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퍼런 칼끝이 사내의 심장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뚫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사내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땅바닥에 쓰러진 사내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그리고 시커먼 밤하늘 위를 바라보면서 마지막 목소리를 힘겹게 내뱉었다. “죽기 전에 달나라에 가보는 일이 소원이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다니. 좀 아쉽군. 이렇게 된 거 멋지게 떠나야지.”

 

 

 

 

 

 

 

 

우리는 이 사내를 희곡의 주인공으로 알고 있다. 또한, 그의 특이한 신체 부위까지도 기억한다. 이 사내는 사람들 눈에 띌 정도로 커다란 코를 가졌다. 이 사내의 이름은 사비니앵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다. 이름을 줄여서 흔히 ‘시라노’로 부른다. 프랑스의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은 시라노를 모델로 한 희곡을 써서 명성을 얻었다. 작품 속 시라노는 못생긴 큰 코를 가진 수줍음 많은 남자로 나온다. 그러나 실존인물 시라노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큰 코를 제외하면 잘생긴 외모를 유지했으며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을 정도로 사교적인 성격이었다. 부유한 환경 속에 자랐음에도 너무 활발한 성격 탓에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탕진했다. 시라노는 생각이 제대로 박혀 있는 건달이었다. 그는 세속적으로 오염된 종교 권위에 반항하는 글을 여러 편 남겼다. 이렇듯 반항기 넘치는 그의 성격은 주변에 수많은 적을 만들었다. 시라노는 한밤중에 누군가로부터 습격당해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시라노의 이름이 있는 두 편의 소설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 작품들이 바로 <달나라 여행>과 <해나라 여행>이다. 이 두 작품은 시라노의 대표작으로 많이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소설이 나오는 과정이 껄끄러웠다. 소설 출판을 맡은 시라노의 친구가 두 책에 나오는 과격한 표현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친구는 이 책에 있는 시라노의 비판 정신이 또 한 번 트집 잡을까 봐 걱정했다. 친구 입장에서는 죽은 시라노의 명예를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달나라 여행>과 <해나라 여행>은 공상과학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달나라 여행>은 달에 대한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한 소설이다. <달나라 여행>의 주인공은 달이 지구처럼 사람이 사는 세계라고 주장한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하지만, 지구가 둥글다고 확신에 차 있다. 그리고 성서로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에 반대한다. 주인공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지만, 진보적인 생각을 거침없이 발언하는 모습으로 봐서는 시라노와 비슷하다. 달나라로 가기 위한 이동 수단은 과학적으로는 성립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로켓의 원리와 약간 유사한 면이 있다. 수많은 유리병을 몸에 달고, 병에 포도주를 가득 붓는다. 태양의 열기로 인해 병 속에 있는 술이 끊기 시작하면 공중으로 솟는 추진력이 생긴다. 달나라는 지상 낙원으로 묘사되었다. 달나라에 도착한 주인공은 자신이 젊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시라노가 활동했던 시절에 사람들은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지상 낙원을 찾고 싶어 했다. 시라노는 그 당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통된 소망을 달나라 묘사에 반영했다.

 

하지만 시라노가 달나라 세계를 설정한 이유는 따로 있다. 달나라 사람들이 지구 사람들보다 잘사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달나라 사람들도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엄격한 법령 속에서 살아간다. 시라노는 달나라 사람들의 풍습을 황당하게 묘사해서 비판성 있는 풍자를 유도했다. 달나라에서는 시(詩)가 화폐 역할을 한다. 달나라의 젊은이들은 노인들보다 더 똑똑하다. 달나라 사람 남성, 여성 모두 성기와 비슷한 물건을 달고 다닌다. 이들은 성기 모양의 물건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달나라에서는 성기 모양의 물건이 귀족의 상징이다. 시라노는 당시 귀족들의 상징인 칼을 우스꽝스러운 물건으로 바꾸어 권력에 집착하는 귀족들을 풍자했다.

 

<달나라 여행>과 <해나라 여행>은 공상적인 요소보다는 사회 풍자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주인공이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들에 맞서서 열띤 토론을 하는 장면이 많다.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야기가 재미없다. 공상과학소설의 원조 격이라고 해서 읽을 생각은 하지 마시라. 이 두 작품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시라. 로스탕의 희곡 작품이 성공하자 사람들은 시라노를 ‘코가 커서 슬픈 남자’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시라노도 자신의 코가 부담스럽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달나라 여행>을 읽으면서 시라노가 나름 자신의 약점을 장점으로 만들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멋진 남자로 느껴졌다. 소설에 보면 달나라 세계에서는 코가 낮은 채 태어난 아이들은 거세했다. 반면 코가 큰 아이는 재치 있고, 관대하며, 상냥하고, 자유로운 사상을 지닌 사람으로 여겼다. 코가 크면 정력이 세다는 속설이 있다. 이 내용이 진짜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시라노는 대단한 정력가임은 분명하다. 시라노는 남들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콧대를 마음껏 높이면서 살다가 멋지게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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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01-06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라노에 대해선 레나타 살레츨 <불안들>에서도 분석글이 있습니다. 참고삼아 남깁니다^^
<달나라여행> 억압적인 상황이나 화폐구실을 하는 다른 사물 등의 설정은 하인리히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과 비슷한 구석이 있군요.
코와 성기쪽 혈이 같으니 정력 문제는 맞다고 보는데요. 현대의학은 찾아봐야 알겠고^^;

cyrus 2016-01-07 14:51   좋아요 0 | URL
Agalma님이 추천한 책을 찾아봐야겠어요. 좋은 정보를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코와 정력의 상관성이 너무 궁금해서 인터넷에 검색해봤습니다. 상관성을 인정하는 주장, 반대로 관련 없다는 내용의 주장이 혼재되어 있어서 뭐가 맞는지 모르겠어요. ^^;;

서니데이 2016-01-06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가 큰 사람이 한 사람은 아닌데, 어쩐지 코가 큰 사람, 하면 시라노 부터 떠올라요. ^^;
잘 읽었습니다.
cyrus님, 편안한 저녁 되세요.^^

붉은돼지 2016-01-06 18: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라노하면 제라드 빠르디유(맞나?)가 생각나요 ^^

물고기자리 2016-01-06 18:37   좋아요 2 | URL
저도요ㅋ 제라르 드빠르디유(?)^^

서니데이 2016-01-06 18:49   좋아요 0 | URL
아마도 저도요^^;

cyrus 2016-01-07 14:53   좋아요 1 | URL
저는 ‘시라노’하면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이 생각나요. 여기서 세대 차이가 나는군요. ^^;;

서니데이 2016-01-07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많이 춥네요.
따뜻하고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cyrus 2016-01-07 19:25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
 
첫사랑의 이름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38
아모스 오즈 지음, 정회성 옮김 / 비룡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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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umchi (1978)

 

 

 

첫사랑.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세 글자다. 아득한 기억 저편에서 금세 하얀 뭉게구름이 하트 모양을 그리며 뭉실뭉실 피어오를 것만 같다. 첫사랑의 추억은 우리의 마음속에 남는다. 그것을 담아두는 저장고는 머리가 아니라 대개 가슴의 영역이다. 열병 같은 첫사랑의 기억도, 부질없어 보이던 청춘의 방황도 세월이라는 이름 속에 사라지는 것 같지만, 어느새 추억이라는 옷을 갈아입고 우리의 가슴 속에 잔잔하게 스며든다.

 

아모스 오즈의 《첫사랑의 이름》은 우리에게 잊힌 첫사랑의 추억을 다시 환기하는 소설이다. 평범한 소년과 소녀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갑작스러운 이별. 어쩌면 다소 작위적하고 통속적인 설정으로 비칠 수도 있었던 이 잔잔한 성장 소설이 외국 문학상 심사위원의 지지를 이토록 깊은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삶의 진실이 문자로 명료하게 드러날 때, 그것을 읽는 독자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 소설의 서늘한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수줍은 첫사랑을 시작한 소년의 감정 변화를 생생하게 포착해내는 작가의 시선이 인상적이다.

 

책에 주인공 소년의 이름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 대신, 동네 친구들이 그를 놀리기 위해 붙여준 별명이 이름을 대신한다. 소년이 별명을 얻게 된 사연이 독특하다. 지리 수업 시간에 소년은 선생님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한다. 훌라 호수를 ‘숌히(Soumchi) 호수’라고도 부른다고 대답하자 선생님은 당황한다. 선생님은 탈무드에 훌라 호수의 또 다른 지명이 있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교실의 아이들은 소년의 대답이 완전히 틀린 줄 알고, 크게 비웃는다. 이때부터 소년은 ‘숌히’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숌히가 좋아한 소녀 에스티는 전형적인 ‘츤데레’(마음속으로는 좋아하면서도 겉으로는 쌀쌀맞게 대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인터넷 은어) 스타일. 에스티는 숌히를 퉁명스럽게 대하지만, 숌히는 어떻게든 그녀의 관심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숌히는 외삼촌으로부터 자전거를 생일 선물로 받는다. 좀처럼 받기 힘든 특별한 선물을 자랑하고픈 마음에 숌히는 아이들 앞에서 자전거를 탄 채 등장하지만, 아이들은 숌히의 자전거가 여성용이라고 놀린다. 자존심 제대로 상한 숌히는 자신을 동네북으로 여기는 이곳을 벗어나 저 멀리 아프리카의 잠베지 강으로 떠나려고 결심한다. 말 그대로 가출을 꿈꾼다. 하지만 여행의 동반자가 될 자전거를 부잣집 아들인 알도의 장난감 기차 세트와 바꾼다. 이번에 고엘 게르만스키라는 소년이 자신이 키우는 개를 숌히의 장난감 기차 세트와 맞바꾸자고 강압적으로 제안한다. 너무나도 순진한 숌히는 개가 족보가 있는 순종이라는 고엘의 말을 믿고, 장난감 기차 세트를 주는 대신에 개를 얻는다. 숌히는 뒤늦게 자신의 결정에 후회한다. 하루 동안 모든 걸 잃어버린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한다. 그러다가 길에서 우연히 에스티의 아버지를 만난다. 에스티의 아버지는 친절하게 숌히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뜻밖의 행운! 숌히는 에스티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한다. 운 좋게도 에스티의 방을 처음 구경하게 되고. 방에 그녀와 함께 있는 겹경사를 누린다. 이 만남을 계기로 숌히와 에스티는 다정하게 지내게 된다. 여기까지 숌히가 어린 시절에 겪은 첫사랑의 추억이다.

 

숌히는 뜻하지 않은 상황 덕분에 극적으로 에스티와의 만남이 성사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른이 된 독자는 알고 있으리라. 운명이란 자기 뜻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제멋대로 흘러가는 것이라는 점을. 세상은 점점 변하고, 영원할 것 같은 우리 마음도 세월 따라 무심히 변한다. 숌히는 히말라야나 아프리카에 가면 시간이 그대로 멈춘 장소를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세상의 변화를 순순히 인정하지 않는다. 숌히는 너무 이른 나이에 삶의 진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그는 나이를 먹게 된다.

 

이 소설의 에필로그 제목은 ‘끝이 좋으면 다 좋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All's Well That Ends Well) 제목이기도 하다. 재미있게도 희곡의 여주인공 헬레나도 숌히처럼 외로운 존재에다가 짝사랑하는 상대가 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고아가 된 헬레나는 후견인의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된다. 그녀는 후견인의 아들을 좋아하지만, 그는 헬레나에 관심이 없다. 가출한 숌히가 에스티의 집으로 초대받은 과정이 희곡의 줄거리와 비슷하다. 헬레나와 숌히는 사랑을 성취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시작되는 모든 사랑이 셰익스피어 희곡의 결말처럼 행복하게 끝맺지 못한다. 숌히가 에스티와 헤어지게 된 이유가 밝히지 않은 채 소설은 여운을 남기면서 끝난다. 수줍은 마음으로 에스티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숌히에게 삶은 그리 관대하지만은 않다. 에필로그 제목은 달콤하면서 씁쓸한 첫사랑의 추억을 의미하는 슬픈 반어 표현이다.

 

기억 속 앨범 한구석에 있는 첫사랑의 추억을 끄집어내면 멋쩍다. 인생을 살면서 절대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장면들이 희미해지고 그렇게 우리는 남자 또는 여자로 성장해 간다. 진한 사랑 한번으로 평생 함께 살았으면 하는 바람들은 철없는 기대였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변하고 잊었다고 생각한 사람은 다시 기억으로 돌아온다. 녹음기에 담겨 있는 소리가 재생버튼을 누르면 언제라도 다시 들려오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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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
아모스 오즈 지음, 정영문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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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Touch the Water, Touch the Wind (1973)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물과 기름에 비유되는 두 나라 간의 유혈충돌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이들의 다툼은 삶의 터전을 둘러싼 생존의 문제였기에 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15세기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으나 기원전 63년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자 대부분 해외로 이주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살아왔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 건국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유대인들은 고향 땅인 팔레스타인과 미국으로 줄을 이어 이주했고 그들의 강력한 영향력을 이용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유엔은 1947년 마침내 유대인들의 이런 요구를 받아들여 팔레스타인 땅의 52% 지역에 유대 국가를 세우고 나머지 48%에는 아랍 국가를 수립한다는 분리된 국가건설 방안을 제시했다. 유대민족으로서는 2,000년 만에 약속의 땅에 돌아온 것이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교도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셈이 됐다. 그 뒤 이 땅을 두고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4차례 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은 19673차 중동전쟁(6일 전쟁)으로 점령한 요르단 강 서안과 가지 지구 등에 유사시에는 전진기지역할을 할 수 있는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해 왔다. 유대인들은 키부츠(집단농장)로 상징되는 개척자로서의 이스라엘이란 이미지를 버리고 홀로코스트를 강조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은 점령지 전부 반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정착촌을 자신의 관할 하에 두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아모스 오즈의 소설을 읽으려면 이스라엘 건국 역사를 먼저 이해해두는 것이 좋다. 아모스 오즈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삼거나 제4차 중동전쟁 후 이스라엘 사회 모습 등을 고스란히 작품에 반영해왔다. 이스라엘 역사를 파악하지 않고, 오즈(Oz)문학나라로 들어가면 독서의 여정이 순탄치 않게 된다. 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를 펼치는 순간, 독일군을 피해 도망치는 주인공을 만난다. 엘리샤 포메란스는 수학을 가르치는 유대인 교사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소설이 디아스포라(유랑)를 계속하는 유대인의 여정을 그리는 것 같다. 그런데 엘리샤의 아내 스테파도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엘리샤는 생사가 걸린 유랑을 선택한 남편과 반대로 자신의 집에 끝까지 남는다. 그녀의 첫 등장 또한 예사롭지 않다. 집밖에 울려 퍼지는 독일군의 총소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예 전쟁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녀의 이력도 독특하다. 철학자 하이데거와 텔레파시로 의견을 주고받은 적 있으며 괴테 학회 회원이기도 하다. 뒤숭숭한 상황 속에서도 스테파는 집에 있는 모든 창문을 닫은 채 너무나도 평온하게 지낸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교수를 자신의 집에 불러들여 함께 살기도 한다. 그녀는 남편과 다른 행보를 보인다.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고 건너나 비밀 첩보원의 수장이 된다.

 

 

 

 

 

서경식 《시의 힘》 (현암사, 2015)

 

 

 

엘리샤와 스페타는 전쟁에 직면하는 유대인(혹은 유대인 출신 지식인)의 상반된 태도를 상징한다. 이들의 모습을 서경식 선생이 표현한 동심원의 패러독스로 설명할 수 있다. 전쟁의 중심부에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그곳 비극의 진실을 상상할 수도 없고, 공감하지 못한다. 그러면 전쟁의 중심부에 가까이 있을수록 인간은 공포를 느끼는가. 서경식 선생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비극의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보인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런 구조가 장기화하면 비인간적인 문제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인식이 형성된다.

 

엘리샤는 전쟁의 중심부를 벗어나 이스라엘에 정착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수학, 특히 무한을 주제로 하는 연구에 몰두한 끝에 누구도 풀지 못한 수학의 난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또 음악을 멜로디가 있는 수학으로 본다. 그러면서 음악이 난폭함을 없애고, 조화로운 세계를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를 번역한 정영문 작가는 엘리샤가 믿는 음악의 힘이 스테파와의 극적인 재회로 이끌게 하는 화해의 힘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엘리샤가 수학과 음악 연구에 매달리는 태도가 불편하게 느껴지고, 이를 긍정적으로 보는 정영문의 해석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겠다. 피난길 도중에 엘리샤가 자신의 하모니카 연주에 흠뻑 취하는 장면은 생사 벼랑으로 내몰리는 전쟁 피란민의 현실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묘사한 감이 있다.

    

 

독일군의 사냥이 가까이서 이루어질 때면 그는 하루 종일 황량한 마을 외곽에 있는 헛간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해가 지면 은신처를 떠나 어둠 속에서 여윈 몸을 꼿꼿이 세운 채로 서서 완전히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부드럽게 하모니카를 불었다. 폴란드의 공기는 그 즉시 음악에 젖어들었다. 포메란스는 진흙으로 이루어진 땅을 손으로 때리며 힘을 가다듬고 트림을 했다. 그는 땀을 흘리며 팔꿈치를 자신의 주위에 내보낸 음악에 기댔다. (중략) 그는 몸을 일으켜 어두운 하늘 위로 떠올랐다. 애를 쓰다 지쳐 축 늘어진 그의 몸은 숲과 초지 위로, 교회와 오두막과 들판 위로 높게 그리고 조용하게 떠올랐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가는 길에 있는 모든 장애를 뛰어넘었다. (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중에서, 16~17)

    

 

엘리샤는 디아스포라의 비극에 휘말린 피해자이면서도 가혹한 현실을 바라보지 않고, 수학과 음악 세계에 탐닉한다. 디아스포라의 운명이라는 해일에 맞서려는 고민의 자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전쟁으로 인해 비극의 대물림으로 이어지는 디아스포라 문제를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독일군 공습에 도망가지 않고, 자기 집에서 머무르는 스테파의 모습은 위험한 지역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전쟁의 비극을 외면하는 소극적 자세로 볼 수 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도 행복하게 살지 장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들의 이야기가 더 진행된다면 작가는 이들의 모습을 또 어떻게 그릴 것인지 궁금하다. 과연 음악의 힘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적대적 갈등을 잠재우고 평화를 염원하는 하나의 소통 창구가 될 수 있을까. 서로에 대한 분노와 증오만 점점 커지고 있는 중동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 동화 같은 소설이 중동 분쟁의 희생자들에게 거짓 위로를 주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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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0-14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모스 오즈 도 이번에 노벨문학상 수상자 대열에 오르긴 했던 문동카페기준으로인지 몰라도!

cyrus 2015-10-14 20:31   좋아요 1 | URL
노벨 문학상 발표 전에 해외 도박 사이트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 유력 후보 배당률을 공개하는데, 가끔 순위권에 아모스 오즈가 언급됩니다. 이번에 오즈의 소설이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나오기 때문에 출판사 측은 오즈의 수상을 기대해봤을 겁니다. ^^

[그장소] 2015-10-14 21:15   좋아요 0 | URL
그런건..참..소치.(수치?)스러워...요.어쩐지...그래선지 국가가 이번 그녀를 조명하는데 지난 출신지들부터 못박는 느낌. 이름은 명백히 러시아 인데..우리나라에선 러시아에 뭐 좋을리 없으니...

[그장소] 2015-10-14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다른 방식으로 보았는데 앨런 튜링이 2차 세계 대전의 복판에 있으면서 수학에 공식에 빠져있었죠. 에니그마 라고 하는 지금과는 형태와 본질이 좀 다르게 변형이 되었지만 해독의 기술이
단순히 아녔어요.
음파를 가지고 독일 쪽에선 특히나 묘하게 숨기는 암호만들기에 집착을 많이 보인 걸로 알거든요.
음악의 종류이기도 하고요.그게 보이는 눈이 있는 거죠.모두 어떤 기하학이나 숫자.혹은 그림의 형태로..영화에선 제대로 잘 전달이 안되어서 결국 나타낸 모양이 에니악같은 모양새가 되버렸지만
ㅡ그런 기호와 그림에서 읽어낸 같은 흐름의 반복적 규칙을 도식화 했고 기계는 사람이 계산하면 그 인원이 수년을 매달려야 할 일을 줄여 줬어요. 여기까진 영화의 이야기라면 이제 그 유대인의 피와 살..을 이은 그녀가 집착해 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유혈전 으로 옮겨 가 볼 수 있어요. 모든 것이 암호의 세계이고 무궁무진한 신비로 가득하다는 것을 저는 느꼈는데..수학에 아주 정확한 답이 나온다는 것 만큼이나 그 반대로 미지수라는 것 또한 존재한다는 걸..알잖아요.
불협화음이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가..도 알고 말예요. 뭐 단적인 예일 뿐입니다. 폭풍의 핵 .그 안은 오히려 고요 하다죠...그렇다고 사정권 밖이냐 면 그것도 아니면서요.중심에 있으니..쓸데없이 길게 떠들어서 죄송하고요.저는 안타깝긴 하지만
이해불가영역이 ..아니라고..말하고 싶었네요.

cyrus 2015-10-14 20:45   좋아요 1 | URL
미안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좋은 의견입니다. ^^

제가 앨런 튜링의 영화를 보지 못해서 소설 속 주인공과 튜링을 비교할 자신은 없지만, 수학의 반복적 규칙이 음악과 유사하다고 보는 그장소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수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피타고라스가 최초로 수학의 원리를 음악에 적용하여, `피타고라스 음계‘를 만들었어요. 오늘날의 화음과 비교하면 이 음계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수학이 음악의 발전에 중요한 기초를 제공한 공로는 인정합니다.

[그장소] 2015-10-14 21:11   좋아요 0 | URL
그 피타고라스의 음계를 최적으로 사용한 이가 저는 바흐라고 생각해요.
그.평균율을 놓고 고민하면서..ㅎㅎㅎㅎ
음악하는 이들이 천재적이고 다분야에 걸쳐 재능이 있는걸 악기를 만드는 것..공명을 ..조율하는 그 미묘한 차이를 잡아 내는 기술까지..물론 세대간 에 차이는 엄청 큽니다만..뭐 제 생각일 뿐..ㅎㅎㅎ피타고라스정리가 거짓이라는 지식채널을 얼핏보기까지..해서..

cyrus 2015-10-15 21:26   좋아요 1 | URL
피타고라스가 제자의 아이디어를 훔쳐서 자기가 독창적으로 발견한 것으로 꾸몄다는 설이 있어요. 이게 사실이라면 피타고라스의 공은 바흐가 가져가야 합니다. ^^

[그장소] 2015-10-16 04:02   좋아요 0 | URL
아이쿠 ㅡ기원전 과 그 시간차를 놓고 보면 제가 우겨도 많이 우기는 거죠. ^^ 중간에 뭐 저같은 생각을 하는 분은 비슷하게 다른 사례로도 없나..궁금했어요.^^ 하하하..피타고라스의 공은 ..던지면..개가 달려나가는.물어오는 ...역.ㅎㅎ
제자의 몫 ㅡ그럴테죠.맞다면 ? ! 얼렁뚱땅 우기는 얘기 잘 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의 미카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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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Michael (1968)

 

 

그녀에게는 두 개의 이름이 있다. 한나 그린바움 고넨이본 아줄라이. 한나 그린바움이라는 이름이 아이를 키우는 주부로서 평범한 일상에서의 진짜 이름이라면, 이본 아줄라이라는 이름은 그녀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다. 그녀의 일상은 기묘한 이중생활의 연속이다. 내성적이면서 유머 센스가 없는 미카엘 고넨과의 결혼 생활에 지루함을 느낀다. 지루하고 따분한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고 거의 매일 꿈을 꾼다. 한나는 ‘이본 아줄라이’가 되어 자유를 만끽한다. 그녀는 이런 답답한 일상에 견디기에는 완벽하게 모질지도, 그렇다고 아주 순진하지도 못하다. 그 혼란스러움에 그녀의 비극이 있다. 마음의 공허함을 풀기 위해 한나는 낭비벽을 부려보고, 자신이 ‘이본 아줄라이’가 되는 환상을 좇아보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삶은 더욱 사면초가에 빠져든다.

 

아모스 오즈의 소설 《나의 미카엘》은 사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정상적으로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각자 조금씩 참을 수 없는 결핍에 시달린다. 한나는 남들과 다름없이 일상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평범한 가정주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점점 감정의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일탈을 부추길만한 매너리즘을 스스로 감지한다. 한나는 정서불안과 애정결핍에 시달리며 쉴 새 없이 환상의 세계를 드나든다. 현실과 이상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그 균열에서 비롯되는 허전함을 ‘환상’이라는 감정을 통해 메우려고 한다. 미카엘은 아내 한나 고넨이 아니라 이본 아줄라이를 만족하게 하지 못해 전전긍긍한다. 그가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산다는 이유로 한나는 남편의 모습에 낯설어한다. 미카엘은 한나가 원하는 강인한 남성상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최대한 그녀와 가까이 하려고 노력해보지만, 역시나 그녀의 공허감을 채워주는 든든한 존재가 되어주지 못한다. 소설 후반부에 한나는 자신이 직면한 현실적 문제들을 미카엘에게 떠넘김으로써 체념하는 태도를 보인다.

 

작가는 자신의 결혼생활을 회상하는 한나의 목소리를 들려주면서 그저 우리네 살아가는 쓸쓸한 인생 풍경을 사심 없이 보여준다. 시작되는 사랑은 반짝반짝 빛난다. 한나는 ‘발목’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청년 미카엘에 호감을 느끼면서 사랑이 성립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 때문에 사랑은 붕괴한다. 생애 처음으로 타인과의 내밀한 친밀감을 경험한 사람은, 이 행복한 시간이 영원할 거라 믿는다. 하지만 신비로운 마법의 시간은 오랫동안 가지 못한다. 일상 속에서 사랑은 더디게 부식한다. 한나는 미카엘과의 관계의 거리를 조정하지 못하고 이기적으로 투정부린다. 현실에 도피하기 위해서 자신의 임무를 미카엘에 떠넘기는 한나의 무책임한 태도에 몇몇 독자는 짜증이 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실과 이상의 균형을 잡지 못한 채 쓸쓸하게 무너져가는 한나가 측은해보이기도 한다. 한나가 미카엘을 처음 만나 결혼을 결정할 때 당시 그녀는 대학생이었다. 한창 청춘의 자유를 만끽해야 할 나이다. 미카엘의 청혼을 성급하게 받아들이는 바람에 한나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대학생 시절부터 시작했던 히브리 문학 공부를 포기한다. 결국 한나는 자신만의 인생 목표를 정하지 못했고, 젊을 때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못한다. 한나 그린바움이 ‘한나 고넨’이 되는 순간, 청춘의 문은 너무나 허무하게 닫히고 만다. 어쩌면 한나는 청춘에 대한 동경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일찍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마음껏 여행할 수 있었다. 청춘의 거침없는 열정이 불쑥 그녀를 덮쳤다. 열정은 그녀의 머리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을 뿐, 그녀의 삶을 새롭게 전환해주는 원동력이 되지 못한다. 한나는 틀에 박힌 일상을 영영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말해 봐요, 미카엘」 나는 혐오감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물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거죠?」 (《나의 미카엘》 중에서, 265쪽)

 

한나가 독자에게 묻는다. 도대체 이 지긋지긋한 삶에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미카엘은 한나의 질문이 무의미하며 사람을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고 있다고 대답한다. 서글프지만, 미카엘의 대답은 진실이다. 우리는 한번쯤 원대한 꿈 하나를 설정하여 그걸 바라보면서 살기를 원한다. 어떤 가수의 노랫말처럼 젊은이는 타오르는 꿈을 안으면서 꿈을 먹고 살 수 있다. 하지만 ‘내일’을 위해 젊음을 불태울 수 있어도 현실의 장벽을 감당하기에는 현실이 녹록지 않다. 요즘 젊은이들은 꿈을 먹기는커녕 앞으로 밥 한 끼 제대로 먹을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할 판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현실과 이상의 조화를 추구하는 삶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런 ‘진부한’ 교훈에 공감하는 독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아등바등 현재를 살아가기에도 바쁘다. 나는 한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홍영철 시인의 시로 대신하겠다.

 

 

눈을 떠야 한다.
일어나야 한다.
먹어야 한다.
입어야 한다.
닦아야 한다.
나가야 한다.
일해야 한다.
나와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미워해야 한다.
마셔야 한다.
싸야 한다.
잠들어야 한다.
아아, 우리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

 

 

(홍영철 「우리는 무엇인가를」, 《가슴속을 누가 걸어가고 있다》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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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반짝 2015-10-08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처음 아모스 오즈를 알게 해 준 책인데 제목의 달콤함과 달리 갈라져버린 이들에 맘이 툭 떨어져 버렸어요! 읽은지 10년도 넘어서 내용이 남아있지 않네요^^

cyrus 2015-10-12 17:50   좋아요 0 | URL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방식이 워낙 독특해서 며칠 전에 읽어도 기억이 나지 않을 것 같아요. ㅎㅎㅎ

안녕반짝 2015-10-12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내용보단 계속 텔아비브란 도시 이름만 남나 있어요! 어느날 문득 텔아비브가 떠오르기에 찾아보고는 아모스 오즈 때문이었구나 그랬던 일도 있어요^^

cyrus 2015-10-13 15:57   좋아요 0 | URL
며칠 전에 <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를 읽었는데, 기대한 것과 달라서 실망했습니다.

간서치 2015-10-12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을 보니 읽고 싶어지네요.. 저도 왜 사는지 네 아이의 엄마나 아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고 싶다.. 는 생각에 답답하거든요..

cyrus 2015-10-13 15:56   좋아요 0 | URL
처음에 읽기 시작하면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여주인공이 결혼하고 난 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주부로서 공감되는 장면을 나옵니다.

안녕반짝 2015-10-13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책은 팬심으로 읽었어요 개인적으로 <여자를 안다는 것>을 가장 좋아해요.

cyrus 2015-10-13 20:27   좋아요 0 | URL
발표 연도순으로 읽을 예정입니다. <첫사랑의 이름>, <블랙박스>, <여자를 안다는 것> 순으로요. 제목으로만 보면 <여자를 안다는 것>이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안녕반짝 2015-10-13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랙박스>도 특이한 소설이었어요. <여자를 안다는 것>은 내용이 기억이 안나요 근데 좋았어요 밝은 내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도 좋았어요^^

안녕반짝 2015-10-14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모스 오즈 아야기하니 신간이 나왔네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2권짜리네요~ 이렇게 긴 책은 없었는데 기대돼요^^

cyrus 2015-10-14 21:00   좋아요 0 | URL
안녕반짝님의 서평이 기대됩니다. 천천히 읽고 난 뒤에 서평 올려주세요. 오즈의 소설에 관심 있는 사람이 우리 둘밖에 없군요. 아흑...

에이바 2015-10-14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아모스 오즈 소설도 읽어야겠어요. ㅎㅎ

cyrus 2015-10-14 21:01   좋아요 0 | URL
청소년 독자를 위해 쓴 <첫사랑의 이름>부터 읽으셔도 좋고요, 초기작인 <나의 미카엘>부터 읽어도 좋습니다. 에이바님의 취향에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
 
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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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비로소 그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퍼 리《앵무새 죽이기》(줄여서 ‘앵무새’)를 끝까지 안 읽어본 사람도 이 유명한 구절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영화 때문이겠지만 그레고리 펙의 얼굴로 그려지는 애티커스 핀처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정의로움, 지혜, 자상함 등으로 점철되는 그의 아빠로서의 언행은 완벽한 아빠로서의 모범이다.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면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다. 편견으로 비롯된 오독도 마찬가지다. 선입견을 배경으로 어떤 결론을 전제하는 독서는 작품의 진면목을 놓칠 수 있다.

 

금고 속에 잠들어있던 하퍼 리의 원고가 55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다는 소식에 전 세계 독자들은 출간 전부터 큰 기대를 걸었다. 영원히 공개되지 못할 뻔 했던 원고는 《파수꾼》이라는 이름으로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출판사와 언론 들은 《파수꾼》을 ‘《앵무새》의 후속작’으로 소개했으나 예상했던 반응과 다르게 독자의 혹평이 꽤 많다. 인종차별에 반대했던 애티커스의 변절, 여주인공 진 루이즈의 히스테릭한 면에 불만을 쏟아냈다. 전작과는 다른 작품 속 캐릭터와 작품 분위기의 급격한 차이에 독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파수꾼》이 《앵무새》보다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독자의 반응도 많다. 《파수꾼》이 《앵무새》와 비교당해 따분하고 결함이 많은 작품으로 보는 독자평들이 많아서 무척 안타깝다.

 

《앵무새》의 애티커스를 중심으로 본 사람은 애티커스만 보인다. 《앵무새》가 지루한 내용임에도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돌연 절필을 선언한 작가의 유일한 작품이라는 사실이 있지만, 애티커스를 제대로 연기한 펙이 아니었다면 애티커스가 ‘흑인 인권’을 변호하는 미국의 양심으로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파수꾼》을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애티커스만 기억하는 독자라면 당연히 《파수꾼》 속 애티커스의 모습에 실망한다. 하퍼 리의 작품들을 출간한 열린책들 출판사의 마케팅, 그리고 출판사 홍보를 그대로 받아 적은 언론들의 서평 또한 독자의 《파수꾼》 독서를 방해하게 만드는 편견이 된다. 《파수꾼》이 《앵무새》의 후속작으로 알려지면서 《파수꾼》의 줄거리를 파악하지 못한 독자들은 전작인 《앵무새》를 읽게 된다. 출판사는 판매 부수를 올리는 데 성공했지만, 일부 독자들은 《파수꾼》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파수꾼》 읽기 전에 《앵무새 죽이기》를 잊으시오!

 

 

《파수꾼》을 읽으려는 독자들에게 당부한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앵무새》의 줄거리를 모두 잊어버려라. 펙이 분한 애티커스, 《앵무새》의 어린 소녀 스카웃에 대한 기억도 싹 다 잊어버려도 좋다. 《파수꾼》을 독립적인 작품 자체로 읽어 보라. 《파수꾼》의 애티커스에 펙의 명연기를 슬쩍 편입시키는 순간, 독자는 《파수꾼》을 《앵무새》보다 못한 작품으로 본다. 《앵무새》를 감명 깊게 읽은 독자도 이 편견에서 비롯된 오독의 착각에 벗어나지 못한다.

 

진 루이즈는 아버지가 메이콤 주민 협의회 모임에 참석하여 흑인 차별 여론에 동조하는 사실에 큰 실망감을 느낀다. 어린 시절 흑인을 보호해주던 영웅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산산이 부서지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여기서 독자들도 충격을 받는다. 그렇게 양심적인 사람이 어떻게 한순간에 변할 수가 있는지. 그 이후로 진 루이즈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흑인 인권 문제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기 위해 아버지와 삼촌 앞에서 날이 선 태도로 저항한다. 그녀의 저항 의식이 상당히 과격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외국 언론에서는 《파수꾼》의 진 루이즈를 쓸데없이 걱정이 많고, 자기 생각을 뚜렷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미숙한 여주인공으로 본다. 정말 삼촌의 말대로 진 루이즈는 아버지라는 영웅의 결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서적 불구자’일까?

 

진 루이즈는 정말 외로운 여자다. 메이콤 마을에 그녀와 같은 편에 서는 인물이 한 명도 없다. 그녀의 약혼녀 헨리? 그도 역시 메이콤 주민 협의회 소속 회원이다. 알렉산드라 고모는 흑인을 과격하고 버릇없는 인종으로 생각한다. 어린 시절 진 루이즈를 키운 보모 캘퍼니아는 애티커스가 예전처럼 흑인을 위해서 앞장서서 변호해줄 거라고 믿지 않는다.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 헤스터도 흑인 인권 운동이 공산주의자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를 손잡아 이끌어 주는 정의의 파수꾼은 없다. 진 루이즈는 ‘흑인 인권 보호를 주장하는 여성’이다. ‘백인 남성’이 사회를 주도하는 1950년대 미국의 보수적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그녀의 진보적인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가 된다.

 

 

 

 

 

 

《파수꾼》을 《앵무새》와 함께 인종 편견을 고발하는 소설로 본다면, 《앵무새》의 명성으로 드리워진 그늘에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불운의 작품이 된다. 진 루이즈는 백인 남성 중심 사회 한가운데서 고군분투하는 외로운 파수꾼이다. 진 루이즈는 외로운 싸움을 통해서 지켜내야 할 정의란 바로 ‘흑인 인권’과 ‘여성 인권’이다. 그녀의 모습은 1950년대 페미니스트 운동을 이끈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행보와 유사하다. 글로리아는 처음으로 흑인과 여성 문제 사이에 동질감을 발견했다. 애티커스와 헨리가 가입한 메이콤 주민 협의회가 백인 남성들에게 독점되어 온 정치권력을 상징한다면, 진 루이즈는 흑인 차별에 동조하는 정치권력에 도전한다. 애티커스와 삼촌은 그녀의 정치적 의견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서 그녀를 가르치려 든다. 맨스플레인(Mansplain, 남자들이 여자에게 무턱대고 아는 척 설명하려 드는 현상)’ 때문에 진 루이즈는 괴로워한다. 애티커스는 흑인을 열등한 민족으로 보는 편견에 확신하면서 흑인 차별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삼촌 또한 조카를 남북 전쟁의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가르치듯이 장황하게 설명한다. 아버지와 삼촌은 자신의 말에 반박하는 그녀를 신뢰하지 않는다. 헤스터는 맨스플레인에 강요당한 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 빌의 흑인 편견을 그대로 믿으면서 옳은 사실인 것처럼 진 루이즈 앞에서 떠들어댄다. 진 루이즈는 숨 막히는 남성들로 둘러싸인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해 주변을 맴도는 신세가 된다. 백인 중심, 남성 중심의 제도 아래서 힘을 못 쓰지만, 진 루이즈는 사회의 억압을 깨닫기 시작한다.

 

애티커스는 좋은 남자가 아니다. 잘못된 편견에 지나치게 확신하고 흑인, 여성의 존재를 침묵시키려는 나쁜 남자다. 아직도 그가 양심이 있는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는가. 《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가 TV에 나오는 완벽한 남주인공이라면, 《파수꾼》의 애티커스는 ‘백인 남성 신화’에 의존하여 사회를 지배하는 남자다. 이들은 여성은 복종하는 존재, 흑인은 열등한 존재로 여긴다. 진 루이즈를 무시하지 마라. 그녀는 남부의 ‘글로리아 스타이넘’이다. 그녀가 파수꾼이 되어 우리에게 외친다. ‘백인 남성 신화’에서 벗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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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9-20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독서동아리에서도 읽고 있는데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많아요~~ 앵무새때의 애티커스가 넘 멋있었던거죠~ 균형잡힌 시각과 아이를 기르는데 꼭 필요할 수 있는 덕목. 반듯함과 공정정. 폭 넓은 수용력까지~ 아버지로서의 애티커스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했었거든요~
결국엔 그도 백인이고 남자에 사회의 기득권이라는걸 간과하고 있었던거죠~~

cyrus 2015-09-20 21:08   좋아요 0 | URL
제 생각이지만, 평소에 올바른 성격을 유지한 사람들이 의외로 보수적인 입장을 드러낼 때가 있어요. 애티커스가 그런 유형의 사람으로 보여요. 자신의 생각에 조금이라도 벗어난 타인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수용하기 어려워하죠.

보물선 2015-09-20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파수꾼부터 읽고 있어요.
지난번 북콘 가서 들은 이야기들이 도움이 될듯해요^^

cyrus 2015-09-21 17:42   좋아요 1 | URL
방금 보물선님이 예전에 썼던 북콘 후기를 다시 봤어요. 제가 글에 쓴 내용은 이미 북콘에서 언급되었군요. 나름 참신한 내용이라고 열심히 썼는데... ㅎㅎㅎ

인디언밥 2015-09-20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앵무새와 다른, 독립된 작품으로 읽었어요~ 재료는 같지만 다른 맛, 다른 주제의 글처럼 느껴졌어요

cyrus 2015-09-21 17:4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왠지 <파수꾼> 원고가 맨 처음 발표되었다면, 센세이션 일으킨 작품이 되었을 거예요.

만병통치약 2015-09-21 1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은 인물을 가지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그려 본다음 먹힐 만한 책을 출판한게 아닐가요? ^^ / 애티커스는 평범한 우리나라 40대 50대 같군요. 함께 할 수 있었을때는 사회를 위해 싸울 때도 있었지만 어느새 기득권을 지켜야할 나이가 되었으니 생존이라는 본능에 충실하는게 아닐까요? 두 모습 다 애티커사의 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진 루이즈도 나이 먹고 애 낳고 바둥바둥 살다보면......

cyrus 2015-09-21 17:48   좋아요 0 | URL
하퍼 리는 맨 처음에 <파수꾼> 내용으로 썼다가 출판사 편집자가 다시 새로 써보라고 해서 고쳤는데, 그 작품이 바로 <앵무새 죽이기>예요. 그래서 하퍼 리 입장에서는 나름 인물 설절에 고심했을 거예요. 통치약님의 해석에 공감합니다. 애티커스를 기성세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