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초조감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초조감은 불안한 상태를 의미한다. 인류는 시간이 지날수록 훨씬 더 잘 먹고 잘살게 됐지만,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불안의 정도는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부귀, 성취 등을 놓고 한숨은 쌓여간다.

 

 

 

 

 

 

 

 

 

 

 

 

 

 

 

 

 

 

 

 

 

 

 

 

 

 

 

 

 

 

 

 

 

 

 

 

* 프란츠 카프카 변신 : 카프카 전집 1(솔출판사, 2017)

* 프란츠 카프카 변신(열린책들, 2009)

* 프란츠 카프카, 루이스 스카파티 그림 변신(문학동네, 2005)

* 프란츠 카프카 변신. 시골의사(민음사, 1998)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은 늘 일과 시간에 쫓겨야 하는 비정상적인 현대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일상이 버거운 외판원인 그레고리 잠자(Georg Samsa)는 자신이 어느 날 아침 벌레 한 마리로 변해 버린 것을 알아차리고도 우선은 그냥 한숨 늘어지게 자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니까 사람이 멍청해지는군.

사람이란 잘 만큼 자야 해.” [1]

 

 

숙면 시간을 조금 더 원하는 잠자의 생각은 이 시대 모든 직장인의 마음을 대변한다. 잠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소시민이다. 일밖에 모르는 획일화된 삶은 잠자의 몸과 마음을 속박한다. 그는 오년 동안 일하면서 한 번도 아파본 적 없으며 결근을 한 적도 없다. 이때 잠자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일벌레. 따라서 잠자의 변신은 갑작스러운 해프닝(happening)이 아니다. 이미 그의 정신은 변하고 있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일상을 사는 동안 잠자는 점점 벌레로 변하고 있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벌레로 변한 잠자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가족들은 잠자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그를 벌레처럼 대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죽기를 바라고, 어머니는 벌레가 된 아들을 보면 기겁한다. 벌레로 변한 자신을 살갑게 대하던 누이동생마저 등을 돌린다. 잠자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등껍질에 박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숨어있고 불안해할 뿐이다.

 

 

 

 

 

 

 

 

 

 

 

 

 

 

 

 

 

 

* 양정호 하청사회(생각비행, 2017)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는 인간은 회사를 위한 수단적 존재로 전락한다. 프리젠티즘(Presenteeism)이란 용어가 있다. 회사에 출근했지만 누적된 피로와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근로자의 무기력한 상태를 말한다. 이들은 몸이 아파도 무조건 일터로 향한다. 아파서 결근하면 수당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승진에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방 안에서 전전긍긍하는 잠자는 프리젠티즘에 직면한 근로자의 모습이다. 잠자는 한 번의 결근 때문에 자신이 게으른 사람으로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자신 때문에 부모를 욕보일까 봐 결근을 스스로 거부한다. 잠자는 출근하는 데 실패하지만, 어차피 평소대로 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잠자는 가족뿐만 아니라 집에 방문한 직장 상사의 눈치도 살핀다. 이때 가족과 직장 상사는 ()’이고, 잠자는 ()’이다. 갑의 위치에 있는 가족과 직장 상사는 근로자인 잠자에게 심리적 압박을 준다. 결국, 궁지에 몰린 근로자는 주체성을 박탈당한 채 고독한 상태에 빠져 버린다.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한길사, 2017)

* 한병철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

* 박이문 문학 속의 철학(일조각, 2011)

* 박이문 나의 문학, 나의 철학(미다스북스, 2017)

 

 

 

카프카가 이미 우려했던 대로 지금 우리 사회에 자의든 타의든 일만 하는 일벌레가 많아졌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자신의 책 인간의 조건에서 심각하게 일만 하는 사람을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로 비유했다. 그녀는 맹목적인 노동을 경계한다. 그렇다면 잠자는 노동하는 벌레이다. 하지만 한병철은 아렌트의 분석이 근대사회의 인간을 설명하는 것에 적합할 뿐, 자기 착취에 빠져 피로해질 때까지 일하는 후기 근대사회의 인간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자기 착취는 말 그대로 지배자(근로 관리자)가 없는 착취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이 노동을 강요하는 지배자가 되는 동시에 노동에 시달리는 일의 노예가 된다. 혼자서 12, 즉 갑을 역할을 동시에 소화하는 기묘한 상황에 직면한다. ‘나는 (결근하지 않고) 일할 수 있다라는 자기 긍정은 근로자를 지치게 하는 해로운 주문(呪文)이다. 잠자는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어떻게든 침대에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침대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해.”[2] 그는 자기 주문을 중얼거리면서 출근 준비를 서두른다. 그가 일하면서 얻을 수 있는 성과는 없다. 그렇지만 잠자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누이동생이 음악 공부를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것은 잠자가 반드시 이뤄야 할 삶의 성과이다. 그러나 잠자는 자신의 삶의 성과에 커다란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또 잠자의 삶의 성과는 잠자 개인의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벌레로 변하는 바람에 움직임이 둔해진 잠자의 모습은 피로가 좀처럼 풀리지 않고, 누적된 후기 근대의 인간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피로사회속에 사는 현대인은 소진 증후군에 시달린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의 과잉은 스스로 가하는 채찍질이다. 전염병의 공포에 사로잡힌 중세 시대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되도록 자신을 마구 채찍질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려고 했다. 성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스스로 나태한 자라고 꾸짖으며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계속 채찍질한다. 이제 우리는 채찍질을 멈추고 다시금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우리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가?’ [3]

 

 

 

 

 

 

[1] 이주동 역, 변신 : 카프카 전집 1(2개정판, 솔출판사, 2003) 110

[2] 같은 책, 114

[3] 박이문 나의 문학, 나의 철학204쪽에 나오는 (굵게 표시를 한) 문장을 변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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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2 01: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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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2-02 12:03   좋아요 2 | URL
젊은 노동력이 부족하니까 정년퇴임 연령이 와도 일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정말로 재수 없으면 죽을 때까지 일할 수 있어요. 중장년층 노동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데 이들에 대한 처우가 열악해요. 게다가 인공지능의 노동 투입 이야기까지 나오니 일할 의지가 사라질 만도 해요.
 
창백한 언덕 풍경 민음사 모던 클래식 61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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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기쁨보다는 슬픔을, 즐거움보다는 아픔을 기억에서 더 쉽게 떠올린다. 굴곡진 삶의 여정에서 힘들고 아팠던 기억들이 유독 더 선명한 상처로 남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세상은 불완전하고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기에 상처는 모든 인간에게 피할 수 없으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의 데뷔작 창백한 언덕 풍경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창백한 언덕 풍경은 매우 많은 것들이 생략된 소설이다. 독자들은 에츠코가 영국인 남편과 재혼하기 전에 낳은 게이코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리고 게이코가 왜 자살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게이코는 죽은 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거부한다. 그 대신 일본 나가사키에 살았을 때 만났던 사치코와 그녀의 딸 마리코를 기억한다. 작가가 인물 심리의 흐름에 충실하게 서술하는 만큼, 창백한 언덕 풍경에서는 외부와 내면,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모호하다. 작가는 안과 밖의 경계를 넘나들며 에츠코의 기억을 재생시키고, 지우고 싶은 상처에 대면하게 한다.

 

로쟈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서평가 이현우창백한 언덕 풍경전후 소설이면서도 여성 소설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1]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창백한 언덕 풍경은 시종일관 에츠코, 사치코, 마리코, 이 세 여성의 삶을 교묘히 병치시킨다. 따라서 하나의 단선적 사건이 인과관계를 따라 풀려 가는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에게 소설은 다소 지루하며 모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창백한 언덕 풍경여성 소설로 볼 수 있는 이유는, 단지 소재가 여성 문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작가는 전후 세대 여성의 삶과 심리상태를 조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가족 구성원에 대해 신경을 놓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여성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에츠코 : “내 이야기를 하자면, 난 지금 아주 행복해요. 남편의 일도 잘 풀리고 있고, 원할 때 아기를 갖게 되었지요…‥.”

 

사치코 : “저 애는 사업가가 될 수도 있고, 영화배우가 될 수 있어요. 미국은 그런 곳이에요, 에츠코. 많은 일들이 가능해요. 프랭크 말이 나 역시 사업가가 될 수 있대요. 그곳에서는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요.”

 

에츠코 : “그렇겠지요. 다만 난 개인적으로 현재 삶에 무척 만족해요.” [2]

 

 

나가사키에 살았던 시절, 에츠코는 일본인 남편을 만나 결혼해 첫째 딸인 게이코의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에츠코는 가부장 사회에서 착한 여자로 인정받는 순종형 여성상이다. 그녀는 전업주부로서의 삶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에츠코가 어엿한 중산층의 안정된 삶을 영위하며 행복한 여성으로 보이지만, 그녀의 내면에 커다란 상처가 남아 있다. 상처의 원인은 자살한 딸에 대한 기억이다. 에츠코는 죽은 딸의 방에 들어가지 못한다.

사치코는 엄마가 가정을 위해서 해야 할 임무라는 환상에 휩싸여 과도한 몫을 떠안으려고 한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개인 사업과 딸 양육을 병행하는 슈퍼 우먼을 꿈꾼다. 장밋빛 미래가 보장될 거로 믿는 사치코는 직업적 성취와 모성의 의무가 대립하면서 느끼게 될 갈등을 예상하지 못한다. 사치코와 마리코는 엄연히 말하면 난민이다. 난민이란 본래 전쟁이나 재난을 당해 곤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사치코와 마리코 모녀는 복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나가사키에 정착한다. 그러나 나가사키 주민들은 모녀를 외지인으로 인식하여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사회가 불안해지고 규범이 와해하면 가장 힘없는 사람들을 지목해 분노를 키우는 모습이 드러난다. 이는 관계 단절로 이어진다. 모녀는 사회의 중심에서 배제된 약자에 속한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상태이다. 모녀가 사는 허름한 오두막 내부는 외부와 소통이 잘 안 되는 고립되고 자폐적인 사회적 약자의 모습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내 관심은 사치코의 찻주전자에 가 있었다. 연한 빛깔의 도기로,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좋은 물건이었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찻잔 또한 같은 재질의 섬세한 다기였다. 그렇게 사치코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면서 나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오두막, 진흙이 노출된 툇마루 바닥과 다기 세트의 대조적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난 좋은 그릇을 쓰는 데 익숙해요, 에츠코. 알다시피 언제나 이렇게 살았던 건 아니거든요.” [3]

 

 

사치코가 소유한 찻잔 세트는 고립된 삶을 살던 사치코의 억압된 욕망을 자극한다. 빈곤한 삶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원천봉쇄한다. 가난한 사치코가 화려한 다기 세트를 사용하는 모습에서 그녀의 잠재의식을 읽을 수 있다. 잠재의식 속에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싶은 동경이 숨어 있다. 사치코는 영어를 유창하게 쓸 줄 안다. 그러나 그녀의 전남편(사치코가 만나는 미국인 프랭크와 다른 인물이다)은 그녀의 외국어 공부를 허락하지 않는다. 한쪽의 언어(일본어)가 다른 쪽 언어(외국어)의 발화를 제한하는 방식은 여성의 입을 말할 수 없는 입으로 만든다. 미국의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의 말을 빌리자면 남편의 강압에 밀린 사치코가 사용하는 일본어는 압제자의 언어이다. 가부장제 안에서 압제자 역할에 있는 남성은 젠더권력뿐 아니라 언어 권력조차 오랫동안 쥐어 왔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제대로 말할 수 없다. 압제자의 언어는 여성의 욕망을 억압한다.

 

마리코는 세 여성 중 가장 불행한 인물이다. 전쟁의 폭력성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흔적을 남긴 채 또 다른 폭력의 온상이 된다. 마리코는 전쟁 중에 아기를 살해하는 여자를 목격한 이후로 오랜 세월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숨결이 예민한 마리코의 마음에 배어들었다. 미래에 행복이 있다고 믿는 사치코는 과거에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딸의 심리 상태를 예사롭게 본다. 과거를 잊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자(사치코)와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해 미래를 거부하는 자(마리코)에서 생기는 괴리감은 불편함을 낳는다.

 

 

 

 

에츠코가 보는 앞에서 거미를 먹는 시늉을 한 마리코의 돌발행동은 자신의 절망적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사치코의 모성애를 거부하는 저항 행위이다. 거미는 새끼를 보호하고 있는 모성을 상징한다. 설치미술가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는 초대형 거미 형태의 작품에 마망(maman: 엄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부르주아는 알을 품는 거미를 통해 어머니의 모성애를 형상화했다.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 상처받기 쉬운 여성의 내면을 표현했다. 거미를 위협하는 마리코의 돌발행동에서 에츠코가 인지하지 못한 정신적 외상(trauma)’을 포착할 수 있다. 에츠코는 마리코의 행동을 바보 같은 짓으로 생각한다.[4] 그녀의 태도는 우리가 타인의 비정상적 행동에 거부감을 느낄 때와 비슷한 반응이다. 마리코의 돌발행동은 혐오스러운 미친 행동이 아니다. 사치코에 대한 분노감을 표출하는 동시에 자신의 절박한 상황을 누군가에게 호소하고 싶은 구조 요청 신호이다.

 

창백한 언덕 풍경은 독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생략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주제의식을 명확히 보여준다. 작가는 전쟁의 비극성과 더불어 개인의 정신적 외상과 기억을 집요하게 다룸으로써, 아픔과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작가는 에츠코와 사치코가 원했던 가정이 결코 상처받은 여성들의 안식처가 아니라는 사실을 들춰낸다. 다만 창백한 언덕 풍경여성소설이라고 해서 페미니즘 소설로 단정할 수 없다. 영국의 언론인 로잘린드 카워드(Rosalind Coward)[5]는 막연하게 여성 중심의 소설을 페미니즘 소설로 보는 비평 방식을 경계한다.[6] 작가는 저마다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 사연이 있는 여성들을 위한 섣부른 치유책을 내놓지 않는다. 거짓 희망에 매달리지 않고 고통을 직시하는 것은 과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에츠코는 아픔을 느낀다는 것이 살아있음의 강력한 증거라는 숙명을 받아들인다.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볼 때 정치적 관심사를 부각하여 여성들의 연대를 강조하는 페미니즘 소설과 거리가 멀다. 창백한 언덕 풍경이 전달하고자 한 여성의 감정과 정서가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페미니즘 소설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이시구로의 문체와 언어는 규정짓기 어려운 불안과 혼돈의 심리도, 스쳐 지날 법한 찰나의 상황조차도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래서 숨이 막힐 정도로 섬세한 언어로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헤집는 이야기의 전개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도 치유의 방법이다. 외면하고 싶어도 담담하게 대면하는 것. 그것이 이시구로의 첫 소설을 접한 독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1] 출처: [희미한 언덕 풍경](로쟈의 저공비행, http://blog.aladin.co.kr/mramor/9682147)

 

[2] 58~59

 

[3] 25

 

[4] 108쪽

 

[5] 그녀의 이름을 모르더라도 푸드 포르노(Food Porno)’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푸드 포르노1984년 로잘린드 카워드가 자신의 저서 <여성의 욕망>에서 처음 사용한 단어이다.

 

[6] 로잘린드 카워드 여성 소설은 페미니스트 소설인가?, 페미니스트 비평과 여성 문학(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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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1-20 1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서평인가에서 보니 가즈오 이시구로 선생
의 데뷔작을 나비 부인에 비교하는 글도 있더
군요.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 않나 싶더군요.

아무래도 작가의 데뷔작이라 그런지 개연성이나
핍진성에서 상대적으로 대표작에 비해 부족하
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cyrus 2017-11-20 14:24   좋아요 0 | URL
제 나름대로 그럴듯한 해석을 제시했지만, 이 소설을 대단한 작품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어요. 이야기 곳곳에 독특하면서도 모호한 묘사들이 있어서 속독하기 힘든 소설입니다.

2017-11-20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20 19:43   좋아요 1 | URL
네, 정말 그렇습니다. 이시구로가 쓴 작품들의 제목이 독특해서 제목만 보고 줄거리를 추측하는 것이 불가능해요. 소설을 다 읽고난 뒤에 제목의 의미가 뭔지 생각해야 합니다. ^^
 

 

 

어제 퇴근길에 중고 책 전문 서점 ‘글수레’에 들렸다. 그곳에서 희귀한 절판본을 발견했다.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성애소설을 총 세 권으로 번역한 《완역 돈 쥬앙》(보람, 1995)이다. 필자는 이 책의 1권과 2권만 가지고 있다. 그래서 《완역 돈 쥬앙》을 처음 공개했을 때 ‘두 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잘못 소개했다(관련 글: <야설작가 아폴리네르> 2014년 10월 23일 작성). 이 글은 2014년에 작성한 글을 수정하기 위해 썼다.

 

《완역 돈 쥬앙》의 번역 저본은 『Les Onze Mille Verges』(1907), 『Les Exploits d’un jeune Don Juan』(1911)이다. 아폴리네르는 이 두 편의 소설을 익명으로 발표했다. 《완역 돈 쥬앙》 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완역 돈 쥬앙》 1권 목차

제1부 우연한 로맨스

제2부 프랑스에서는 향수를 사지 마라 (내용이 2권으로 이어짐)

 

《완역 돈 쥬앙》 2권 목차

제2부 프랑스에서는 향수를 사지 마라 (완결 편)

제3부 여자의 환상에 마침표를 찍을 때

 

《완역 돈 쥬앙》 3권 목차

제4부 일만 일천 개의 채찍

 

 

 

출판사는 이 책을 ‘장편소설’로 소개했지만, 아폴리네르가 익명으로 발표한 두 편의 소설은 ‘장편’으로 보기 어렵다. 제1부(‘우연한 로맨스’)는 『Les Exploits d’un jeune Don Juan』을 번역한 것이고, 제4부(‘일만 일천 개의 채찍’)는 『Les Onze Mille Verges』를 번역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제2부, 제3부는 무엇일까. 이야기의 흐름과 표현력을 봐서는 확실히 아폴리네르가 쓴 글이 아니다. 출판사가 책의 분량을 장편소설 정도로 늘려서 판매하려고 이름 모를 작가의 성애소설 두 편을 끼워 넣었다. 외국 작가의 저작권을 무시하고 원작을 임의대로 편집하면서까지 책을 펴냈던 90년대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래서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에 관한 정보를 알지 못하는 독자들은 출판사의 거짓 홍보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 아폴리네르, 곽효원 역 《돈 주앙 : 소년 돈 주앙의 회상》 (예문, 2014)

* 아폴리네르, 곽효원 역 《돈 주앙 : 일만 일천 개의 채찍》 (예문, 2014)

 

 

 

글수레 서점에 가보면 전권이 다 갖춰진 《완역 돈 쥬앙》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의 정가는 6,500원이다. 만나기 힘든 희귀 중고책이라서 중고가가 비싸다. 한 권당 15,000원이다. 고백하자면 필자는 《완역 돈 쥬앙》 3권만 사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낱권을 사기 위해 내야 할 15,000원은 ‘매몰 비용’이 될 수 있다. 또 《완역 돈 쥬앙》 3권과 같은 내용인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문학수첩, 1999)을 가지고 있어서 다시 살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눈으로 책의 상태를 확인했으며 구매 결정을 포기했다.

 

혹시 이 글을 보고 《완역 돈 쥬앙》 전 3권을 사고 싶은 분이 있으면 지금 당장 책을 주문하라고 권하고 싶다. 글수레 서점에 전화로 문의해서 주문할 수 있다. 대구에 거주하고 있으면 서점에 직접 방문해서 사면 된다. 《완역 돈 쥬앙》 전 3권의 가격은 총 45,000원이다. 이 책을 사는 것보다 전자책으로 만들어진 번역본을 사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다.

 

 

 

 

 

 

 

 

 

 

 

 

 

 

 

 

 

 

 

 

* 아폴리네르, 용광남 역 《신역 돈 쥬앙》 (픽션뱅크, 1999)

 

 

 

 

1999년에 세 권짜리로 된 《신역 돈 쥬앙》(픽션뱅크)이 출간되었다. 이 책 역시 정가보다 훨씬 비싼 가격이 책정되어 있다. 이 책을 직접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신역 돈 쥬앙》은 1995년에 나온 《완역 돈 쥬앙》과 비슷한 형식의 번역본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도서관 서고 자료실에 《신역 돈 쥬앙》이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을 보려면 서고 자료실 관리를 담당하는 사서에게 대출 요청을 하면 된다.

 

 

 

 

 

 

 

 

 

 

 

 

 

 

 

 

 

 

* 아폴리네르, 성귀수 역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 (문학수첩, 1999)

 

 

 

《신역 돈 쥬앙》이 나오고 두 달 뒤에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이 출간되었다. 알라딘에 등록된 정보에 따르면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의 초판 발행일이 ‘1999년 1월’로 나오는데, 틀린 내용이다. 정확한 초판 발행일은 ‘1999년 9월 4일’이다. 《신역 돈 쥬앙》의 초판 발행일은 1999년 7월이다. 이 책의 번역자는 ‘아르센 뤼팽(Arsène Lupin)’ 시리즈, 가스통 르루(Gaston Leroux)《오페라의 유령》(문학세계사, 2009) 등 불문학 작품들을 번역한 성귀수 시인이다. 《일만 일천 번의 채찍질》에 표제와 같은 제목의 소설과 또 다른 성애소설 『어린 동쥬앙의 무용담』이 수록되어 있다. 『어린 동 쥬앙의 무용담』의 원제는 『Les Exploits d’un jeune Don Juan』이다.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은 철저하게 비밀에 휩싸인 채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렇다 보니 아폴리네르는 소설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었다. 성애소설을 출판하기로 했던 출판업자는 아폴리네르가 제출한 원고에 실망했다. 출판업자는 원고에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길 원했다. 그러나 아폴리네르는 출판업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출판하기로 계약했던 『사랑스러운 검둥이 여자』 집필이 계속 미루어지고 있었다. 출판업자는 기다리다가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다른 작가가 쓴 성애소설인 『하얀 에르민』을 아폴리네르의 소설과 함께 묶어 책을 만들었다. 그래서 아폴리네르 사후에 출판업자가 만든 책이 세상에 공개됐을 때 『하얀 에르민』을 아폴리네르가 쓴 작품으로 잘못 소개되기도 했다.

 

필자는 2014년에 작성한 글을 통해 『하얀 에르민』을 《완역 돈 쥬앙》 2부 이야기와 같은 작품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 추정이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 《완역 돈 쥬앙》의 번역자가 출판 뒷이야기를 알려주지 않는 이상 《완역 돈 쥬앙》 2부와 3부의 원제가 무엇이고 누가 썼는지를 알 수 없다.

 

『일만 일천 개의 채찍질』이 정액과 피가 난무하는 ‘하드코어 포르노’라면 『어린 동 쥬앙의 무용담』은 자극적인 성애 묘사에 충실한 ‘B급 포르노’이다. 『일만 일천 개의 채찍질』에 세세하게 나온 성애 묘사들을 학문적 용어로 분류, 정리하면 이렇다.

 

난교, 사디즘(Sadism), 마조히즘(Masochism), 남색(Sodomy), 스카톨로지(Scatology), 색정광(Satyriasis), 님포마니아(Nymphomania, 여성 색정광), 페도필리아(Pedophilia),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에 등장하는 색정광들은 주저 없이 섹스의 향연에 뛰어든다. 색정광이 타자를 대하는 인식은 무척 단순하다. 타자를 자신의 성족 욕구를 채워주는 장난감으로 대할 뿐이다. 아폴리네르의 색정광은 이성의 판단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섹스에 미쳐버려서 감정뿐만 아니라 행동까지 통제하지 못한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아폴리네르의 색정광은 인륜을 저버린 범죄자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은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에 열광했다. 초현실주의적 선언에 참여한 시인 루이 아라공(Louis Aragon)은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을 ‘포에지(poésie: 시 또는 시적 정취)와 섹스를 결부시킨 작가의 독신자(瀆神子: 신을 모독함)적, 예언자적 의식’이라고 극찬했다.

 

 

 

 

 

 

 

 

 

 

 

 

 

 

 

 

 

 

 

 

 

 

 

 

 

 

 

 

 

 

 

 

 

 

 

 

 

 

 

 

 

 

 

 

 

 

* 호세 피에르, 르네 파스롱 《초현실주의》 (열화당, 1994)

* 매슈 게일 《다다와 초현실주의》 (한길아트, 2001)

* 피오나 브래들리 《초현실주의》 (열화당, 2003)

* 카트린 클링죄어 르루아 《초현실주의》 (마로니에북스, 2008)

* 앙드레 브르통 외 《초현실주의 선언》 (미메시스, 2012)

* 로라 톰슨 《초현실주의》 (시공아트, 2014)

* 알렉산드리앙 《에로틱 문학의 역사》 (한숲출판사, 2005)

 

 

 

초현실주의는 현실 세계로부터 단절을 추구하는 예술사조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것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력보다 사회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상상력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신, 성(性), 이성을 인간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억압으로 규정한다. 그들이 추구하려고 했던 ‘인간 해방’의 실체는 ‘상상력의 해방’이다. 아라공은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에서 상상력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면서 성을 억압하는 사회를 무너뜨리는 초현실주의적 면모를 확인했다.

 

 

 

 

 

 

 

 

 

 

 

 

 

 

 

 

 

 

 

* 프랑수아 라블레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문학과지성사, 2004)

* 프랑수아 라블레 《팡타그뤼엘 제3서》 (문학과지성사, 2006)

* 프랑수아 라블레 《팡타그뤼엘 제4서》 (문학과지성사, 2006)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미셸 데코댕(Michel Decaudin)은 아폴리네르를 ‘라블레(Francois Rabelais)의 소스에 맛 들인 사드(Marquis de Sade)’라고 평가했다.[1] 그의 분석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라블레는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문학과지성사, 2004)을 통해 풍요롭고 자유로운 인간 해방을 제시했다. 소설 속 거인 팡타그뤼엘(Pantagruel)의 이름에서 딴 팡타그뤼엘리슴‘육체적 만족을 통해 삶을 즐기려는 태도’[2]를 의미한다.

 

 

 

 

 

 

 

 

 

 

 

 

 

 

 

 

 

 

 

 

 

 

 

 

 

 

 

 

 

 

 

 

* 사드 《사드의 규방철학》 (도서출판b, 2005)

* 사드 《소돔의 120일》 (동서문화사, 2012)

* 사드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워크룸프레스, 2014)

* 존 필립스 《HOW TO READ 사드》 (웅진지식하우스, 2008)

 

 

 

 

라블레는 ‘웃음’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사회를 비판하고 구시대를 파괴했다면, 사드는 극단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법과 종교를 거부하고 조롱했다. 사드가 선택한 행동은 펜과 종이를 통해 외설과 부도덕, 신성모독의 악취를 뿜어내는 일이었다. 사드는 사회를 위반하는 행동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무신론을 이용한다. 그러므로 신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모든 관습과 규범을 뛰어넘는 위반 행동을 할 수 있으면 여기에 대해 비난을 받지 않게 된다. 또 본능에 충실한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팡타그뤼엘리슴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섹스를 즐기면서 건강한 삶을 지향하는 쾌락주의라면 사드의 리베르탱(libertin)은 팡타그뤼엘리슴을 뛰어넘는 극단적 자유주의다. ‘무신론’을 이용하여 사회적 금기를 거부하는 인간의 일탈을 관용한다. 아폴리네르의 색정광은 ‘맛있는 육체’를 노리고, 마음껏 누린다. 자신들의 행동에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아폴리네르의 색정광은 팡타그뤼엘리슴과 리베르탱 일부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 아폴리네르 《티레시아스의 유방》 (연극과인간, 2004)

 

  

 

그러나 사드와 아폴리네르의 색정광의 차이점이 있다. 사드는 법에 얽매인 결혼 관계와 인간의 종족 번식을 반대했다. 사드는 오로지 자기 삶의 일차적 목표인 쾌락을 추구하는 일에 집중했다. 『어린 동 쥬앙의 무용담』의 주인공은 하렘(harem) 분위기가 있는 성에 거주하면서 성안의 모든 여성을 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방탕한 여성 편력을 조국의 인구를 늘려주는 애국적인 의무라고 말한다. 주인공의 황당한 생각은 아폴리네르의 초현실주의 희곡 《티레시아스의 유방》 (연극과인간, 2004)에도 나온다. 방탕한 성 생활을 출산과 연관 짓는 주인공의 생각은 자손 번식을 거부하는 사드의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는다.  

 

아폴리네르, 라블레 그리고 초현실주의자는 공통으로 ‘인간 해방’을 갈망했으나 자신들이 생각하는 ‘인간’의 범주에 ‘여성’을 배제했다.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부터 시작해서《팡타그뤼엘 제3서》《팡타그뤼엘 제4서》(한길사, 2006)까지 남성 인물들은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아폴리네르의 성애소설에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성적 쾌락을 누리는 여성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여성 인물의 주체적인 정체성을 보여주는 근거로 보기 어렵다. 아폴리네르의 성애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끝내 남성의 쾌락을 위해 희생당하며 쾌락에 미친 남성들의 손에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 『초현실주의 선언문』에 초현실주의를 ‘남성 명사’라고 적은 내용을 볼 수 있다.[3] 식자층 집단을 지배한 남성은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상식, 관습 등을 부정했으면서도 ‘여성은 열등하다’, ‘여성은 남성을 위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식으로 상하로 나뉜 지배 구조를 만들었다. 이 경우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존재는 누굴까?

 

 

 

 

 

[1] 《일만 일천 개의 채찍질》 8쪽

[2]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14쪽

[3] 《초현실주의 선언》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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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2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02 18:53   좋아요 2 | URL
자고 일어나면 나오는 신간도서들이 반갑긴 하지만, 사람들 눈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책이 태반입니다. 북플에 신간도서를 소개하는 분들이 많아요. 재미는 없지만, 저 같은 별난 독서 취향을 가진 놈도 있어야 합니다. ㅎㅎㅎ

sprenown 2017-11-02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리뷰는 읽을때 마다 항상 입이 떡 벌어지네요..도대체 이 해박한 지식과 열정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요?

cyrus 2017-11-02 18:58   좋아요 2 | URL
제 글의 80%는 책에서 나온 것이에요. 제 역할은 책 속의 내용을 추려서 내 입맛에 맞춰서 편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글에 편향과 오류가 있어요. 그것을 확인하고 고치기 위해서 책을 읽어요. ^^

syo 2017-11-02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 올라올 때 보면, 정말 ‘꾼‘인데....^-^b

cyrus 2017-11-02 19:00   좋아요 0 | URL
저는 말 많고, 아는 척하는 지적 허영꾼입니다.. ㅎㅎㅎ

sprenown 2017-11-02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대단해요!

임모르텔 2017-11-02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졸리니 감독의 <살로,소돔의 120일>을 예전에 봤어요. 이 영화를 만든후에 살해당했다고해요.책으로도 읽어보고 싶네요.

cyrus 2017-11-03 20:12   좋아요 0 | URL
악랄하고, 불쾌한 묘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
 
거꾸로 대산세계문학총서 59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지음, 유진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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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트(Cult)는 특정 인물이나 사물에 대한 광적인 호응을 의미하는 단어다. 소수의 팬을 형성하고 있는 독특한 문화를 말할 때 쓰인다. 사실 컬트 문화의 정의는 모호하며 그 범주를 한정 짓기도 어렵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컬트 문화는 ‘세속적인 주류에 향한 반기’를 목표로 정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컬트’가 들어간 작품 대부분은 난해하고, 재미가 없다. (예외로 재미 있어서 대중의 인기를 받는 컬트물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록키 호러 쇼') 컬트 문화는 기존 사회의 관념과 가치를 뒤엎으면서 전통적인 서술 구조를 깨뜨린다. 황당한 상황 전개와 예상할 수 없는 결말이 있는 컬트영화 근저에 반체제, 반권위와 같은 가치 전복의 비수가 감춰져 있다. 소수의 독자가 인정하는 소설은 ‘컬트 소설’로 분류된다.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거꾸로》(문학과지성사, 2007)는 ‘컬트 소설’로 불릴 만하다.

 

데 제쎙트(Des Esseintes)는 세상에 유행하는 문화나 취향에 염증을 느낀 젊은 귀족이다. 그는 솟구치는 욕망 · 열정을 지녔으나 분출구가 막혀버린 소외된 변두리 인생의 ‘난쟁이’다. 변두리 인생이 현실을 탈출하는 방법은 현실과의 정면 대결이 아니라 환상으로의 도피다. 데 제쎙트는 약 1년간 자신이 만든 별장(인공 낙원)에서 생활한다. 《거꾸로》는 ‘낡은 세계’로 상징되는 19세기 말 시대를 더 이상 투쟁으로 개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을 환기한다. “자! 무너져라, 사회여! 제발 죽어라, 낡은 세계여!”라는 데 제쎙트의 절규는 소설의 핵심 메시지다.

 

《거꾸로》 출간 당시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분노했고, 데 제쎙트를 ‘별난 편집증 환자’로 취급했다. 《거꾸로》는 초현실주의적 환상과 독창적인 감각이 넘치는 실험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1884년에 나온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시계 부품으로 조립된 인조 물고기가 헤엄치는 수족관, 알록달록한 보석이 박힌 ‘금박 거북이’, 여러 가지 종류의 술통으로 이루어진 ‘미각 오르간’ 등이 눈에 띈다. 데 제쎙트의 꿈에 등장한 여성들이 예사롭지 않다. 끔찍한 몰골을 한 매독의 여신, 몸에 식물이 자라나는 꽃의 여신에 대한 묘사를 보노라면 작가가 무슨 의도로 이런 가상 인물을 창조했는지 궁금하게 느껴질 정도다. ‘엽기’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에 만들어졌지만, 난해한 광기로 가득한, 조금 엽기적이고 현대적인 소설이다.

 

작가는 데 제쎙트가 겪게 된 일과 그가 느끼는 다양한 생각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현실과 환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기존 소설 서사 구조를 부쉈다. 독자들이 《거꾸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길어진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세기말을 궤도로 삼아 해석 불가능한 몽상의 향연이 펼쳐지지만, 댄디즘(dandyism: 타인에게 정신적 우월감을 표출하는 태도), 보들레르(Baudelaire),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오딜롱 르동(Odilon Redon)상징주의를 표상하는 문학적 요소와 이미지도 풍성하다. 데 제쎙트의 독서 편력과 미적 취향은 기존 사회와 기성세대의 관습 혹은 가치관으로부터 일탈한 하위문화(counter-culture)에 가깝다. 보들레르, 포, 르동 작품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주제는 일상의 규칙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분방함과 이채로운 것을 탐닉하는 것이다.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 살인 · 광기 · 환상 등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소재를 스스럼없이 취한다. 일반 독자들이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가치와는 다른 소재들이다.

 

데 제쎙트가 지향하는 세계는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정체성을 설정 가능한 자유로운 사회이다. 따라서 ‘상식적인’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기에는 무리가 있다. 세상의 논리와 도덕률에 어울리지 않는다. 작가도 데 제쎙트의 한계를 이해하고 있다. 아무리 난쟁이가 대중적인 관심을 받는 유행 문화를 멸시하고, 거금을 들이면서 ‘인공 낙원’을 꾸며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저항은 ‘절망’에 이르는 자해일 뿐이다. 그럴 때 데 제쎙트와 같은 상황에 부닥친 소수의 난쟁이에게 환상을 꿈꿀 권리라도 있어야 한다. 상상력은 치유를 위한 것이다. 상상력은 몸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마약이 아니다. 상상력은 현실에 갇힌 진짜 의식을 깨우는 약이다. 상상력이 현실을 견뎌내는 힘이라고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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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2017-10-24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항은 절망에 이르는 자해일 뿐이다라는 문장과 상상력은 의식을 깨우는 약이다라는 문장을 연결지으니 왠지 암담해지는구요 결국 현실은 견뎌야하는 대상일 뿐이구나 싶으니 암울하네요...

cyrus 2017-10-25 14:33   좋아요 1 | URL
체 게바라의 명언이 있잖습니까.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꿈을 꾸자.” 본인의 의지와 상황이 딱 맞아 떨어지면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거로 믿습니다. ^^

sprenown 2017-10-24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 이 발음도 어려운 작가도 있었나요? 감탄합니다... 이 무식과 무지의 베일은 언제 벗겨질런지..과연 죽기전에 저 책 1001권을 다 읽고 죽을 수는 있을 런지!..끊임없이 상상해야 겠네요.. 이런 암담한 밥벌이의 삶을 살더라도, 죽기전에 1001권을 다 읽고 죽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cyrus 2017-10-25 14:37   좋아요 1 | URL
위스망스가 에밀 졸라와 동시대에 살았던 작가입니다. 졸라와 같은 자연주의 문학을 공유했지만, 나중에 위스망스가 졸라의 자연주의 문학에 싫증을 느끼게 됩니다.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권’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죽기 전에 어떻게 1001권의 책을 다 읽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은 똑같을 수가 없죠. ‘1001권 읽기’는 제 개인적인 작업입니다. 여기에 포함된 책을 반드시 읽으라고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책입니다. ^^;;

임모르텔 2017-10-25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고 싶은 욕구가 생기네요. 상상은 시간과 조건이 맞닿는 시점이오면, 현실로 물현화되죠. 현재 이 지상의 모든 상황과 물건들이 인간들의 생각상상에서 다 출현된 것이니까요~ 이 사회의 극악무도한 범죄들도...수많은 사람들이 행동으로 실행하진 못하지만 강력한 집단의식이 낳은 대리자들이라고.. 사색하곤해요!

cyrus 2017-10-25 14:40   좋아요 0 | URL
변질된 상상력은 ‘망상’입니다. 망상이 현실에 출현하면 극단적인 상황이 일어나요. 이런 최악의 결과가 나올까 봐 두려워하면 상상력의 힘을 과소 평가하게 됩니다.
 

 

 

To Sherlock Holmes she is always the woman.” 코난 도일(Conan Doyle)의 단편소설 보헤미아 스캔들(A Scandal in Bohemia)의 첫 문장이다.

 

 

 

 

 

 

 

 

 

 

 

 

 

 

 

 

     

* 셜록 홈즈 전집 5 : 셜록 홈즈의 모험(황금가지, 2002)

* 셜록 홈즈 전집 4 : 셜록 홈즈의 모험(시간과 공간사, 2002)

* 셜록 홈즈의 모험(동서문화사, 2003)

* 셜록 홈즈의 모험(문예춘추사, 2012)

* 주석 달린 셜록 홈즈 1 : 셜록 홈즈의 모험(현대문학, 2013)

* 셜록 홈즈의 모험(더클래식, 2014)

* 셜록 홈즈의 모험(코너스톤, 2016)

* 셜록 홈스의 모험(엘릭시르, 2016)

    

 

이 작품에서 홈즈는 보헤미아 국왕으로부터 그의 연인이었던 아이린 애들러(Irene Adler)가 가진 문제의 사진(국왕과 애들러가 같이 찍은 것)을 되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홈즈는 애들러가 사진을 어디에 숨겼는지 알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눈치를 챈 애들러는 다른 사진만을 남겨두고 해외로 떠난다. 콧대 높은 남성 우월주의자 홈즈가 유일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여성이 애들러다. 그래서 홈즈는 그녀를 세계에서 유일한 여성(the woman)’이라고 부른다.

 

 

 

 

 

 

 

 

 

 

 

 

 

 

 

 

 

 

* 셜록 홈즈 전집 6 : 셜록 홈즈의 회상(황금가지, 2002)

* 셜록 홈즈 전집 6 : 셜록 홈즈의 회상(시간과 공간사, 2002)

* 셜록 홈즈의 회상록(문예춘추사, 2012)

* 주석 달린 셜록 홈즈 2 : 셜록 홈즈 회고록(현대문학, 2013)

* 셜록 홈즈의 회상(더클래식, 2014)

* 셜록 홈즈의 회고록(코너스톤, 2016)

* 셜록 홈스의 회상록(엘릭시르, 2016)

    

 

 

홈즈가 존경할 정도로 영리하고 대담한 여성이 있는가 하면, 홈즈에게 외면 받은 비운의 여인도 있다. 이 비운의 여인은 머스그레이브 가 의식문(The Musgrave Ritual)에 등장하는 레이첼 하웰즈(Rachel Howells).

 

다음 내용은 작품의 줄거리 및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이첼은 머스그레이브 가문의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이다. 그녀는 저택의 집사 리처드 브런튼(Richard Brunton)과 약혼한다. 그러나 브런튼은 그녀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다른 여자를 만난다. 실연의 아픔을 겪은 레이첼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척추 뇌막염에 걸린다. 브런튼은 저택 주인 레지날드 머스그레이브(Reginald Musgrave)가 잠든 줄 알고, 늦은 밤 주인의 서재에 들어와 가문의 의식문을 훔쳐본다. 그 날 레지날드는 서재에 가게 되고, 집사의 수상한 행동을 목격한다. 화가 난 레지날드는 집사를 해고하지만, 브런튼은 2주일만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한다. 레지날드는 집사의 사정을 들어준다. 집사는 그날 밤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만회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소동이 일어난 지 3일 후에 집사가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린다. 투병 생활로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레이첼은 정신에 이상을 일으키게 되고, 그녀도 사라져버린다. 저택 안의 연못 주변에 레이첼의 발자국을 발견한다. 연못 속을 수색해보지만, 그녀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 대신 형체를 알 수 없는 녹슨 쇠붙이가 든 자루를 발견한다. 레지날드는 대학 동창 홈즈에게 집사와 하녀 실종사건을 의뢰한다. 홈즈는 암호 같은 의식문을 해독하여 특별한 것을 숨겨놓은 장소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 장소는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뜸했던 지하실이었다. 그곳에서 브런튼의 시체를 발견한다. 브런튼은 의식문을 해독하여 지하실에 보관된 찰스 1세의 왕관을 찾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레이첼과 함께 지하실에 내려가지만, 브런튼은 보물이 보관된 좁은 공간에 갇히고 만다. 브런튼은 레이첼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녀는 보물을 들고 지하실 밖으로 나간다. 레이첼은 집사의 죽음을 은폐하기 위해 보물을 연못에 던졌고, 연못 주변에 그녀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것이다.

 

사건은 해결되었으나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가 여러 개 있다. 첫 번째 수수께끼. 브런튼의 죽음은 예기치 못한 돌발 사고인가 아니면 우발적인 사고로 가장한 레이첼의 복수극일까. 홈즈는 후자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지하실에 있었던 일을 추리한다. 그는 레이첼이 흥분하기 쉬운 켈트(Celts, 아일랜드와 웨일스에 거주한 고대 민족) 여자라서 브런튼이 방심한 사이에 복수했을 거로 생각한다. 두 번째 수수께끼. 끝내 알려지지 않은 레이첼의 행방이다. 홈즈는 레이첼이 죄의 기억을 간직하고서 영국을 탈출해 도피했다고 추측한다. 홈즈는 레이첼의 행방에 무관심하다. 그의 여성관을 생각해볼 때 레이첼은 홈즈가 기피하는 부정적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홈즈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를 복수하려고 죄를 지은 히스테릭한 여성으로 인식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히스테리를 감정에 치우친 여성에게 나타나는 정신적 증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히스테리를 여성만 겪는 병으로 이해하는 편견이 남아 있다.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은 이러한 편견을 근거로 정상적이지 않은 여자들은 히스테리 환자 아니면 미친 여자로 규정했다.

 

80년대 아동용 축약본으로 나온 계림문고 셔얼록 호움즈’(80년대에 '셜록 홈즈'를 이렇게 표기했다) 시리즈에서는 원작을 무시한 결말이 나온다. 번역본의 제목은 <저주받은 왕관>. 이 책에서 레이첼은 미쳐버린 상태에서 홀로 돌아다니다가 늪지에 빠져 죽은 것으로 나온다.

 

 

 

 

 

 

<저주받은 왕관>의 번역자는 하웰즈의 모습에서 오필리아(Ophelia)를 연상했던가 보다. 오필리아는 물에 빠져 죽은 미친 여자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수많은 화가들은 오필리아의 죽음을 너무나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 많은 오필리아를 묘사한 그림 중에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가 그린 것이 오필리아의 슬픈 삶을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민음사, 1998)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 1사절파본(동인, 2007)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펭귄클래식코리아, 2014)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문학동네, 2016)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창비, 2016)

* 디트리히 슈바니츠 슈바니츠의 햄릿(들녘, 2008)

    

 

디트리히 슈바니츠(Dietrich schwanitz)는 오필리아를 미치게 만든 원인을 햄릿(Hamlet)과의 관계에서 찾는다. 오필리아는 자신의 사랑을 거부한 햄릿이 아버지 폴로니우스(Polonius)를 죽인 사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녀는 정신이 불안정한 상태 속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햄릿45) 한때 저질 사절판으로 알려져 연구가들이 무시했던 1사절판 햄릿에 미친 오필리아의 모습을 알려주는 무대 지시문 한 줄이 적혀 있다. 번역으로 활용된 판본에는 무대 지시문이 없다.

    

 

오필리아가 류트를 연주하고, 머리는 아래로 풀어헤친 채 노래하며 등장한다.

 

(이현우 역, 동인 햄릿 : 제1사절판142)

    

 

신하는 오필리아가 온통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말을 떠들고 다닌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오필리아가 잃은 것은 아버지만이 아니다. 그녀가 사랑했던 연인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되었다. 오필리아의 친오빠 레어티스(Laertes)는 복수의 칼날을 햄릿의 가슴에 겨눈다. 오빠가 아버지의 원수를 거론했으니 복수의 피바람 예감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그녀는 햄릿 근처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직감했는지 의미심장한 노래를 부른다.

 

 

당신의 참사랑이 남다른 줄

어떻게 아냐구요?

조가비 모자와 지팡이에

가죽신 때문이죠.

 

그분은 가셨어요, 아씨,

돌아가셨다고요.

머리맡엔 새파란 잔디요

발치엔 비석이죠.

 

(최종철 역, 민음사 햄릿151~152) 

 

당신 진실한 사랑 남다른 줄

어찌 알까요?

조가비 모자에 지팡이,

가죽 신발 모양 보고 알지요.

 

그분은 죽었어요, 가셨어요, 아가씨,

그분은 죽었어요, 가셨어요.

머리맡엔 초록 풀잎이 자라고,

발치엔 돌비석 하나.

 

(이현우 역, 동인 햄릿 : 1사절판142)

      

그대 진정한 사랑인 줄

내 어찌 알까요?

조가비 단 모자에 지팡이

샌들 신은 모습일 테죠.

 

그 사람은 죽었다오, 아가씨.

죽어 떠나갔다오.

머리에 푸른 잔디 덮이고

발치에는 비석이 서 있다오.

 

(노승희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년 초판 햄릿239~240,

펭귄북스 오리지널 디자인 특별판 햄릿185)

      

내가 당신의 애인을

다른 이와 어떻게 구별하느냐구요?

그의 새조개모와 죽장

그리고 그의 가죽신을 보고서.

 

그이는 죽어서 사라졌어요. 마님.

그이는 죽어서 사라졌어요.

그의 머리맡에는 잔디 풀 한 개

그의 발치에는 돌멩이 한 개.

 

(이경식 역, 문학동네 햄릿162)

     

그대 임 어찌 아나

누가 내게 물으면

순례자 가리비 모자,

지팡이와 가죽 신.

 

죽고 없어요, 아씨,

죽고 영영 없어요,

머리엔 푸른 뗏장,

발치엔 묘석 하나.

 

(설준규 역, 창비 햄릿146~147)

 

 

조가비 모자를 쓴 순례자는 사랑하는 연인을 상징한다. 오필리아는 미래에 다다르게 될 순례자, 즉 햄릿의 비극을 걱정한다. 셰익스피어 연구가와 독자 들은 햄릿의 광기가 실제인지 아닌지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한다. 45장에 등장한 오필리아가 정말로 미쳤는지 아닌지 분석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슈바니츠는 오필리아의 광기가 진짜라고 주장한다. (슈바니츠의 햄릿144) 나는 그의 의견에 반대한다. 오필리아는 미치지 않았다. 헛소리에 가까운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오필리아의 행동을 광기 어린 발작의 증상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그녀는 미친 것이 아니라 고민했다. 오필리아는 햄릿처럼 존재론적 고민 속에 빠진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감당하기 힘든데, 햄릿마저 포기해야 하는 세상을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이 문제야.’ 그녀는 분명한 결정을 취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부닥쳤다.

 

레이첼 하웰즈와 오필리아. 이 두 사람은 정상안정을 유지하는 사회가 낙인찍은 비정상적 인물이다. 가부장제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심각한 정신장애를 가진 여성은 결혼할 기회가 없다. 가부장제에서 비롯된 편견은 여성의 광기를 비장상적’, ‘합리적 이성이 불가능한 상태로 인식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여성 광기의 원인을 가부장이 될 연인을 잃은 상실감에서 찾는다. 그것을 내면화한 독자는 레이첼과 오필리아의 복잡한 감정 상태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 그냥 그녀들을 미친 여자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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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4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6-24 16:41   좋아요 0 | URL
좀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홈즈 소설에 나오는 여성의 모습이 오필리아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AgalmA 2017-06-26 0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면요. 부모나 연인이 죽어서 혼란한 상태인 인물들이 나왔을 때 여자는 항상 미치고 남자는 미친 척을 하는 거로 설정하죠. 비평가도 작가도 이걸 일반화하고 경향화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잘 짚어 주셨어요.
그에 비하면 도선생은 남녀 구분두지 않고 병적인 개인을 다뤄서 좋아요ㅋ 다들 이 구역에선 내가 더 미쳤어 하는ㅋㅋ;;

cyrus 2017-06-27 08:02   좋아요 1 | URL
도끼 선생, 당신은 대체... ㅎㅎㅎ

여성의 광기는 여성이 남성보다 하등하다는 편견을 강화하기 위한 근거가 되었어요. 남성의 광기를 낭만화하는 경향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