책에 드캉을 딱 한 번만 소환했다.[3] 그는 드캉의 작품을 들라크루아와 함께 ‘열정적이고 활기 가득한 낭만주의’[4]로 규정했다.

 

 

 

 

 

[1] 《자연을 사랑한 화가 밀레》 210~211쪽

 

[2] 《제국과 낭만》 137~138쪽

 

[3] 《오리엔탈리즘, 역사와 예술》에 ‘인명 색인’이 없다. 이 좋은 책의 치명적인 단점,, 그래서 ‘드캉’을 찾기 위해 3장 ‘미술에서의 오리엔탈리즘’ 편을 무한 반복해서 읽었다... ‘책에서 드캉 서방(?) 찾기’였다.

 

[4] 《오리엔탈리즘, 역사와 예술》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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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커뮤니티에 혐짤이라는 은어가 있다. ‘혐오을 합친 말인데, ‘짤림 방지의 준말이다. 인터넷 게시물이나 블로그 등에 첨부된 사진이나 그림을 뜻한다. ‘혐짤을 쉬운 말로 풀어쓰면 혐오스러운 사진이다. 이 글에서는 혐짤이라는 표현 대신에 혐오 사진이라고 사용하겠다.

 

혐오 사진을 이용해 악의적으로 장난치는 누리꾼들이 많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법이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상관없는 사진을 올리는 것이다. 대개는 음란한 사진을 올려 게시판 이용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또 혐오 사진을 올려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을 들게 하는 경우도 있다. 좀 오래된 일이긴 한데 7, 8년 전만 해도 알라딘 서재에 광고성 음란 게시물만 올리는 회원들이 있었다. 누리꾼들이 주로 공개하는 혐오 사진은 사람이나 동물의 시신이다. 그 밖에 희소병에 걸려 신체가 기형적으로 변해버린 환자, 대변이나 토사물을 찍은 것도 혐오 사진이다. 혐오 사진 게시물은 익명의 불특정 다수를 노리는 온라인 공간의 테러라고 보면 된다. 혐오 사진을 볼 경우 정신적인 충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친절한(?) 누리꾼은 게시물 제목 앞에 혐짤 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혐짤 주의가 적힌 게시물을 발견하면 못 본 척 지나치면 된다. 그런데 혐짤 주의가 사람의 호기심을 유발하게 한다. 궁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마우스를 클릭하면…‥. 그다음 상황은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긴다.

 

혐오 사진이 나름 컬트적인 인기가 있다 보니 악명 높은 혐오 사진 또는 게시물을 따로 모아서 목록으로 만든 것도 있다. 일본 온라인 커뮤니티 ‘2ch’절대로 검색해서는 안 될 검색어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있다. 이 목록에 나온 검색어를 구글(Google)에 검색하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충격과 공포를 받는다.

 

 

 

 

 

2ch 유저들은 검색어의 위험성을 측정(객관적이지 않다)해서 숫자로 매겼는데, 위험도 7’은 제일 위험한 수준이다. 검색 한 번으로 트라우마가 생기고, 덤으로 악성 바이러스까지 얻는 상황이다.

 

미술의 세계에서도 보는 이의 눈과 마음에 충격을 주는 괴상하고 무서운 그림들이 있다. 미술의 세계에 아름다운 그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게 무슨 예술이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추한 그림도 있다. 그래서 필자는 절대로 검색해서는 안 될 그림들을 모아 봤다. 물론, 이제 공개할 그림들은 유명 전시관에 소장되어 있거나예술로 인정받은 것들이다글의 제목은 재미있으라고 만든 패러디(parody). 그렇지만, 깜짝 놀라게 하거나 불쾌한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으니 심장이 약한 분은 자신의 소중한 심장 꽉 부여잡고 보시길. 심장이 놀라 도망가면 책임 못 진다.

 

 

 

 

* 작가 미상 구상시회권(九相詩繪卷)위험도 : 2~6

 

구상(九相)인간의 시체가 부패되는 아홉 단계의 과정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불교 경전에 나오며, 중국의 시인 소동파(苏东坡)는 이를 주제로 한 구상시(九相詩)’를 남기기도 했다. 구상시회권은 구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이 그림의 일부를 어디서 볼 수 있느냐면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세종서적, 2005) 2217~218이다. 그림 전체를 보려면 구글에 九相詩繪卷을 검색해야 한다. 그런데 검색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들개와 새가 부패가 심한 시체를 뜯어 먹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나오는데, 살이 뜯어져 나가고 사지가 절단된 시체의 모습이 그로테스크하다.

 

 

 

 

*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위험도 : 1, 2

 

 

 

 

 

 

 

 

 

 

 

 

오딜롱 르동은 상징주의와 초현실주 중간에 서 있는 프랑스의 화가다. 르동은 꿈의 화가. 그가 첫 번째로 제작한 석판화집 제목이 <꿈속에서>였다. 그의 그림에는 현미경에 통해 볼 수 있는 생명체, 고전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들, 목만 남은 사람 등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꿈속에 갇힌 존재가 되어 보는 이를 당혹스럽게 하는 꿈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서기원 씨는 르동의 웃음 짓는 거미를 오마주한 작품을 제작했다. 르동이 그린 거미는 어두컴컴한 곳에서만 사는 음흉한 괴물에 가깝다면, 서기원 씨가 그린 거미는 정말 해괴한 형태의 괴물이다. 화려한 색채에 얼굴을 과장되게 그렸기 때문에 상당히 그로테스크하다. 트라우마를 줄 수 있는 위험도 5’. 어떤 그림인지 궁금한 분은 여기 링크로 보면 된다. 링크 주소를 클릭한 순간, 서기원 씨의 그림이 나오므로, 깜놀 주의.

 

 

※ 관련 링크 (깜놀 주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3&aid=0007601553

 

 

 

 

 

 

*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 위험도 : 1, 2

 

 

 

 

 

 

 

 

 

 

 

 

앙소르의 그림에 자주 나오는 단골 소재는 가면해골이다. 그는 인간과 죽음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생각했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고통과 불안을 표현하기 위해 가면과 해골이라는 어두운 도상을 이용했다. 비통한 남자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에 배경 소품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 오토 딕스(Otto Dix) 위험도 : 2

 

 

 

 

 

 

 

 

 

 

 

 

오토 딕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하여 참전했다. 철없는 조국애에 도취한 군인 딕스는 빗발치는 포탄 소리를 듣고 전몽(戰夢)에서 깨어나게 된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비참함에 치를 떤다. 전쟁이 끝난 후 화가가 된 딕스는 삼면제단화 형태의 전쟁을 제작했다. 제단화의 가운데 그림에 총탄 구멍으로 너덜너덜해진 병사들의 시체가 참호 속에 널브러져 있다. 서경식 선생은 딕스의 전쟁그림은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일반적인 통념을 철저하게 깨뜨린 작품이라고 평했다.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나라를 위해 몸 바치는 독일인의 우수함을 내세우고 싶었던 나치 정부에 그의 그림은 희생 장병을 모독한 매국노의 퇴폐 그림으로 비난받았다. 2010년 서울대 미술관에 오토 딕스 전이 열린 적이 있다.

 

 

 

 

 

*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위험도 : 2, 3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은 고기가 어는 과정을 알고 싶어서 실험했다면, 동명의 화가는 고기를 이용해 고통받는 인간이 변형되고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그림으로 실험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제목에 습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화가는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고통을 스스로 선택한 직업이었던가. 베이컨의 그림 속에는 화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감정 상태의 농도가 확연하게 보인다. 극도의 불안함은 역동적으로 온몸을 휘감아 원래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린다. 그의 그림은 공포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미술에서는 모든 것이 잔인해 보입니다. 실재가 잔인하기 때문이죠.”(프랜시스 베이컨,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 H. R. 기거(Hans ‘Ruedi’ Giger) 위험도 : 2, 3

 

 

 

 

 

 

 

기거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기거가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에이리언(Alien)’을 창조한 초현실주의 화가라는 사실을 알려주면 대단하다면서 엄지를 올렸을 것이다. 반대로 기거의 이력을 알려주지 않은 채 사람들에게 그로테스크한 그림들을 보여주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그린 그림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기거가 괴팍한 성격이긴 하지만, 병원에 입원할 정도는 아니다. 기거는 한 인터뷰에서 만일 내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마 창조적인 사람일 것이다. 아니면 미쳤거나라고 말했다. 미치지 않은 사람도, 창조와 거리가 먼 사람들도 기거의 그림을 좋아할 수 있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들의 기괴한 분위기를 거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극단적 상상력이 동원된 어두운 본성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 즈지스와프 벡신스키(Zdzisław Beksiński) 위험도 : 2~6

 

벡신스키의 그림은 기거의 그림보다 더 오싹하다. 벡신스키는 자신이 제작한 그림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고, 자신의 그림에서 의미를 찾는 일이 무용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냉소적인 태도는 프랜시스 베이컨과 유사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의 그림이 와전되어 전해졌고, 세 번 보면 죽는다는 저주의 그림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이 그림에도 섬뜩한 벡신스키의 화풍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땅 한가운데에 거울이 달린 거대한 의자가 있다. 의자 위에 창백한 여성의 목이 놓여 있다. 여성의 목이 거울에서 스르르 나타난 것처럼 느껴진다. 벡신스키가 무슨 의도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 알 수 없다. 도무지 봐도 알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감. 이게 바로 보는 이를 불안하게 만들고, 긴장하게 만드는 어두운 아우라(Aura). 벡신스키의 그림들은 위키아트(Wikiart)’벡신스키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무서운 그림을 싫어하는 사람은 안 보는 게 낫다.

 

 

위키아트 https://www.wikiart.org/en/zdislav-beksinski

공식 홈페이지 http://www.dmochowskigallery.net/

https://beks.pl/zdzislaw-beksinski-grafiki/

 

 

 

 

 

 

 

 

 

벡신스키의 그림은 책표지로 사용된 적이 있다. 동서문화사의 책 두 권의 표지로 사용된 어둡고 쓸쓸한 풍경화가 바로 벡신스키의 그림이다. 그런데 출판사는 그림을 제작한 벡신스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두 권의 책 모두 2003년에 나왔고, 벡신스키는 2005년에 사망했다. 과연 출판사는 화가에게 허락받고 그림을 표지로 사용했을까? 저작권을 무시했던 출판사의 행적을 봐서는 그렇게 했을 가능성은 0%. 이익에 눈멀어 저작권법을 무시하면서 책을 만들다간 언젠가 화를 입게 된다. 이 글과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지난달에 저작권법 위반으로 동서문화사 대표가 불구속기소 되었다.

 

 

[, ‘대망개정판 무단발간한 동서문화사 대표 기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8&aid=0003875857

 

 

 

 

 

 

 

 

참고도서

 

 

1. 오딜롱 르동

 

 

 

 

 

 

 

 

 

 

 

 

 

 

 

 

*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 상징주의 미술(열화당, 1987)

* 질 장티 상징주의와 아르누보(창해, 2002)

* 김형구 르동(서문당, 2004)

* 르동(재원, 2004)

 

 

 

 

2. 제임스 앙소르

 

 

 

 

 

 

 

 

 

 

 

 

 

 

 

 

* 울리케 베크스 말로르니 제임스 앙소르(마로니에북스, 2006)

* 나카노 교코 무서운 그림 3(세미콜론, 2010)

 

 

 

 

3. 구상시회권, 오토 딕스

 

 

 

 

 

 

 

 

 

 

 

 

 

 

* 서경식 고뇌의 원근법(창비, 2002)

* 진중권 춤추는 죽음 2(돌베개, 2009)

 

 

 

 

4. 프랜시스 베이컨

 

 

 

 

 

 

 

 

 

 

 

 

 

 

 

 

 

 

 

 

 

 

 

 

 

 

* 크리스토프 도미노 프랜시스 베이컨(시공사, 1998)

* 루이지 피카치 프랜시스 베이컨(마로니에북스, 2006)

* 안나 마리아 빌란트 프랜시스 베이컨(예경, 2010)

* 데이비드 실베스터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디자인하우스, 2015)

 

 

 

 

 

5. H. R. 기거

 

 

 

 

 

 

 

 

 

 

 

 

 

 

* 기거(아트앤북스, 2003)

* H. R. 기거 HR 기거(마로니에북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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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09-01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섭네요. 하긴, 인류의 진화과정이 돌연변이의 역사이지요. 이렇게 자판 두들기는 손가락도 앞 지느러미가 변형된 거고, 발가락은 뒷지느러미의 변형에 불과하니...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런지.. 돌연변이의 역사!

cyrus 2017-09-01 20:31   좋아요 0 | URL
르동이라는 화가가 괴물 묘사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 중의 하나가 진화론이었습니다. ^^

sprenown 2017-09-01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섭네요..하긴, 인류 진화의 역사가 돌연변이의 역사죠..앞으로 어떻게 진화할련지.. 희귀병도 많이 생기고, 별 희한한 일들도 많이 생기는 호모사피엔스의 삶이죠.

cyrus 2017-09-01 20:32   좋아요 0 | URL
인류가 진화할수록 상상력도 풍부해지는 것 같습니다. ^^

qualia 2017-09-02 0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위 ‘혐짤’이란 용어 설명 부분하고 혐오 사진 구경에 대한 경고 부분까지만 읽었습니다. 중간 혐오 사진 부분은 재빨리 내려서 안 봤습니다. ㅎㅎㅎ 근데 맨 아래 부분 H. R. 기거 작품 사진은 살짝 봤습니다. 영화 《에일리언》에 나오는 외계 우주선과 외계인을 H. R. 기거가 디자인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 외계 우주선과 그 조종사인 스페이스 쟈키(space jockey)의 괴기함(혐오감과는 다른 느낌이죠)과 공포유발감은 정말 영화 사상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계 우주선 안에서 알을 까고 나와 변태 과정을 거치는 에일리언 디자인도 역대 최고의 괴물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능가하는 건 아직까진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한 가수의 실황(라이브) 공연 무대도 H. R. 기거가 디자인한 것이 있어요. 그건 그러나 정말 웅장하면서도 어떤 경외감이 들게 하는 명작이었습니다. 전혀 혐오감 같은 건 들지 않는, 그 가수와 그 가수의 노래와 이미지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뭐랄까 신의 자애로움이 느껴지는 그런) 거대 인물상(혹은 신인상)이었죠. 그러나 저는 H. R. 기거의 전모에 대해선 거의 전혀 모릅니다. 서점에서 그의 작품집을 훑어보았던 적이 있는데요. 제 취향이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후루룩 넘기면서 보고 말았더랬습니다. 아무튼 깊이 탐구할 만한 문제적 예술가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의 공포스럽고 괴기스럽고 혐오스러운 작품들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습니다. 그에 비해 영화 《에일리언》에 나오는 외계 우주선과 외계인은 일종의 순화된 공포와 괴기스러움으로서 얼마든지 영화적 흥미진진함을 불러일으키는 특이한 사례라는 생각입니다. 저는 보면 볼수록 온갖 호기심과 상상력이 샘솟는 느낌입니다. 첨언하자면 《에일리언》 유형 이외의 다른 공포 영화는 거의 본 적도 없고 보고 싶지도 않더라고요. 저 또한 트라우마에 한번 걸리면 빠져나오기 힘들어 하는 유형의 인간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cyrus 님의 경고를 받아들여 윗글 중간을 건너뛴 것이죠. ㅎㅎ 《이벤트 호라이즌》 같은 유형의 영화가 저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영화 주제는 매우 철학적이고 의미심장해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다시 보고 싶진 않더라고요. 그보다 더 수위가 높은 공포물들은 아예 본 적도 없고 볼 생각도 없고 말이죠. 다른 분들은 공포 감각, 괴기 감각, 혐오 감각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사람마다 수용할 수 있는 그 수위나 임계점은 많이 다를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cyrus 님의 감각 수위는 저와는 많이 다른 것 같더라고요. ㅎㅎㅎ ^^

[처음 댓글 올린 시각 : 2017-09-01 21:53]
[오타 수정해 다시 올린 시각 : 2017-09-02 00:55]

cyrus 2017-09-02 12:30   좋아요 0 | URL
qualia님은 기거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기거의 그림을 보면 과거 낭만주의자들이 느꼈던 숭고, 경외감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저도 기거의 디자인을 긍정적으로 보는 편입니다. ^^

2017-09-01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02 12:32   좋아요 0 | URL
혐오 사진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들은 자신이 혐오 사진을 보면서 느꼈던 정신적 충격을 상대방도 느껴보길 원하는 것 같습니다. 즉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해봐, 이런 심리인거죠.. ^^;;

AgalmA 2017-09-02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딜롱 르동 그림은 종교적이고 성스러운 그림도 많은데 혐오로 많이들 분류하는 게 오딜롱 르동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못마땅합니다ㅜ 그런데 이상하게 혐오쪽을 깊게 건드리면 종교적이기까지 하다는 게 참 아이러니!

cyrus 2017-09-02 20:35   좋아요 1 | URL
르동의 그림들을 소개하면서 분석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도 르동의 그림을 좋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