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내용은 작품의 줄거리 및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7)은 김지영을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의 진단으로 끝이 난다. 독자의 예상을 뒤엎는 반전이다. 김지영의 삶을 따라가며 진행되던 소설은 정신과 의사가 작성한 진료 기록의 일부였다. 결국, 김지영의 발화 행위는 실패한 셈이다. ‘개인적인 것을 정치적으로(The personal is the political,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구호)’ 확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가 그녀의 상황을 공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성의 목소리와 일상을 사적으로 규정하는 가부장적 시선을 유지한다. 의사는 김지영을 산후우울증과 육아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로 진단하고,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처방한다.

 

 

 

 

 

 

 

 

 

 

 

 

 

 

 

 

김지영 씨와 정대현 씨의 얘기를 바탕으로 김지영 씨의 인생을 거칠게 정리하자면 이 정도다. 김지영 씨는 일주일에 두 번, 45분씩 상담을 받고 있는데, 증상이 나타나는 빈도는 줄었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당장의 우울감과 불면증에 도움을 주기 위해 김지영 씨에게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처방했다. (169쪽)

 

 

 

나는 의사가 김지영에게 처방한 항우울제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프로작(Prozac)일까, 아니면 졸로푸트(Zoloft)[1], 세로작트(Serozat)일까? 국내에 유통된 항우울제 종류가 생각보다 많다.

 

 

 

 

 

 

 

 

 

 

 

 

 

 

 

 

* 《불확실한 시대의 과학 읽기》(궁리, 2017)

 

 

 

방금 언급한 세 가지 항우울제는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s)다. 우울증은 뇌 속의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serotonin)의 화학적 불균형 때문에 발생한다. 세로토닌은 신경 세포로 재흡수 되는 것을 차단해 몸속의 신경전달물질을 적정하게 유지한다. 프로작은 졸로푸트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항우울제였다. 졸로푸트는 다른 약물과 상호작용이 거의 없어 필요할 경우 병용 투여가 가능하고 부작용이 거의 없는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SSRIs계 항우울제는 우울증뿐만 아니라 불안장애, 생리 전 불쾌증후군 등의 치료제로도 사용됐다.

 

세상엔 완전한 만병통치약이 없다는 것은 SSRIs계 항우울제도 마찬가지다. 항우울제의 부작용이 끊임없이 보고되고 있다. SSRIs계 항우울제 중 일부 약은 투약을 중단하기가 어렵고 갑자기 투약을 중단했을 때 초조 불안 등의 금단현상이 나타난다. 이 때문에 미국과 영국에선 중독성 관련 논쟁이 일기도 했다. 단기적으로 항우울제가 유용할지 몰라도, 장기복용 시 효과는 아직 밝혀진 게 없다. 항우울제의 사용량이 급증하고 있는 것은 확실한 임상적 증거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제약회사들의 적극적인 광고 전략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항우울제의 효과가 상당 부분 ‘불확실성의 영역’을 안고 있다. 우울증의 원인을 사회 · 심리적 요인, 유전적 요인이 신경전달 물질과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서 찾는 것처럼, “우울증의 치료도 항우울제 복용 같은 약물치료에만 의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지적은 귀 기울여 볼 만하다.

 

 

 

 

 

 

 

 

 

 

 

 

 

 

 

 

 

 

미국의 작가이자 법조인인 엘리자베스 워첼(Elizabeth Wurtzel)《프로작네이션》(민음인, 2011)에서 자신의 몸과 영혼을 갉아먹은 우울증과 항우울제의 위험성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크게 마음의 상처를 받은 후 우울 증세를 보였다. 끊임없이 자살 충동을 느꼈고, 자기 혐오와 무력감을 느끼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심각한 임상적 우울증 상태에서 느끼는 고통은, 본능적으로 빈 공간을 채우려는 인간 본성의 몸부림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비어 있는 상태를 못 견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의지와 목표를 가지려 애쓴다 해도, 심한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깨어서 걸어 다니는 시체에 지나지 않는다. (37쪽)

 

 

그녀는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복용해온 프로작이 우울증을 낫기 위한 확실한 해법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는 또 항우울제 처방을 권하는 의사를 ‘박사학위를 딴 마약 거래상’이라고 비난한다. 아마도 이런 의사들은 마음이 아픈 여성의 증상이 어떤 병명인지 몰랐을 것이다.

 

 

 

 

 

 

 

 

 

 

 

 

 

 

 

 

 

 

* 베티 프리단 《여성의 신비》(이매진, 2005)

* 안미선, 김보성, 김향수 《엄마의 탄생》(오월의봄, 2014)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은 전업주부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자살을 하는 사례가 급증하자, 우선 동창들을 인터뷰하면서 문제점을 밝혀냈다. 그녀는 미국 사회 중산층 주부들이 앓고 있었던 불가사의한 증상을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여성들을 신비화하는 가부장적 관념, 즉 현모양처와 모성애가 여성의 가정 내 역할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했다.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온 가부장제가 여성을 외롭게 만들었다. 한국 사회의 여성, 즉 ‘엄마’가 된 여성들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에 걸린다. 결혼과 출산을 하기 전 여성은 자아실현이 가능한 삶을 살 수 있지만, 출산 이후에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좋은 엄마’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사회가 만들어내고 때로는 강요하는 고정된 성 역할일 뿐이다. ‘엄마’ 역할을 해야 하는 여성들은 머리 아프고, 혼란스럽다. 모유 수유부터 신생아를 건강하게 돌보는 방법까지 산후조리원이 가르쳐준 대로 학습한다. 아이가 아파도, 잘 안 먹어도, 공부를 못해도 “다 엄마 탓”이라는 지적을 혼자 감당한다. 이제는 숨만 쉬어도 ‘맘충(mom蟲)’이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는 ‘혐오 대상’이 된다. 자신과 자녀가 타인에게 어떠한 피해를 주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대부분 사람들(특히 남성들)은 산후 우울증, 육아 우울증이 신체적 및 정신적 증세가 작용해서 일어나는 병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우울증의 환경적 요인까지 고려하지 못한다. 과도한 시집살이, 경제적 압박감, 자녀 출산 및 육아에 대한 과도한 부담감 등이 우울증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많은 연구 자료가 있다. 그런데 자신의 아이를 죽이고 자살한 엄마의 비극적 소식을 접하면 ‘비정한 엄마’라고 비난한다. ‘기레기’라고 불리는 수준 낮은 기자들은 기사 조회 수를 늘리기 위해 이런 소식을 자극적으로 보도한다. 자살한 엄마의 앞뒤 사정을 확인하지 않은 채 엄마를 '천륜을 어긴 사람'이라는 프레임(frame)을 씌운다. 이 억지스러운 프레임이 재생산되면 엄마 역할을 해야 하는 여성들의 말 못 하는 고충을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여성의 우울증은 사회가 만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정신 상태를 알지 못한 채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로 살아간다. 우리 사회에 ‘정신과 의사’가 정말 많다. 대중은 ‘무허가 정신과 의사’가 되어 자신의 입맛대로 여성의 정신 상태를 판명한다. 여성이 조금만이라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면 피해망상, 우울증이라고 성급하게 진단을 내린다. 그들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약을 권한다. 우리 사회는 여성이 왜 아픈지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약 권하는 사회’이다.

 

 

 

 

 

 

[1] 《불확실한 시대의 과학 읽기》 『프로작이 과연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을까?』 편에 보면 항우울제 이름이 ‘졸로프트’라고 나와 있다. ‘졸로푸트’와 ‘졸로프트’ 둘 다 써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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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9-16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도 약이지만 술 권하는 것도 문제지.
하긴 알콜도 약이라면 약인가?

cyrus 2017-09-17 19:54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특유의 술 문화 때문에 술을 입에 대지 못하는 사람들도 마셔야해요. 술을 못 마시면 사회생활 못한다고 착각하는 시선이 사라져야해요.

transient-guest 2017-09-18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국의료업계의 무분별하고 무차별적인 우울증처방남발과 약사용은 90년대를 규정짓는 현상들 중 하나로까지 이야기될 정도로 당시엔 어린애, 심지어 개까지 우울증운운하던 때였다고 History Channel아니면 CNN 다큐인 90s에서 본 것 같습니다. 중증의 우울증은 약으로 일단 조절을 해야하지만, 테라피를 병행해야 근본치유가 가능한 걸로 지금은 많이 인식하고 있습니다만, 한때는 정말 비타민처럼 이런 약을 먹었다고 하네요.

cyrus 2017-09-18 09:53   좋아요 0 | URL
‘비타민처럼 약을 복용’했다는 표현을 들으니까 미국인들이 얼마나 항우울제에 지나치게 의존했는지 실감이 납니다.
 
남성성/들 이매진 컨텍스트 42
R. W. 코넬 지음, 안상욱.현민 옮김 / 이매진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한 남자가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수많은 감정의 기복을 겪는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믿음. 눈물을 흘리고 싶어도 남자가 그까짓 일로 울면 안 된다라는 시선 때문에 감정을 수축시키며 살아왔다. 특히 한국 남성들은 강한 남자가 돼야 한다는 경쟁심리 속에서 살아왔고, ‘남성성은 어느새 이들의 삶을 살아가는 인식의 지도가 되었다. 남성이 쥐고 있는 이 낡은 인식의 지도가 시대와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어떻게 만들었는지 추적한 책이 R.W. 코넬남성성/(이매진, 2013)이다.

 

천지개벽이니 상전벽해니 하는 말로도 어쩌면 부족할 것 같다. 기나긴 세기 동안 있었던 남성성의 형성 과정을 묘사하려면 말이다. 근대의 남성성개념은 한 사람의 행동을 여성성과 견주어서 규정한다. 남성성과 거리가 먼 사람은 종종 부정적인 것(‘눈물이 많은 남자는 남자답지 못하다’,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으로 폄하됐다. 그렇지만 남성성을 성격과 행동 등 개인성(individuality)을 근거로 단순하게 정의하는 것은 젠더 분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젠더가 육체적 경험, 인격, 문화가 만들어내는 사회문화적 구성물이라면 남성성은 애초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제도 담론이 그렇게 명명하고 실천하도록 지식 체계를 동원한 결과가 된다. 따라서 젠더는 사회적 실천이며 사람들은 남성성여성성이라는 이름으로 젠더를 배치한다. 저자는 젠더를 배치하는 실천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재생산의 무대라고 말한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남성 중심적, 남성 우월적 가치평가, 남성에 의한 여성지배 구조의 재생산적 구조 등을 들 수 있다. 가부장제 문화에서 자란 사람은 가부장제 사회관계를 재생산한다. 헤게모니(hegemony, 주도권)를 잡은 남성들은 여성을 현모양처의 틀에 가둬놓았고, 동성애 남성에게 남성성에 배제된 비정상적 존재라는 낙인을 새겼다. 헤게모니 남성성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특성을 보인다. 국가는 신체가 건강한 남성에게 나라를 지키는 애국심 강한 군인으로, 기업은 일할 수 있는 남성에게 국가 경제의 기둥이라는 이름으로 남성성을 전시하고, 남성에게 주도권을 부여한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 ‘국가 경제의 기둥에 배치되지 못한 동성애 남성과 여성의 능력은 무시 받고, 자연스럽게 사회적 지위가 격하된다. 동성애 남성, 트랜스 남성(female-to-male transgender)은 헤게모니 남성성을 실천하는 재생산의 무대에서 추방당하는 종속된 남성성 된다.

 

최근에 와서 전통적인 성역할 구분은 현대 사회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인간이 타고난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는 데에 장애요인이 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들은 성역할의 이상적인 모델로서 심리적 양성성의 개념을 제시한다. 심리적 양성성이란 한 개인이 강인한 남성성과 섬세한 여성성 모두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양성적인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남성적 역할과 여성적 역할을 융통성 있게 적절히 수행할 수 있다. 잃어버린 남성성을 회복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대안 중 하나가 심리적 양성성이다. 현실에서 무너진 헤게모니 남성성(실추된 권위)심리적 양성성으로 보상하려 한다. 하지만 심리적 양성성을 중심으로 한 남성 운동은 기껏해야 단순 논리 차원에서 남성의 권위만 회복하는 데 초점을 맞출 뿐이며 가부장적 구조의 기반을 다시 세우는 데 일조한다. 또 성차별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다.

 

남성성은 헤게모니 남성성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젠더 질서에 가장 높은 정점에 위치한 헤게모니 남성성은 남성성의 모범으로 자리 잡아 동성애 남성이나 트랜스 남성 같은 특정 유형의 남성성을 차별하고, 혐오한다. 헤게모니 남성성을 수호하는 남성은 자신이야말로 진짜 사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진짜 사나이란 없다. 오늘날 혐오와 차별을 양산하는 재생산의 무대위의 주인공은 남성이다. 그들이 입고 있는 무대복은 헤게모니 남성성이다. 이제 여성들도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남성을 위한 연극을 끝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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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15 22:35   좋아요 1 | URL
살아있는 존재는 서로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문제는 관계축이 한쪽으로 쏠리면 문제죠. 그렇다고 다른 존재를 아예 없으면 평형 관계가 완전히 무너집니다.

sprenown 2017-09-15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모두 남성성과 여성성을 같이 갖고 있지 않나요? 상황에 따라 그 성향이 발현되고요..다만 남성성이 지나치게 우세하고, 그걸 장려하는 사회문화가 문제라는 것은 알지만요.

cyrus 2017-09-16 05:18   좋아요 1 | URL
칼 융이 남성과 여성이건 모두 적어도 남성성과 여성성 일부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의 주장을 선호합니다. 남성 운동론자들이 이 주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문제는 남성이 유리하도록 해석합니다. 양성성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여전히 레즈비언의 남성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식이 남아 있습니다.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도란스 기획 총서 2
권김현영 엮음, 권김현영.루인.엄기호 외 지음 / 교양인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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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가부장적 아버지상의 해체는 90년대 말 압축 성장 신화가 붕괴한 IMF 체제를 통과하며 이루어졌다. 한국의 남성은 경제성장의 주체였고, 그들의 퇴장은 가부장제의 몰락이기도 했다. 때맞춰 발간된 김정현《아버지》(문이당, 1996)는 외환위기를 거치며 직장과 가정에서 동시에 밀려나 갈 곳을 잃고 몰락한 가부장의 뒷모습을 애처롭게 조명했다. 그러나 성의 경계, 전통적 가부장이 몰락한 최근에도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가부장 아버지들이 대중문화에 등장하기도 한다. 아직도 TV 드라마는 왕좌 같은 소파에 근엄하게 앉아 버럭 소리를 지름으로써 모든 갈등을 일시에 중지시키거나 해결하는 힘을 과시하는 아버지들을 등장시킨다.

 

드라마 속 아버지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져 가는 ‘(거칠고 권위적인) 남성성’을 지키려 하는 한국 남성의 모습을 닮았다. 잃어버린 남성성을 회복하고 싶은 한국 남성들은 여권 신장 등 사회적 변화를 거부하고 ‘남성의 위기’를 불러온 원인을 여성에게 돌린다. 한국 남성은 자신의 시들어가는 남성성을 확인하기 위해 여성을 혐오하고 물리적 · 언어적 폭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자신들이야말로 여권 신장 시대가 낳은 희생양이며 점점 설 자리가 잃어서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그동안 책과 언론은 ‘남성성의 허상’에 대해 끊임없이 제기해왔지만, 대부분 한국 남성들은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교양인, 2017)는 한국 남성들이 어떻게 남자로 만들어져 가는지를 규명한 흥미로운 책이다. 정희진권김현영‘식민지 남성성’이 어떤 방식으로 일제 강점기 시대의 조선 남성들에게 영향을 줬는지 논의했고, 루인한채윤, 준우는 트랜스젠더 남성 · 여성과 레즈비언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게 만드는 ‘남자다움’과 이성애 제도의 문제점을 들춰낸다. 엄기호는 남성성을 ‘어디서나 통할 수 있는 보편성’으로 인식하는 남성 권력을 분석한다.

 

일제 강점기 조선 남성 지식인들은 ‘피식민지인’의 설움을 강한 남자의 힘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동경한 것은 ‘일제가 조선에 이식한 근대화’였고, 나라를 빼앗긴 수치심을 참지 못한 조선 남성들은 자신을 ‘식민지 남성(일본)에게 패배한 피해자’로 인식했다. 거대한 제국주의 앞에 한없이 쪼그라든 식민지 남성들이 자기 비하감에 젖어 드는 것은 당연한 일. 조선 지식인 및 문필가들은 자신의 위축된 남성성을 자조하며 시대의 아픔을 기록했고 문학과 예술로 승화시켰다.[1]

 

남의 나라 식민지 노예가 되고 동족끼리 피 흘리는 전쟁을 경험한 한국 남성들은 ‘강인한 남성성’을 원했고, 우리나라 특유의 군사 문화는 한국 남성의 남성성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국가의 부름을 거절하는 남성은 국가 정책에 거스르는 ‘비(非) 국민’이 된다. 군대를 다닌 남성은 국가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핵심 노동 자원이 되는 순간 ‘한국 남성’으로 개조된다. ‘남성적 민족성’이 강조되면서 여성은 노동하는 능력이 있음에도 ‘한국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지 못한다.[2] 미필 남성, 동성애자 남성, 장애인 남성 등은 ‘한국 남성’을 상징하는 지배적 남성성보다 아래에 있는 ‘주변적 남성(성)’으로 전락한다.[3] 군대를 다녔고, 노동함으로써 ‘국민’으로 인정받은 한국 남성들은 자신의 위치를 당연하게 여겼다. 그리고 청춘을 군대에서 보내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군대에서 허비한 시간과 경험’을 보상받기를 원했다. 군대 간 남성들이 군 가산점제 부활을 요구하는 것도, 잊을 때마다 여성 징병제를 주장했던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다. 한국 남성은 사회뿐만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까지 구획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남성성을 위협하는 동성애와 트렌스젠더를 인정하지 않았다. 트랜스남성(female-to-male transgender: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 남성 성 정체성을 가진 트랜스젠더)은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남성 집단으로부터 배척받는 주변적 남성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한국 남성’이 되기 위해 단련된 근육으로 섹스어필하는 남성상, 가부장적 남성성을 모방한다.[4]

 

현대의 남성성은 오랜 기간에 걸쳐 제도화되었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다방면에 걸쳐 형성된 ‘남자다움’에 대한 오해와 허상으로 인해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도 자유롭지 못했다. 21세기는 남성성이 소용없는 시대다. 남성들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남성성’을 죽이고 ‘남성’이 아닌 또 한 명의 좋은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한국 남성의 적은 여성이 아니다. 남성성은 ‘남성’을 치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편협하고 이기적인 환영(幻影)이다. 남성성을 죽이자! 남성성은 우리 모두(남성, 여성, 동성애자, 트랜스젠더)의 원수다.[5]

 

 

 

 

 

 

[1] 2장 근대 전환기 한국의 남성성 (권김현영)

 

[2] 4장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 (엄기호)

 

[3] 1장 한국 남성의 식민성과 여성주의 이론 (정희진)

 

[4] 6장 트랜스남성은 어떻게 한국 남자가 되는가 (준우)

 

[5] 디시 인사이드 갤러리에 유행했던 짤방에서 나온 말 ‘개미를 죽입시다. 개미는 나의 원수’를 패러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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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 2017-09-06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성성에 집착하는 마초나 메갈 모두 사회부적응자들이죠.

cyrus 2017-09-06 17:32   좋아요 0 | URL
저는 메갈리안의 미러링 스피칭에 한 번도 동참한 적이 없습니다. 처음에 미러링 스피치를 부정적으로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미러링의 의도를 이해한다면 메갈리안을 ‘사회적 부적응자’, ‘반 페미니스트’로 볼 수가 없습니다. 어제 쓴 <그럼에도 페미니즘> 리뷰에서 미러링의 긍정적 효과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미러링은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메갈리안에서 나온 워마드가 남성 동성애자의 여성 혐오 발언을 미러링한 점(여성 혐오 발언을 한 남성 동성애자도 비판 받아야 합니다. 제가 언급한 내용들 모두 <메갈리아의 반란>이라는 책에 나옵니다), 독립운동가를 ‘고인 모독’하는 표현 행위는 미러링 스피치의 의도에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워마드가 메갈리아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메갈리아를 부정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분’만 가지고 ‘전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워마드로 가지 않은 메갈리안은 남성 동성애자의 여성 혐오 발언을 미러링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저는 워마드에 반대한 메갈리안의 태도에서 ‘성 소수자들도 안고 가야 할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봤습니다.

2017-09-06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9-06 17:40   좋아요 2 | URL
아직 우리 사회는 남성과 여성이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성애적 사회’입니다. 그렇다 보니 지금도 여전히 ‘비혼’, ‘1인 가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

2017-09-06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6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6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6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6 1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6 1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ient-guest 2017-09-07 0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엇인든 극단적인 건 조심해야 한다고 봅니다. 메갈의 미러링도 일정한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있으나 그 대상이 무차별적으로 넓어지면서 이상해졌죠. 게다가 사람이 여럿 모이면 늘 말썽분자가 섞이는 것도 있구요. 남성적인 것도 여성적인 것도 있는 그래도 좋습니다. 다만 상징이 되고 거기에 기댄 정치성이나 우월성을 부각시키면 문제가 되겠죠. 완벽한 것은 없기에 서로간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다락방 2017-09-07 06:42   좋아요 1 | URL
무엇이든 극단적인 걸 조심해야 하는 것은 타당하게 들리지만 메갈에 대해서라면 그 말은 좀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간 얼마나 남성들이 여성을 혐오하고 비하했는지를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었고, 그러므로 거울 앞의 똥을 치우면 자연스레 거울에서도 똥도 찾아볼 수 없었을겁니다. 지저분한 원본을 없애기 보다 ‘얘네도 잘못했지만 니네도 나빠‘ 해버리는 건 기득권과 이미 있던 것에 대해 힘을 실어주는 것밖에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르면서 말하기는 무척 쉽죠. 왜 그 울분에 찬 미러링이 나왔는지 이해한다면 ‘뭐든 나빠‘란 말은 나올 수 없다고 봅니다. 나쁜 게 아니라 그동안 한 말을 돌려듣기가 불편했다는 게 맞다고 보여집니다. 메갈에 가면 실제로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남성으로부터 당했던 성추행과 성폭력에 대한 얘기들이 쏟아지고 거기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힘을 주고 위로해주는 글이 많습니다. 그간 사회에서는 다 내 잘못이라고 퉁쳐왓던 부분들에 대해서요. 메갈에 대한 정당성은 남성이 부여하고 말고 할 건 아니라고 봅니다.

transient-guest 2017-09-07 07:15   좋아요 0 | URL
제가 남자인 것과 제가 쓴 글과 연관을 지어서 특정주제에 대해 언급할 자격유무를 말씀하시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메갈의 활동에 큰 관심이 없지만, 여성 모두가 메갈을 지지한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구요. 남성이 여성에게 행사한 온갖 폭력, 그리고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차별에 대한 저항으로써의 의미는 공감하지만, 미러링이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미국에 와서 경험했던 차별을 그대로 미러링하는 것이 인종갈등해소에 어떤 도움이 될까요...극단적인 비유지만, 일제 35년간 한국사람들에게 저지른 온갖 악행을 우리가 그래도 미러링한다고 할 때 거기에 대해 일본사람은 아무말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글의 특성상 표정도 볼 수 없고, 톤을 들을 수도 없어 그냥 보았을 땐 아주 불쾌하게 보신 듯 하고, 저 역시 조금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관점이 다를수도 있고 꼭 모두 다 agree하지 못해도 그만이지만, 적어도 ‘남성‘이라서 메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취지로 들리는 말씀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메갈에서 서로 감싸주고 문제를 나누고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미러링으로 represent되는, 흔히 뉴스에서 접하는 그런 극단적인 수준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고 남성이든 여성이든 거기에 대해 ‘정당‘하다 아니다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불쾌하게 느끼실지도 모르겠어요.

PS 비밀 댓글로 해놨는데, 그러면 서재주인만 볼 수 있다는 걸 갑자기 깨닫고 수정합니다...-_-:: 제가 이래요..ㅎ

syo 2017-09-07 08:02   좋아요 0 | URL
갑자기 튀어나와서 죄송합니다. 그냥 몇말씀 드리고 싶었습니다.

다락방님의 진짜 뜻이야 제가 함부로 단정할 순 없겠으나 남자는 무조건 메갈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라- 라는 말씀을 하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메갈의 미러링에 대한 ‘정당성‘을 말씀하시려면 최소한 메갈이 제기하는 문제의식과 그들이 받은 피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 다음에 하라는 말씀 같아요.

미러링이 인종차별에 대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하셨는데, 미국은 아직 인종차별 문제가 있긴 해도, 시민사회 전반에 차별을 터부시하는 문화가 꽤 넓게 형성되어 있고 사람들도 문제의식을 두텁게 가지고 있는지라 미러링의 효과가 그다지 드러나지 않을수도 있겠네요. 미러링은 주의를 환기시키는 효과가 가장 크니까요ㅡ 라고 미국에 살아본적도 없는 제가, 어디서 뉴스나 책이나 드라마 같은데서 보던 지식만 가지고 인종차별을 터부시하는 문화가 비교적 잘 정착되어 있으므로 어쩌주 저쩌구 진단하는 식의 말을 하면, 미국에 살고 직접 인종차별을 겪으셨다는 transient님은 제 발언에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다락방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의 의미가 그런데 있는 건 아닐까요?

극단적인 비유는 정말 극단적이셨습니다. 맞지도 않구요. 메갈의 미러링은 과거에 벌어진 일들에 대한 단죄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증언이고 환기가 아닐까요. 이미 지나갔으며 지금은 벌어지고 있지 않은 일제 35년간의 만행에 대해 미러링을 한다면 당연히 말씀대로 일본 사람들이 아무말도 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겠지요. 그건 사과와 배상의 문제니까요. 님의 비유는 여성혐오가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 여성들이 만약 과거의 잘못에 사죄하고 배상하라는 뜻에서 미러링을 전개하는 상황에나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죄송합니다.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다락방 2017-09-07 08:28   좋아요 1 | URL
안그래도 트랜짓님의 비댓이 달린 걸 보고 저를 향한 것 같은데 볼 수 없어 공개로 변경해달라 요청드릴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바꿔주셨네요. 고맙습니다.

제가 트랜짓님의 첫댓글에서 받은 건, 님이 생각하신 것처럼 ‘불쾌함‘은 아니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말씀드리고 싶어요. 불쾌함을 느끼진 않았어요. 다만, ‘의미없는 예쁜말‘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남성이라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사자가 아닌 동떨어진 느낌, 거기에서 오는 ‘얘도 나쁜데 너도 나빠‘하는 느낌이요. 이 점에 대해서 그렇게 판단하면 안된다고 저는 생각하니까요.

일단 제 위에 syo 님이 제 댓글의 의도를 잘 파악해주셨는데요,
트랜짓님 말씀처럼, 여성이라고 다 메갈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남성이라고 다 지지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제가 언급했듯이,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비난하기가 너무 쉽다는 말을 한것입니다. 트랜짓님도 댓글에서 언급하셨죠. ‘큰 관심이 없다‘고요. 큰 관심이 없는 것,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정당성을 얘기한다는 것이야말로 좀 아니지 않나 생각한 겁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메갈을 일베처럼 낙인찍어 놓았고, 메갈은 없어진 지 한참 되었죠.
일례로, 꼴페미를 극혐한다는 사람들은 페미니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습니다. 그리고 계속 페미니스트를 혐오하죠. 저 역시 페미니즘에 대해 잘 모를 때 많은 것들을 오해했던 것처럼요.


미국에서 경험한 인종차별을 미러링하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냐, 해소에 무슨 도움이 되겠냐 하셨는데, 저는 미러링이 가져온 효과가 엄청 많다고 생각합니다. 여성들이 드디어 말하기를 선택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페미니즘이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가 되고, 소라넷을 없애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피해자 탓을 했던 용어들이 많이 바뀌었어요. 하지 않고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냐‘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은 아주 많이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의 페미니스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생각한 방법을 최대한 시도하고 해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자꾸 악법을 고쳐나가려고 하고 악습을 없애려한다고 생각해요. 미러링은 거기에 불을 붙였고요. 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지 않으면서 그게 무슨 효과가 있는지, 그 방법 나쁘다, 등의 얘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나쁜 걸 바꿔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Nina 2017-09-11 1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 학습과 실천을 열심히 하시는 건 좋지만..
양비론을 비판하는 이런 논리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메갈과 미러링, 한남충론 등등에 대해 전적인 찬성 대 전적인 반대만을 강요하며 이탈을 억압/단속하려는 전형적인 찬반 이분법적 흑백논리로서 위기에 몰린 워마드 잔당들 같은 메갈 후진분자들의 궁색하기 그지없는 초라한 방어논리이자 ’유일한’ 자위 논리라는 것입니다.

’미러링’의 긍정적 효과들만 일면적으로 과장하면서 결국 자기 믿음만을 고집하며 복잡다단한 사회적 효과들과 다채다양한 피드백들에 의한 자기수정을 회피하는 전형적인 확증편향과 단순화 오류를 범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 ˝꼴페미 비판자들이 페미니즘 책은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용감한 주장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하고 계시는 건지... .
현실의 저질 페미니즘은 절대 비판해서는 안되고 무조건 일방적으로 옹호해줘야만 하는, 이미-완성형이고 완전체입니까??
’미러링’이란 그럴싸한 미명에 도취되어 모든 혐오를 대량생산함으로써 더 큰 백래쉬를 불러들였고 여혐을 오히려 비교불가능할 정도로 전사회적으로 증폭시켰으며, 모든 평범한 남성들을 일베화시켜 파시즘을 낳게 된다는 생각은 못해보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실망스러운 자기성찰능력의 부재 전시행위를 멈추고 제발 ’더 나은 페미니즘’ 발명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모색을 포기하는 안주에 머물지 마시기 바라며,
그런 의미에서 이하 진보정당 여성분과위에서도 수년 간 재직하신 이영희 사회연대네트워크 공동대표께서 르몽드디플로마띠끄에 발표했던 다음 기고문을 일독해주십시오.

¶˝뭐, 메갈리안이 페미니스트라고?˝
http://m.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6321

그리고 transient는 트랜짓이 아니고 트랜젼트입니다

cyrus 2017-09-11 19:10   좋아요 0 | URL
저는 워마드의 미러링은 반대합니다. 저 위에 박균호님의 댓글에 달린 답글이 있습니다. 워마드에 대한 반대 입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워마드가 여성혐오를 한 남성 동성애자를 미러링한 시도, 페미니즘 논점에 완전히 벗어난 과격 발언 등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메갈리아 지지자들 중에도 워마드를 비판하고, 메갈리아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메갈리아의 반란》을 쓴 유민석 씨가 있고, 저도 유 씨의 노선과 같습니다.

저는 예전에 《페미니즘, 무엇이 문제인가》 리뷰를 작성했습니다. 이 책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를 비판한 책입니다. 사실 저는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에 가깝습니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가 지적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한계를 알고 있습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장단점도 확실히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어딘가에 ‘더 나은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분들이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Nina님이 소개한 글을 꼭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읽을거리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에도, 페미니즘 - 일상을 뒤집어보는 페미니즘의 열두 가지 질문들
김보화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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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오죽했으면 성폭력을 당했겠어.’, ‘옷을 야하게 입고 다니니까 성폭력을 당했지.’ 성폭력은 피해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친구들에게까지 상처를 준다. 가해자 못지않게 피해자에게도 사회적 비난이 쏟아지는 것도 언어적 폭력이다. 이미 상처를 당한 피해자에게 이중 상처를 안겨주고 있다. 피해자의 행동과 태도가 사건을 유발한 것이 아니므로 사건 당시 피해자의 행동을 책망해서는 안 된다. 어떤 때는 피해자에게 성폭력을 방지하지 못한 데 대해 죄의식이 들 수도 있다. 편견이나 잘못된 지식에 근거한 엉뚱한 도움 등은 오히려 피해자에게 악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잘못된 사회적 통념에서 빚어지는 문제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성폭력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에게 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강간은 낯선 사람에 의해 발생한다.’, ‘강간범은 정신 이상자거나 사이코패스다.’, ‘부부간에 강간이란 있을 수 없다.’라고 믿는 남자들이 있다. 우리 사회는 성폭력이 일어나기 쉬운 사회다. 과거의 남성은 힘이 세고 주먹을 휘둘러야 강인한 남자로 인정받았고, 여성을 남성보다 아래인 나약한 인간으로 봤다. 남성에게 성적인 문제가 생기면 쉽게 용서되나 여성에게 성적인 문제가 생기면 이혼을 당한다든지 집에서 쫓겨나는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신이 처한 끔찍한 상황을 주변 관계에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피해자로 인정하는 순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성폭력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전환하려면 일상적이었던 것을 뒤집어 볼 수 있는언어화가 필요하다.[1] 과거 아내 폭력은 칼로 물 베는 부부싸움으로 인식되는 바람에 남편의 아내 구타에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에 대중화되어 확산되고 있는 데이트 폭력은 여성 혐오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언어다. ‘데이트 폭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오랫동안 쌓인 남녀 불평등과 여성 혐오에 무감각한 사회적 분위기에 저항했고, 이를 공론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자신이 처한 개인적 상황(일상 속 성차별, 아는 사람에게 당한 성폭력 등)을 언어화하는 일은 그 상황을 변화시키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다.

     

메갈리아의 미러링(Mirroring)’은 여성 혐오에 저항하는 추세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인터넷은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표현할 기회의 땅이다. 그러나 인터넷 공간에서도 남성 중심의 권위주의가 팽배하고, 여성에게 가해지는 남성의 적대행위가 비일비재하다. 인터넷 공간상에서 여성들에게 폭력적인 언어로 인신공격을 일삼는 일베 회원은 사이버 마초(Cyber Macho)’들이다. 여성의 발언권 기회를 축소하는 남성 중심 인터넷 문화에 대부분 여성은 침묵을 지키거나 그 공간을 떠나버렸다. 성숙한 인터넷 토론문화를 만들기 위해 남성 중심의 인터넷 문화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여성들의 연대 운동도 진행되었다. 하지만 남성 유저들의 묵살이 계속되자 메갈리안(메갈리아 회원)을 중심으로 한 미러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발화를 남성들이 했던 것 똑같이 하는 것이다. 남성은 동성끼리 모인 은밀한 장소에서 여성을 소재로 성적 농담을 주고받는다. 메갈리안은 남성만이 향유할 수 있는 농담을 미러링하여 공개된 농담으로 새롭게 탈바꿈했다. 따라서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남성의 우월적 지위를 전복시킨 급진적인 여성의 유머이다.[2] 미러링은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 미러링이 남성 혐오를 부추기기 때문에반 여성 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권력의 억압과 위선을 깨부수는 웃음, 농담의 효과를 모르거나 의도적으로 은폐한다. 페니스는 남성의 서열이나 권력과 같은 사회적인 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메갈리안은 미러링 스피치(Mirroring Speech)를 통해 상징의 전복을 시도한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런 말을 했다. 권위에 가장 강력한 적은 경멸이며, 권위를 훼손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웃음이라고.

     

그럼에도 페미니즘(은행나무, 2017)은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이유만 설파하는 책이 아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성 평등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놓칠 수 있는 문제점(레즈비언 여성, 트랜스젠더 여성이 차별받는 사회적 구조)도 명확하게 알려준다.[3] 성노동 비범죄화를 바라보는 두 필자의 상반된 글[4]을 배치함으로써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푸는 성노동 비범죄화의 장단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페미니즘집필진에 참여한 김홍미리페미니즘을 남녀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믿는다. 그녀는 여성이 처한 문제를 외면하는 남성 진보 논객뿐만 아니라 남성 모두 페미니즘과 같은 방향을 서보는 연습을 시작할 것을 권한다.[5] 앞으로 남성들은 여성에게 잘 해주겠다, 행동에 반성하겠다는 식으로 공약을 내세우기보다는 여성 혐오, 성 평등 문제 등에 여성과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 공부해야 한다. 말보다 행동이 우선이다.

 

 

 

 

 

[1] 그럼에도 페미니즘3치정과 멜로, 그 경계에서 데이트 폭력을 묻다, 김보화

 

[2] 같은 책, 1메갈리아의 거울이 비추는 몇 가지 질문들, 윤보라

 

[3] 같은 책, 7여성을 사랑하는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 나영

 

[4] 같은 책, 8성노동 비범죄화, 한국에서는 안 될 일인가?, 박이은실 / 9성매매 비범죄화, 안 될 일이다, 박은하

 

[5] 같은 책, 4남성 진보 논객과 담론 헤게모니, 김홍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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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9-05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성의 성폭력은 꼭 젊은 여성만 당하는 게 아니야.
여성 노인이 당하는 성폭력은 제외되어 있지.
그들은 늙고 힘없다는 이유로 더 많이 노출되어 있을 수 있는데
그거 생각하면 아찔하다.

난 어떤 면에서 여성을 혐오하는 게 차라리 낫지 않나 싶기도 해.
겉으로 여성을 옹호하는 척 하면서 결정적일 때 본색 들어내는
남자들 보면 좀 웃긴다 싶어.

cyrus 2017-09-05 18:15   좋아요 1 | URL
황혼 부부의 가정 폭력, 노년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 · 성폭력 문제도 공론화되어야 해요. 노인 인구가 많아지면, 또 다른 사회 문제로 대두될 거예요. 여성 혐오가 팽배한 사회일수록 여성이 피해 받는 문제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9-05 15: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위의 댓글은 역대급이네요.. ㅎㅎ어떻게 저런 사고가 가능하지 ?!

2017-09-05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5 2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렷!”

 

시끌벅적했던 잡담 소리는 반장의 ‘차렷’ 소리 앞에 멈춘다. “선생님께 경례!”라는 반장의 구령에 학생들은 “안녕하세요”라며 입을 모아 외친다. 학창시절 교실을 생각하면 으레 떠오르던 너무나도 익숙한 장면.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였다. 서울시교육청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군대식 문화를 청산하는 취지에서 ‘구호 없는 학교 만들기’ 운동을 시범으로 시행한 적이 있었다.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구령 문화 대신 선생님과 학생 사이의 자연스러운 인사가 오갈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교실에서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군사문화를 완전히 몰아내는 과정에 여러 가지 진통이 일어났다. 교사들은 ‘차렷, 경례’ 구호가 없으니까 학생들을 집중시킬 수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요즘도 학교에서 ‘차렷, 경례’를 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문화가 여전히 남아있다면 일상화되었다고 봐야 한다. 교실 앞 벽에 걸린 액자 속 태극기, 교장 선생님 훈화를 듣는 조회, 두발검사. ‘전통’이라는 이유로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하는 군대식 문화의 잔재들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알고 있어도 싹 갈아엎어 없애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권위주의의 수혜자라 할 수 있는 기득권이 침묵하거나 외면하기 때문이다. 학교는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 의식을 학생들에게 이식하기에 딱 좋은 최적의 공간이다. 우리의 생활이 하루가 다르게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어도 사회 곳곳에는 아직도 구시대적 관습과 봉건적 규범들이 그대로 온존되고 있다.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1》(한겨레출판사 · 2001), 《당신들의 대한민국 2》(한겨레출판사 · 2006), 진중권의 《호모 코레아니쿠스》(한겨레출판사 · 2007)는 우리 주변에 볼 수 있는 전근대적인 의식과 규범이 어떤 게 있는지 적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두 저자의 시선은 여전히 불합리한 측면으로 작용하는 우리 사회의 악의 지점을 포착한다. 이 악의 지점이란 ‘군대식 문화’와 ‘권위적인 폭력의 논리’다. 권위주의의 또 다른 이름은 ‘폭력’과 ‘통제’다. 군대 문화, 위계질서를 이용한 ‘갑질 문화’ 등은 집단의 권위로 개인의 인권을 짓밟는 점에서 한결같이 억압적이다. 사회 각계각층의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을 군대에 적응시키는 과정에서 폭력은 ‘필요악’처럼 생겼다. 박노자는 군대에서 몸에 밴 폭행 습관이 제대 후 가정 폭력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경력’을 의미하는 소위 ‘짬밥(‘잔반’을 변형시킨 군대식 속어) 문화’는 군대처럼 서열이 형성된 기업으로 전이되었다. 오래 일하면 일할수록 높은 급여를 받는 연공서열형 임금 체계(호봉제)는 근무성적 평가에 악영향을 준다. 연공서열은 기본적으로 점진적인 축적을 중시하기 때문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데 한계가 있다.

 

 

 

 

 

 

 

 

 

 

 

 

 

 

 

 

 

 

한국인은 자연의 순리에 맞게 살아가는 농경문화 속에 살았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를 지나 1970년대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갑자기 ‘인간 개조’를 하기 시작한다. 한국인은 집단 훈육 및 통제를 강조하는 학교와 군대에서 뜯어 고쳐지면서 자란다. 사람이 인격체가 아니라 효율적인 생산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국가에 바치던 ‘공적 충성의 의무’는 오늘날에는 회사의 발전을 위해 바치는 ‘사적 충성’으로 변질되었다(《호모 코레아니쿠스》 40쪽). ‘사적 충성’을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공간이 ‘직장 내 단체 카톡방’이다. 단체 카톡방을 통해 업무 지시를 하는 문화가 확산하면서 근로 시간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단체 카톡방은 퇴근 후나 주말에도 족쇄가 된다. 이건 ‘소통’이 아닌 ‘고통’이다. 상사는 단체 카톡을 통해 부하 직원들과의 ‘소통’을 원하겠지만, 실상은 소통을 가장한 ‘통제’에 가깝다.

 

 

 

 

 

‘공관병 갑질’로 물의를 일으킨 박찬주 대장 부부. 군 검찰 조사를 받은 대장 부인은 ‘아들 같은 마음’으로 장병을 대했다고 말했다. 그녀의 궤변을 순간적으로 듣는 순간, ‘국가의 아들’인 장병이 훈련하는 도중 크게 다쳤거나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남의 아들’로 취급했던 국방부와 군대의 쌀쌀맞은 반응이 오버랩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혼을 내면 회초리를 들었지, ‘칼’을 휘두르지 않았다. 대장 부부의 몰상식한 행동은 단순히 개인적인 성격의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폭력과 통제를 앞세운 군대식 문화가 몸에 밴 생활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다.

 

 

 

 

 

 

 

 

 

 

 

 

 

 

 

 

일본의 군사문화는 포로에게 인격적인 모욕을 가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게 했다. 포로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수용소 군속과 일본군들에게 경례를 해야 했다. 심지어 장군에게까지 밥을 나르게 명령하여 모욕을 주었다. 포로들로 하여금 서로 마주보고 뺨을 때리도록 해 수치심과 죄책감을 유발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208~209쪽)

 

 

군대 밖에서 ‘일제 잔재’인 군대 문화는 ‘군대에 다녀온 남자들이 잊지 못하는 추억’으로 미화된다. 억압적인 분위기를 참고 견딘 남자들에게 군대 문화는 꿈속에도 나올까봐 두려운 '끔찍한 추억'이다. 우리가 늘 지적하고, 분노하는 갑질 문화의 뿌리 중 하나가 군대 문화다. 그 뿌리로 ‘권력’이라는 영양분을 먹고 자란 사람들이 너무 많다. 발본색원(拔本塞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잔뿌리들이 무성하게 돋아나서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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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8 1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08 17:24   좋아요 1 | URL
세대에 걸쳐서 문화가 존속되는 과정이 대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합니다. 개인은 문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문화에 적응하면서 사는 것이죠. 어떤 특별한 계기로 문화가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을 알고 있어도 이를 완강히 거부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이렇다 보니 사회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나와같다면 2017-08-08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사히 학교를 졸업해서 다행이지..
지금 다시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면,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문화를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국어. 윤리. 국사. 사회.. 모든 시간에 끊임없이 ‘저는 이 점에는 동의하지 않고 이런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신가요?‘ 묻고 또 물었을거예요

cyrus 2017-08-08 17:29   좋아요 0 | URL
교련 수업이 있었던 시절에 제가 학교를 다녔다면, 엄청 고생했을 겁니다. 몸이 안 따라줘서 훈련받다가 여러 번 얼차려를 받았을 거예요. ^^;;

dys1211 2017-08-08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련하지만 다시 경험하긴 부담스런 추억이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7-08-09 12:30   좋아요 0 | URL
가끔 군대 꿈을 꾸게 됩니다.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 아침에 깨어나면 기분이 이상합니다. 제게 군대 꿈은 불길한 징조를 나타내는 꿈입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