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시즌이기도 하고 연말의 울적함을 좀 덜어보고자 서재를 환하게 핑크빛으로 꾸며 봤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에서 콩브레 생틸레르 성당의 분홍빛 종탑, 미래에 스완 씨 부인이 되는 분홍빛 여인, 르그랑댕 씨가 도취해서 말하는 분홍빛 구름, 분홍빛 미나레트(회교 사원의 첨탑), 분홍색 산사나무 꽃, 분홍색 주근깨투성이 소녀에게 사랑을 느끼는 화자 등등을 발견하며 내 선택이 마침 잘 맞았군~ 혼자 싱글거리기도 했다.
헌데 생각보다 고품질 고사양 핑크빛 책이 많지 않아 서재 진열이ㅡ보라와 살구빛 사이에서 투쟁 중;;ㅡ흡족하지 않았다. 뭐야! 더부살이 주제에 마치 책방 주인처럼 말하고 있어;; 아동서 외엔 핑크색 책이 많지 않은 것은 가벼워 보일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왜 핑크색은 가벼움으로 생각되는가, 크릉)) 아예 빨간색으로 하면 했지 핑크색은 되도록 피한다. 문득 조르주 바타유 <에로티즘>은 얼마나 난감했는지... 빨간색 표지에 페이지는 검정 테두리; 꼭 이랬어야 했나 싶은 모양새로, 힘 엄청 줬지만 읽기엔 영 거북했던 책 중 하나였다. 검정 테두리 때문에 지문이 페이지마다 묻어...((악)) 핑크색 칸트 책은 누구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악취미 수집가가 아니라면; 앤디 워홀의 핑크빛 마오는 미적 쾌감만이 아닌 사유의 비상구를 보여준 셈~

내 이 괴상한 서재꾸미기 취미 생활을 ㅉㅉ하며 펼쳐본 스티븐 켈러트 <잃어버린 본성을 찾아서>에도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우리의 선호도가 어떻게 좋음과 나쁨을 나누고 현실 체계를 만들어가는지에 대해. 그것은 본성과도 관련된 것인데, 나쁜 것만도 아니다. 우리는 밝은 색상이나 맑은 물 같은 자연물에 미적으로 끌리는 반면, 바퀴벌레, 쥐, 어두운 늪지, 깊은 숲엔 거부감을 느낀다. 병문안을 갈 때 왜 꽃을 선물하는지, 강이나 바다를 바라보는 뷰 포인트 방은 왜 비싼지, 경치가 좋은 곳을 왜 좋아하는지...이러한 현상은 진화 과정에서 더 안전하다고 느끼는 자연 요소와의 관계를 반영(p45 참조)한다.

다 읽고 나면 리뷰를 쓰겠지만, 제목 때문에 이 책을 골치 아픈 철학책으로 알고 주저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미리 소개한다. 미적인 것에 대한 칸트 <판단력 비판> 이런 걸 가져오는 게 아니라; 현실 적용에 대한 논의 위주다. 유익한 책인데 영 반응이 없어 내가 알리겠소! 우리 동네 도서관에도 신청~ 당신도 도서관에 신청을ㅎ! 책 구입은 도서관에 양보하세요~ㅎ 녹색 표지처럼 논리도 시원시원하면서 안정감이 있다. 수록 이미지들도 좋고 숲속에서 휴식을 취하며 정보를 얻는 기분이다. 번역도 매끄러운데 번역자가 과학 신문 전문 칼럼니스트라 내용 이해도가 깊어서 주석도 꼼꼼하다.

진화심리학 책을 많이 읽어본 사람에겐 겹치는 내용이 많겠지만, 스티븐 켈러트가 자연과 일상을 연계해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걸 보는 유쾌함이 있다. 공격적이고 현학적인 과학 책에 두려움을 가졌거나, 오, 다윈! 리처드 도킨스!<(ㅜㅁㅜ)>하며 이 분야 진입을 어려워했던 사람들에겐 접근하기 쉬운 책이다.

스티븐 켈러트와 함께 ˝생명 사랑 정신˝을 진화심리학 이론 개념으로 널리 알린 에드워드 윌슨 <인간 본성에 대하여>도 어서 읽어야 되는데...아, 죽기 전에 내 진화는 어떻게 끝날 것인지)) 당장 깊어만 가는 내 서재꾸미기 증상은 어찌 해야 하는 것인지...사기 치고 다니는 것보다야 건전하지만;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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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12-20 06: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책장 서재를 핑크 빛으로 깔맞춤이 신선합니다.^^..

AgalmA 2015-12-20 23:12   좋아요 1 | URL
깔맞춤도 너무 하면 노땅 느낌 난다고 하던데 말입니다.ㅎㅎ;;

지금행복하자 2015-12-20 09: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핑크~ 좋은데요 ㅎㅎ
왠지 핑크를 좋아하면 유아기에서 못 벗어난 느낌이 들어요. 애들도 커가면서 핑크를 좋아하면 유치하다고 놀리고~
연한 핑크색 벽지는 안정감을 준다고 하면 좋다고 하던데 ㅎㅎ 핑크보다는 화이트가 더 ~

AgalmA 2015-12-20 23:53   좋아요 1 | URL
핑크야말로 진짜 세련되게 써야 하는 고급색이죠. 무채색들은 대충 맞춰도 어울리지만 핑크는 신경쓰지 않으면 바로 촌스러움으로 추락^^;

2015-12-20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0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5-12-20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아~~~ 저 깔맞춤 서재는 연두색보다 더 따뜻하고... 진짜 크리스마스 분위기 나네요. 어떻게 꾸미신건지 궁금합니당^^

AgalmA 2015-12-21 02:00   좋아요 1 | URL
따뜻하다니 다행^^...다 해 놓고 보니 뭔가 들쭉날쭉해보여서 ^~^;에잉 했는데...
책 올리는 거야 아실테고, 책 선별에 대한 걸 물으시는 거 겠죠? 일단 제 책장에 원하는 색깔의 책들을 한 번 보고, 보관함 리스트를 주욱 훑어봅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시리즈별 책들에서 색깔을 추립니다. 진열하는 책이 50권 뭐 이렇지 않기 때문에 얼추 권 수가 맞춰지더라는^^

물고기자리 2015-12-20 21: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갈마 님 프로필 사진을 자세히 보니 (제 눈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어두운 계단에 떨어진 작은 빛 한 조각으로 보이네요. 빛이 닿는 자리를 계속 보게 되는 사진이에요. 작지만 확실한 위로나 축복 같은 느낌으로요..ㅎ

오늘 뱅쇼를 끓여서 집 안이 달콤하고 유혹적인 냄새로 가득 찼는데 아갈마 님의 핑크빛 서재에서도 뱅쇼 향기가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AgalmA 2015-12-21 03:02   좋아요 1 | URL
pc에서 보면 큰 이미지가 뜰 텐데요. 그 빛 한 조각 속에 무지개가 확연히 들어가 있답니다^^ 무슨 야곱의 사다리라도 보는 줄 알았어요ㅎ 하필 그날 제 생일이기도 해서 더 특별했던 경험...

가끔 이런저런 수집이 다 뭐 하는 짓인지 크리스티나 페리 로시<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제목이 생각나기도 하는...이 책 혹시 안 보셨으면 보세요. 하루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주인공이 두개골을 들여다보는 기분을 정확히 재현한 책입니다. 품절이라 도서관에서 빌려 보셔야겠네요;

오, 뱅쇼~ 물고기자리님은 멋쟁이b
쨈 만들 때 그 향취와 읽었던 책이 선명히 기억나네요. 감각은 이성보다 더 강력한 것인지도. 프루스트를 읽으며 계속 그 생각을 하게 됩니다...

표맥(漂麥) 2015-12-20 2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번쯤 따라해보고 싶어지는군요...^^

AgalmA 2015-12-21 02:26   좋아요 1 | URL
현실적으로 보면 경기가 나빠 이런 놀이를 하는 거다 지적할 수도 있지만, 저는 생활에서 끌어낼 수 있는 상상의 경험을 남에게 피해를 안 준다면 최대한 해보려는 편입니다^^ 다른 감성의 다른 표현 좋죠. 한 번 해 보세요. 재미납니다. 이런 식으로 잊고 있던 책들을 눈으로 쓰담쓰담 하는 즐거움도 있고요 :)

cyrus 2015-12-21 2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서재 블로그가 싸이월드 홈페이지 같은 시스템이었다면 BGM으로 EXID의 핫 핑크를 깔았을 겁니다. ㅎㅎㅎ

AgalmA 2015-12-22 23:19   좋아요 1 | URL
알라딘을 포털사이트로 만들자/ ㅎㅎ

에이바 2015-12-24 14: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리 다리외세크의 가시내도 핑크색 표지예요. ㅎㅎ 음악의 기쁨 3권도 핫핑크...!

AgalmA 2015-12-24 18:44   좋아요 1 | URL
ㅎㅎ 음악의 기쁨 1권만 갖고 있어서 놓쳤네요. <가시내> 정보도 감사요^^

[그장소] 2015-12-24 2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엄청나군요~^^

AgalmA 2015-12-24 20:15   좋아요 1 | URL
색으로 미소를 보냅니다 :)
방명록은 보셨습니까? 편지 보내고 수취인확인도 해야 하고 웹이 은근히 일이 많아요ㅎㅎ;;

[그장소] 2015-12-24 20:26   좋아요 1 | URL
그러는 당신은 ...방명록 보셨나이까?^^♡
겨울이 춥지 않다면 ㅡ그건 당신 때문인걸로..
붉은 ㅡ그 마음을 가져다 주어서...
부드럽기 그지없어..내 피들도 이내 흐르기로
..그러기로 했다고...그리 전하랍니다.~!^^

AgalmA 2015-12-24 20:38   좋아요 1 | URL
접수 끗~ ㅎㅎ
부드러운 피의 소유자 [그장소]님께 같은 피인 제가 수혈 좀 한 걸로 할께요ㅎ? 이의 없으시죠ㅎㅎ! 있으셔도 상황 끝, 난 몰라)))

[그장소] 2015-12-24 2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땡큐 ㅡ땡큐~!!손 얼어서..타자 치기 힘들었어요.
무조건 고마워요!^^♡
다음에도 뜨끈하게 뎁힌 피로 수혈 부탁....좀...ㅎㅎㅎ

AgalmA 2015-12-24 20:42   좋아요 1 | URL
장르소설 탐독자다운 멘트ㅋㅋ! [그장소]님의 여유는 그 밭에서도 자란 건지도 모르죠 :)

[그장소] 2015-12-24 20:46   좋아요 1 | URL
뭐...팥심어서 팥나겠지...콩 날까 ㅡ
프랑켄 빈ㅡ도 아니고!^^
섞어 휘젖는 걸 좋아는 하지만 어벤져스 스러운
그런건 별로...차라리 히어로즈 ㅡ가 훨 잼 나요!

[그장소] 2015-12-24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림슨 리버 ~스럽잖았우~^^?...그랑제 의....ㅋㅋㅋ
 
단편들 세계사 시인선 81
박정대 지음 / 세계사 / 199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시인도, 나도 지금 이 시를 읽으며 모종의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이 시는 제대로 도착한 것인가. 아무것도 몰랐던 예언자 같이? 모든 사람과 사물이 그토록 변하고 흩어질 동안 너는 그러했으며 그러할 것이라고. 그때도 지금도 우리는 중심을 모른다고, 앞으로도.
100년 뒤에는 이런 고민 안 하겠지. 나에 한해서는.

루시드 폴 - 목포의 눈물(http://youtu.be/khO1519UqLw)을 들으며 또 자야겠다. 내 비난은 거기까지 잘도 따라 오겠지. 걸음걸음 으깨어질 그것.



ㅡAgalma



*
나 자신에 관한 調書

ㅡ박정대




1
일찍이 나는 떠도는 하나의 섬이었다, 눈물의 망망대해에서 보면

2
살아 있다는 느낌ㅡ고요함이 나를 찌른다, 나는 살아 있다

3
죽은 자들의 책 속에는 이상한 향기가 난다

4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ㅡ의 오랜 세월이 작은 혁명을 완성한다

5
나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무력감 속에서 이 글을 쓴다

6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시간의 마차는 사라져간다

7
나는 자살한다, 남들에게 무익하니까, 나 자신에게 위험하니까

8
다시 생각해보아도 정열은 부질없는 것

9
영혼과 육체는 처음부터 일치할 수 없었던 것

10
밤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내 두통의 원인이었다

11
거미들은 새벽에도 왜 외롭다고 소리치지 않는 것일까

12
광기가 나를 완성하지 못한다면 내가 광기를 완성하리라

13
눈에 보이는 것들의 불가사의ㅡ그 속을 꿰뚫어본다

14
불가사의한 것들이 우리를 끌고 간다

15
나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겠다, 움직인다는 것은 외로운 것이다

16
산다는 것은 물론 표현한다는 것과는 어느 정도 반대되는 것이다

17
이 밤에 잠들지 못하고 펜을 움직이는 내 손이 저주스럽다

18
정신이 타락하면 육체는 몰락한다

19
그러나 몰락한 육체 속에서 정신이 꽃피는 경우도 있다

20
위대한 작가는 작품 속에서 스스로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이다

21
겨울은 우리를 따스하게 한다, 그것은 정신의 힘이다

22
패배하지 않는 정신의 힘ㅡ나는 그것을 믿는다

23
의미 있는 침묵이란 정당성을 획득할 때 가능하다

24
나는 지금 치명적으로 젊다

25
행복이란 단순한 육체노동 속에서 온다

26
나는 지금 유배되어 있다, 어디에 유배되어 있는지 모르는 채

27
추억은 우리들의 등뒤에 서 있다, 푸른 비수처럼

28
담배를 피운다, 눈이 쓰리다, 눈물이 반드시 슬픔의 형식은 아니다

29
언어는 육체다

30
시인이란 인생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가를 시인한 사람들이다

31
외로움은 표현으로부터 온다, 욕망이 생으로부터 오듯이

32
階段이라는 말속에는 정말로 몇 개의 계단이 있는 것 같다

33
폭력이란 외로움의 극단적 자기표현이다

34
극심한 혼돈은 질서에의 열망과도 비례하는 것이다

35
산다는 것은 끝없이 굴복한다는 것을 배우는 것은 아니다

36
물방울들은 서로의 몸에 경계선을 두지 않는다

37
강물을 바라본다, 흘러가는 것들이 시간이 깊다

38
그대들 안녕하신가, 멀리 혹은 가까이에 있는 섬들이여

39
산다는 것이 때로는 고립 위로 떠오르다

40
불란서와 러시아에 이 밤의 사랑을

41
나는 벌레들을 함부로 죽였다, 그것이 나의 죄다

42
밤하늘의 별들을 모두 셀 수는 없을 것이다

43
또다시 밤을 꼬박 샜다, 오 미친 짓이다

44
열에 들뜬 몸으로 나는 지금 심연으로 가는 길을 안다

45
절망적인 생각들을 몰아내야 한다, 최후까지

46
나는 헛살았다,라고 중얼거린다, 중얼거리기만 하는 내가 못내 분하고 억울하다

47
왜 이리도 죽음의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가

48
답답하다, 끊임없이 답답하다

49
......

50
한때 내 영혼의 상류에서 육체의 하류까지 범람하던 사랑이여

51
르 끌레지오ㅡ두 개의 계단과 두 개의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고독에 관하여 그는 말했다

52
담배 냄새가 역겹다, 나는 문득 생을 토하고 싶다

53
산다는 것을 포기하고 밤새도록 소설 나부랭이들을 읽다

54
살아 있는 정신은 아름답다

55
거미좌의 별들은 참으로 깨끗하게 빛난다, 사글세의 하늘에서

56
술을 마시지 않고 견딘다는 게 거의 악몽처럼 느껴진다

57
보들레르에게 악수를 청해본다, 그의 퀭한 눈

58
아편복용자처럼 운다, 밤새도록 나의 펜은

59
나는 필사적으로 나의 외로움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본다

60
두통이 나를 물어뜯는다, 새벽부터 나의 고통은 시작된다

61
꿈을 꾸기가 두렵다, 두렵다 세상

62
갈 수 있을 것이다, 두통을 넘어서 어디로든

63
갈 수 없을 것이다, 두통이 너무 심하다

64
나의 고통과는 얼마나 무관하게 이 세계는 흘러가는 것인가

65
에잇, 엿먹어라 세상!

66
너는 날씨 속에 있다, 아주 천박한 날씨 속에

67
작은 새들이 지구를 몰고 또 내 방 창가로 날아온다

68
하늘을 본다, 새떼들이 지금 윤회의 한가운데를 날고 있다

69
나는 언제나 당당하게 행복의 한복판에서 살고 싶었다

70
가을은 10월을 데리고 방랑자처럼 돌아왔다

71
가을은 또 11월을 데리고 부랑자처럼 떠돌 것이다

72
무위여, 파도는 한없이 부서지며 또한 무수한 바다를 이루었던 것을

73
책, 책, 책, 울며 날아가는 눈먼 박쥐들의 시간

74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을 위하여, 나는 감히 글을 쓴다

75
나의 영혼은 지금 시와 소설로 분단되어 있다

76
글 속에 나타나는 위대함이란 절실함 속에서 온다

77
글을 쓸 때 가장 위험한 것은 자기검열에서 비롯된다

78
상상력이란 무용한 것이다, 무용함이 때때로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79
산다는 것은 하나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집요하게 애쓰는 것

80
혹은 하나의 문체를 완성하기 위하여 집요하게 애쓰는 작가들의 삶

81
이 세계는 글로 쓰여진 한 장의 종이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82
모든 것들의 내부는 어둡다

83
동물들 속에서 가장 무서운 사랑을 나는 보았다

84
그저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던 이별-그것은 영원한 것이다

85
나를 이루지 못하고 떠나가는 무수한 외곽의 시간들을 보다

86
자신의 音樂을 발견한 자는 하나의 영원을 획득한 것이다

87
이 세계의 질서는 말에 의해 구축되고 말에 의해 파괴되리라

88
먼저 쓰고 그리고 사고하라

89
생선들의 뼈, 낡은 부두, 시간, 붉게 밑줄 쳐진 희망,
고장난 시대의, 하역장, 가로수들의, 헌책방의, 세월, 부두의, 갓내음의, 부서진, 목포에서, 목포에서, 바닷가에서, 꽃처럼 피어오르는, 고기의, 비늘의, 어둠의, 별빛, 부서지는, 포말의, 비릿한 포말의, 가슴의, 가슴의, 한없이 부서지는 목포에서, 목포에서

90
빌더무우트라는 사나이, 그가 한순간 겪었던 진실에 대하여
그것도 육체의 진실에 대하여 목포는 아직도 말할 수 있다
말이 필요 없었던 반다
그리하여 살고 있었던.
바람과의 일치, 비와의 일치를 말하는 반다의 육체
진실이 육체 속에 일치로 스며 있는 그러한 여인네와
그러한 남자들에 대해 목포는 여전히 말할 수 있다
반다가 살고 있었던 카를로바츠 또는 목포

......

그러한 목포는 지금 무엇으로부터 멀리 있는가

91
나는 때때로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92
그곳으로의 망명, 이라고 나는 써본다 너 나 사랑하니, 라고 나는 써본다 새들은 페루를 지나 목포에 가서 죽다, 라고 나는 써본다 장밋빛 노을이 시들면 어둠은 잉크병을 들고 통째로 마시고 있었지 치사량이야, 라고 나는 써본다 너 나 사랑하니, 라고 나는 써본다 그곳으로의 망명, 이라고 나는 써본다 그곳, 아아 너는 혹시 아니 그곳...... 그곳으로의 亡命

93
담배연기, 푸른, 니코틴의 외투

94
푸른 천막, 담배연기, 푸른, 젖은, 깃발, 펄럭이는 영혼의 의혹

95
집착을 버려라, 지구에서 미끄러 떨어지면 우리는 또다른 아름다운 혹성으로 갈지도 모르니까

96
우리는 블레이크의 시를 완성했다
우리는 이제 차디찬 사람들을 경멸할 수 있다

97
갱지 같은 하늘에는 검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98
나는 나를 부정하는 적의조차 완성하고 싶었다

99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양은 몸서리치며 정오의 꼭대기를 향하여 간다, 떨어진다

100
그대들, 살아 있으라
살아 있으므로 너희는 세계의 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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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컴맹 2015-12-19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원은 거스름돈일까요
98번 적의를 완성하려는 시도처럼 보면 과대포장일까요 ㅋㅋ 링크가 들어가지지 않으니 괜한 핑계를 달고 있군요
때론 책보다 전기를 통해 숙독이 잘되니 이 또한 어떤 중독임엔 틀림없습니다

AgalmA 2015-12-20 07:56   좋아요 1 | URL
그때 책값이 4천원이었는데, 5천원 주고 받은 거스름돈요ㅎ 빳빳한 신권이라 웃으며 넣어뒀죠.
영수증에 찍힌 날짜를 보며, 프루스트가 마들렌을 먹으며 레오니 아주머니 댁을 화악 떠올리듯 그 당시의 일들이 생생히 살아나더군요. 이 시집 빌려 읽었다가 이 날 샀었지 하며 음반을 사서 밤새 들었던 일....등등.

요즘 pc로 글을 작성 못해서 글 편집이 매끄럽지 않아서 저도 불만입니다. 내년까진 안 가야 할텐데;
전기라 하심은 전기집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레이 몽크가 쓴 비트겐슈타인이었어요^^
적의를 반항이나 자유로 읽어도 되지 않을까요 :)
 

어제는 밤늦도록 집안-거의 책-정리를 했고, 몇 권의 책과 이별 예정이거나 이별했고, 서재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놓고 있고 떨어져 있다는 생각에 불편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늘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환해졌다. 거울이, 겨울이 평생 나와 함께 하듯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지.

어떤 일은 완수보다 시작(始作)이 조급함과 불안을 더 달래준다. 책을 읽는 일은 의무감이 아니라 떨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괴로움과 두려움보다 떨림이 더 많은 일, 독서. 나는 많은 책들 속에서 그런 연애의 떨림을 바라는 독서 난봉꾼ㅎ;;

묵은 포장을 풀고 작년에 신던 털신을 꺼내 신으며 발끝으로 전해지는 올겨울 온기를 음미했다. 날카롭고 낯선 새 신이 아니어서 편안함도 같이 전해졌다.
새해란 새 시작의 의미보다 뒤를 돌아보며 한때 혹은 계속 원해 왔던 과거를 다시 불러오려는 제의(祭儀)이자 구호(救護)의 재정립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렸던 시간을 풍요롭고 창조적인 시간으로 바꾸˝(민음사 판, p15)려 한 이 책의 주제처럼 말이다.

민음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을 읽으며, 국일 미디어에서도 눈길이 멈췄던 대목에서 멈췄다. 멈추고 나서 그 사실을 떠올렸다는 게 더 정확하다. 언제나 내 눈이 밑줄이다. 번역이 천차만별이어도 이 문장이 담고 있는 어떤 진실은 원석처럼 거기 있었다. 누군가 알아보고 깎고 다듬기 전까지 원석은 빛나지 않는다. 보석은 지고한 손길에서 탄생하고,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기쁘게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모두가 나눠 가질 수 있는 행복이며, 인간의 발명 중 가장 멋진 일 중 하나다.


*
잠든 사람은 자기 주위에 시간의 실타래를, 세월과 우주의 질서를 둥글게 감고 있다. 잠에서 깨어나면서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생각해 내기 때문에 자신이 현재 위치한 지구의 지점과,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흘러간 시간을 금방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순서는 뒤섞일 수 있으며, 끊어질 수도 있다. (민음사, p19)

**
잠든 인간은 시간의 실을, 세월과 삼라만상의 질서를 자기 몸 둘레에 동그라미처럼 감는다. 깨어나자 본능적으로 그것들을 찾아, 거기서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지점과, 깨어날 때까지 흘러간 때를 삽시간에 읽어 내는데, 종종 그것들의 열(列)은 서로 얽히고 끊어지고 한다. (국일 미디어, p10)



현실적으로든(읽다가 자게 만든다) 소설적으로든(나도 불면! 나도 몽상! 공감하게 만든다) 모든 불면자의 친구, 프루스트. 그가 회고하는 방들, 밤들, 사람들.
잃어버린 창조의 시간을 꿈꾸며 잠 못 드는 이가 마술사가 되는 겨울밤들을 상상해본다.
이 순간 나는 조금 행복하다. 아주 어둡고 추운 밤에도 어떤 꽃은 피어 있다. 내 한밤의 꿈처럼.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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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12-17 2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갈마님 파이팅이요. 저도 스완네 집 쪽으로는 읽었는데 다음 권부턴 책장에 있어요. 교수님이 완역해주시길 바라고 또 바랄 뿐... 이번에 나오는 3부도 일단 사둘거예요. 그래야 4부도 얼른 나올 것 같다는 생각...ㅎㅎ

AgalmA 2015-12-17 21:50   좋아요 1 | URL
최근에 민음사판 5권, 6권 나왔더군요. 우리 박차를 가해야 될 때가 왔어요^^

해피북 2015-12-17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는 `떨림이 중요하다`는 말이 깊이 공감되는 저녁입니다. 늘 읽어야하는데 하는 생각으로 책장에서 방치된지 오래인데 저도 먼지 좀 털어줘야겠어요. 으흐흐^~^

AgalmA 2015-12-17 21:55   좋아요 1 | URL
책 하면 뭐니뭐니 해도 떨림 아닙니까. 만남부터 읽는 내내 읽고 나서도^-^
다들 집에 프루스트 책들 가지고 있잖습니까ㅎㅎ 연말은 늘 프루스트 먼지청소 주간~~
올해 제 독서계획에 프루스트 완독이 2순위였는데 이렇게 흘러가게 할 순 없다! 작정했지요. 새 번역판 1권이라도 봐야지! 하면서^^ 읽다보면 또 2권, 3권 그렇게 이어질테고 :)

2015-12-17 2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7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7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7 21: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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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1: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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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1: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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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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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7 2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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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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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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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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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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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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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2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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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2-18 0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차를 가하려면 일단 말부터 ...있어야..할텐데..그쵸?

AgalmA 2015-12-18 05:45   좋아요 1 | URL
책이 말 아니겠습니까^^ 五車書라는 말도 있으니 통 크게 수레를 가져와야 할까요ㅎ;;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정도면 수레급이긴 하죠ㅎㅎ 프루스트 평전도 샀다가 감당 못하고 보냈지요;;
아, 생각해보니 민음사 번역이 다 안 나온 걸 두고 말이 없다 말씀하신 게지요^^; 그동안 묵혀 둔 국일미디어를 읽으면 되지 싶어서 저는 조급하지 않던 중ㅎ;; 어차피 두 번역을 다 읽어야겠다 했으니까요.
감기는 좀 나으셨는지. 그장소님 약골이신 거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킁킁))

[그장소] 2015-12-18 05:52   좋아요 0 | URL
에구..본전 못찾을 곳에서..ㅎㅎㅎ
한번만 봐 주십쇼~^^;;;
수레고 말이고 놓고 줄행랑 36계 할랍니다..!
저도 잘 익혀먹을까..녹여먹을까...
남는게 시간이라..
바쁜 분들껜 죄짓는 말인데..ㅋㅎ...
감기 약 먹고 칠일 안먹어도 일주일..이런다..
! 농담이고요..약이 영..고때뿐..ㅠㅠ

AgalmA 2015-12-18 06:52   좋아요 1 | URL
취향 차이일 뿐인데, 뭘 그렇게 땀을;;; 장르 소설 열혈 탐독에는 제가 땀을 좀;;;;
정말 그렇죠. 약은 먹으나 안 먹으나 비슷하고 주사가 좀 빠른 듯도 하고...앓고 난 뒤의 개운함을 어서 맞으시길 빌 뿐입니다/
귤과 따뜻한 차가 제겐 감기 마들렌^^

[그장소] 2015-12-18 06:33   좋아요 1 | URL
주사 이번엔 다들 주사를 권하는데 몸이 붓고있을땐 주사도 함부로 못맞아서..상처가나면
안된다고..침도 뭐도..암튼 그렇다네요..면역이 약해서..ㅇㄹㅈ
차는 종일..마시고..카페인 금지..중..ㅎㅎ;
저야 취향존중!^^
얼른 깨운해지고 시포요~
축농증인분들 어찌 사는지..참..ㅠㅠ;
감기 조심하세요 ^^♡

AgalmA 2015-12-18 06:51   좋아요 1 | URL
면역력 강화 음식을 찾아봐야 하는 우리ㅜㅜ...운동은 또 얼마나 안 하는지(저만은 아니죠ㅎ;;;? 이봐, 어디서 도매질이야! 하셔도 됩니다;;;)
카페인은 탈수 증상을 만드니 감기엔 정말 안 좋죠. 몸을 건조하게 만든니까...
크리스마스 케익을 아무 맛도 못 느끼고 드시면 안될 텐데 어쩌나요;;; 어서 쾌차~ 으쌰으쌰~~🍰

[그장소] 2015-12-18 06:56   좋아요 1 | URL
크리스네랑 마스네 생일은 같이 축하 안할려구요.
관례처럼 다들하니 인사는 하지만. .저한텐 별 의미없어요.. (카톨릭은 ..이제 그만 ㅋㅎ)
걍 빨간날...
집에서라도 좀 움직움직거렸던 때가 있었는데..
멸치근육이라도 좀 만들어보려구...걍 살기로했어요.
여기서 면역강화를 핑계로 먹기를 더 잘함..생계에 빨간불들어올 지도 모름..엥겔지수 높다고..ㅎㅎㅎ

AgalmA 2015-12-18 06:58   좋아요 1 | URL
언제나 생일축하는 핑계고 맛난 거 먹는 건수 올리는 거 아니던가요. 어떻게든 엥겔지수는 강력ㅎㅎ

AgalmA 2015-12-18 06:59   좋아요 1 | URL
근육 그장소님 상상이 안돼😅 하지만 건강한 미소는 상상됨. 어서 쾌차하세요 :)

[그장소] 2015-12-18 07:03   좋아요 1 | URL
계란한판 채우고 생일 안챙기고 있어서..
우핫~아무날도 아닌 날로 조용히지나가 주는게
선물인데...^^
Agalma 님! 고요를 침묵을 2종셋트 선물로 받아요..그날은..ㅎㅎㅎ

AgalmA 2015-12-18 07:08   좋아요 1 | URL
이장욱 시집<생년월일>이 문득 읽고 싶어지네요ㅎ

[그장소] 2015-12-18 0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이~곧 접수토록하겠나이다~^^
이까짓 감기 ..ㅎ,,ㅎ ! ㅋㅋㅋ
고마워요 ~^^Agalma 님!!♡

[그장소] 2015-12-18 07: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생년월일

 

                          이장욱

 



  이전과 이후가 달랐다. 내가 태어난 건 자동차가 발명되기 이전이었는데,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쾅!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뒤에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더군.

 

  수평선은 생후 12년 뒤 내 눈앞에 나타났다. 태어난 지 만 하루였다가, 36년 전의 그날이 12년 전의 그날이다가,

 

  수평선이다가,

 

  저 바다 너머에서 해일이 마을을 덮쳤다. 바로 그 순간 생일이 찾아오고, 연인들은 슬픔에 빠지고, 죽어가는 노인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케이크를 자르듯이 수평선을 잘랐다. 자동차의 절반이 절벽 밖으로 빠져나온 채 바퀴가 헛돌았다.




- 시집, 생년월일 중 수록


AgalmA 2015-12-18 07:51   좋아요 2 | URL
전 역시 이장욱 소설가보다 시인이 더 좋더라는 :)


[답시]

자동차 안에서*
ㅡ불한당들의 세계사 5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낡은 자동차 안에 쪼그리고 앉아
라디오 채널을 돌리며
남쪽으로 가는
도로를 찾아보았네.

몇몇은 고독을 이기지 못해 엽서를 써서
우리에게 최종 결정을 내리라고 요구했지.

몇몇은 산꼭대기에 앉아 있었어.
밤에도 태양을 보기 위해서였지.

하나의 인생이 결코
사적이 아님이 확실한 곳에서도
몇몇은 사랑에 빠졌지.

몇몇은 어떤 혁명보다도
더 극단적인 각성을 꿈꾸었지.

몇몇은 세상을 뜬 영화배우들처럼 앉아서
이 세상에 살아남을
올바른 순간을 기다렸어.

몇몇은 자신들의 일을 위해서 죽지 못한 채
그냥 죽어갔어.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낡은 자동차 안에 쪼그리고 앉아
라디오 채널을 돌리며
남쪽으로 가는
도로를 찾아보았네.


(자동차 안에서* :볼프 본드라체크의 시. 이 시를 읽고 읽노라면 나는 마음이 편해진다. 아름다운 노래를 듣듯이, 나는 자주 이 시를 내 두 눈으로 쓴다. 내 몸이 갈 수 없는 곳에도, 아름다운 노래는 여전히 간다. 가서는 또 다른 노래가 되고, 노래가 되지 못한 것들은 별이 되거나 나뭇잎이 되어, 여전히 이 세상의 풍경이 일부가 되어, 나를 흔들고 내 속의 또 다른 노래를 흔든다.

박정대 <단편들> (세계사, 1997) 중


두 시인 사이는 별로 안 좋은데 우리끼리 이러고 있는 건 아니겠지ㅎㅎ;;;

[그장소] 2015-12-18 0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작가 시를 읽은지 얼마 안되서..소설을 먼저 알았거든요.
시를 더 잘 써요..확실히..^^
느낌도 좋고..

[그장소] 2015-12-18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안좋은데요?난 그런건 몰라서..둘이 싸울일이..있었나요?
그러든지 말든지..시로는 뭐 화해시키죠..화합의 장 이랄지..
우리끼리 파티랄지..^^

AgalmA 2015-12-18 07:59   좋아요 1 | URL
제 농담이었어요ㅋ;;

[그장소] 2015-12-18 08:00   좋아요 0 | URL
아...저 혼자 밥상차려 먹은거군요..그러니까..
아침 일찍 부지런 떨어서 ㅋㅋㅋ
덕분에 배 두둘기며 띵가띵가..놀아야겠어요~^^

AgalmA 2015-12-18 08:06   좋아요 1 | URL
그러나 저는 문득 치명상을...입고 이젠 자야겠어요.
좋은 하루 되시길. 그장소님. 뮤즈 같은 친구님 :)

[그장소] 2015-12-18 08:10   좋아요 1 | URL
해뜨니 환함을 덮고 주무시구려~
치명상은 눈감았다 뜨면 사라지고 말터~^^
잘 자요~(성시갱)
잠옷을 입자 ㅡ (이 제목이 맞던가?)ㅎㅎ
또 봐요!♡

물고기자리 2015-12-18 15: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근 읽은 책에도, 스쳐 지나가며 잠깐 본 어느 영화의 한 장면에서도 이 책 이야길 하더라고요. 1Q84에선 아오마메가 모처에서 은신해야 했을 때, 이 책을 완독할 기회일지도 모른다며 읽기 시작하는데 하루키가 말하는 이 책의 감상은 제가 카프카를 읽을 때의 느낌과 거의 흡사해서 깜짝 놀랐어요^^

자꾸 눈에 들어오는 건 읽을 시기가 가까워졌다는 뜻인 것도 같은데,, 조만간 제게도 기회가 오긴 오겠죠..ㅎ

AgalmA 2015-12-18 20:06   좋아요 1 | URL
자꾸 내 눈에 띈다는 것은 내 관심이 행동으로 진입하려는 조짐 아닐까요. 관심 없음 소 귀에 경읽기ㅎ;; 하지만 관심은 점점 쌓여서 결국 펼치게 만들고... 우리가 우연을 필연으로 느낀다? 만든다? 그렇게 되듯 말예요.
1Q84 1,2권만 읽고 기억에서 희미해져 버렸는데 그런 내용이 있었군요. 읽었던 책 얘기는 한때 사귀고 헤어진 연인의 몰랐던 혹은 공감하는 얘길 듣는 거 같아 기분이 이상해요...싱긋
 
소리 없는 빛의 노래
유병찬 지음 / 만인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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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
산에서 만난 점 하나 받잡고 사람이 점이 되니 비로소 산에는 사람도 하나의 점이라면 족한 줄 알겠더라.
(중략)
누군가 ˝사진은 찍는 것인가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감히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습니다.
대신, 가슴에 점 하나 찍기입니다.
점 점 점!
사진이 내 삶의 점 찍기 하나라면, 그리고 만족이라면 행복입니다.

ㅡ유병찬 <점 찍기>

현대미술에서 ˝하이퍼 리얼리즘(극사실주의)˝이 있지요.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극도로 사실에 가깝게 묘사하는 기법. 회화 경우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수많은 점들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어떤 폭발 현장에 와 있거나 까마득한 우주에 떨어진 듯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게 됩니다.

이건 또 어떨까요. 정보의 바다라 불리는 컴퓨터는 1과 0이라는 이진수의 세계입니다. 흐르고(1) 흐르지 않는(0) 전기적 연결들. 지금 우리의 대화도 그 속에 오가고 있습니다.

이 세계가 그런 점들이 모여 운행된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아득해지며 겸허해집니다.

제가 <실크로드>란 다큐멘터리에서 첫번째로 떠올리는 건 보이지 않는 점, 音입니다. Kitaro의 구슬픈 테마곡(http://youtu.be/on4OQCTO-n8)이요. 두번째로 강렬히 남아 있는 건 깊고 광활한 사막 속에 점.점.이.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왜 그토록 고된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하며 속절없이 그들을 바라 보았지요. 긴 시간 뒤 사람은 사람에게 갔고, 흙먼지와 주름 가득한 얼굴로 그들은 웃었습니다.

바둑은 또 어떤가요. 흰 돌, 검은 돌로 쌓고 무너지는 세계. 그것은 <미생>이란 작품의 훌륭한 토대였습니다.

마릴린 먼로의 애교점 생각도 해봅니다. 진짜다 가짜다 우스개소리도 하지만, 그 점은 그녀의 아름다운 상징이 되었죠. 금발 머리에 그 점만 찍으면 누구나 마릴린 먼로를 연상하게 됩니다.

˝점˝이란 화두에 세상의 많은 점들을 생각해봤고, 유병찬 작가의 ˝점˝은 `사진`이란 걸 공감했습니다. 허구의 점들로 더 강렬한 사실을 보여주는 하이퍼 리얼리즘 작품들처럼 유병찬 작가가 점 찍어 왔고 앞으로 찍어 갈 세계도 찬사와 지지가 계속 함께 하리라 생각합니다.

˝점 찍기˝ 외에도 ˝나무가 지닌 빛의 심장˝(p70~71), ˝소리 없는 빛의 노래˝(p90~91), ˝내가 부르는 사진의 노래˝(p98), ˝비가 내려 빗물이고, 눈이 녹아 눈물이라˝(p102~103) 등등 긴 노력과 눈물 속에 얻었을 이미지와 언어 해학에 많이 공감 했습니다. 어렵게 다가오는 제목은 이미지와 글을 보면 단번에 이해됩니다. 직접 보셔야 실감하실 겁니다^^
카메라를 현(絃) 삼아 울림을 전달하는 점 찍기의 달인! 유병찬 작가의 다음 책도 기대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독자의 글들이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합니다.


ㅡAgalma

* 감사
감사하게도 보내주신 책으로 이 리뷰를 썼습니다만, 전 아부는 장난할 때만 씁니다. 정색-_-)!

** 아쉬움
사진 이미지가 다음 책에선 좀 더 크면 좋겠습니다. 좋은 사진인데 편집에서 참 아쉬웠습니다. 단가 생각하면 흠...이해해야 할 부분.
제가 맞춤법 논할 주제가 안되는 걸 매우! 잘! 압니다만;;;; 짧은 글이라 비문이 좀 튀어 보입니다. 다음 책에선 더 신경 쓰실 거라 생각합니다/

*** ˝새˝ 기대
표지에서 알 수 있듯 ˝점(이면서 빛)˝ 못지 않게 ˝새˝도 유병찬 작가 세계의 주요 모티프더군요. 점처럼 홀로 있으나 비상을 품고 있는 존재. 그 주제도 계속 이어서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 궁금
이 책의 내용의 전부나 일부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나 만인사 양측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책에 써 있길래 겁먹고ㅎ;; 이미지는 생략했습니다. 궁금하면 보시오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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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7 0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7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7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18 0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yureka01 2015-12-18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럼요.아주 아주 감사합니다.흐

2015-12-18 1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스포츠와 여가
제임스 설터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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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형 컨버터블 `들라주`로 느리게 드라이브 하는, 생각해보면 제임스 설터의 소설은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지겨워하면서도 삶을 치장하는 데 노련한 왕년의 스타 같은 눈썰미. 그것은 밉지 않으면서 어쩐지 처연하다. 소설 속 욕망들도 그렇게 다가온다. 여가나 백일몽 같이 기회를 살피며 충동적이다.
나는 투우에서 투우사와 황소의 현란하며 긴 대결, 지치고 노한 황소에게 내리꽂는 창, 열광들 그 모든 게 끔찍했다. 그것은 에로스적 사랑과도 닮았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그녀에게>에서도 그런 비유가 있었고, 조르주 바타유는 투우와 에로티즘을 연결해 소설을 쓰기도 했다. 설터의 표현은 좀 더 건조하고 예리하다. 19금 표현 수위가 많아 다소 낮은 것으로 가져왔다.

*
그건 그저 하나의 달콤함 사건, 어쩌면 환상의 끝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무해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그 모든 일이 일어났음에도 그토록 서로 분리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고립된 느낌, 나아가 살기殺氣까지 느껴진다. (p85)

프랑스 곳곳을 돌아다니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주인공들이 한밤 내내 돌아다니던 풍경들이 겹쳤다.
나-딘-안마리를 서술하는 격자식 구성, 시점 변화도 흥미롭다.
˝닳아 없어지지 않는 암석면 같은, 이미 지나갔으나 줄곧 어른거리는 프랑스의 이미지들˝(p125) 같은 묘사와 비유는 문장 사이사이 빛난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며 느끼게 되는 심상처럼 그런 단면을 보여주는 화법은 생각보다 어렵다. 이 소설은 거의 풍작이다.
소설을 읽고 있으면서 이 사람은 참 소설가 같군, 바보 같은 감탄을 여러 번 했다.

˝고요하다는 점에서만 탁월한 겨울의 나날˝(p97), ˝아침이 점차 추워지는데 나는 아무 대비 없이 그 속으로 들어간다˝(p66) 처럼 그의 소설을 또 읽게 되는 밤.

조이스 캐롤 오츠가 이 소설을 나보코프 <롤리타>와 비교한 건 타당했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결혼을 했든 안했든 서로에게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추파를 던지기도 한다. 주인공은 딘과 안마리를 관음증적으로 관찰하며 자신의 욕망을 이리저리 대입해본다.
이 책 덕분에 사놓고 읽기를 미뤄두고 있던 <롤리타>를 좀 더 빨리 펼칠 것 같다~
겨울밤 독서로 꽤 괜찮았다.


ㅡAgalma

몇 가지 것들을 나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 기억한다. 양복 주머니에 넣고 잊어버린 동전처럼 시간이 흘러 조금 퇴색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세부들은 오래전에 변형되었거나 재편되어 다른 세부들이 전면에 드러났다. 실제로 몇 가지는 분명히 진짜가 아닌데, 그렇다고 덜 중요하지는 않다.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거를 바꿔야 한다.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더 이상 변화하지 않는 그 양식에 진짜 의미가 있다. 실제로 내가 줄곧 변화를 시도할 경우 그때까지 조화롭던 모든 일이 오래된 신문지처럼 내 손 안에서 부서져버릴 위험이 있는데, 그것은 생각만 해도 참기 어렵다. 무수한 과거가 우리에게 들어왔다가 사라져간다. 다만 그 안 어딘가에 다이아몬드처럼 소비되기를 거부하는 파편들이 존재할 뿐이다. 용기를 내어 그것들을 수집한다면 우리는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p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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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12-1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소설 에로틱의 걸작, 포르노 그래피 등등 이란 말에 혹해서 사 읽었는데 눈이 쫑긋해지지는 않고 몸이 늘어지던데요 ㅋㅋ 롤리타는 읽는 재미는 있던데 말이죠. 소설은 잘 모르겠습니다. ^^

AgalmA 2015-12-17 02:55   좋아요 0 | URL
ㅎㅎ 제가 느리게 드라이브 하는 들라주 얘길 괜히 한 게 아닙니다. 예전 미키루크 같은 배우들이 출연하던 에로틱 영화 보면 굉장히 느슨하잖아요. 이 소설의 인물들은 그런 은근한 제스춰로 서로에게 뭔가 여지를 주잖아요. 주인공이 딘과 안마리 사이를 관음증적으로 관찰하고 서술하는데 그걸 포르노 그래피적이라고 보는 거죠. :)